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벽화 중 가장 많은 인원 등장
안악3호분의 무덤 안 평면도. 입구는 문방, 서쪽 곁방에 주인공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널방은 시신을 넣어둔 곳이며, 그에 딸린 회랑에 대행렬도가 그려져 있다.
▲ 길이 10m · 높이 2m의 대작
고구려 벽화 고분 가운데 먼저 소개할 것은 황해남도 안악군에서 1949년에 발견된 안악3호분 입니다. 357년에 지어진 이 무덤은 다양한 내용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특히 흥미를 끄는 것은 회랑에 그려진 대행렬도 입니다. 전체 길이가 10 m가 넘고 높이가 2 m인 회랑의 동벽 남쪽에서 북벽 서쪽까지 이어진 이 그림은, 하나의 주제로 그려진 전세계 고분 벽화 중 가장 많은 인원이 등장하는 대작입니다.
북벽 쪽이 행렬의 앞쪽인데, 앞에는 3 열, 중간에는 5 열, 수레에 탄 주인공이 있는 부분은 7 열로 행진하고 있습니다. 이 대행렬도에는 134 명이 그려져 있지만, 지워진 뒷부분까지 치면 실제 행렬 참가자는 500 명 정도로 여겨집니다. 이처럼 많은 인원을 거느리고 행차하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왕일 거예요. 그 주인공 옆엔 ‘임금의 깃발’이라 씌어진 깃발 든 부하까지 있으니까요.
안악3호분의 대행렬도.
▲ 말 탄 사람 · 궁병 · 악공 등 자세히 묘사
행렬에 참가한 사람들을 살펴볼까요. 먼저 수레에 탄 주인공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엔 수레꾼이 가까이 있고, 그 앞쪽으로 깃발을 든 6 명의 시종과 소리를 치는 사람 1 명, 노래하는 여성 4 명, 북을 연주하는 악공 9 명, 칼과 활을 들고 춤추는 사람 2 명이 있습니다. 또 깃발과 건장한 말을 끌고 가는 사람들이 앞에 위치합니다. 이 말은 수레에 탄 주인공이 갈아탈 말입니다. 그 앞쪽으로 말을 탄 사람과 시종이 3 열로 줄지어 갑니다. 행렬의 맨 앞쪽에는 말을 탄 관리, 깃발을 드는 사람, 큰 북과 큰 피리를 든 사람이 있습니다. 또 주인공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들도 참가하고 있습니다.
수레 좌우에는 활을 든 궁병 8 명, 그 바깥엔 도끼를 든 병사가 10 명 있는데 모두 갑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또 행렬의 좌우 바깥쪽에는 8 명의 중장기병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은 물론 말까지 철갑옷을 입히고, 창을 들고 있습니다. 또 주인공의 수레 뒤에는 3 명의 시녀가 따르고, 좌우에 깃발을 든 의장대와 악공, 주인공의 명령을 기다리는 문관들이 줄지어 이어집니다.
▲ 당시의 복장 등 많은 정보 담겨
안악3호분 외에도 덕흥리고분ㆍ팔청리고분 등 10여 기의 무덤 벽화에 행렬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안악3호분의 대행렬도는 사람과 사람을 비스듬하게 옆으로 겹쳐 그렸습니다. 원근감을 표현해 주는 이 기법은 당시 주변 국가의 벽화보다 수준이 높았습니다. 특히 사람마다 몸짓과 자세를 사실적으로 표현했고, 행렬의 구성과 배치까지도 한눈에 들어오게 화면을 구성했습니다.
이 행렬도에는 또 행차의 흥을 돋우고 길을 트는 사람, 역할에 따라 갑옷과 무기 등을 달리 들고 참가하는 군인의 모습 등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현대의 우리는 이 그림을 통해 고구려인의 복장, 군대의 편성과 특성, 무기, 그들의 예술 세계 등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고분 벽화의 가치는 이렇듯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2. 무덤 주인에 관한 기록… 귀중한 자료
모두루총의 묘지. 원 안은 묘지를 확대한 사진.
▲ 모두루총에 새겨진 기록 800 자
벽화가 그려진 고구려 무덤은 역사와 문화를 알려 주는 소중한 보물입니다. 아쉬운 점은 대부분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벽화로 미루어 왕의 무덤이라는 것, 언제쯤 만들어졌다는 것 등을 짐작할 뿐입니다. 그런데 중국 집안 시의 모두루총은 무덤 안에 먹으로 기록한 800여 자의 묘지(죽은 사람의 행적을 담은 글)가 씌어 있습니다.
10 자씩 80 줄로 된 이 글은 시신을 넣어 두는 널방으로 향하는 앞방 위에 쓰여져 있으며, 현재 약 300 자 정도만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엔 모두루의 조상, 특히 높은 직책에 있었던 염모와 모두루 자신의 행적까지 나타나 있습니다. 묘지에는 고구려의 추모왕을 하백의 손자이며, 성스러운 왕으로 묘사한 것이 보입니다. 또 광개토대왕은 호태성왕이며 해와 달의 아들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고구려의 시조인 추모왕뿐만 아니라 모두루 자신이 직접 모셨던 광개토대왕도 하늘과 연결된 성스러운 인물로 그려 놓은 것입니다. 이는 당시 고구려 사람들이 고구려 왕을 성스러운 혈통의 계승자로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묘지에는 또‘천하 사방이 고구려가 가장 성스러운 곳임을 다 안다.’는 강한 자부심이 넘치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고구려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자부심이 얼마나 컸는지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두루총 안에는 묘지만 있을 뿐 벽화조차 없습니다. 하지만 묘지가 고구려 역사를 아는 데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에, 당당히 벽화 고분의 하나로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안악3호 벽화 고분의 묘지(위쪽)와 덕흥리 벽화 고분의 묘지.
▲ 안악3호분 · 덕흥리 고분에도 있어
모두루총 외에도 안악3호분ㆍ덕흥리 고분에 묘지가 씌어 있습니다. 안악3호분은 묘지 때문에 무덤이 357년에 만들어졌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덕흥리 고분은 광개토태왕의 부하인 진의 무덤이며 그가 죽은 후 408년에 무덤이 완성돼 그의 시신이 묻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두 무덤이 만들어진 때를 알게 됨에 따라, 다른 무덤도 비교해 가면서 언제쯤 만들어졌는지 알아 냈습니다. 나아가 다른 나라의 벽화 고분과 비교할 수도 있었고, 그 결과 안악3호분은 당시 딴 나라의 고분보다도 웅장하고 벽화 기법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976년 평안남도 남포시에서 발견된 덕흥리 벽화 고분의 경우는 묘지뿐만 아니라, 곳곳에 벽화의 장면을 설명해 주는 글이 있습니다. 특히 고구려 역사를 공부하는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덤의 주인공인 진이 유주자사의 자리에 있을 때에 부하인 13 명의 태수로부터 업무 보고를 받는 장면인데, 이들이 지금의 북경 일대를 다스리는 북평 태수ㆍ연군 태수 등으로 기록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광개토대왕의 부하였던 진이 현재의 북경 일대를 지배하는 지방 장관이라는 것은, 당시 고구려가 요하를 넘어 광대한 영토를 개척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됩니다. 고구려 벽화 고분들은 이처럼 고구려 역사를 알려 주는 커다란 보물 창고이자 우리가 풀어야 할 비밀의 문입니다.
3. 덕흥리 고분 벽화
남녀가 평등했음을 알려 주는 그림
- 널방 북벽 서쪽 벽화는 남자 주인공의 그림
덕흥리 널방 북벽 서쪽(왼쪽)과 동쪽. 서쪽에는 남자 주인공이 그려져 있지만, 동쪽은 텅 비어 있다. 이는 아내가 죽은 뒤 그림이 그려질 공간이다.
덕흥리 고분에는 광개토대왕 때 살았던 고구려 귀족의 생활 모습을 보여 주는 벽화가 가득합니다. 시신을 넣어 두는 널방과 이음길, 그리고 앞방에 그려진 벽화들을 보면 얼마나 정성껏 무덤을 꾸미려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널방 북벽 서쪽에는 이 무덤의 남자 주인공이 평상 위에 앉았고, 그 옆에서 시종들이 부채를 부치는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건물 바깥에서는 주인공의 나들이에 대비해 말을 대령해 놓았습니다.
이와는 달리 널방 북벽 동쪽 장방 안에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건물 바깥엔 어린이 둘이 소가 끄는 수레를 세워 둔 채 기다리고, 위 아래로 여자 시종 6 명과 남자 시종 2 명이 있습니다. 수레 옆에는 키 큰 여자가 서 있습니다. 이 수레는 무덤의 여주인공(주인공의 부인)이 탈 것입니다. 덕흥리 고분 널방에는 주로 무덤 주인공의 집 안 풍경을 그렸고, 앞방에는 바깥으로 행차를 하거나 업무를 보는 장면을 그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앞방과 널방을 이어 주는 이음길에는 서벽과 동벽에 서로 대비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답니다. 이음길 서벽에는 말을 탄 부하들이 앞장을 서고, 개방형의 수레를 탄 남자 주인공이 부하들과 행차하는 그림이 보입니다. 이음길 동벽에는 소가 끄는 수레가 보이는데, 좌우가 막혀 있습니다. 또 수레 주변에도 여자 시종들이 천천히 걸어가고, 소 옆에는 어린 소년이 있습니다. 수레 뒤쪽에는 말을 탄 두 무사가 쫓아가며 행차을 지켜줍니다. 그렇다면 수레에 탄 사람은 당연히 여자겠지요.
장천 1호분의 부부 연화화생도.
- 동쪽 벽화 빈공간은 주인공 부인의 그림 들어갈 자리
앞방 동쪽 벽에 그려진 행렬도에도 남자가 탄 수레 뒤쪽에 그의 부인이 탄 수레가 따라가고 있답니다. 이는 널방인 집 안에서, 앞방인 실외로 나가는 모습을 이음길에 그려 넣은 셈입니다. 이제 벽화가 덜 그려진 널방 북벽의 남자 주인공 옆 자리에 무엇이 그려져야 하는지 잘 알겠지요? 바로 주인공의 부인 모습을 그릴 공간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이 무덤의 주인공인 진은 77 세에 죽었습니다. 물론 진이 죽었을 당시에 그의 부인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에, 무덤에 함께 묻히지 않았을 터입니다. 죽지 않은 사람의 초상화를 무덤 안에 그려 넣지 않은 것이고요. 그런데 무덤 널방에는 관을 놓을 관대가 크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두 사람의 시신을 넣기에 넉넉한 정도입니다. 덕흥리 무덤은 이처럼 처음부터 부부가 함께 묻힐 수 있도록 설계됐고, 벽화 역시 두 사람을 위해 그려졌습니다.
무슨 까닭에선지 알 수 없지만, 부인이 죽은 뒤에도 그녀를 위한 그림을 다시 더 그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완성이 된 셈인데, 오히려 그 때문에 우리는 더 확실히 고구려 사람들이 어떻게 무덤을 만들려 했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장천 1호분 벽화에는 ‘연화화생도’라 불리는 그림이 있습니다. 이처럼 고구려 사람들은 죽은 후에도 부부의 인연이 영원히 이어지길 바라는 소망을 그림에 담아 놓았습니다. 남성 중심의 조선 시대와 달리 고구려 시대는 남녀가 평등한 가운데 서로 존중했고,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살았음을 벽화를 통해 잘 알 수 있지요.
4. 안악 2호분, 고구려 여성의 종교 생활 알 수 있어
안악 2호 분의 비천도. 아름다운 선과 자연스러운 표정이 두드러진다.
안악 2호 분의 가족도. 오른쪽의 키 큰 사람이 무덤의 주인공이다.
안악 2호 분의 북벽 그림. 중앙에 앉아있는 사람이 무덤의 여 주인공이다.
- 여자만 묻힌 무덤
덕흥리 고분은 남자 주인공이 먼저 묻히고, 여성은 뒤늦게 묻혔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여자만 묻힌 고분이 있습니다. 황해남도 안악군에서 발견된 안악 2호 분입니다. 안악 2호 분은 5세기 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몇 가지 특이한 점이 눈에 띕니다. 먼저 벽화에 그려진 33 명 가운데 4 명을 빼고는 모두 여성입니다. 또 무덤의 널방 북벽에는 덕흥리 고분에서처럼 벽면 가운데 장방 안에 그려진 주인공으로 평상 위에 앉은 여성 한 명뿐입니다.
여성 옆에 남자 주인공도 그려져야 할 텐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관대(시신을 넣은 관을 놓는 곳)가 하나 뿐이어서, 이 무덤에는 여성 혼자만 묻혔고 남자는 묻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답니다. 그럼에도 남자가 그려질 벽면 부분은 빈 공간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남자 위주의 덕흥리 고분과는 달리 이 무덤은 여주인공을 위해 벽화가 그려졌습니다. 북벽 중앙 장방 좌우에는 서쪽에 6 명ㆍ동쪽에 3 명이 그려져 있는데, 모두 여성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동쪽의 여성이 서쪽보다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동쪽 여성이 서쪽 여성보다 신분이 높기 때문이겠지요.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는 신분에 따라 사람의 크기를 크거나 작게 그렸거든요. 또 서벽에는 14 명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중앙에 모자를 쓴 여인 옆에 2 명의 작은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가 보입니다. 이들은 무덤 여주인공의 자식입니다. 그리고 남벽 입구 좌우에 그려진 다른 2 명의 남자는 여성들이 편히 쉬고 있는 무덤을 지켜주는 용감한 호위 무사입니다.
- 비천의 아름다운 모습 감탄
남벽의 출입구 위에는 하늘에 사는 보살 2 명이 보입니다. 이들은 비천입니다. 비천이 그려진 것으로 보아 무덤의 주인공은 불교 신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를 믿는 여주인공은 동벽에 또 한번 모습을 드러냅니다. 여기에서도 하늘을 나는 2 명의 비천과, 부처님께 공양을 바치러 가는 여성 3 명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 3 명의 여성 가운데 앞에 선 사람은 무덤의 여주인공이고, 다음 사람은 부처님께 바칠 연꽃 쟁반을 들고 있습니다. 나머지 한 명은 꽃 줄을 날리며 따라오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주인공이 죽은 남편을 위해 부처님께 불공 드리러 가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천장에 가득한 활짝 핀 연꽃 무늬는 불교 문양입니다. 특히 보륜 무늬(불교 사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양)도 그려져 있으며, 무덤 내부가 마치 거대한 불교 사원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무덤 안에 벽화를 이렇게 그리도록 지시한 여주인공은 어떤 생각을 가졌던 것일까요? 남편은 전쟁터에서 먼저 죽었고, 시신도 못 찾았기에 함께 무덤에 묻히지 못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녀는 남편을 위해 부처님께 공양을 바치면서 저승에서의 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벽화를 그리게 했을 것입니다. 또 남편의 빈자리를 비워 둠으로써 저승에서 남편과 만나기를 기원했겠지요. 안악 2호 분은 고구려 여성과 종교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랍니다. 벽화 가운데 조금 더 세밀히 봐야 할 그림은 동벽에 있는 비천의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선과 자연스러운 표정이 두드러져 고구려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여성들 중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되고 있답니다.
5. 안악 1호분 벽화, 당시의 살림집 구조·생활 모습 생생
안악 1호분의 집 그림. 당시 집의 모습을 생생히 알 수 있다.
덕흥리 고분의 부경. 고구려 시대에는 집집마다 곡식을 말리는 부경이 있었다.
오늘 날 만주 지역 농가에서 사용하는 부경의 모습.
- 무덤 주인공 살았던 집 그려
고구려인이 죽은 사람을 위해 만든 무덤의 벽화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있었습니다. 간혹 도굴꾼이 무덤 안을 들여다보기도 했지만, 벽에 그려진 그림은 훔쳐 갈 수 없었으므로 눈여겨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 평안남도 강서군의 강서대묘ㆍ강서중묘를 시작으로 벽화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즈음 일본은 춤무덤ㆍ씨름무덤을 비롯한 고구려 벽화 무덤을 발굴하기 시작했으며, 일부 벽화는 실제와 가까운 모사도를 그려 두기까지 했습니다.
우리의 고분 벽화 연구는 그보다 훨씬 늦었습니다. 1949년 북한은 처음으로 황해도 안악군에서 안악 1ㆍ2ㆍ3호의 벽화 무덤을 발굴했습니다. 이 3 기의 벽화 무덤은 지난 해에 나란히 세계 유산으로 선정될 만큼 뛰어난 가치를 지녔습니다. 그런데 앞서 소개한 안악 2ㆍ3호분과 달리 1호분은 먼저 발견되었지만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안악 1호분에도 주목할 만한 귀중한 그림이 그려져 있답니다. 2ㆍ3호분이 주인공 부부의 생활 모습을 그린 것과는 달리, 안악 1호분에는 그들이 살았던 집의 모습을 주로 그려 놓았습니다.
- 귀족 생활 모습 알려 줘
옛 사람들은 다양한 재료들을 활용해 수많은 역사 기념물을 남겼습니다. 그 가운데 나무로 만든 것은 전쟁과 화재 등으로 불타거나 사라졌습니다. 나무를 주된 재료로 지었던 고구려인의 집은 현재 단 한 채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불타 버리고 겨우 남은 주춧돌과 기와 따위로는 당시 건물의 전체 모습을 알아내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하지만 안악 1호분에 그려져 있는 집 그림은 우리에게 고구려 때의 집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여기에 그려진 고구려 귀족의 집은 둘레를 골기와를 덮은 담장과 회랑으로 감싼 모습입니다. 또 담장 중간에 높은 대문을 세웠고, 안뜰 가운데에는 크고 호화로운 건물이 2중ㆍ3중으로 배치돼 있습니다. 당시 귀족의 집에는 여러 기능을 가진 많은 건물이 따로 떨어져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악 1호분의 전각도는 위에서 내려보는 방식으로 그려져 있어, 전체를 다 볼 수 없어 아쉽습니다. 그렇다고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랍니다. 이 그림을 통해 당시 귀족의 집 바깥 모습을 살필 수 있게 됐으니까요.
- 부엌·우물·방앗간 그림도 있어
안악 3호분에도 부엌ㆍ우물ㆍ방앗간ㆍ외양간 등이 따로 그려져 있습니다. 또 통구 12호분에는 2층으로 된 집이 그려져 있기도 합니다. 귀족의 집 구조는 덕흥리 고분 벽화의 그림 배치를 통해 살필 수가 있습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마당이 있고, 주인의 업무가 행해지는 사랑채가 있습니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면 연못ㆍ마구간ㆍ정원ㆍ안마당ㆍ창고가 배치되었으며, 집안 가운데에 주된 생활 공간인 안채가 있습니다.
특히 덕흥리 고분의 널방 서벽에 그려진 창고의 아래층은 기둥만 있고 사다리가 놓여 있는데, 고구려에서 집집마다 갖고 있는 창고인 부경입니다. 부경은 땅에서 떨어져 높게 만든 창고로 곡식 등을 건조 시켜 보관했습니다. 오늘날 만주 지역 농가에서도 부경에 옥수수를 말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분 벽화에 그려진 당시의 집 모습을 통해 우리는 고구려 시대의 집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고분 벽화가 없었다면, 안악 1호분의 집 그림이 없었다면, 우리는 고구려를 제대로 알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고분 벽화는 이처럼 과거의 모습을 생생히 전해주는 보물 중의 보물입니다.
6. 약수리 고분, 많아진 중장기병, 강해진 국력 알려 줘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 구역의 약수리 고분은 5세기 초에 만들어진 무덤으로, 널방과 앞방 두 개의 방에 여러 벽화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시신을 넣어 둔 널방의 북벽에는 묘 주인 부부가 그려져 있습니다. 또 서쪽 벽에는 여러 부하가 주인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네 벽에는 현무ㆍ청룡ㆍ주작ㆍ백호 등 사신도가 그려졌고요. 이 무덤에서 특히 흥미를 끄는 것은 앞방 북벽에 그려진 성의 모습입니다.
약수리 고분 중장기병(위)와 사냥도.
- 고구려 성·행렬 모습 담아
벽화에 표현된 성의 네 방 중앙엔 높은 성문이 있고, 네 모서리에는 망루라 불리는 높은 건물이 있습니다. 또 성 안에는 두 개의 건물이 그려졌습니다. 이 성은 무덤 주인공이 성주로 있었던 곳 같습니다. 평안남도 순천군에 있는 요동성총에도 이와 비슷한 성이 그려져 있습니다. 삼실총ㆍ용강대총 등에도 성벽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성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약수리 고분에는 앞방 북벽의 성 그림 서쪽에서부터 앞방 서벽과 남벽의 일부까지 연결되는 공간에 그려진 행렬도에는 무려 80여 명이 나옵니다.먼저 행렬 가운데에는 무덤 주인공과 여주인공이 타고 있습니다. 여주인공이 탄 수레는 좌우가 막혀 있어 얼굴은 잘 볼 수 없지만, 그 둘레에 여자 시종들이 따라옵니다. 또 수레를 중심으로 앞에는 재주를 부리며 흥을 돋우는 재주꾼, 북을 치는 악사가 있고, 좌우에 말을 탄 창병 등 다양한 군사들을 길을 인도합니다.
- 광개토 대왕의 부하 장군 무덤
약수리 고분의 행렬도와 규모가 비슷한 것은 앞서 말한 덕흥리 고분의 행렬도입니다. 덕흥리 고분의 주인공이 유주자사를 지낸 사람이므로, 약수리 고분의 주인공도 비슷한 신분, 즉 고구려의 지방 장관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므로 약수리 고분 앞방 북벽에 그려진 이 성도 지방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큰 규모의 성일 터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무덤 주인공에게는 성주로 임명되어 가는 것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겠지요.
이 성 앞방 동쪽 벽의 벽화는 수십 명이 호랑이ㆍ사슴 따위를 사냥하는 그림입니다. 특이한 것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사람이 20 명에 가깝고, 산에 숨어서 동물을 몰아 주는 몰이꾼이 많은 점입니다. 게다가 나팔을 불며 따라오는 악단도 있답니다. 이 정도의 사냥은 큰 규모의 군사 훈련과 마찬가지입니다.
약수리 고분 행렬도. 안악 3호분보다 규모가 작지만 중장기병은 더 많다.
이 약수리 벽화에서 또 주목할 것은 행렬도에 그려진 중장기병입니다. 행렬 뒷부분에는 모두 갑옷을 입은 중장기병 12 명이 저마다 긴 창을 들고 나란히 달려옵니다. 여기에 칼을 든 지휘관과 깃발을 든 기병이 이들과 함께 참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약수리 고분 행렬도에 비해 훨씬 많은 사람들이 동원된 안악 3호분의 행렬도에는 8 명의 중장기병만이 보입니다. 즉 약수리 고분에는 행렬도의 사람은 적지만, 중장기병의 숫자가 더 많고 이들의 비중이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덕흥리 고분에도 역시 12 명의 중장기병이 보입니다.
357년에 만들어진 안악 3호분에 비해 약수리 고분과 덕흥리 고분은 50 년쯤 뒤에 만들어졌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고구려 군대에서 중장기병의 숫자가 크게 늘어났던 것이지요. 바로 이 때가 광개토 대왕의 시기랍니다. 약수리 고분의 주인공은 덕흥리 고분의 주인공과 함께 광개토 대왕의 부하 장군이었던 것입니다. 고분 벽화는 광개토 대왕 시기에 중장기병의 비중이 높아졌고, 그것이 곧 고구려가 강해진 원인의 하나임을 알려줍니다. 이처럼 고분 벽화는 글로 알려주지 못하는 역사를 우리에게 들려 주고 있지요.
7. 각저층 벽화, ‘씨름’은 저승으로 가는 통과 의식
씨름 무덤은 각저총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각저’(角抵)는, 씨름을 뜻하는 한자어입니다. 길림 성 집안 시에 있는 씨름 무덤의 북쪽 이웃에 춤 무덤이 있는데, 이 두 무덤의 주인공이 아마도 형제일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광개토 대왕의 무덤으로 보이는 태왕릉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면 가까운 곳에서 씨름 무덤이 보입니다. 이 무덤이 만들어진 때가 5세기 전반이라서, 광개토 대왕과 같은 무렵에 살았던 귀족의 무덤이라고 볼 수 있답니다.
- ‘개’는 영혼을 저승으로 이끄는 길잡이
씨름 무덤은 1935년에 발견돼 그 벽화가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 가운데 널방 동벽에 그려진 씨름 그림이 유명합니다. 씨름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은 곧 상대를 넘어뜨리려는 자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림 왼쪽의 사람은 매부리코에 깊은 눈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멀리 중앙아시아에서 온 서역인, 즉 백인입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이처럼 서역인의 모습이 자주 보입니다. 쌍영총ㆍ삼실총ㆍ장천 1호분 등에서도 서역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분 벽화에 씨름 장면이 그려진 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은 씨름을 장의 행사의 하나로 여겼던 것이 분명합니다. 자세히 보면 씨름꾼과 심판(노인) 사이의 공간에 구름 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씨름이 현실 세계가 아닌 저승에서 벌어지는 놀이임을 나타냅니다. 씨름을 저승 세계로 가기 위한 통과 의식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무덤 안에는 죽은 사람이 저승으로 가기 위한 내용을 담은 그림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앞방과 널방을 잇는 이음길에는 큰 개 한 마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와 이웃한 오환 사람들은 죽은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동물을 개라고 생각했답니다. 따라서 이음길에 그려진 개는 죽은 영혼을 지켜주고 저승으로 이끌어 주는 길잡이입니다.
- 이승과 저승 연결해 주는 ‘나무’
씨름 무덤에서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씨름 하는 사람 옆에 그려진 나무입니다. 이 무덤에는 유달리 많은 나무가 그려져 있습니다. 특히 널방 남벽과 앞방 왼쪽ㆍ오른쪽의 3 면 벽에는 나무가 벽면 크기로 단독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널방 동벽의 나무와 서벽에 그려진 3 그루의 나무를 합하면, 무덤 안에 모두 12 그루나 그려져 있는 셈입니다. 왜 이렇게 많은 나무들을 그린 것일까요? 씨름 무덤의 널방 북벽에는 덕흥리 고분에서처럼 무덤 주인의 생활상이 그려졌습니다.
의자에 앉은 무덤 주인공과 온돌 바닥에 앉은 두 명의 부인이 실내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벽에는 북쪽부터 맨 앞쪽에 작은 나무가 섰고, 그 뒤에 시종이 말을 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무와 수레가 번갈아가며 그려졌습니다. 말과 2 대의 수레는 주인공 부부가 저승으로 갈 때 타기 위해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한편, 동벽에는 씨름 그림 외에 부엌이 그려져 있습니다. 부엌은 주인공 부부가 저승에 갈 때 먹을 음식을 준비하는 곳이랍니다.
그런데 부엌과 씨름은 서로 어울리지 않아요. 나무 그림은 바로 벽면을 분할하는 구실을 하는데, 또 다른 뜻도 갖습니다. 무덤 안에 있는 다른 벽화들을 보면, 천정엔 삼각형의 불꽃 무늬ㆍ넝쿨 무늬ㆍ해와 달을 비롯한 별자리, 그리고 연꽃이 맨 위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나무는 이 무덤에서 가장 많이, 가장 중요한 소재로 그려졌는데, 단지 배경을 꾸미거나 화면을 나누기 위한 목적만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서벽의 나무에는 하늘로 올라갔다가 지상으로 내려오는 능력을 가진 새, 즉 신의 전령 역할을 하는 새가 앉아 있습니다. 또 나무 좌우에는 호랑이와 곰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군 이야기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나무는 신성한 것, 하늘(저승)과 땅(이승)을 연결해주는 영혼 사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 사람들은 나무를 통해 신과 인간이 소통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씨름 무덤의 나무는 영혼이 천상으로 올라가는 통로로 그려진 것입니다.
또한 무용 무덤에 그려진 나무는 생명의 나무이기도 합니다. 잎이 떨어졌다가 다음해에 다시 새싹이 돋듯이 죽은 영혼의 새로운 탄생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무덤 안에 가득 나무들을 그려놓은 것은 아니었을까요?
9. 무용총, 무덤 주인공이 즐겼던 춤 공연 모습 그려
춤무덤(무용총)은 씨름무덤과 함께 1935년에 발견돼, 고구려 벽화 고분의 대표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 무덤은 씨름무덤과 내부 구조와 벽화의 내용에서 같은 것이 많지만 다른 점도 꽤 있습니다.
무용총 북벽에 그려진 남자 주인공이 스님 2명과 얘기를 나누는 장면. 스님이 무덤에 등장한 것은 무덤 주인공이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고 한 것이다.
- 의자 생활하는 집 안 모습
씨름무덤의 널방 북벽엔 무덤 주인공 부부가 대화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용총에는 남자 주인공이 두 명의 스님(혹은 도사)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3 명 모두 의자에 앉아 있어요. 가운데 스님은 손짓을 해가며 이야기를 하고, 남자 주인공은 열심히 듣는 모습입니다. 또 이들 사이에 한 소년이 무릎을 반쯤 굽히고서 작은 칼(오자도)로 무언가를 자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대접하기 위해 고기나 과일을 자르는 것 같은데, 그리 자연스럽게 표현하진 못해요.
그리고 주인공 뒤쪽엔 남자 2 명이 서 있습니다. 아래쪽에는 8 명의 남자들의 나란히 서 있는데, 주인공의 자녀거나 부하 혹은 시종일 것입니다. 주인공과 스님들 사이에 놓인 탁자들 가운데 찻잔ㆍ과일ㆍ주전자를 올려 놓은 것이 각각 2 개씩 있습니다. 방바닥에 앉아서 생활하는 조선 시대와 달리 의자에 앉아 생활하는 고구려 시대의 집안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북벽과 이어진 동벽 북쪽에는 씨름무덤처럼 부엌이 그려져 있습니다. 다른 점은 작은 소반에 음식을 나르는 두 명의 시녀가 보이는 것입니다.
춤과 노래를 구경하는 무덤 주인공 그림. 부인이 없어 외로워 보인다.
- 남자만의 무덤 특징
동벽 남쪽에는 이 무덤을 춤무덤이라고 부르게 만든 유명한 춤 그림이 있습니다. 앞에서는 춤꾼들의 지도자가 춤을 추고, 그를 따라 5 명의 남녀가 춤을 추며, 그 위에서 1 명이 완함이란 악기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또 아래에는 7 명의 남녀가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공연단입니다. 이 공연을 남자 주인공이 말을 탄 채 관람합니다. 그 옆에는 시종이 1 명 있고, 개도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여자 주인공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춤과 노래 공연을 보는 건 주인공의 인생에서 즐겁고 기억 나는 장면이겠지요. 그런데 부인이 없이 혼자서 즐기고 있습니다. 또 무덤 널방에는 시신이 담긴 관을 올려놓는 돌 관대도 하나만 있습니다. 이 무덤에는 남자 혼자만 묻혔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함께 있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서벽에는 주인공이 사냥을 나가서 사슴과 호랑이를 잡는 용감한 모습을 그려놓았습니다. 남벽에는 씨름무덤에서처럼 양쪽에 나무를 그려 놓았고, 앞방에는 남자 시종 4 명과 나무ㆍ말 안장 2 개 등을 그렸습니다. 말 안장이 따로 벽화에 그려진 것은 춤무덤 뿐입니다. 아마도 무덤 주인공은 말 타기를 무척 좋아했고, 그래서 자주 말 안장을 갈아야 했던 모양입니다.
여자 혼자 묻힌 안악 2 호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무사들의 사냥 그림이 씨름무덤에서처럼 크게 그려진 것은, 춤무덤이 남자만의 무덤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벽화의 내용도 무덤에 묻힌 사람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그런데 춤무덤을 살펴보니 혼자 말을 타고 공연을 관람하는 주인공이 몹시 외로워 보이지요? 그런 외로움 탓에 북벽에 스님으로부터 설법을 듣는 모습을 그려 놓은 것이겠지요. 무덤 주인공은 종교에 귀의해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스님의 말씀이 그에게 좋은 위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10. 무용총 천장 그림 - 영혼이 가게 되는 하늘 세계 그려
고구려 고분 벽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무덤 천장에 하늘 세계가 표현돼 있는 것입니다. 또 벽화가 그려진 고구려 무덤들의 널방과 앞방 천장은 대체로 높이가 높고, 위로 올라갈수록 그 너비가 좁아집니다. 그리고 천장 맨 위에는 덮개 돌이 올려집니다. 방의 4 벽에는 주로 무덤 주인공이 살았을 적의 일상 생활을 보여 주는 그림이 그려지고, 천장에는 영혼이 가게 되는 세계에 대한 여러 모습을 상상해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춤무덤(무용총)의 동벽ㆍ서벽의 천장 모습. 고구려인이 생각한 하늘 세계에는 신기한 새와 동물ㆍ신선ㆍ연꽃 등이 가득했다.
- 동쪽 천장에는 불꽃 무늬, 남쪽에는 닭
씨름무덤에는 천장에 해와 달ㆍ북두칠성을 비롯한 별자리가 가득합니다. 이와 달리 춤무덤에는 하늘 세계에 대한 관심이 많은 탓인지 다양한 그림들이 8 각 형태로 널방 천장에 그려져 있습니다. 먼저 동벽 천장 그림을 보면, 널방 4 벽과의 경계를 이루는 대들보 위에 삼각형의 불꽃 무늬가 있습니다. 이 무늬는 중앙 아시아에서도 흔한 것이어서, 당시 고구려와 이 곳의 문물 교류가 이뤄졌음을 짐작케 합니다. 그리고 불꽃 무늬 위에는 여러 형태의 연꽃 문양이 보입니다.
세 번째 단에는 동쪽의 수호신인 청룡이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또 연꽃을 건너 남쪽에는 나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각각 평상에 앉았습니다. 한 사람은 귀족인 듯 비단 옷을 입고 화려하게 꾸며진 평상 위에서 호탕하게 웃고, 또 한 사람은 허름한 옷차림으로 무엇인가를 쓰고 있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무덤 주인공의 죽은 후의 모습이라면, 그가 죽어서 노래하거나 시를 읊조리는 것으로 볼 수 있겠지요. 그 위쪽 단에는 봉황을 품은 해가 그려져 있습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항상 해가 동쪽에 위치합니다.
남벽 천장의 그림을 보면 세 번째 단에 긴 꼬리 닭 2 마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본래 여기에는 남쪽 수호신인 주작이 그려질 자리입니다. 아마도 고구려 사람들은 닭을 주작과 비슷하게 여겼던 모양입니다. 그 위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신선ㆍ하늘을 나는 천마(기린)ㆍ학을 타고 새 2 마리를 채찍질하며 어디론가 날아가는 신선의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 서벽 천장에는 달, 북쪽에는 수박희 하는 모습
서벽 천장에는 세 번째 단에 백호가 그려져 있습니다. 동쪽 천장 그림의 청룡과 비교될 만합니다. 그리고 동벽과 마찬가지로 연꽃을 건너 2 명의 여자가 나무를 사이에 두고 거문고와 같은 악기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또 네 번째 단에도 동쪽 천장의 해와 대비되는 달을 그렸습니다. 달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항상 서쪽에 그려집니다. 한편, 달 옆에는 사람 얼굴의 신비한 새, 하늘을 나는 천마(기린) 등 동쪽 천장과 대비되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답니다. 천장의 하늘 세계도 이처럼 그냥 그린 것이 아닌, 분명한 법칙에 따라 그려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장의 남쪽에 주작 대신 닭을 그린 것처럼, 북쪽에는 현무 대신 수박희를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려 놓았습니다. 수박희는 전래의 겨루기 무술로 고려 시대에는 군인이 반드시 익혀야 하는 무예였답니다. 이 수박희는 안악 3호분에서도 나오지요. 수박희를 하는 사람들의 옷이 씨름꾼처럼 팬티 모양이라서 고구려에서도 이와 같은 속옷을 입었음을 알게 해 준답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생각한 하늘 세계에는 이처럼 신기한 새와 동물, 즐겁게 살아가는 신선들, 연꽃이 가득하고 또 해와 달과 별이 있는 곳입니다. 이처럼 고구려 고분 벽화는 당시 사람들의 정신 세계까지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11. 수산리 고분 벽화, 귀족 생활 모습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 구역에서 1971년 발견된 수산리고분은 5세기에 살았던 고구려 귀족의 생활 모습을 잘 보여 주는 벽화로 유명합니다. 이 무덤은 발견 당시 이미 도굴이 되어 있었지요. 그래서 무덤 안에는 사람 뼈 조각 정도만이 남아있을 뿐 온통 흙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또 널방 천장의 벽화와 북벽ㆍ동벽 일부의 벽화도 훼손되었답니다. 하지만 남아 있는 벽화만으로도 수산리고분의 벽화는 세계 문화 유산으로 평가됐답니다.
수산리고분 널방 서벽에 그려진 서커스 그림. 고구려 사람들은 이처럼 서커스 구경을 즐겼다.
- 남자는 서쪽·여자는 동쪽에 그려
무덤 안으로 들어가면 입구인 널길 서쪽 벽에서 무덤을 지키는 무사를 볼 수 있습니다. 무사는 오른손에 칼, 왼손에는 긴 창을 들고 부리부리한 눈을 뜬 채 외부 침입자를 쫓아 내려는 듯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널방 북벽에는 주인공 부부가 커다란 집 안에서 좌상 위에 앉은 모습이 보입니다. 남자 주인공은 서쪽에 그려져 있으며, 건물 안에 남자 시종 3 명ㆍ건물 밖에 남자 시종 5 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 주인공은 동쪽에 그려져 있는데, 집 안에 여자 시종 2 명과 건물 밖에 여자 시종 5 명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동쪽ㆍ서쪽으로 대비시켜 그린 게 무척 인상적입니다.
널방 동쪽 벽면에는 중간에 띠 무늬를 그려서 화면을 위 아래로 구분했습니다. 아래에는 악대와 주인공이 탄 수레, 여자 시종의 행렬 모습이 그려져 있고, 위에는 팔짱을 끼고 선 2 명의 인물 앞에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사람 사이에 구름 무늬가 그려진 것으로 보아 주인공 부부와 자식이 서로 이별하는 장면이라 여깁니다.
- 중앙 아시아·일본과의 교류 알 수 있어
널방 남벽에는 무덤 입구로 나가는 통로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양산을 쥔 여성이, 서쪽에는 한 남자와 우산을 든 남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주인공 부부와 자식으로 볼 수 있는데, 주변에 구름 무늬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천상 세계에서의 모습을 나타낸 것 같습니다. 널방 서벽은 동벽처럼 띠 무늬로 벽면을 위 아래로 갈라놓았습니다.
널방 서벽에 그려진 여주인공과 시녀 모습. 섬세한 벽화를 통해 고구려 회화의 높은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아래 부분에는 남자 주인공의 행차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위에서는 재주를 부리는 사람과 5 개의 둥근 고리와 3 개의 막대기를 엇바꾸어 던지는 사람, 수레바퀴와 막대기 둥근 고리를 바꾸어 잡는 재주꾼 등이 서커스를 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안악 3호분ㆍ약수리무덤ㆍ팔청리무덤 등에서 주인공의 행차 그림에 그려진 것과 비슷합니다.
이 서커스는 오늘날 중앙 아시아 지역인 서역에서 유래한 것으로, 고구려가 활발한 대외 교류를 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재주를 보기 위해 무덤 주인공과 남자 시종ㆍ여주인공과 여자 시종 등 10 명이 줄지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여자 주인공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볼까요? 얼굴에 붉은 점을 찍어 화장하고, 아름답게 만든 저고리와 색동치마를 입었습니다. 두 손을 가슴에 모은 모습이 너무나도 예쁩니다. 또 그녀를 위해 양산을 들고 있는 시녀도 자연스런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이렇듯 섬세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한 무덤의 벽화는 고구려 회화의 수준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 줍니다.
한편, 일본 나라 현 아스카 촌의 다까마쓰 고분에는 수산리고분의 여성 그림과 같은 옷차림을 한 여성의 모습이 보입니다. 무덤의 모습과 벽화 내용도 많이 닮았습니다. 이는 당시 고구려와 일본의 교류 관계를 보여 주는 것이어서 눈길을 끕니다.
12. 용강대총, 왕궁 그림은 당시의 건축물·도로 연구에 소중한 자료
- 귀접이 천장 형식은 동아시아에서는 고구려 뿐
우리 나라의 국보 제1호는 남대문이고, 북한 국보1호는 평양성입니다. 그런데 북한의 50 개 국보 가운데에 3호인 강서대묘를 비롯해 약수리 고분ㆍ용강대총ㆍ쌍영총ㆍ동명왕릉ㆍ안악 1~3호분 등 무려 20 기의 무덤이 들어 있답니다. 물론 그 상당수가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었지요.
용강대총 내부 투시도. 일반 집처럼 기둥과 대들보가 그려져 있다.
오늘은 고구려 벽화 고분 가운데 북한 국보 10호인 용강대총을 살펴볼게요. 남포시 용강군 용강읍에 위치한 용강대총은 비교적 일찍 세상에 알려진 생활 풍속 그림이 담긴 벽화 고분입니다. 무덤은 널길과 앞방ㆍ사이길ㆍ널방으로 구성돼 있으며, 사이길 양쪽 옆에 벽 구멍을 만든 독특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널방 천장은 모서리에서 45 ℃ 방향으로 판석을 내밀어 모서리를 삼각형으로 줄여 가며 층층이 쌓아 올렸습니다.
이는 앞방 천장도 마찬가지인데, 천장을 3 부분으로 나눈 다음 널방과 같은 귀접이 천장(가장자리가 꺾인 천장)을 3 개 만들어 마치 3 개의 방처럼 만들어 놓았어요. 이 귀접이 천장은 고구려 석실 무덤의 특징 중 하나로 아름다운 천장 벽화를 그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줍니다.
용강대총 앞칸 성벽도. 무덤 주인이 살던 왕궁을 그린 것이다.
이런 천장 형식은 멀리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생긴 뒤, 그리스와 중앙 아시아를 거쳐 들어온 형태랍니다. 동아시아에서 이 기법으로 천장을 만든 나라는 오로지 고구려뿐입니다.
5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무덤은 벽화가 그려진 회벽이 오래 전 훼손되었습니다. 널방 벽화도 많이 손상되어 남벽의 연꽃 무늬 외에는 전혀 그 내용을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앞방의 경우는 천장과 남벽 입구에 구름 무늬ㆍ불꽃 무늬ㆍ기둥, 그리고 성곽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성벽도는 무덤 주인이 살던 왕궁 그림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앞방 남벽에 그려진 성곽 그림입니다. 일반 주택보다 훨씬 큰 것으로 보아 성채 또는 무덤 주인이 살던 왕궁을 그린 것입니다. 우진각 지붕을 한 2층 문의 누각을 갖춘 이 건물은 궁성, 구체적으로 장수왕 시기에 만들어진 왕궁(안학궁)의 바깥 모습일 가능성이 큽니다. 문의 누각은 정문과 곁문에 따라 높이가 다르며, 성벽이 방향을 바꾸는 모서리에는 각루라 불리는 높은 누각이 있습니다. 또 성벽은 기와로 덮었으며, 문 앞에는 성벽과 나란하게 흑백 바둑판 모양을 한 포장길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당시의 건축물과 도로 연구에 도움이 되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용강대총의 투시도를 살펴보면 마치 일반 집을 보는 것처럼 기둥과 대들보ㆍ대공(들보 위에 세워 마룻보를 받치는 짤막한 기둥)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가운데 기둥은 사방 벽 모서리에 그렸는데, 무덤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타낸 것입니다.
-용강대총 기둥과 공포의 장식 그림은 단청의 기원
무덤 윗부분의 공포(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 머리 같은 데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는 천장의 무게를 분산시켜 기둥에 전달하는 부분입니다. 이 공포 덕분에 높은 지붕과 무거운 기와를 얹을 수 있습니다. 또 공포 자체가 화려한 장식 기능도 합니다. 용강대총의 기둥과 공포에는 따라서 여러 장식 무늬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는 우리 건축의 아름다움을 빛내 주는 단청의 기원이라 할 수 있지요. 공포 위에 놓인 대들보는 천장과 4 벽의 구획이 되기도 합니다. 또 대들보 위에는 ‘∧’자형 대공을 놓아 그 위의 도리ㆍ종보 등 천장에 올라가는 가로 막대를 받쳐 주는 구실을 합니다.
무덤 안을 목조 가옥의 내부처럼 그리는 것은 고구려 고분 벽화의 큰 특징입니다. 우리는 이 때문에 옛 고구려의 건축물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어요. 만약 이 같은 벽화가 없었다면 고구려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 등을 제작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겠지요. 고분 벽화의 가치는 이처럼 다양하답니다.
13. 쌍영총, 영혼이 머물 신성한 공간과 2 개의 멋진 기둥 '눈길'
국립중앙박물관에는 활과 화살을 갖고 말을 타고 있는 고구려 무사의 모습이 그려진 돌 조각이 하나 있습니다. 이 돌 조각은 1910년 평남 남포시 용강군에서 발견된 쌍영총의 널길 동벽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발견 당시 쌍영총은 이미 도굴범에 의해 많이 훼손된 상태였습니다. 이 돌 조각도 그렇게 깨뜨려진 것 가운데 하나로 박물관까지 옮겨 왔습니다.
-다른 고분 벽화에 비해 깔끔하고 세련된 그림
5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쌍영총은 안악 3호분이나 덕흥리 고분에 비해 100 년 정도 늦습니다. 그런 만큼 앞선 시기의 고분 벽화에 나오는 인물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깔끔하고 세련된 인물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쌍영총 널길 행렬도. 화려한 수레와 중장기병 그리고 시녀들을 볼 수 있다.
이 쌍영총은 널길ㆍ앞방ㆍ이음길ㆍ널방을 모두 갖춘 무덤입니다. 널길 왼쪽ㆍ오른쪽 벽에는 행렬도가 있습니다. 무사 외에도 멋진 갑옷을 입고 창을 든 중장기병과 아름다운 수레, 주름치마를 입은 3 명의 미녀, 그리고 미녀들과 이야기하는 남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들의 행차는 무덤 안으로 향합니다.
수레에 탄 사람이 무덤의 여주인공이라면, 중장기병은 무덤의 남자 주인공이고, 세 미녀는 이 부부의 딸입니다. 따라서 이 그림은 무덤의 남녀 주인공이 그들의 영혼이 머물 공간에 들어가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은 영혼 말고 다른 이는 함부로 무덤으로 들어오면 안 되겠지요? 그래서 널길 좌우 벽에는 창칼을 든 무사, 앞방 남벽의 좌우 벽에는 문지기, 앞방 동벽ㆍ서벽에는 청룡과 백호를 각각 그려 놓았지요. 이들은 모두 무덤을 나쁜 기운으로부터 지켜내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무덤 안에 있는 2 개의 8각 기둥
쌍영총 앞방과 널방의 천정에는 연꽃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무덤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널방과 앞방 사이 이음길에 있는 2 개의 8각 기둥입니다. 8 마리의 용이 휘감고 있는 이 기둥의 머리 부분에 연꽃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2 개의 기둥이 무덤 안에 있는 것은 쌍영총뿐입니다. 기둥을 멋지게 만들고, 화려한 그림을 그린 고구려인의 수준이 돋보입니다.
널방 동벽에서는 9 명의 사람들이 무덤 북벽을 향해 가는 행렬도가 보입니다. 그 맨 앞에 향로를 머리에 인 시종이 있고, 그 뒤에는 스님과 시종, 4 번째에 유달리 크게 그려진 귀부인이 있습니다. 주름치마와 붉은색 깃과 문양을 수놓은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그녀는 수산리 벽화의 여주인공과도 매우 닮았습니다.
3 개의 건물 안 중심에 자리한 주인공 부부의 모습. 귀한 사람이라서 신성한 공간에 모셔져 있다.
그리고 널방 북벽에는 주인공 부부가 낮은 좌상에 앉아 있습니다. 이들은 기와 집 안에서 시종의 시중을 받고 있습니다. 이들이 머무는 건물 전체는 다시 장막을 걷어올린 큰 건물 안에 있습니다. 또 이 건물은 다시 널방 북벽 좌우에 있는 건물 기둥과 위에 놓인 대들보로 구성된 건물의 한 부분에 놓여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인공 부부는 3 개의 건물 안 가장 중심에 자리했습니다. 이는 주인공 부부가 귀한 사람이기에 이처럼 첩첩이 둘러싸인 신성한 공간에 자리하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쌍영총은 고구려인의 미의식과 죽은 이에 대한 생각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14. 통구 12호분, 용감하고 우애 깊은 형제의 무덤
북쪽 무덤 널방 서벽에 그려진 적장을 죽이는 장면. 그 옆에는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무사의 용맹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고구려 무사의 전투 모습
고구려 무사들에게 있어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습니다. 따라서 고분 벽화에서는 전쟁의 순간이 그려져 있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1937년 일본인에 의해 발견된 통구 12호분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주인공이 왼손으로 적장의 머리를 잡은 채 오른손에 든 칼로 목을 치려는 장면이 보입니다. 이 때 승자의 발 아래에는 패장의 창이 밟혀져 있습니다.
창을 밟은 그 발에는 못신이 신겨져 있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아이젠과 같은 못신은 당시 무덤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고구려 무사들은 못신을 신은 상태로 적을 공격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승자인 주인공이나 패자인 적장의 갑옷이 닮았습니다. 혹시 패배한 자는 반란을 일으킨 사람이고, 무덤 주인공은 반란을 진압하는 공을 세웠던 것은 아닐까요? 적장을 죽이는 그림 옆에는 갑옷차림의 무사가 말에 올라타고 창을 휘두르며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무척 용감한 모습입니다.
동쪽 곁방의 마구간 그림 유명
통구 12호분은 모습이 아주 특이합니다. 무덤길 입구에서 연결되는 독립된 두 개의 무덤이 같은 흙 무지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남쪽의 무덤은 널방과 널길ㆍ곁방이 2 개 딸렸고, 북쪽 무덤은 곁방이 하나이며 널방도 좀 작습니다. 아마도 남쪽 무덤이 형의 무덤이겠지요?
고구려 무사들이 전쟁 때 신었던 못신.
무덤은 발견 당시 이미 도굴이 돼 벽화가 많이 훼손되어 있었대요. 다행히 북쪽 무덤 널방 서벽에 그려진 전투하는 장면과 천장의 연꽃 문양 그림은 1930년대 말 일본인에 의해 베낀 그림이 만들어졌는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돼 있습니다. 박물관은 11 개 벽화 고분에서 120여 점의 벽화 장면을 베낀 그림을 소장하고 있으며, 1917년~1941년 사이에 그려진 것들입니다.
한편, 동쪽 곁방에는 그 유명한 마구간 그림이 있습니다. 통구 12호분은 흔히 말구유무덤(마저총)이라고 부르는데, 이 그림을 처음 본 일본인들이 지은 이름이지요. 널방의 입구 쪽인 남쪽 무덤 좌우측 아래에는 검은 개가 그려져 있습니다. 또 서쪽 벽에는 수레를 탄 주인공의 행차 그림이 있는데, 아치형 모양으로 붉은색 덮개가 씌워진 가마 틀이 있고 검은색 바퀴는 상당히 큰 편입니다. 그런데 이 수레는 소와 말이 끌지 않고 황색 저고리와 녹색 바지를 입은 남자 종이 손으로 끌고 갑니다. 수레 주변에는 남자 시종들이 보입니다.
동쪽 벽에도 수레 탄 행렬이 있는데 역시 남자 종이 끌고 있습니다. 수레 바로 뒤에는 2 명의 시녀가 있고, 그 뒤로 굽은 우산을 든 시녀와 검은 그릇을 든 시녀도 따라갑니다. 이는 아마도 여성의 행차로 보입니다. 덕흥리고분 벽화처럼 여기서도 남자의 행차는 서쪽에, 여자는 동쪽에 그려져 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이처럼 남녀의 영역을 구분했습니다.
두 형제의 가족 무덤
무덤 북벽에는 무덤 주인공 부부의 그림도 희미하게 보입니다. 이들은 쌍영총에서처럼 건물 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왼쪽ㆍ오른쪽에 문이 달렸고, 문 위에는 누각이 있어 대단히 큰 건물로 보입니다. 또 북쪽 무덤 곁방에는 음식을 만드는 도구들이 있고, 널방의 입구 쪽인 남쪽 벽에는 개가 보입니다. 개는 무덤의 문지기인가 봐요. 서쪽 벽에는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적장을 죽이는 장면이 보입니다. 또 북쪽 벽에는 주인공 부부가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통구 12호분은 이처럼 밖에서는 하나의 무덤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2 개의 무덤인 셈입니다. 통구 12호분의 주인공들이 하나의 무덤을 만든 것은, 저승에서도 서로 의지하려고 한 우애가 깊은 형제들이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15. 동명왕릉, 연꽃 무늬 가득한 무덤, 불교계 이상 세계 표현
동명왕릉 외부 전경
정릉사 터는 동명왕릉임을 밝혀 주는 확실한 증거
세계 문화 유산에 오른 고구려 무덤 가운데 평양시 동남쪽에 위치한 동명왕릉이 들어 있습니다. 동명왕(추모왕)은 고구려를 처음 세운 임금입니다. 그런데 그의 무덤이 고구려가 건국된 압록강 북쪽이 아닌 북한에 있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하지요? 하지만 이 무덤을 동명왕릉으로 볼 수 밖에 없는 여러 중요한 증거들이 있습니다.
-무덤 위해 만들어진 정룡사 터 발견
먼저 무덤 주변에는 동명왕릉비ㆍ정자각ㆍ돌짐승 등 조선 시대 사람들이 만든 유물들이 즐비합니다. 옛 지명도 왕릉동이고요. 주변에 있는 진파리무덤 떼는 마치 이 무덤을 호위하듯 배치되어 있답니다. 또 무덤은 한 변의 길이 22 mㆍ높이 8.15 m로 주변 무덤보다 훨씬 크답니다.
동명왕릉 연꽃 무늬
무덤의 형태도 특이합니다. 벽화가 그려진 무덤들은 대부분 안에 돌로 방을 만들고, 바깥은 흙으로 덮은 형태입니다. 그런데 동명왕릉은 무덤 밑 둘레에 정교하게 다듬은 돌로 1.5 m 높이로 3층짜리 둘레를 둘렀습니다. 이처럼 동명왕릉 외에 돌로 밑 둘레를 두른 무덤은 동명왕릉 말고는 역시 왕릉으로 보이는 용강 큰무덤 뿐입니다.
이보다 확실한 증거는 무덤 앞에서 정릉사의 터가 발굴됐다는 것입니다. 이 곳에서 나온 질그릇과 기와 조각에서 고구려ㆍ정릉사ㆍ릉사 등이 적힌 글자가 나왔습니다. ‘릉사’는 무덤을 위해 만들어진 절이라는 뜻을 갖습니다. 정릉사 터에서는 탑ㆍ강당 등 일반적인 절에 필요한 건물 터 뿐만 아니라 궁전에서나 필요한 건물의 터와 창ㆍ활촉 등 무기류도 발견됐습니다. 이들 유물을 통해 왕과 그 가족이 호위 무사들을 거느리고 정릉사에 가끔씩 찾아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답니다. 왕과 그 가족이 이곳에 온 건 아마도 동명왕릉에 참배하기 위함이겠지요?
-완벽한 배수 등 최고의 건축 기술 자랑
동명왕릉은 크게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널방은 폭 4.21 m ×4.18 m, 높이 3.88 m로 고구려 벽화 무덤 가운데 가장 넓답니다. 또 두 개의 돌문을 설치하고, 완벽한 배수 시설을 갖추고 있는 등 최고의 건축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40년에 일본인에 의해 도굴돼 많은 유물들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동명왕릉 내부
다만 무덤 안에서 104 개의 연꽃 그림이 확인되었는데, 전체를 다 복원하면 641 개 정도가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구려 벽화 무덤에는 이처럼 연꽃 무늬가 천장 등 여러 곳에 그려져 있습니다. 동명왕릉을 비롯해서 산연화총 등은 무덤 안 대부분을 연꽃 무늬로 치장해 놓았답니다. 5~6세기 고구려에서는 무덤 내부를 장식 무늬로 치장하는 것이 유행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는 연꽃들이 가득한 무덤 안을 한 번 상상해 보도록 할까요? 지름이 12 cm나 되는 활짝 핀 형태의 연꽃 무늬는 6 개의 꽃잎이 교차된 모습입니다. 꽃술과 잎맥은 생략돼 있지만, 꽃잎마다 둥근 점 무늬를 찍은 모양을 하고 있어요. 회색 바탕에 꽃잎의 끝은 붉은색, 입 안의 굵은 선은 보라색, 둥근 점은 검은색으로 선명하게 채색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아름다운 연꽃이 가득한 무덤 안은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 세계인 ‘연화 세계’이겠지요?
최근 복원된 정릉사
16. 장천 1호분 벽화, 놀이.사냥하는 모습 저마다 개성 넘쳐
장천 1호분 앞방 왼쪽벽의 전체 그림
1970년 발굴된 장천 1호분은 불상 그림이 처음 그려진 벽화 고분으로 뒤늦게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습니다. 최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이 고분의 모형이 전시되기도 했지요.
-그림 속 등장 인물 100 명 넘어
장천 1호분은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에서 동북쪽으로 20 k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5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무덤의 안은 널길ㆍ앞방ㆍ이음길ㆍ널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약 100여 명이 그려져 있는 장천 1호분 벽화는 고구려인의 생활 풍습을 이해하는데 아주 소중한 자료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난 1996년과 2000년 등 2 차례에 걸쳐 도굴꾼들이 벽화의 일부를 떼어가 버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최근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 빈틈없는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장천 1호분 벽화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무덤 입구에서 볼 때 앞방 왼쪽에 그려진 다양한 야외 놀이 그림입니다. 천장 아래 벽면 전체에 50 명 남짓한 사람들이 한꺼번에 다양한 놀이를 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장면, 다른 시간대의 행동을 한 화면 속에 다 그려 넣는 방식은 옛 그림에서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흰 수건을 든 시녀의 모습.
벽면 아래쪽에서는 많은 젊은이들이 사냥을 하는 장면이 보입니다. 사슴과 멧돼지ㆍ호랑이 등 잡는 동물의 숫자도 많습니다. 또 개가 사냥에 따라 나서고, 사냥하는 사람 거의 모두가 말 위에서 활을 쏘아 맞춥니다. 다만 왼쪽 나무 아래에 있는 남자는 화살에 맞은 채 도망치는 멧돼지를 잡기 위해 다시 활을 당기고 있네요. 여기에 곰은 나무 밑 움에 숨어 있고, 뛰쳐나온 호랑이는 사냥꾼의 사냥감이 됩니다. 한쪽 나무 아래에는 사슴들이 쉬고 있으며, 사냥하는 무사들의 모습이 저마다 개성이 넘칩니다. 주변에는 매사냥을 하는데, 매가 사람 팔에 앉아 있기도 하고 날아가기도 합니다.
-다양한 야외 활동은 '백희기악도'
벽면의 오른쪽 윗부분에는 수레 바퀴를 던지는 재주꾼도 보입니다. 열매가 달린 큰 나무에 원숭이가 오르내리고, 이를 지켜 보는 신분이 높은 남자가 야외용 의자에 앉았습니다. 남자 옆에는 물 주전자가 있습니다. 뒤에 서있는 남자들은 의자에 앉은 사람의 시종으로 보입니다.
장천 1호분 사냥도.
벽면의 왼쪽 윗부분에는 가축 도둑 붙잡기, 놀랜 말 달래기, 씨름, 곡예를 하는 사람이 그려졌습니다. 중앙 윗부분에는 아치형 수레와 이를 끌고 온 시종이 있습니다. 그 아래쪽에는 귀부인이 한 남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귀부인 뒤의 시녀는 거문고를 들었습니다. 귀부인은 위쪽 수레를 타고 왔겠지요.
귀부인과 남자는 서로 의견이 일치되었는지, 여자는 거문고를 연주하고 남자는 춤을 춥니다. 그림은 이처럼 하나의 이어지는 이야기를 세 장면으로 연결해 그린 것입니다. 그림 중앙에는 커다란 흰 말도 있습니다. 이 말은 무덤의 주인공이 탈 말입니다. 그 옆에는 큰 개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습니다. 그 위쪽에는 그림이 약간 지워졌는데, 아마도 무덤 주인공이 그려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워진 사람 옆에 곧은 양산을 든 남자 시종이 있고, 그 뒤에는 여자 시종이 왼팔에 흰 수건을 들고 대기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놀이가 담긴 그림.
야외에서 땀 닦는 수건을 대령해 놓은 사실이 참 재미있습니다. 이처럼 고구려인의 다채로운 야외 생활의 모습이 담긴 ‘백희기악도’라 불리는 이 그림은 안타깝게도 도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다시는 그 원래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으니,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17. 장천 1호분 벽화②, 고구려 고분 중 유일하게 부처 모습 그려져
연화대에 올라 서 있는 앞방 천장의 네 보살.
장천 1호분 연화화생도.
사랑하는 부부가 함께 같은 연꽃에서 태어나 영원히 인연을 이어가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고 있다. 이번에도 지난 주에 이어 장천 1호분 벽화를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무덤 안으로 들어가 앞방의 입구 좌우 벽부터 둘러보지요. 벽화가 많이 지워지긴 했지만 실제 크기의 무사 2 명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과 마주 보는 널방 입구 좌우에는 문지기 2 명의 모습도 보입니다. 이들 문지기의 키는 왼쪽이 153 cm, 오른쪽은 156 cm입니다.
5세기 중엽부터 인물을 신분과 관계 없이 실물 크기로 묘사
고구려 시대의 여러 무덤에서 나온 사람의 뼈를 분석해 보면, 고구려인의 평균 키는 165 cm 안팎입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벽화를 그린 화가가 실제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그리려고 노력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널방으로 이어지는 널길 좌우에도 실물 크기로 시녀 2 명을 그려 놓았는데,이들의 얼굴ㆍ자세가 저마다 특징이 있게 잘 묘사되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안악 3호분ㆍ쌍영총ㆍ수산리고분 등의 벽화에서는 신분이 높은 사람은 크게, 낮은 사람은 작게 그렸지만, 장천 1호분에서는 신분에 따른 그림 크기의 차이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5세기 중엽 이후 고구려 사회에서는 신분 차별이 줄어들고 모두 동등한 인간으로 보려는 흐름이 있었으며, 그런 생각이 그림에 나타난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죽은 뒤에도 인연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 연꽃에 담아
장천 1호분에는 널방 천장에 북두칠성과 해와 달, 앞방 천장에 사신도와 장사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건 불교와 관련된 그림입니다. 널방으로 들어가는 쪽의 앞방 천장, 즉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눈을 들어 가장 먼저 보이는 벽면에 부처의 모습이 보입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부처의 모습이 그려진 것은 장천 1호분 뿐입니다. 널방의 왼쪽 벽과 오른쪽 벽면 천장 쪽에도 각각 4 명의 보살이 보입니다. 또 다양한 무늬의 연꽃과 하늘을 나는 선녀들이 모습이 눈에 띕니다. 이렇듯 연꽃은 장천 1호분에서 가장 많은 그림의 소재였습니다. 또 연꽃을 다양한 각도에서 그렸는데, 그 형태만 해도 10여 가지에 이릅니다.
특히 시신을 모시어 둔 널방에는 네 벽과 천장에 16~17 cm 크기의 8 개 잎을 가진 연꽃 200여 송이가 그려져 있습니다. 연꽃으로 널방을 꾸민 것은 무덤 주인공 부부가 죽은 뒤 극락 정토인 연화 세계로 가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시신을 넣은 관 조각에도 연꽃 무늬가 그려져 있기도 했답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삶이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를 윤회라 하지요. 윤회하는 삶은 인연과 업보에 의해 끝없는 고리로 연결되어 간다고 보았어요. 그런데 이런 윤회를 벗어나 극락 세계로 태어나는 것이 화생이며, 화생의 방법은 연꽃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앞방에 그려진 문지기. 땡땡이 무늬 바지 저고리를 입고 있다.
장천 1호분에는 이처럼 연꽃에서 사람이 태어나는 연화화생 그림이 많이 그려져 있습니다. 삼실총ㆍ성총ㆍ오회분 4호묘 등 여러 고분에서 발견되는 이 그림들은 고구려인이 사후 세계를 바라는 불교의 관점을 받아들였음을 알려 줍니다. 재미있는 것은 인연의 고리를 뛰어넘고자 하는 불교의 근본 교리와 어긋나게 장천 1호분의 연화화생 그림에는 부부의 인연이 극락 세계에도 끝없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반영하듯 하나의 연꽃에서 부부가 함께 태어나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 불교를 믿긴 하지만 불교 교리를 그대로 따르지는 않은 셈이지요. 이렇게 볼 때 장천 1호분의 주인공 부부는 죽은 후에도 영원히 함께 하기를 바라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요?
18. 덕화리 1ㆍ2호분 벽화①, 6세기부터 청룡ㆍ주작ㆍ백호ㆍ현무 비중 커져
덕화리 1호분 청룡.
고구려 고분 벽화는 그 시기에 따라 그림의 주제가 달라집니다. 초기에는 무덤 주인공의 일상 생활을 중심으로 한 풍속도가 그려졌지요. 안악 3호분ㆍ무용총의 벽화가 이런 그림의 대표적입니다. 5세기 이후에는 연꽃 등 장식 무늬의 비중이 커졌어요. 그래서 동명왕릉처럼 무덤 전체가 연꽃 무늬로 장식된 경우도 생깁니다. 6세기 무렵부터는 청룡ㆍ주작ㆍ백호ㆍ현무 등 사신의 비중이 커져 널방 벽면 전체에 그려집니다. 이는 강서대묘ㆍ오회분 4호묘에서 확인할 수 있지요.
덕화리 1호분 사신도 중 현무
풍속도→연꽃→사신도로 주제 변화
사신은 각 방위의 수호신으로, 죽은 영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불교 전래 이후 장천 1호분처럼 불교를 소재로 한 무덤 벽화가 그려지기도 했지만, 사신도가 더욱 위세를 떨쳤습니다. 사신도를 벽화의 중심 주제로 삼는 것은 이웃 나라에선 찾기 어려운 고구려 고분 벽화만의 특징입니다. 인물 생활도 벽화에서 사신도 벽화로 바뀌는 것은 갑작스레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무용총 벽화에서 보듯이 사신도는 천장에 조그맣게 그려졌고, 때로는 주작이 닭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러다가 쌍영총 무덤에선 천장이 아닌 앞방에 백호와 청룡이 크게 그려지고, 현무는 널방에 작게 그려지게 됩니다.
덕화리 무덤은 뛰어난 사신도 유명
1976년 평안남도 대동군 덕화리에서 발견된 2 개의 무덤은 이러한 변화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지요. 서쪽 1호분과 동쪽 2호분은 3 m 정도 떨어져 있고, 무덤의 구조나 벽화의 내용이 워낙 비슷해 형제의 무덤으로 생각되어 집니다. 5세기 말~6세기 초에 만들어진 이들 무덤은 안길과 널방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널방의 네 벽에는 사신도가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우선 덕화리 1호분 널방 동벽에 그려진 청룡은 머리가 크며, 2 개의 뿔이 인상적이지요. 삼각형으로 벌린 입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나 있습니다. 용 둘레는 대체로 붉은데, 용의 몸은 먹 선으로 묘사했어요. 서벽에는 백호가, 남벽에는 주작 2 마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주작은 날개를 활짝 펼친 자세를 그렸는데, 많이 훼손되어 제 모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덕화리 1호분의 백호.
덕화리 1호분에서 북벽이 가장 눈길을 끕니다. 수산리 벽화에서 보듯이 벽면을 2단으로 갈라 두었습니다. 아래에는 상상의 동물인 현무를 그렸고요. 거북의 네 다리는 아주 길며, 뱀은 거북의 몸을 3 번 감고 X자로 머리와 꼬리가 원을 그리며 교차하고 있습니다. 덕화리 1호분의 사신도는 매우 소박해, 백호를 신령한 동물로서가 아닌 실제 호랑이처럼 그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그림이 발달해 점차 세계에 자랑 할만한 사신도로 거듭나게 됩니다.
인물 풍속화의 전통도 여전히 존재
덕화리 1호분에는 여전히 인물 풍속도를 그리는 전통이 남아있지요. 현무 위에는 8 명의 사람이 그려져 있습니다. 널방 북벽에 무덤 주인공의 모습을 그리는 전통에 따라 남자 주인공과 시종, 여자 주인공과 시종, 그리고 땡땡이 무늬 복장을 한 두 여자와 두 남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남자 주인공은 갈색 저고리에 통 넓은 바지를 입고 머리에 뾰족한 모자를 쓴 것이 전형적인 고구려 귀족의 모습입니다. 여 주인공이 치마를 입은 모습도 수산리 고분에서 보는 것처럼 고구려 귀족 여인의 자태 그대로입니다.
덕화리 2호분의 널방 북벽〉?4 명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두 고분은 고구려 사람들이 벽화의 소재를 어떻게 변화시켜 왔는가를 잘 알려줍니다. 두 무덤의 천장에는 별자리 그림도 많은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19. 덕화리 1ㆍ2호분 벽화②, 천장에 하늘의 법칙 알려 주는 별자리 그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도시에서 별을 잘 볼 수 없게 됐습니다. 그 수도 적고 빛도 흐릿해졌습니다. 공기가 오염된 탓이지요. 하지만 대기 오염이 적었던 지난날에는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총총했습니다. 그리고 옛 사람들은 일식ㆍ월식과 다섯 행성(수성ㆍ금성ㆍ화성ㆍ목성ㆍ토성)의 변화 등을 관찰하고, 그 모습을 잘 기록해 두었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늘의 조그마한 변화가 곧 인간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덕화리 2호분 천장. 세발까마귀가 그려진 태양 아래에 벽성(壁星)이란 적혀져 있다.
별에 대한 관심 고분 벽화에 표현
별자리 그림은 청동기 시대 고인돌에서부터 발견됩니다. 그 뒤 신라 시대에 와서는 첨성대를 세워 별을 관찰하기도 했지요. 서울 궁중 유물 전시관에 보관 중인 조선 시대‘천상열차분야지도’(1395년 제작)에는 별 자리를 돌 위에 새겨 놓았습니다. 여기에는 283 개의 별자리와 1467 개의 별이 그려졌는데, 고구려 때의 천문도 탁본을 다시 그린 것입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가졌던 별에 대한 관심은 고분 벽화에 잘 나타나 있어요. 고분 벽화에 그려진 것으로는 해와 달ㆍ북두칠성ㆍ남두육성ㆍ북극 3성ㆍ5행성ㆍ28수 등의 별자리를 들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28수는 달이 매일 밤 일정한 시각에 차지하는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해와 달이 지나가는 부근에 널려있는 별들을 28 개의 덩어리로 묶어서 이름 붙인 별자리를 말합니다. 서양의 황도 12궁과 비교될 수 있지요. 28수는 동방에 각ㆍ항ㆍ저ㆍ방ㆍ심ㆍ미ㆍ기 의 7 개 별자리를 비롯해, 네 개의 방위별로 7 개씩 구분됩니다.
사신(청룡ㆍ주작ㆍ백호ㆍ현무)은 각 방위 별자리 모양에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28수는 태양과 달, 그리고 5행성과 자주 만나기 때문에 이들 별자리는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주목 받은 것은 해와 달이었지요. 고구려 사람들은 해에는 세발 까마귀(봉황이라고도 함), 달에는 두꺼비나 방아 찧는 토끼를 그려 넣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해는 반드시 동쪽에, 달은 서쪽에 그린다는 것입니다. 북두칠성도 반드시 해와 달과 함께 그려졌습니다.
덕화리 2호분 별 배치도. 해(일)와 달(월), 남두육성, 북두칠성 별자리가 표기돼 있다.
사후 세계를 관장하는 별 '북두칠성'
북두칠성은 고구려의 밤하늘에서 매일 밤마다 볼 수 있는 별이었습니다. 그래서 밤에는 사람들에게 북쪽 방향을 알려 주는 별자리가 되었지요. 서양에서는 큰곰자리라 부릅니다. 고구려인들은 이 북두칠성을 사람의 사후 세계를 관장하는 별이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해와 달ㆍ북두칠성은 고구려 시대 19 개 고분에 그려져 있습니다.
남두육성은 사람의 수명 연장을 주관하는 별로 서양의 궁수자리에 해당하지요. 남두육성은 비록 북두칠성에 비교될 만큼 큰 별자리는 아니지만, 남쪽을 상징하는 별자리라고 여겨왔습니다. 북두칠성과 함께 10 개의 고분에 그려져 있고요. 덕화리 1호분 천장에는 북쪽에 북두칠성, 남쪽에 남두육성, 동쪽에 해, 서쪽에 달이 이 법칙에 딱 맞게 그려져 있습니다.
덕화리 2호분 정8각형 천장.
뛰어난 천문학 지식 자랑
덕화리 2호분에는 이 별들 외에도 28수의 별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부가 지워지긴 했지만 정팔각형 천장의 4 번째 단에는 19 개의 별자리가 아?남아 있으며, 류성ㆍ정성ㆍ위성ㆍ벽성 등 4 개 별자리 이름도 검은 먹으로 적혀 있답니다. 한편, 고구려인의 천문학 지식은 매우 뛰어나 일본과 중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일본 기또라 고분 천장에 그려진 천문도는 고구려의 밤하늘을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덕화리1ㆍ2호분에 이렇게 많은 별들을 그린 것은 하늘이 존재하고 작용하는 법칙에 대한 고구려 사람들의 깊은 관심의 표현이었지요. 따라서 고분 벽화에 그려진 별자리들은 고구려인의 종교와 의식 세계를 밝히는데 아주 중요한 실마리가 된답니다.
20. 호남리 사신총의 사신도, 청룡ㆍ백호ㆍ주작ㆍ현무 모습 다른 벽화와 크게 달라
사신총은 널방 4벽면에 사신만 그려진 유일한 무덤…수수께끼 풀기 위한 연구 한창
주작. 머리 모양이 타조를 많이 닮았다.
호남리 사신총은 평양시 대성구역 호남리에서 1916년 발견된 벽화 무덤입니다. 이 사신총은 동명왕릉에서 보는 것처럼 무덤 아래 부분을 돌로 두른 기단을 갖고 있으며, 규모도 꽤 커서 신분이 높은 사람의 것으로 여겨집니다. 무덤은 단순히 널길과 널방의 구조로만 되어 있습니다. 무덤 안은 긴 목재 형태의 흰 대리석을 정교하게 다듬어 만들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무덤 안 널방 4 벽면에 청룡ㆍ주작ㆍ백호ㆍ현무 등 사신의 그림만 그려져 있고 천장과 널길 등에는 아무런 그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구려 벽화 무덤 가운데 순수하게 사신만을 그린 것은 호남리 사신총 뿐입니다.
호남리 사신총의 청룡. 청룡의 특징인 뿔이 나 있다.
청룡ㆍ백호, 자신의 꼬리는 보는 형태 취해
고구려 벽화 고분들은 6세기 초에 만들어진 이 사신총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사신도를 고분 벽화의 주된 주제로 삼게 된답니다. 널방 벽면의 아래쪽은 물이 스며들어서 화면이 지워지긴 했지만, 위 부분만으로도 사신의 외모를 제대로 알 수 있어요. 벽화는 곧장 벽면에 그려졌습니다. 이렇게 직접 채색하는 방법이 발전해 강서대묘 등에서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빛깔이나 화면이 손상되지 않는 벽화를 그리는 데 성공하게 된 것이지요.
동벽에 그려진 청룡은 몸을 널방 입구인 남쪽을 향해 있는데, 머리는 북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서벽의 백호도 몸은 남쪽을 향하면서, 머리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청룡과 백호가 이처럼 자신의 꼬리를 보는 형태를 취한 것은 고산리 1호분 백호 그림을 빼고는 찾기 어려운 아주 특이한 경우입니다. 한편, 청룡의 얼굴은 옆으로 그렸습니다. 머리에는 하나의 뿔이 길게 뻗어 있고, 윗입술은 높이 치켜 올라가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백호.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백호.
백호는 몸체와 목이 한번 더 뒤틀려 청룡보다 심하게 움직이는 형상입니다. 이 두 그림은 원래 무덤 안에 들어오려는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죽은 영혼을 보호하기 위해 수호신인 청룡과 백호는 무덤 입구를 바라보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무덤의 청룡과 백호는 오히려 무덤 안쪽을 보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는 전문가들도 아직 밝혀내지 못해 수수께끼로 남았습니다.
주작 머리도 봉황의 모습이 아닌 타조 닮아
널방 남벽의 입구 좌우에는 주작이 그려져 있습니다. 날개를 펼치고 꼬리를 위를 향해 길게 뻗어 있는 모습은 다른 고분 벽화에서의 주작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머리 모양은 봉황이나 수탉의 모습이 아니라 타조를 닮았습니다. 타조는 아프리카 등지에 자라는 동물이라 고구려에선 볼 수 없지요. 하지만 이웃 중국에서는 타조를 귀한 동물로 여겼습니다. 당나라 고종의 무덤인 건릉에는 타조의 모습을 돌에 선명하게 새겨 놓기도 했답니다.
거북과 뱀이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는 특이한 모습의 현무.
혹시 고구려에도 타조가 선물로 보내져 고구려 사람이 봤을 수도 있겠지요. 그 때문에 주작을 그릴 때에 그 모습을 반영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어요. 북벽의 현무 그림도 다른 무덤의 현무와 다른 점이 눈에 띕니다. 현무를 만드는 뱀이 거북의 꼬리 쪽으로 몸을 휘감고 있어서 두 짐승의 머리가 서로 마주 보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다른 현무들은 얼굴을 맞대고 있는데, 호남리 사신총의 현무만이 다릅니다. 현무는 원래 두 마리의 짐승이 조화를 통해 우주 질서의 회복을 상징하는 존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두 마리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기운을 뿜어 내지 않고 있다면, 앞서처럼 백호와 청룡처럼 자신의 임무를 미처 다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 호남리 사신총의 사신만이 이렇게 전혀 다르게 그려진 것일까요? 벽화를 그린 고구려인의 생각을 알기 위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연구 중입니다.
21. 진파리 4호분, 연못 그려 정토 세계로의 환생 소망
진파리 4호분의 널방 입구(왼쪽), 진파리 4호분의 연못을 복원한 그림(오른쪽)
평양 동남쪽 제령산 줄기에는 동명왕릉과 진파리 1호분 등 많은 벽화 무덤이 있습니다. 진파리 4호 무덤에 대해 자세히 알아 볼까요? 이 무덤은 6세기에 만들어진 벽화로, 널길 동쪽과 서쪽 양벽에 거의 똑같이 생긴 연못 그림이 있어 유명합니다. 벽면 전체를 차지할 만큼 크게 그려진 연못 그림은 고구려의 대표적인 풍경화라고 할 수 있답니다.
●연못 그림은 6세기 고구려의 대표적 풍경화
소나무가 우거지고 바위와 절벽으로 된 인공 산으로 둘러싸인 이 연못에는 연꽃들이 활짝 피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금가루를 칠한 십자형과 삼각형 무늬 그림을 곳곳에 배치해 그림을 아주 호화롭게 보이게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연꽃이 가득한 연못을 널방 입구 좌우에 그린 건 무슨 이유일까요?
진파리 4호분의 천장 벽화(왼쪽)와 천문도(오른쪽).
무덤 주인공이 자신의 집 실내 풍경을 그렸다면 마구간이나 창고도 함께 그렸겠지요? 그렇지만 연못만을, 그것도 입구 좌우에 그린 데에는 다른 뜻이 있을 터입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의 희망은 죽어서 낙원인 정토세계로 가는 것이지요. 하지만 정토세계에 다시 태어나려면 장천 1호분 연화화생도에서 본 것처럼 연꽃을 통해 거듭나야 합니다. 따라서 널길의 연못은 죽은 영혼이 정토 세계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린 것입니다.
널방 동벽 아래쪽에서는 또 청룡을 볼 수 있어요. 그 위에는 용을 탄 신선이 상서로운 새와 함께 날아가고 있고요. 또 남벽 무덤 입구 좌우측 벽에는 서로 마주 보는 주작이, 그 아래에는 나무가 보입니다. 두 마리 주작은 두 다리를 벌리고 움직이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다른 고분에서는 보기 어려운 아주 생동감 넘치는 그림입니다. 이에 비해 서벽은 왼쪽만 벽화가 남아 있습니다. 아래쪽에는 백호, 위쪽에는 세 명의 신선, 그리고 위쪽 가운데는 달 그림이 보입니다. 신선의 머리에 꽃 장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성으로 짐작됩니다.
●높은 천문학 수준 알 수 있는 '별자리 그림'
한편, 널방 북벽에는 특이하게도 현무 대신에 청룡이 있어요. 청룡 위쪽에는 상서로운 새를 탄 여자 신선이 있습니다. 이 신선이 혹 무덤의 주인공은 아닐까 싶네요. 북한에서는 평강 공주와 온달 장군의 무덤이라고 보고 있답니다. 고개를 들어 무덤 천장을 보면 또 연꽃 무늬와 병풍 무늬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천장 막음돌에는 91 개나 되는 별이 보입니다. 이 별들이 모두 금가루로 칠해져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입니다. 진파리 4호 무덤 벽화에는 이처럼 금가루로 채색한 부분이 많이 있어 매우 화려합니다.
천장에 그려진 91 개 별은 태양이 지나가는 길에 놓인 28 개의 별자리와, 북두칠성, 그리고 북극 3 성을 그린 것입니다. 북두칠성은 크게, 다른 별들은 밝기에 따라서 차등을 두어 그렸습니다. 이처럼 천장에 그려진 별자리 그림은 고구려 천문학의 발전 수준을 알 수 있는 귀한 그림입니다.
22. 통구사신총, 고구려의 비밀 풀어 줄 그림 가득
통구사신총 널방 북벽의 현무 그림
통구사신총은 집안시 우산 아래에 있는 벽화 무덤으로, 그 앞에는 오회분 4호묘와 5호묘가 있습니다. 이 3 개의 벽화 무덤은 사신(청룡ㆍ주작ㆍ백호ㆍ현무)을 널방 네 벽에 크게 그렸으며, 천장에 신선과 용이 그려져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또 세 무덤 모두 6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고구려 최고 신분을 가진 사람의 무덤이기도 합니다. 특히 통구사신총과 오회분 4호묘 천장에는 하늘의 북극을 상징하는 세 별과 함께 황룡이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천장에 학을 탄 신선의 모습. 높은 모자를 쓰고, 비단 바지를 입었다.
●최고 통치자 상징인 '황룡' 그려져
황룡은 중앙을 수호하는 동물이자, 최고 통치자를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광개토 대왕릉 비문에도 고구려를 세운 추모왕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에 염증을 느끼자, 하늘에서 황룡을 보내 맞이했다는 기록이 보이기도 합니다. 또 고구려 벽화고분 가운데 영양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강서대묘에도 천장에 황룡이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통구사신총이나 오회분 4호묘도 고구려 왕이나 그에 버금가는 인물이 묻혀 있겠지요?
통구사신총 널길의 수문장. 곧 적과 싸울 태세다.
●현무 그림 자연스럽고 생동감 넘쳐
통구사신총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널길의 좌우 벽에는 힘센 무사가 그려져 있습니다. 특히 서쪽 무사는 왼쪽 다리를 뒤로 굽히고, 오른손으로는 창을 앞으로 비켜 들고 있어 언제든 적을 찌를 듯한 공격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또 왼손에는 적의 침입을 알리기 위한 나팔을 들고 있습니다. 만약 적이 쳐들어와 나팔 소리가 울린다면 널방 네 벽의 사신들은 영혼을 지키기 위해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사신 가운데 가장 멋진 그림은 북벽에 보이는 현무입니다. 현무는 뱀과 거북이 삼각 모양을 이루고 있는데, 뱀은 심하게 엉켜 있습니다. 이에 비해 거북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뱀과 마주 보고 있습니다. 이 현무는 오회분묘의 현무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훨씬 더 자연스럽고 생동감이 넘칩니다. 주변의 흐르는 듯한 구름 문양도 현무를 더욱 빛내 줍니다.
●신선ㆍ도깨비 등 의미 아직 못 밝혀
널방의 사방 모퉁이에는 기둥 대신에 괴수들이 천장을 받치고 있습니다. 천장은 삼각형 고임돌이 2단으로 올려져 있습니다. 각 고임돌 바닥에는 용을 한 마리씩 그려 넣었습니다. 1층 고임돌에는 10 명의 신선이 그려져 있는데, 신선은 모두 용ㆍ봉황ㆍ기린ㆍ학 등을 타고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학을 타고 긴 창을 든 신선은 머리에 높은 모자를 쓰고 문양이 그려진 비단 바지를 입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서쪽의 신선들은 모두 뾰족한 모자나 높은 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데 비해, 동쪽의 다섯 신선은 모두 면류관을 쓰고 있습니다. 이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이와 함께 고임돌 사이 네 방위의 막음돌에는 동쪽과 서쪽에는 해와 달, 남쪽과 북쪽에는 도깨비와 상상의 동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도깨비와 상상의 동물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한편, 서쪽에는 나무 아래에 두 명의 신선과 뱀을 먹고 있는 큰 새 그림이 있습니다. 한 신선은 불을 만들고 있고, 다른 신선은 붓으로 탁자 위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신선은 어떤 글을 쓰고 있을까 생각해 보세요. 혹 무덤 주인공의 일생을 기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통구사신총 벽화에서 여전히 그 의미가 잘 밝혀지지 않은 이 그림들은 앞으로 고구려의 숨겨진 비밀을 풀어가는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23. 오회분 5호묘, 생동감 넘치는 용·신선 그림… 보존 소홀 아까워
오회분 5호묘 안의 남벽. 무덤 안에서 이슬 맺힘 현상이 뚜렷하다.
지난 1999년 고구려 문화 유적을 답사하던 중에 중국 집안시에 위치한 오회분 5호묘의 안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오회분 5호묘는 묘실 입구를 활짝 열어 놓고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5 분 남짓한 시간 동안 무덤 안에 들어가 벽화를 보고 나오는데, ‘무언가 잘못되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뛰어난 기술의 고분 벽화 아예 사라질 수도
무용총ㆍ쌍영총과 같은 벽화 고분은 무덤 안 벽면에 석회를 바른 다음, 그 위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오회분 5호묘 등 고구려 후기 벽화들은 잘 다듬은 돌벽 위에 직접 그림을 그렸습니다. 안료와 접착제를 개선해 안료가 돌의 입자 사이에 박히다시피 그림을 그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림을 그리면 시간이 지나도 그 색과 생동감이 오래 유지될 수 있지요.
오회분5호묘 모서리에 그려진 괴수.
그래서 오회분 4호묘의 경우 지금도 1500 년 전 색깔이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오호분 5호묘도 1962년 발견 당시 4호묘처럼 화려한 색감을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출입이 잦아지면서 그들이 내뿜은 이산화탄소에 의해 안료가 산화되고, 그림이 바래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 무덤 바깥과 안의 온도 차로 벽면에는 이슬 맺힘 현상이 뚜렷해졌고, 이 물이 흘러내리면서 산화된 안료까지 씻어 내리게 됐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냥 두면, 뛰어난 기술로 그린 고분 벽화라도 그림 자체가 아예 사라질 수도 있지요. 문화 유산은 한번 파괴되면 다시 되살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벽화 고분을 연구하는 것도 큰일이지만 보존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오회분5호묘 안의 모습.
●가장 중요하게 그려진 소재는 '용'
오회분 5호묘는 통구사신총과 마찬가지로 6세기에 만들어진 무덤입니다. 널길 동벽에는 연꽃 좌대에 반쯤 무릎을 꿇고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수문장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 역시 널방 네 벽에 그려진 사신들과 함께 무덤 주인공의 영혼을 지키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널방에 그려진 사신은 통구사신총과 비슷합니다. 다른 점은 사신의 곁에 구름 문양이 아니라, 연꽃 문양ㆍ불꽃 문양이 함께 어우러진 사방 연속 무늬를 배경으로 그려졌다는 점입니다. 이 문양으로 널방의 네 벽은 매우 화려해 보입니다. 이 무덤에서 가장 중요하게 그려진 소재는 놀랍게도 상상의 동물인 용입니다. 네 벽의 모서리ㆍ위쪽, 천장 고임 등에는 39 마리의 용이 그려져 있답니다.
특히 네 벽 모서리에는 아래에 괴수가, 위에는 두 마리 용이 천장을 받들고 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이처럼 용을 친근한 동물로 여겼지요. 천장 벽화에서 주목할 그림은 상단 고임에 그려진 신선들입니다. 4 개의 고임에는 용을 탄 신선 2 명씩이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이 신선들은 거문고와 작은 장구인 요고, 옆으로 부는 피리인 횡적, 하모니카와 비슷한 횡적, 뿔나팔 등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동쪽에 그려진 한 신선은 춤을 추고, 서쪽의 신선은 노래를 신나게 부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천상 세계에서 신선이 사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 볼 수 있겠지요. 음악과 춤이 어우러지면서 즐겁게 사는 세상, 그것이 죽은 자가 가고 싶었던 세상은 아닐까요? 이와 같은 그림은 오회분 4호묘에도 있어요. 이렇게 볼 때 신선들이 사용하는 악기의 구성을 통해 고구려 시대의 음악을 재현해 보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 소리는 천상에서 울려 퍼지는 정말로 아름다운 음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4. 오회분 4호묘, 고구려인들의 신앙 세계 벽면에 '가득'
▲오회분 4호묘 널방 동벽의 청룡과 신선
지난 1998년 고구려 역사 유적을 답사하면서 중국 장춘시 길림성 박물관에 있는 오회분 4호묘의 모형 전시실에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함께 갔던 사람들이 관람을 다 마치고 나올 때에도 나는 쉽게 그 전시실에서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의 신앙 세계가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벽화 속에 가득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재 이 모형 전시장은 없어졌으며, 그 대신 집안시 오회분 4ㆍ5호묘 곁에 벽화 전시장을 만들어 놓고 4호묘 내부를 찍은 비디오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벽마다 신선 그려져 있어
오회분 4호묘는 5호묘와 달리 사람들의 방문을 막아 벽화 상태가 좋은 편입니다. 1500 년 전의 그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채색을 아직 간직하고 있지요. 무덤 안 널길에 들어서면 좌우 벽면에 2 명의 무사가 섰습니다. 널방 안에 들어서면 사신(청룡ㆍ주작ㆍ백호ㆍ현무)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벽마다 그려진 신선입니다. 동벽에 1 명, 남벽에는 2 명, 서벽에는 3 명, 북벽에는 4 명 등 모두 9 명의 신선이 그려져 있지요.
남벽에는 흔히 주작이 2 마리 그려지기 마련인데, 오회분 4호묘는 무덤 입구가 남벽 중앙이 아닌 동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에 주작이 한 마리만 그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입구가 한쪽에 치우친 것은 오회분 5호묘와 다른 점입니다. 그리고 널방 네 벽의 모퉁이 아래에는 괴수, 위에는 용 두 마리가 교차해 있습니다. 또 네 벽의 윗부분에는 용이 서로 몸을 꽈서, 천장과 아래 공간을 구분 짓고 있습니다. 이것은 5호묘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천장 네 벽의 고임돌 아래에는 5호묘가 연꽃 문양이 있는 것과 달리 용이 그려져 있습니다. 더욱이 천장 맨 위 덮개 돌에는 황룡이 그려져 있어요. 이 4호묘의 황룡은 빨강과 노랑이 강렬하게 대비되어 강한 인상을 줍니다.
▲수레바퀴신 ▲숫돌가는 신
대장장이 신·수레바퀴 신도 섬겨
오회분 4호묘는 5호묘와 달리 해신과 달신이 서로 다른 돌에 그려져 마주보고 있습니다. 또 아래 고임돌 벽면 가운데에는 용을 그려 넣어 두 신을 떨어뜨려 놓았고, 위쪽 고임돌 가운데에는 해ㆍ달ㆍ북두칠성 등을 그려 신들을 떼어 놓았습니다. 이처럼 오회분 4호묘는 5호묘와 비슷한 소재를 벽화에 그렸지만, 화가들이 다르게 그림을 그리려 한 흔적이 아주 뚜렷합니다. 유행만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을 살리려고 노력했던가 봐요.
위쪽 고임돌에 그려진 9 명의 신선은 거문고ㆍ소ㆍ횡적ㆍ뿔피리 등의 악기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남쪽에 그려진 신선은 약단지를 들었고요. 아래 고임돌에는 8 명의 신이 그려져 있는데 이 또한 오회분 5호묘와 닮았습니다. 동남쪽 고임돌에서부터 살펴보면 불꽃을 든 불의 신, 대장장이 신, 수레바퀴를 만드는 신, 숫돌에 쇠붙이를 가는 신, 용을 타고 모자를 쓴 신, 달을 든 달신, 해를 든 남자인 해신, 소머리를 한 농사의 신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신들을 보면, 그리스 신화에서 대장장이 신인 헤파이스토스가 12 신의 하나였던 것처럼 고구려인들도 대장장이ㆍ수레바퀴 신을 해신ㆍ달신처럼 중요한 신이라고 보았던 것을 알 수 있지요. 조선 시대에는 대장장이를 농민보다 못한 신분으로 여겼지만, 고구려는 달랐습니다. 대장장이들을 우대했기에 대장장이 신도 함께 섬겼을 테니까요. 고구려가 수공업이 발전하고 부유해진 이유를 이와 같이 고구려인의 신앙 세계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5. 강서중묘, 깔끔하고 세련된 벽화 예술의 진수 보여 줘
강서중묘의 주작도.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 구역에 있는 강서중묘는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에 만들어진 무덤입니다. 강서중묘 곁에는 강서소묘와 강서대묘가 있어 이 지역의 이름이 삼묘리랍니다. 삼묘리에 있는 세 무덤은 평원왕ㆍ영양왕ㆍ영류왕의 무덤이라고 하는데, 평원왕 대신에 영양왕의 동생이자 보장왕의 아버지인 대양의 무덤으로 보기도 하지요.
●백호도·주작 그림 고분 벽화 중 으뜸
강서중묘는 널방으로 들어가는 널 길이가 7 m로 긴 편인데, 널방에 가까워지면서 점차 폭이 좁아집니다. 널방은 한 변의 길이가 3 m, 천장까지 높이는 2.5 m로 천장이 좀 낮습니다. 천장은 2 단의 받침을 안으로 좁혀 들게 얹은 뒤 그 위에 넓은 화강암으로 된 덮개 돌을 얹었는데, 이는 다른 무덤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입니다.
백호도. 골격과 근육이 꿈틀거리듯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널길에는 벽화가 없고 널방 안의 벽화는 단순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네 벽은 각각 하나의 돌을 다듬어서 막은 것이라 벽면이 매끄럽습니다. 그 벽면 위에 직접 색을 입혀 그린 벽화는 아직까지 원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동벽의 청룡과 서벽의 백호는 모두 남쪽 무덤 입구를 바라봅니다. 청룡은 불을 뿜지 않고, 몸에 비늘도 없어서 좀 단순해 보입니다. 이에 비해 서벽의 백호는 호랑이의 골격과 근육 움직임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지요. 속도감과 박진감 넘치는 모습이 아주 멋집니다. 그래서 고구려 무덤에 그려진 최고의 백호도로 평가되고 있답니다.
남벽 입구 좌우에는 마주 보는 두 마리 주작이 그려졌습니다. 입에는 구슬을 문 채 날개를 펼치고, 꼬리를 뒤로 뻗은 모습이 매우 단아하고 세련돼 보입니다. 이 그림 또한 고분 벽화의 주작 그림 가운데 으뜸으로 칩니다.
강서삼묘의 바깥 모습. 왼쪽이 강서중묘다.
●잘 다듬어진 벽면은 장식 없이 그대로 둬
이제부터는 천장을 살펴볼까요? 천장 아래쪽 받침돌에는 인동당초 문양이 연속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또 위쪽 천장 받침돌에는 인동초가 뻗어 있는 문양과 목화 송이처럼 꽃 핀 연꽃 문양이 멋지게 어우러져 있지요. 천장의 네 모퉁이에도 인동초 문양도 보입니다. 비스듬히 천장 덮개 돌을 받친 네 벽 동쪽엔 해, 서쪽에는 달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고구려의 다른 벽화에는 북쪽과 남쪽에 북두칠성과 남두육성을 그린 반면, 강서중묘에서는 봉황을 그렸어요. 주작과 달리 봉황은 꼬리가 두 갈래로 뻗어 있습니다. 천장의 덮개 돌에는 활짝 핀 연꽃이 그려져 있답니다.
집안 지역에 그려진 오회분 4호묘ㆍ오회분 5호묘 등에는 화려하고 복잡한 그림들로 장식된 벽화가 많지만, 강서대묘는 깔끔하게 중요한 소재만을 그리고 나머지는 벽면의 빈 공간으로 두었습니다. 무덤 안의 벽면이 울퉁불퉁하고 보기 흉했다면 벽화로 장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돌을 잘 다듬어 매끄러운 벽면을 가진 강서대묘의 실내 공간은 굳이 복잡한 문양을 그리지 않아도 무척 아름답게 보이니까요. 강서중묘는 이처럼 아주 세련된 고구려 벽화 예술의 진수를 보여 주는 멋진 벽화 고분입니다.
26. 강서대묘, 화강암으로 만든 널방, 완벽한 건축 기술 뽐내
강서대묘 천장 벽화인 현무도.
고구려 특별전이 2003년 서울에서 열렸을 때, 강서대묘의 널방이 모형으로 공개됐습니다. 필자는 당시 이 전시회를 7 번이나 찾았는데, 가장 주의 깊게 살펴본 것이 강서대묘였어요. 전문가들은 흔히 고구려 고분 벽화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강서대묘의 현무도를 꼽습니다. 그런데 현무도 만큼 강서대묘를 빛나게 하는 건 완벽한 건축 기술을 보여 주는 돌로 만든 널방 그 자체입니다.
●정교한 장인 솜씨 놀라워
널방 벽면은 길쭉한 판돌을 2~3 장 수직으로 포개 쌓되, 윗부분은 안으로 기울게 다듬었습니다. 여기에 맞춰 네 구석에 오각형의 돌을 끼워 넣어 모서리를 부드럽게 처리했습니다. 또 널방 천장을 안쪽으로 갈수록 좁아지게 만들어, 무덤 안이 지나치게 직선과 평면으로 이루어지는 딱딱함을 갖지 않도록 정교하게 꾸몄습니다.
강서대묘 천장 벽화
그런데, 그리스ㆍ로마 건축물에 사용된 대리석과 달리 고구려인이 사용한 돌은 표면 처리가 어려운 화강암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처럼 기계가 없는 상태에서 화강암을 유리처럼 말끔하게 다듬고, 또 빈틈없이 돌을 꿰어 맞춰 석실을 완성한 고구려 장인들의 솜씨는 놀랄 정도랍니다.
●현무도와 신선도, 고분 벽화 최고 걸작
강서대묘는 영양왕 또는 평원왕의 무덤으로 보이는 고구려 후기 왕릉입니다. 무덤 안에는 시신을 넣은 나무관의 파편과 관을 놓아 두는 관대 두 개만 남아있습니다. 관대는 화강암을 정교하게 다듬어 넓은 판으로 만들었지요. 그리고 옻칠을 한 나무관 파편에는 인동초 문양이 그려져 있습니다. 강서대묘는 이처럼 고구려 태왕의 무덤답게 벽화 뿐만이 아니라, 관ㆍ관대ㆍ석실 벽면까지도 정성 들여 만든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강서대묘 널방의 사신도는 강서중묘의 것과 닮았습니다.
강서대묘의 청룡도. 고구려 고분 벽화의 청룡 가운데 가장 위용을 자랑한다.
두 개의 뿔이 달린 청룡은 혀를 길게 내밀고 눈을 부릅뜬 채 발을 내딛으며 문에서 들어오는 자를 위해 달려들 듯한 모습으로 동쪽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강서대묘의 청룡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그려진 청룡들 중 가장 잘 생겼습니다. 하지만 강서대묘에서 으뜸은 현무도입니다. 뱀이 거북을 감싸고, 거북은 공중을 날고 있는 모습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신비감을 풍깁니다. 특히 뱀이 몸을 뒤틀며 머리와 꼬리를 교차 시키는 그림에서 탄력 있는 곡선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느껴지지요. 여기에다 거북 뒷다리의 털까지 휘날리는 모습은 그림의 세부까지도 치밀하고 정성스럽게 그렸음을 알게해 줍니다.
강서대묘 천장에도 인동당초ㆍ연꽃ㆍ구름 문양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보다 더 주목이 가는 그림은 서쪽 천장 아래 고임돌에 그려진 봉황을 탄 신선의 모습입니다. 이 신선이 가는 곳에는 삼신산이 그려져 있지요. 널방에 그려진 두 마리의 주작 아래 역시 삼신산이 보이고, 널방 동쪽 맨 아래 고임돌에도 삼신산이 그려 있습니다. 산들은 원근법이 이용됐는데, 앞산과 뒷산을 색을 달리해 가며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강서대묘 천장에는 또 먹으면 사람이 늙거나 죽지 않는 약인 불사약을 든 신선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죽어서도 영혼이 신선으로 거듭나 삼신산에 가서 영원히 살기를 바랐지요. 고구려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죽고 없지만, 그들의 영원한 삶에 대한 갈망은 벽화를 통해 우리에게 徨蠻側?있습니다. (글 :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고구려 무덤벽화의 변천사
고구려와 이집트 고분 벽화는 쌍둥이 베 짜는 여인, 고깃간, 방앗간 등 똑 같아 이집트를 처음 방문했을 때의 느낌은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이집트의 수많은 유적지에 산재한 벽화나 조각이 1000년, 심지어는 2000년씩이나 차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인물의 구도가 한결같이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벽화나 조각에 묘사된 인물의 옷이나 장식을 비교한 후에야 비로소 서로 다른 시대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벽화나 조각의 내용들은 그들이 체험했던 과거의 경험을 표현한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농사짓고 고기를 잡으며 포도주를 만들고 빵을 굽는 것은 물론 머리를 깎고 면도하는 장면도 있었다. 무용은 물론 죽은 사람 앞에서 통곡하는 장면까지 실생활을 묘사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한마디로 고분의 벽화만으로 이집트인들의 일상생활을 모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등장인물 모두 매우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 누구 하나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 가축 사육 장면을 그린 이집트 벽화. 이집트인들은 현생의 시간은 짧은 것이며 죽어서야 비로소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고 식량을 재배하고 물고기나 가축을 기르는 장면을 벽화로 그렸다. 이집트인은 어느 민족보다 낙천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인생을 사랑하고 죽음 또한 행복한 인생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신이자 통치자인 파라오의 강력한 지배하에 살았지만 이집트인의 생활은 전체적으로 볼 때 결코 불행한 생활은 아니었다. 물론 3200년의 역사 동안 전쟁이나 정치적 혼란, 기근 등으로 불안한 기간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평온한 생활을 영위했다. 지리적 조건상 정치적으로 침입자에게 짓밟히고 약탈당하는 다른 민족에 비하면 이집트인의 생활은 훨씬 평안하고 근심도 별로 없었던 것이다.
또한 고대 이집트의 풍습에서 발견한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그들의 계급이 세대를 내려가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파라오의 가계에서 파라오가 나오고, 재상의 가문에서 재상이 나오며, 장군의 가문에서 장군이 배출되었다. 벽돌공이나 상형문자를 새기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직업이 세습되었다. 파라오의 세습은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파라오가 임명하는 재상이나 장군도 한 가문에서 계속 이어받는다는 것은 현대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파라오는 자신이 총애하는 사람을 언제든 재상이나 장군으로 임명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 이집트에서 이러한 파격적인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 앞에 정해진 벽을 깨뜨리려 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에 스스로 순종하려고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집트인들은 현생의 시간은 짧은 것이며 죽어서야 비로소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죽어서도 파라오는 파라오며, 재상은 재상이라고 믿었다. 더구나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고 음악을 들으며 놀이도 할 것이므로 그들이 먹을 식량을 재배하고 물고기나 가축도 길러야 했다. 죽어서 신하나 하인들로부터 대접을 받으려면 살아 있을 때 잘해주어야 했다. 공연히 제도적인 틀을 바꿈으로써 잡음을 일으킴으로써 신하들을 화나게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충격을 받은 것은 이집트 벽화의 그림이 바로 우리나라 고분벽화의 그림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주로 고구려의 벽화이지만 베를 짜는 여인이나 부엌, 고깃간, 방앗간 등은 물론 사냥을 하는 장면, 무용하는 장면 등 무덤의 주인이 체험한 생활상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전통과 풍습은 물론 종교도 다르고 지역적으로도 멀지만 벽화만을 놓고 볼 때 이집트와 고구려의 차이점은 없었다. 아니, 죽은 후에도 내세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믿음은 오히려 두 사회의 공통점이었다. 고구려인들도 이집트인처럼 이승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며 육체가 소멸해도 영혼의 삶이 천상에서 이어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고인의 물건을 무덤에 옮겨놓고, 고분의 벽과 천장에 고인의 생전 생활을 그대로 그려놓은 것이다.
■ 고구려인의 긍지 고분벽화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중국 요령성 환인지방(桓因地方)에서 나라를 세우고(북한은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기원전 277년에 건설되었다고 주장) 기원후 3년에는 압록강 중류지역인 만포진 건너 중국 길림성 집안 통구(通溝)평야의 국내성에 도읍했다. 그 후 주변국과의 수많은 전투를 통해 한민족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으며(남북국시대의 발해는 고구려보다 1.5∼2배 정도 넓었던 나라로 추정) 427년 장수왕 때는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 따라서 고구려 무덤은 중국 요령성 환인지방에 750여 기가 남아 있고 통구 지방에 1만2358기가 있다. 그리고 현재 발견된 벽화 고분은 약 80여 기로 통구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압록강 유역과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강 유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안악(安岳)지방에서도 발굴된다.
고구려 벽화가 축조된 시기는 대부분 고구려가 절대 왕권을 중심으로 한 국가체제를 완비하고 한국사에서 가장 광대한 국토를 영위하며 맹위를 떨치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비교적 대등한 입장에서 중국과 교류하면서 불교를 비롯한 종교와 문화를 수입한 후 자신의 문화로 흡수시켰다. 그러한 긍지가 곳곳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고구려 벽화이다. 벽화고분의 그림은 현세적인 풍속화와 내세적인 상상화로 구분된다. 풍속화는 죽은 사람의 초상화는 물론 살아 있을 때의 생활 모습을 비롯하여 그가 살던 집이나 성곽 등 되도록 고인과 직접적으로 관계 있는 것을 정성스럽게 그린 반면, 내세의 그림은 상상력의 산물로서 당시 믿음을 토대로 사신도, 신선도, 천상도 등 종교적인 내용으로 채워졌다.
▲ 안악3호분(고국원왕릉으로 추정)의 부엌에서 조리하는 장면.
여자들이 부뚜막 아궁이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불을 지피고 시루 앞에서 요리를 하며 탁상에 반상기를 두 줄로 쌓아 올리고 있다. 푸주간에는 개와 사슴이 준비되어 있다. 풍속화는 대부분 4세기에서 6세기 초반으로 추정되는 고분에서 나타난다. 이후부터는 풍속화와 사신도가 공존하는 벽화고분들이 나타나는데 일반적으로 사방을 지켜주는 수호신인 사신(四神)은 중국 고대 민간신앙에서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대개 5, 6세기로 추정되며 다실묘에서 단실묘로 변하는 과도기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에 이르면 고구려 고분은 단실묘가 대종을 이루며 고분벽화도 많은 변화를 보인다. 입구에는 현세적 그림을 그리고 고인의 관이 안치된 현실에는 내세적인 사신도만 그렸다. 후기의 고분벽화는 사신도로 통일된다. 천장에는 대체로 선인상(仙人像), 산악도(山岳圖) 등을 그렸는데 이는 고구려 말기에 유행한 도교와도 관련이 있다고 추정된다.
■ 내세에 대한 믿음을 고스란히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공통적인 특징은 벽화들이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그려졌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사냥꾼들이 활을 쏘는 기상이라든가 춤을 추며 돌아가는 남녀의 낙천적인 모습, 달리는 말과 도망치는 동물들, 씨름하는 남자의 표정과 옆에서 구경하는 노인의 얼굴, 동심이 어려 있는 듯한 산과 나무와 새들의 모양 등에서 그림을 그린 이의 의도가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즉 고구려 화가들은 고구려인들이 갖고 있는 전투적이며 씩씩한 모습과 낙천적인 삶으로 충만된 풍족한 감정을 나타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승에서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 했던 온갖 악과 질병으로부터 무덤의 주인을 지켜줄 수호신까지 만들었다. 또 자연 앞에서 결코 오만하지 않았던 고구려인들은 천재지변 앞에서는 자연을 두려워했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도 자연에서 찾았다. 더구나 자연을 주관하는 주체를 하늘로 보고 이를 벽화로 그림으로써 천상의 세계를 무덤 주인이 영위할 수 있는 궁극의 세계로 보았다.
고구려인들의 이와 같은 영혼불멸사상은 삶을 훨씬 여유롭게 만들었으며 고구려가 최고의 강대국이 되는 데 일조하였다. 고구려인들이 언젠가 죽는다는 불멸의 진리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죽음은 이승에서의 삶이 끝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강인함과 용기를 보일 수 있었던 것도 지상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사후 천상세계에서 보다 풍요로운 삶을 지속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벽화무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안악 3호분으로 영화(永和) 13년(357)에 사망한 중국의 망명객 동수(북한은 고국원왕으로 추정함)의 무덤으로 추정하며 방형의 봉토 안에 여러 개의 석실이 만들어져 있으며 벽화고분 중에서는 연대가 가장 이르다. 남쪽 입구로 들어가면 현관 같은 연실이 있고 그 안에 전실인 사랑채가 있으며 그 양옆에 안채와 측실이 있다. 안채인 서측 측실에 주인 부부의 초상화와 시종들이 그려져 있고 동쪽 측실에는 부엌과 마구간이, 그리고 전실 벽에는 노래하며 춤을 추는 의장도가 그려져 있다.
▲ 안악3호분 대행렬도.
관이 있는 현실의 회랑 벽에는 250명의 문무백관과 악대, 기마대들이 수레에 앉은 주인공을 수행하는 행렬도가 그려져 있으며 고구려 벽화고분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또 관이 있는 현실의 회랑 벽에는 250명의 문무백관과 악대, 기마대들이 수레에 앉은 주인공을 수행하는 행렬도가 그려져 있다. 고구려 벽화고분 중 가장 규모가 큰 대행렬도는 'ㄱ'자형으로 꺾인 두 벽면(2×10미터)을 가득 채운다. 이 벽화가 주목을 끄는 것은 당시의 생활상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부엌은 지붕과 기둥만 있고 앞의 벽은 없애버렸는데 그 안에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여인, 부뚜막에 얹혀 있는 시루 안을 보는 여인, 그릇을 손질하는 여인들의 모습 등이 보인다. 지붕 오른쪽 끝에는 까치가 한 마리 있고 부엌과 도살실 사이에 개 두 마리가 어슬렁거린다. 많은 식솔을 거느리고 있던 주인공의 풍족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건립 연대를 6세기 중반으로 추측하는 통구의 무용총은 현실이 8각 천장이고 전실은 장방형으로 된 2실묘로 현실 북벽의 장방 인물을 중심으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북벽의 우측에 새의 깃을 꽂은 관모를 쓰고 통 넓은 바지를 입고 의자에 걸터앉은 인물을 둘러싸고 승려로 보이는 삭발하고 수염이 난 두 사람이 중심 인물을 향해 앉고 변관을 쓴 8명의 인물이 서있다. 북벽을 중심으로 동벽에는 북벽을 향한 인물들과 주방, 무용하는 그림이 있고 서벽에는 주로 수렵 장면을 그려져 있다. 그 가운데 5인조가 춤을 추며 돌아가는 장면은 각자의 동작과 표정에서 낙천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또 사신도로 유명한 강서대묘는 평남 강서군 삼표리에 위치한 세 기의 분묘 중 가장 크다. 현실 네 벽에는 각각의 방위에 해당하는 사신이 그려져 있고 천장 중앙에는 원을 그리며 구름 속에서 몸을 트는 황룡(黃龍)의 모습이 있다. 사신도가 현실 각 벽화의 주제로 등장한 분묘는 여러 기가 있으나 강서대묘의 사신들, 특히 북벽의 현무와 남벽의 주작들은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강서대묘의 사신도는 신비한 색감과 생동감으로 고구려 벽화를 세계적으로 알린 걸작품이다. 중국의 집안에는 20여 기의 벽화무덤이 있지만 일반에게 공개하는 것은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는 다섯무덤(오회분) 중에서 다섯번째 묘인 5호분 뿐이다. 현실의 네 벽에는 거대한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 있다.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로 나뉘어져 있는데 사신도가 그려진 바탕에는 인동무늬, 연꽃무늬, 부채꼴로 된 불꽃무늬가 연속적으로 그려져 있다.
▲ 오회분 중 4호분의 용을 탄 신선도.
4호분과 5호분은 음양의 조화로 천지창조의 장면을 연출했는데 이 벽화는 천지창조 설화를 주제로 그린 세계 유일의 벽화이다. 4호분과 5호분은 내용이 유사한데 네 면의 벽 위에 약간 밖으로 내어 쌓은 부분이 있는데 이를 들보라 하며 여기에 서로 얽힌 용의 그림이 이어져 있다. 이 용들은 천상세계를 받치고 있는 것으로 천상과 천하를 가르는 상징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들보의 각 귀퉁이에 고구려 고분의 특징인 삼각형 돌판을 올려 1, 2단을 만들었는데 여기에 용, 해와 달의 신, 수레바퀴 제조신과 돌을 다루는 신, 소머리신과 불의 신, 하늘나라의 신선, 세 발 달린 까마귀를 들고 있는 남신과 두꺼비를 들고 있는 여신도 발견된다.
용을 타고 연주하는 천상의 사람, 해와 달, 북두칠성과 남두육성 별자리, 춤과 피리부는 신선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동양에서 까마귀와 두꺼비는 '해'와 '달'을 의미한다. 이는 곧 음양의 조화로 천지창조의 장면을 연출한다. 이 벽화는 천지창조 설화를 주제로 그린 세계 유일의 벽화이다. 이외에도 1988년에 발견된 평정리 고분에서는 묵화로 그린 산수화가 발견되었고, 동명왕릉으로 불리는 진파리 10호, 1976년에 발견된 덕흥리 벽화 등도 유명하며 2002년 황해북도 연탄군 송죽리에서 왕릉급으로 보이는 고분벽화가 발견되었다. 서기 4∼5세기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이 고분 벽화는 일부 훼손된 부분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전실과 현실로 이루어진 무덤은 전체 봉분의 직경이 30미터에 이를 정도로 거대하다. 꼬리털까지 세세하게 묘사된 흰둥개, 부리부리한 눈의 고구려 호랑이 그림도 있고 고구려 여인의 얼굴은 초생달 같은 눈썹과 붉은 입술, 까만 눈동자가 지금도 살아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있다. 말 탄 자세에서 상체를 돌려 활을 자유자재로 쏘며 호랑이를 ?는 무사들도 보이며 고구려 초기의 무덤의 양식인 회를 바른 뒤 천연안료로 그렸다. 이 벽화는 고구려인들의 뛰어난 미의식을 보여주는 예로서 크게 평가받았다.
■ 벽화가 1500년 이상 보존된 비밀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1500년이나 지난 것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그 섬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도 그 비밀을 찾기 위한 연구가 미진한 감은 있으나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안병찬 교수가 발표한 회벽의 제작 기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시료는 집안의 하해방지구 제31호분에서 출토된 벽화 파편이다. 현미경 조사에서 석회의 마감층은 밀도가 치밀하고 일정하며 균열이 거의 없는데 이것은 석회 건조시 수축이 매우 적었음을 말해준다. 석회는 입도가 미세하고 균일할 경우 수축율이 적어진다. 바탕층에는 짚으로 판단되는 식물종 여물이 포함되어 있지만 현대에 생산되는 볏짚과 비교해서 줄기의 조직과 모양이 흡사하지만 크기는 현저하게 현대종보다 가늘고 섬세했다.
▲ 고구려 벽화 그리는 장면.
고구려벽화는 대부분 회가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리는 프레스코 기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현재까지 원형이 보존될 수 있었다.(『한국생활사박물관(03)』) 벽화를 그릴 때 석회는 동서양 고금을 통해 벽화의 바탕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석회는 다른 재료와는 달리 자연에서 손쉽게 얻어지는 1차 원료가 아니라 특별한 가공법을 이용해야 얻을 수 있는 재료이다. 석회는 원래 석회석(Limestone, calcite, CaCO3)을 900도 정도의 높은 온도로 가열하여 얻는데 이때 만들어지는 석회가 잘 알려진 생석회(강회(剛灰), quicklime, CaO)이다. 생석회는 반죽을 만들기 위해 물과 섞으면 급격하게 발열반응을 일으키면서 소석회(Ca(OH)2)가 되는데 이때 다량의 열을 방출하기 때문에 미장 작업에는 곧바로 사용하지 않고 하루 또는 일주일 정도 묵혀 소화(消和)시킨 상태에서 사용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유럽에서는 석회석이 많이 생산되므로 많은 건물들을 석회석으로 건축한다. 그런데 건물을 건축할 때 생석회를 접착제 용도로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문화재 파괴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것은 석회석으로 생석회를 만드는 공정에서 광산에서 석회석을 채취하는 것보다는 인근에 있는 건축물들을 파괴하여 접착제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특히 십자군 전쟁 때 십자군은 전략지점에 많은 성들을 건설했는데 이때 필요한 생석회를 구하기 위해 수많은 역사적 유적들을 용광로 속에 집어넣었다.
유명한 세계 7대 불가사의 등이 파손된 이유이기도 하다. 여하튼 고구려 벽화에 사용된 회반죽은 소석회에 물과 함께 점토 및 여물 등 적절한 첨가제를 섞어 용도에 맞는 물성의 반죽으로 가공하여 벽에 바른 것이다. 소석회 반죽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여분의 물이 증발하고 딱딱한 물질로 응고된다. 소석회의 응고 과정은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와 반응해 고착되면서 표면부터 원래의 물질인 방해석(석회석, calcite, CaCO3)으로 전환된다. 이것은 종유석과 같은 결정이므로 고구려벽화가 1500년을 넘기고도 오늘까지 변함 없는 상태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시료로 사용된 하해방지구 제31호분의 벽화에 사용된 회벽은 모두 세 개 층으로 구분되어 벽면 층으로부터 초벌, 바탕, 마감층으로 시공되었다. 초벌층은 깬돌 또는 막돌로 쌓아 만든 석실의 벽면에 최초로 석회를 바른 층을 말하는데 석재의 요철이 심하고 표면이 거칠므로 회반죽의 점성이 높아야 효과적이다. 따라서 초벌층 회반죽에는 점성이 높은 붉은 점토를 주로 섞고 가능하면 얇게 발랐다.
[사진설명] 벽화 단면 상세도. ▲ 벽화 단면 상세도.
바탕층은 초벌층과 마감층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에 아래로는 굴곡 있는 벽면을 고르게 하면서 위로는 표면의 얇고 단단한 마감층을 밀착해 잡아주어야 한다. 특히 고운 석회로 이루어진 마감층이 건조하면서 일으키는 수축을 완화해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층의 회반죽 제작기법은 여물과 모래 등 첨가제를 넣고 물은 적게 사용하며 신속하게 섞어 내부에 기포를 다량 혼합시킴으로써 방수효과를 높이고 수축균열을 방지하게 했다. 마감층은 직접 그림을 그려 넣는 면이므로 면이 깨끗하고 요철 없이 매끈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층은 가장 순도가 높은 석회를 사용하여 적당히 묽은 반죽을 만들어 한차례 바른 후 곧 표면을 흙손 등을 사용해 강하게 눌러 문지르는 작업을 통해 반질반질하며 경도가 높은 치밀질 상태로 마감했다고 추정한다. 이 때문에 첨가제도 엄선된 작은 입자의 모래만 약간 포함되었다.
요약하면 초벌층은 회반죽에 점토를 섞고, 바탕층은 여물을, 마감층은 순수한 석회만 사용하여 표면을 치밀하고 매끈하게 만드는 등 석회를 용도에 따라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한편 국립중앙박물관의 보존과학실에서 쌍영총의 벽화조각을 통해 본 채색 방법을 『역사 스페셜』에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쌍영총의 벽화조각에는 주로 붉은색과 검은색 안료가 나타나는데 적색인 경우에는 수은과 황의 농도가 높게 나왔다. 이는 황화수은을 안료로 한 것이고 흑색은 먹을 사용했다. 벽화의 주색인 적갈색은 황토같은 산화철 계통의 흙을 가열하여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외 산화납, 크롬 계통의 산화물 같은 천연재료를 주로 사용했다. 그러나 벽화에 쓰인 안료들의 대부분이 물에 녹지 않는 천연 광물성 재료들이므로 이들을 벽에 고착시키는 방법이 필요하다.
검은색 안료는 돌에 바른 석회에 잘 붙어 있는 반면에 붉은색 안료는 엉성하게 떠 있었다. 이것은 석회와 안료가 탄산칼슘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프레스코적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으로 채색되었기 때문이다. 접착제 없이 천연안료로 벽화를 그리면 벽에 바른 석회가 마르면서 안료가 그 틈으로 스며드는데 이것이 프레스코 기법(중세시대의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교황청에 벽화를 그린 기법으로 중세 시대 중요 건물의 벽화나 천장화는 이 기법으로 그렸다)이다. 채색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돌을 쌓고 그 위에 굵은 돌가루와 석회를 섞어 1차로 벽을 바른다. 그 다음 중간 굵기의 돌가루와 석회, 마지막에 고운 돌가루와 석회를 섞어 3번 가량 회벽을 입힌 후 석회가 마르기 전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러나 고분벽화의 넓은 표면을 모두 회벽이 마르기 전에 그린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화공들은 프레스코 기법을 주로 사용하면서 그림이 완성되기 전에 회벽이 다 마른 부분은 아교와 같은 것을 섞어 채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레스코 기법의 장점은 젖은 상태에서 안료와 석회가 함께 굳으므로 벽화 자체가 회벽의 구실을 한다. 또한 습기나 빗물이 무덤 안으로 스며들어도 석회수가 되어 일종의 코팅 현상이 일어나므로 그림에 훼손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교와 안료를 섞어 칠한 부분은 이런 효과를 얻을 수 없으므로 안료가 떨어져 나가는 박락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1500년이 지나도 원형을 유지할 수 있는 비밀은 바로 프레스코 기법이었다.
고구려 초기 무덤 __ 풍속화
- 안악 3호분 평면도
-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에 있는 고구려시대 벽화고분.
- 안악3호분, 부인과 시녀, 황남 안악군 오국리, <조선유적유물도감>에서
- 안악3호분, 묘주인, 황남 안악군 오국리, <조선유적유물도감>에서
- 안악3호분의 고구려 군사행렬도(부분) <조선유적유물도감>에서
북한 국보 제28호. 묘실은 현무암과 석회암 판석으로 짜여졌으며 널길의 방향은 남향이다. 널길[羨道]·널방[羨室]·앞방[前室]·좌우옆방[側室]·널방[玄室]·회랑으로 이루어진 다실분(多室墳)이며, 각 방의 천장은 3각굄형식이다. 널길에서 회랑에 이르는 묘실 내부공간의 석면 위에 직접 그림을 그렸는데, 벽화의 총면적이 139㎡(벽면 81㎡, 천장부 58㎡)에 달한다. 앞방 서벽의 남쪽 상단에는 연기(年記)가 있는 묵서명이 있어 무덤의 축조 및 피장자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을 전하고 있다. 묵서명은 "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甘六日 使持節都督諸軍事 平東將軍護撫夷校尉樂浪 相昌黎玄帶方太守都 鄕侯幽州遼東平郭 都鄕敬上里冬壽字 安年六十九薨官"이라고 씌어 있다. 명문(銘文) 중의 영화 13년(永和十三年)은 동진(東晉)의 연호로 357년이며, 동수(冬壽)는 336년(고구려 고국원왕 6) 요동(遼東)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동수(冬壽)와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학자들간에는 안악3호분의 피장자를 동수로 보는 견해와, 고구려의 미천왕 또는 고국원왕으로 보는 견해가 대립되고 있는데 아직은 결말이 나지 않고 있다.
무덤벽화의 중심주제는 인물풍속이다. 널길의 동서벽에는 무덤을 지키는 병사가 그려져 있으나 석회의 박락이 심하여 자세한 것을 알기 어렵다. 앞방 남벽의 서측과 동측에는 무악의장대(舞樂儀仗隊)를 그렸다. 서쪽 옆방 입구에 해당하는 앞방 서벽의 남측과 북측에는 옆방 내의 주인공을 모시는 두 인물의 입상이 그려져 있는데, 북측 인물의 머리 부근에는 장하독(帳下督)이라는 직명이 주서로 씌어져 있다. 서쪽 옆방 내부인 서벽에는 묘주인이, 남벽에는 묘주인의 부인이 연꽃 봉오리 장식의 장방 안에 앉아 주서로 기실(記室)·소사(小史)·성사(省事)·문하배(門下拜) 등의 직명이 씌어진 관리들의 보고를 받거나 시녀들의 시중을 받고 있다. 묘주인의 초상은 정면향이며 부인은 비스듬히 묘주인 쪽을 향하고 있다. 동벽 북측에는 묘주인 부부를 모시는 무인상이 그려져 있다.
앞방의 동쪽 옆방 내부는 각종 생활도로 장식되었다. 그 서벽 북측에는 디딜방아를 다루는 하녀, 남측에는 색색의 말로 가득한 마구간을 그렸으며 남벽에는 소로 가득한 외양간, 북벽에는 용두레우물에서 물을 긷는 하녀들, 동벽에는 주방에서 음식을 조리하는 장면을 중심으로 그 오른쪽에는 날짐승과 뭍짐승의 고기가 걸린 육고(肉庫), 왼쪽에는 마차를 넣는 차고를 그려넣었다. 주요기구와 인물들 곁에 확(確)·아비(阿婢)·정(井)·아광(阿光) 등의 글씨가 씌어 있다.
앞방과 널방 사이에 있는 여러 개의 8각돌기둥머리는 무덤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괴면(怪面)으로 장식되었다. 널방 동벽에는 무악도(舞樂圖)가 묘사되었다(→ 안악3호분주악도). 널방의 동면에서 북면으로 이어지는 'ㄱ'자 회랑에는 250여 명에 달하는 인물들로 이루어진 대행렬도가 자리잡고 있다. 행렬은 우차(牛車)에 탄 주인공을 중심으로 주변의 남녀시종들과 그 앞의 보병악대와 곡예꾼들, 뒤의 기마악대와 기마기수, 외곽의 호위보병과 기병들로 구성되었다. 널방 북벽의 뒷면, 곧 회랑 남벽에는 2층건물이 그려져 있고, 그 곁에는 경옥(京屋)이라는 글씨가 씌어 있다. 앞방 천장에는 일상과 월상이, 널방 천장에는 커다란 연꽃무늬가 그려졌다. 앞방과 널방 천장 굄부에는 간략한 당초무늬가 장식되었다.
안악3호분은 무덤축조연대가 확실하고 벽화의 내용이 풍부하여 4세기 중엽경의 고구려 문화를 복원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묘실의 주인공을 둘러싼 논의가 결말이 나지 않고 있어 보다 면밀한 연구를 필요로 하는 고분이기도 하다.
고구려 중기 무덤 - 도교.불교 관련 벽화
- 간성리 연화총 평면도 설명도
- 평안남도 강서군 태성리(옛 지명은 학재면 간성리)에 있는 고구려 벽화고분.
1912년 우현리의 강서3묘(江西三墓)와 함께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당시의 명칭은 간성리고분(肝城里古墳) 또는 간성리연화총이었다. 얕은 구릉의 남쪽 끝에 자리잡고 있어 무덤의 앞으로 넓은 평야지대가 내려다보인다. 널길[羨道]과 4개의 감실(龕室)이 달린 장방형 앞방[前室], 용도(甬道), 널방[玄室]으로 이루어진 두방[二室]의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으로 묘실의 방향은 남향이다. 앞방의 좌우 양끝과 안벽 좌우에 각 1개씩의 감실이 설치되어 있다. 감실이 달린 이러한 앞방 형태는 안악3호분의 앞방과 구조상 유사하다. 널방 천장은 3단의 평행굄 위에 2단의 3각굄을 얹은 평행3각굄이다. 앞방과 4개의 감실은 화강암 막돌로 쌓은 반면 널방벽은 크고 작은 안산암 막돌로 쌓았으며 널방 천장은 화강암 판석으로 짰다.
묘실 내부 전면에 걸쳐 백회를 입히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으나 백회의 대부분이 떨어져나가 벽화의 내용을 알 수 있는 곳은 극히 일부분이다. 벽화의 주제는 인물풍속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앞방과 널방의 각 벽 모서리에는 붉은색 물감으로 나무기둥과 주두(柱頭), 2중두공, 굽받침소로, 들보 등이 그려진 흔적이 있어 내부를 목조건물의 실내처럼 느끼게 장식했음을 알 수 있다. 널방 앞벽 윗면에는 희미한 들보 위로 '∧'형 활개가 뚜렷이 남아 있다. 앞방 안벽 오른편에 달린 감실의 서벽에는 둥근 무늬의 술로 장식된 장방 아래로 오른편을 향하여 긴 소맷자락을 모아 읍(揖)한 자세의 인물 얼굴과 상체 일부가 보인다.
앞방 남벽에는 기마행렬도(騎馬行列圖)의 일부가 남아 있다. 3칸으로 이루어진 앞방 천장의 각 뚜껑돌 밑면에는 활짝 핀 9엽 4겹의 연꽃이 1송이씩 그려졌으나 오른편 끝칸의 것만 형태가 뚜렷하며 다른 것은 거의 알아보기 어렵다. 널방 앞벽 윗면의 붉은색 들보 위에 그려진 '∧'형 활개들 사이의 공간에는 봉황·기린(麒麟)·천인(天人) 등이 표현되었다. 활개 사이의 공간에 이러한 존재들을 그린 벽화고분으로는 안악2호분·천왕지신총(天王地神塚)·용강대묘(龍岡大墓) 등을 들 수 있다.
널방 천장부의 3각굄석 밑면에는 팔랑개비무늬의 원문과 원안의 세발까마귀[三足烏]로 상징되는 해, 봉황류의 서조(瑞鳥)를 그렸다. 널방 천장 뚜껑돌 밑면에는 커다란 연꽃을 그렸던 흔적이 남아 있다. 옆방[側室]이 퇴화한 단계의 장방형 앞방과 전형적인 평행3각굄으로 처리된 널방 천장을 지닌 묘실구조, 목조건물의 내부처럼 장식된 묘실, 화려하면서도 실물적 표현을 간직한 연꽃무늬 등의 요소를 고려할 때, 연화총의 축조 및 벽화제작 시기는 5세기 전반일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후기 무덤 - 도교적인 벽화, 사신도 등의 관념화
- 강서대묘 평면도 설명도와그림
- 평안남도 대안시 삼묘리(강서군 강서면 삼묘리)에 있는 고구려시대 벽화고분의 하나.
- 강서대묘의 입면도와 평면도
강서대묘 널방 동벽의 청룡그림(고구려), 평남 대안시 삼묘리, <조선유적유물도감>에서
부근의 다른 두 무덤과 함께 우현리삼묘·강서삼묘라고도 불린다. 봉분의 직경이 51.6m, 높이는 8.86m에 이르는 대형 봉토석실분으로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남향의 외방무덤이다. 장방형인 널방의 동서폭은 3.12m, 남북길이는 3.17m이며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3.5m이다. 널방은 잘 다듬어진 화강암 판석으로 축조했으며 천장은 평행삼각고임 방식으로 쌓아 올렸다. 널방 바닥에는 동서에 나란히 돌로 만든 2개의 관대를 설치했다. 널방벽과 천장부의 석면에 직접 벽화를 그렸는데, 필선이 힘차고 생동감이 있어 고구려 벽화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널방 벽화의 주제는 사신(四神)이며 천장부 벽화의 주제는 신선세계이다. 널방 동벽의 청룡과 서벽의 백호는 널방 입구를 향하여 포효하고 있는데, 세부묘사가 치밀하고 필치에 생동감이 있으며 채색이 화려하여 환상적이고 신비한 느낌마저 준다. 널방 입구인 남벽의 좌우에는 널방문쪽을 향하여 마주보며 막 날아오르는 순간의 주작 1쌍을 그렸다. 연꽃 봉오리 가지를 입에 물고 있는 두 주작의 좌우로 펼친 양날개와 위로 뻗은 긴 꼬리는 팽팽한 원을 이루고 있다. 두 주작의 발밑에는 여러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는 풍수지리설과 관련된 표현으로 보인다. 널방 북벽의 현무는 강서대묘의 사신도 가운데 그 뛰어난 작품성으로 인하여 특히 유명한 그림이다. 현무의 뱀과 거북은 거북의 등 부분에서 머리를 마주하고 위로 제끼고 입에서 화염을 뿜어내고 있다.
천장부의 평행고임 제1단은 화려한 연속 인동당초무늬[忍冬唐草紋]로 장식되었다. 제2단에는 산악도와 선인(仙人)과 비천(飛天)들이 묘사되어 있다. 고임돌 동쪽받침과 서쪽받침에는 중앙에 산악도를 그리고, 그 좌우에는 서조(瑞鳥)를 타고 있는 인물들을 표현했다. 남북받침에는 머리를 삭발한 천인(天人)을, 북쪽받침에는 4명의 비천을 그렸다. 비천의 자태는 남북조시대 석굴사원에 등장하는 비천과 여러모로 유사하여 상호영향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제2단 고임돌에 그려진 인물과 동물들은 모두 자신의 왼편을 향하고 있다. 선인과 비천 및 상서동물들 사이의 공간에는 3엽연꽃과 구름을 그려넣어 공간배치의 균형을 꾀하고 있다. 고임돌 동서측의 산악도는 색조의 농담과 필치의 강약으로 토산과 암산을 구분하고 구름과 나무 등으로 산의 원근과 입체감을 나타내려고 하는 등 높은 수준의 회화적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삼각고임 제1단과 제2단 고임돌에는 봉황·기린·영지(靈芝) 등 각종의 상서로운 동식물을 그렸다. 천장뚜껑돌 밑면에는 오행(五行)의 중심에 해당하는 황룡을 묘사하였다. 황룡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힘차게 몸을 틀었는데, 주변의 구름으로 인해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다. 강서대묘는 널방의 축조방식이 정교하고 치밀하며 벽화의 구상이 장대하고 기법이 세련되어 그시기 고구려 건축기술상의 수준과 회화기법상의 발전정도를 잘 드러내는 고분이다. 널방축조 및 벽화의 제작연대는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 수렵도
집안에 있는 장군총은 초기 피라미드형과 아주 유사하다
장천 1호분 전실 서쪽벽을 가득 채웠던 생활풍속도 부분.
중국 지안시 장천1호분 벽화 중 전실의 귀부인 나들이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장천1고분 삼삭형 천장 받침돌의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장천 1호분 전실 왼쪽 벽의 생활 풍속도.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 묘실 정면의 천장으로 올라가는 부분.
탑 모양으로 차츰 좁혀 올라가는 다섯개의 계단에 온 세상을 담은 듯,
각종 동식물과 인물 형상이 가득 그려져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 벽화에 등장하는 수렵도.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
천장 밑 층급받침돌 벽화의 용을 탄 신선도와 태양의 상징인
세발 까마귀,소머리 형상을 한 농사의 신 등이 그려져 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의 벽화 그림.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 천장 벽화중에 말 그림.
오른쪽에 세계의 선으로 연결된 것은 별이다.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고구려인들의 습속을 그린 그림의
한장면인데 화살촉이 석류처럼 생겼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천장 밑 층급받침돌
벽화의 용을 탄 신선도와 태양의 상징인 세발 까마귀,소머리
형상을 한 농사의 신 등이 그려져 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의 천장 받침돌 그림.
학과 용을 타고 승천하는 신선과 달을 상징하는 두꺼비가 그려져 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 묘실 벽면의 부채를 든 귀부인의 인물도.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 천장 받침돌의 용그림.
용의 몸뚱아리가 적-황-청의 보색대비로
그려져있으며 비늘은 지금도 선명하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의 묘실 천장 받침돌에
그려져있는 달의 신.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의 수레바퀴 만드는 신의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의 하늘을 나는 신선의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의 고구려 벽화 중 `해의 신.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5호묘
천장 밭침돌 벽화에 등장하는 농사의 신.
소머리에 벼이삭을 들고 질주하고 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5호묘의 묘실 천장과
계단식 천장받침돌 벽화.
오회분 4-5호묘는 사신총과 함께 7세기 고분에 속한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5호묘의 묘실 입구로부터
묘실 전체를 담은 사진.
무덤의 구조와 벽화의 배치상태 등이 잘 나타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삼실총 제1실 남쪽벽의 행렬도.
삼실총 제1실 천장 고임면에 있는 주작(남쪽을 지키는 신) 그림.
도굴당한 뒤 고분 입구에 두껍게 시멘트를 바른<
중국 지린성 지안시의 삼실총의 최근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벽화의
신수 백호의 머리부분과 용의 몸통부분이 결합된 형상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에 삼실총에 나오는 새 그림.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의 고구려 여인의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의 인물상.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제3실 서쪽 입구 벽의 역사(力士)상.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긴 칼을 찬 무장이
묘실의 무덤 주인을 보호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행렬도의 남자 인물상.11명으로
구성된 행렬도의 10번째 위치하는 것으로 봐서 평민으로 보인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행렬도의 평민 복장 여인.
오늘날의 애교머리를 닮은 특이한 헤어스타일이 재미있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저고리와 통이 넓은 바지는
고구려 평민들의 전형적인 복식이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사신총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사신총의 묘실에서 연도 쪽을 바라다 본 면의 그림.
삼각형 천장 받침대가 만나는 부분을 귀면 판석으로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각저총 벽화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각저총 벽화.
저고리와 바지를 입은 전형적 옷차림의 고구려여인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각저총의 벽화.
쪽구들에 앉은 부인들과 맨바닥에 의자를 놓고
걸터앉은 남편이 상위에 차린 음식을 즐기며 담소하고 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각저총 묘실 왼족 벽면의 말과 마부.
말의 등에는 안장이 놓여있고 마부의 손엔 채찍이 들려있다.
서역인과 고구려인이 씨름하는 모습을 그린 각저총 벽화.
[고구려 고분벽화] 북한 송죽리 고분
북한 황해도 연탄군 송죽리 고구려 벽화 고분에서
1600여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고구려인의 모습
북한 황해도 연탄군 송죽리에서 발굴된 고구려 벽화.
북한 황해도 연탄군 송죽리에서 발굴된 고구려 벽화.
부리부리한 눈의 고구려 호랑이.
훼손으로 인해 주위는 떨어져나갔다.
평남 남포시 쌍영총의 8각기둥과 주두
[고구려 고분벽화] 안악 제1호분
황해도 안악 제1호분 벽화의 주두.
평남 대동군 덕흥리 고분의 주두.
현재 북한에 있는 덕흥리 고분 전실 벽화.왼쪽에 묘지
주인공이 꽃무늬로 장식된 화려한 방에 앉아 있는 보습을
그렸다.위에는 주인공의 신상을 기록해 놓았는데,
이에 따르면 그는 이름이 진이고,
요동태수와 유주 자사 등을 지냈으며 77세에 죽었다.
현재 북한에 있는 안악 3호분의 마구간 그림.주인공의 생활 면모를
그린 동쪽 측실 벽화 가운데 하나다 마구간 구유에서 여물을 먹고
있는 말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대륙을 달리던 고구려인들의 분위기가 물씬 난다.
수산리고분 현실 북쪽 벽에 그려진 귀신 얼굴모양 부채.
묘지 주인공 부부의 시종들이 들고 있던 것으로,
부채 혹은 햇빛가리개의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귀신밑으로 S자 비슷한 손잡이까지 달려있는 것이 특 징
고구려 벽화에서 보는 유일한 형태이다
안악 3호분 전실 동쪽 벽면에 있는 수박놀이하는 역사(力士) 그림상투를
머리 뒤로 묶고 아랫도리 일부만을 가린채 금방이라도 한번 맞붙을 기세다
역사들의 체구와 몸짓을 다소 희화적으로 과장되게 그렸다.
고구려 안악 3호묘 왕비복식 고구려 유물들
금동여래입상
평양 동암리 고구려 고분벽화에 의복그림일부로 보이는 파편조각
고구려 유물.
일본 나라 박물관 특별전에 전시된 고구려 승려화가 담징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법륭사 금당벽화 비천도 진본.
서기 756년 일왕 성무(聖武) 사후 작성된 법륭사 헌물장의 일부.
왼쪽에서 네번째 줄 아랫부분에 "고구려 비단(高麗錦)"이란 구절이 보인다.
고구려 유물들
1940년 평양에서 병기창공사를 하던 중 발견한
고구려 "금동미륵반가상"(왼쪽)과 6세기쯤 신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반가사유상"
1998년 7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된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의 흉상.
고구려와 발해의 피지배층이었던 말갈족 주거지로
추정되는 마리아노브카 토성에서 나온 삽 등 철제 유물들
옛 고구려 영토였던 중국 동북평원의
왼쪽에 위치한 대싱안링의 고구려시대 흔적인 돌절구.
일제 어용학자들이 식민사관에 근거로 이용한 광개토대왕비,
일본인들이 비문을 조작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
복제품 진품운 평양박물관
경복궁내 신축한 국립중앙박물관이 1996년 12월 13일 개관을 앞두고
6일 미리 공개됐다.사진은 고구려실에 전시한 금동투조장식 복제품
진품은 평양 진파리 1호분에서 발굴돼 현재 평양역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높이 14cm, 너비 23cm. 고구려하면 대륙적이고강인한 것만을 연상하지만,
이 유물은 고구려가 얼마나 정교하고 섬세한 기술을 지닌 국가였는가를
보여주는 명품이다.
보장왕21년(서기662년)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은
평양 부근 사수에서 방효태가 이끄는 당군을 격파했다.
고구려 소수림왕의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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