■「몽유도원도」의 슬픔■
1447년 안견이 사흘만에 그림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꿈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중국제 <도화원기>를 조선식으로 번안해서 꿈을 꾼 안평대군은 안견을 불러놓고 그림소재를 귀뜸해줬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몽롱한 <몽유도원도>는 풍요로운 이상향이 꼼꼼하기 짝이 없는 필치로 그려낸 걸작이다. 펼쳐진 선경은 그야말로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를 달콤한 꿈의 세계였다. 안평대군은 감탄을 했으며 성상문, 박팽년, 정인지, 이개, 서거정 등 스무명의 문장들이 앞다퉈 안견의 그 그림에 이름 석자를 올렸다. 이 것이 슬픔의 씨앗이었다.
<몽유도원도> 단 한장의 그림으로 조선 초기 화단에서 다른 화원들의 시샘을 한몸에 받은 안견은 젊은 안평대군의 초상화를 그리는가 하면 당시 화사로는 꿈도 못꿀 정4품 벼슬까지 얻어 위인설관이란 눈총을 받을 정도가 됐다. 그러니 그에 대한 높은 분의 배려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글씨 잘 써서 조선 초기 최대 서예가요, 거문고 잘 타는데다 그림보는 눈까지 밝았던 안평대군은 당대 최고의 컬렉터답게 중국화 중심으로 모은 서화가 무려 2백22축에 이르렀다. 그중 30점이 안견의 작품이었다는 기록은 그에 대한 지독한 편애를 알게 해준다.
세조가 권세에 오르자 <몽유도원도>에 오른 이름들은 추풍낙엽처럼 줄줄이 처단됐다. 사약을 받고 쓰러진 안평대군 그리고 사육신, 그러나 안견은 세조대까지 목숨을 부지했다. 도도한 역사의 역류를 눈치챘던지 안견은 꾀를 내어 안평대군의 방에서 귀한 벼루를 훔쳤다고 한다. 귀여워해줬더니 부뚜막에 오른 안견을 대군이 그냥 둘리 없었다. 그날로 찬밥 신세가 됐다. 그러나 안견은 그것으로 안평대군과 의절했음을 넌지시 세조에게 알린 셈이 됐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말하지만 안견은 '인생도 길고 예술도 길고, 신의는 짧았다' 할 수 있겠다. 특히 동양 미술에서는 그림을 그리기 앞서 사람이 되어야한다고 이야기하건만 목숨이 무엇인지 안견은 제 목숨부지하기에 급급했을까? '죽은 정승보다 살아있는 개가 낫다"는 속담이 조선초에도 있었나 보다.
그 꿈에 흡사한 지금 서울 세검동의 무계에 터를 잡고 정자를 크게 지어 ‘무계정사’라 이름지었다.
그 꿈에 본 것을 안견에게 그리게 했다. 그것이 '몽유도원도’이다
몽유도원도 발문
몽유도원도 발문 내용 중에서
(" 세종 29년(1447년) 늦은 봄날 잠이 들어서 박팽년과 함께 산속을 거닐고 있었다. 산봉우리는 높고 골짜기는 깊은데
수십 그루 복숭아나무가 있고 숲 사이로 두 길이 있었다.
길을 잃을까봐 걱정하면서 걸어갔더니 한 야인(野人)이 나타나서 공손하게 인사하며 말하기를, 이길을 따라 북쪽으로
따라가 골짜기에 들어가면 도원(桃源)이 있다고 한다.~)
조선을 건국한 사대부들은 시문과 학문을 하는 문인인 동시에 국가를 경영하는 관료들
이었습니다. 흔히 관료 문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조선 전기의 안정과 발전을 이룩하며
당시의 문화를 이끌어 나간 인물들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세종때에는 과거에 급
제한 뛰어난 관료 문인들이 집현전에 모여 학문에 몰두함으로써 민족의 학문과 문화 전
반을 체계화 하는데 큰 역활을 담당했습니다.
집현전 관료 문인들은 학문뿐만 아니라 시문과 예술에도 뛰어났습니다.
이들은 당시의 시대를 태평성대로 칭송했으며 함께 모여 학문과 예술을 토론 했습니다.
이들과 함께 예술을 주도한 사람은 바로 당대 최고의 풍류객으로 유명했던 안평대군이
었습니다. 집현전 관료 문인들은 안평대군의 집에 모여 그림을 감상하며 시를 짓고 글씨
를 쓰며 풍류를 즐겼고 그 자리에 빠질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안견이었습니다. 이러한 풍
류는 15세기 문인 들 사이에서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게 되었습니다. 1447년 음력 4월 20
일 안평대군은 꿈속에서 안평대군은 신비하고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안평대
군은 박팽년과 함께 온통 복숭아 나무가 심어져 있는 어느 산아래에 다다랐습니다. 그리
고 이내 산속에 이르자 여러 갈래 길이 나왔는데 안평대군과 박팽년이 어디로 갈지 몰라
망설이고 있자 한 사람이 나타나 북쪽으로 돌아 골짜기로 들어가면 도원이 나올 것 이라
했습니다. 그말을 따라 골짜기로 들어가니 높은 벽처럼 치솟은 산들이 마을을 감싸고 있
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여기저기 복숭아나무가 심어진 숲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을의 집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싸리문은 반쯤 열려있고 토담도
무너져 있었습니다. 오직 시냇가에 빈 조각배만 물결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안평대군은 박팽년과 함께도원을 노닐다가 문득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잠에서 깬 안평대
군은 바로 안견을 불러 자신의 꿈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안견에게 자신이 꿈에서 본
광경을 그리게 하니 안견은 3일 만에 "몽유도원도" 를 완성 했습니다. 안평대군은 이 그림
을 보고 감탄하며 "몽유도원도"라는 제목과 그림을 그리게 된 연유를 적어서 그림의 첫 머
리에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뒤에는 집현전 문인들을 포함한 21명의 명사들이 직접 쓴 찬
시와 찬문을 붙였는데 그 길이가 무려 20미터에 달 했습니다. 때문에 "몽유도원도" 는 그
림도 명품일 뿐 아니라 당대 명사들의 뛰어난 글씨도 볼수있어 조선전기의 그림과 글씨
를 대표하는 보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