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루트를 찾아서](22)고대사의 뇌관을 건드리다 | ||||||||||
입력: 2008년 03월 14일 17:03:08 | ||||||||||
ㆍ고대사 뒤흔든 “기자조선은 실존했었다” 표면에서 불과 30㎝ 밑에서 모두 6점의 은(상)나라 시대 청동기가 질서정연하게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청동 항아리 1점과, 청동제 술그릇(뢰) 5점이었는데, 모두 주둥이가 위를 향해 있었다. 희한했다. 제2호 청동 술그릇의 주둥이 안에 이상한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 고죽, 기후 명 청동기 6자였다. 그런데 6자 가운데 3, 4번째 글자인 ‘고죽’ 두 자는 1122년 송나라 휘종이 출간한 ‘박고도록(博古圖錄)’과 ‘상하이 박물관 소장 청동기 부록(1964년)’에 수록된 은(상) 청동기 명문 중에서도 나온 바로 그 글자였다. 바로 고죽(孤竹)이란 글자였다. 항아리의 무늬와 형태는 갑골이 쏟아진 안양 인쉬(殷墟) 유적에서 나온 은(상) 나라 말기의 청동 술그릇과 같았다. 같은 해 5월, 이 교장갱(교藏坑·물건을 임시로 묻어둔 구덩이)을 정리하던 조사단은 불과 3.5 옆에서 또하나의 구덩이를 확인했다. 지표 밑 50㎝에서 은말주초 청동기 6점을 발견한 것이다. 청동기 6점은 장방형의 교장갱 안에 세 줄로 배열됐다. 솥(鼎), 술그릇(뢰), 물 따르는 그릇(帶嘴鉢形器) 등이 하나의 세트로 일정한 규율을 갖추고 있었다. “제2호 교장갱 출토품 가운데는 방정(方鼎·사각형 솥)이 가장 주목을 끌었어요. 높이 52㎝, 입지름 30.6×40.7㎝, 다리 높이 19.6㎝, 무게 31㎏였는데 굉장히 아름답고 전형적인 은(상)나라 말기의 방정이었지.”(이형구 교수) 방정의 형태와 무늬는 역시 인쉬 부호(婦好)묘와 인쉬 허우자좡(侯家莊) 대묘에서 출토된 대형 청동솥과 같았다. 은(상)나라 말기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방정의 북쪽 내벽에 4행 24자의 명문이, 바닥 중심에도 4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문제의 명문은 내부 바닥 것인데, ‘(箕侯)’로 읽을 수 있는 명문이었다. 보고자들은 명문에서 보이는 ‘고죽’과 ‘기후’를 은나라 북방에 자리잡은 2개의 상린제후국(相隣諸侯國·인접해 있던 제후국)이라고 추정했다. ■ 한반도를 강타한 ‘기자조선’의 부활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979년 새해 벽두. 깜짝 놀랄 소식이 한반도를 강타했다. “箕子朝鮮은 실존했었다”(경향신문 1979년 1월5일자)는 보도 때문이었다. 경향신문과 서울신문은 한·중·일 학계가 뜨거운 감자로 여긴 기자조선의 실체를 고증한 이형구 당시 문화재전문위원(현 선문대 교수)의 논문을 실었다. 논문은 이형구 교수의 국립 대만대 고고학과 석사학위 논문 ‘중국동북부 신석기 시대 및 청동기시대의 문화 연구’였다. 34살 고고학도가 쓴 한 편의 ‘석사논문’은 학계에 거대한 폭풍을 일으켰다. 이른바 ‘물 먹은’ 다른 언론은 다음날 경향신문·서울신문의 기사를 받아 쓸 수밖에 없었다. 경향신문은 사설(1월9일)을 통해 ‘민족사의 재조명-식민사관 극복위한 일대전기를 갖자’고 기원했다. 다른 신문들도 사설에서 ‘기자조선이 뜻하는 것-적극적인 자세로 史實을 밝히자’(한국일보 7일자), ‘상고사연구와 국제협력’(동아일보 8일), ‘기자조선의 허실-이를 밝히는 학술작업’(조선일보 10일자)이라며 연일 다투어 촉구했다. 반면 김정배 고려대 교수와 김정학씨는 “중공자료에 집착한 인상”(김정배 교수·중앙일보 3월20일자) “랴오닝 지방 청동기는 은·주가 아니라 시베리아 계통”(김정학씨·중앙일보 1월17일자)이라고 반박했다. 이기백 서강대 교수는 이형구 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기후(箕侯)가 기자조선이었다는 증거가 제시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 학문엔 ‘절대’란 없다 논쟁은 해외까지 번졌다. 당시 심심치 않게 국내에 인용되던 통일일보(일본에서 한국인이 발행한 일본어신문)는 천관우씨와 김정배씨의 글을 상·중·하로 다뤘다. 또한 대만의 ‘연합보’도 “한국인 학자가 뿌리를 찾는다(韓國學人在尋‘根’-李亨求爲‘箕子朝鮮’正名)”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기자조선의 ‘대동강 유역 존재설’을 흔들림 없이 믿고 있던 중국문화대 량자빈(梁嘉彬) 교수는 얼마나 화가 났던지 이교수의 논문을 급히 입수한 뒤 즉각 반론을 제기했다. 그야말로 동북아 학계가 요동친 것이다. “논문을 지도·심사한 베이징대 출신 원로 고고학자 가오취쉰(高去尋) 교수와 인쉬(은허·殷墟)를 발굴했던 스장루(石璋如) 선생 등이 78년말 기립박수로 통과시킨 논문이었지. 그런데 이 논문을 국내에 소개했을 때, 어느 정도 파장은 예상했지만 사태가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번질 줄은 몰랐지. 아 글쎄 내 논문을 가지고, 당대최고의 학자들이 그분들끼리 치열한 논쟁을 벌이잖아요. 그때 ‘아, 정신차려야겠구나. 더 공부하지 않으면 큰 일 나겠구나’ 하고 느꼈지.”(이형구 교수) 이 논쟁과 관련된 자료를 들추던 기자(記者)는 학문에서 ‘(상대방의 견해는) 절대 아니다’, ‘내 주장은 100% 옳다’는 쾌도난마는 없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특히나 고고학·문헌 증거들이 속출하는 역사 및 고고학계에서 과거의 학설이나 주장은 언제든 바뀔 운명에 놓여있다. 그런데도 ‘내 주장만이 옳다’고 고집하는 것은 새로운 성과나 연구결과가 나왔을 때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과 마찬가지다. 돌아설 명분, 즉 자신의 고집을 번복하고 새로운 학문을 향해 진일보할 기회를 스스로 놓치는 것이다. 조유전 현 토지박물관장이 늘 드는 재미있는 일화 하나.
29년 전을 뜨겁게 달궜던 ‘기자조선’ 논쟁도 그렇다. 반발이 워낙 극심했던 탓에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이 순간에도 제대로 진척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극렬하게 반발했던 측이 그 이유로 내세웠던 일부 주장들은 중간에 사실상 폐기되었다. “우리 민족문화의 시베리아 기원론이 대표적이죠. 1980년대까지 풍미했던 우리 민족문화의 시베리아 기원설이 90년대 들어 수정되었습니다. 시베리아 기원설이 국사교과서에서 슬그머니 사라진 거지요. 국립중앙박물관의 도록도 2003년판과 2005년판이 다른데, 주된 변화는 우리 신석기·청동기 문화의 시베리아 기원설이 아무 설명도 없이 빠진 겁니다.” 1980년대 이후 발해연안에서 BC 6000년전 문화인 차하이-싱룽와 문화를 비롯, 훙산문화(BC 4500~BC 3000년), 샤자뎬하층문화(BC2000~BC 1400년) 등 동이족이 창조한 발해문명의 흔적들이 대거 쏟아진 것이다. “발해연안 빗살무늬 토기문화와 청동기 문화 등의 연대가 시베리아의 그것보다 훨씬 이르다는 증거들이 잇달아 발견되자 시베리아 기원설이 힘을 잃어간 것이지. 내가 그걸 논증하느라 30년 동안 죽을 힘을 다해 바로 잡은 것인데, 아무 설명도 없이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그냥 넘어가면 안되지….”(이형구 교수) ■ 한국 고대사의 뇌관 여기서 이기백 선생이 기자조선 논쟁이 한창일 때 이형구 선생에게 보낸 한 장의 편지에 주목한다. 이기백 선생은 물론 젊은 고고학자인 이형구 선생의 견해를 비판한 쪽이었다. 이기백 선생은 편지에서 “이형구씨가 고죽(孤竹)과 고조선을 연결시킨 것은 논리의 비약”이라고 조목조목 비판했다. 하지만 그는 말미에 “(이형구씨의 논문 발표로) 학문적인 바탕 위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제시된 만큼 장차 활발한 토론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비판은 했지만 학술토론의 여지를 남긴 것이다. 고고학계의 태두 삼불 김원룡 선생도 원래 한국민족 문화의 시베리아 기원설을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삼불은 이형구 교수의 논문을 폄훼하는 대신 “랴오닝성은 한(漢)족과 우리 민족의 접경지역이며~ 우리도 중공학계의 정보입수와 함께 중국·일본고고학 전문가들을 양성해야 한다”고 역시 심도있는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학계의 어른들은 학문이 살아있는 생명체인 만큼 언제든 성장하고 진화할 수 있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안 것이다. ‘기자조선 논쟁’의 불을 붙인 당시 박석흥 경향신문 기자의 개탄(79년 1월15일자)은 생생하다. “한국학계에 큰 충격을 준 기자(箕子) 명 방정(方鼎·사각형태의 솥)은 이미 73년에 발굴되었고, 76년에 일본 전시회 때 실물이 공개됐다. 그런데도 우리 학계가 뒤늦게 입수해 검토하게 된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결정적인 유물 발굴에도 근본적인 변화없이 종래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은 구태의연한 학계풍토이다.” 아마도 박사논문도 아닌 석사논문이 이렇게 파란을 일으킨 적은 없었을 것이다. 사실 기자(箕子)와 기자조선 문제는 동북아 고대사에서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뇌관이었다. 그런데 젊은 고고학도가 그 뇌관을 건드렸으니 난리가 날 법도 했다. 그런 그를 기성학계가 그냥 놓아두지 않았던 것이다. 학계는 왜 기자조선 문제가 나왔을 때 그렇게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을까. 그 이유를 조목조목 따져보자. <후원:대순진리회>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3)동이가 낳은 군자들 | |||||||
입력: 2008년 03월 21일 16:45:01 | |||||||
ㆍ공자·기자·백이·숙제 모두 동이족의 후예 이젠 미스터리의 세계다. 29년 전 폭풍을 일으켰던, 그렇지만 지금도 미해결로 남아있는 고대사, 즉 기자와 기자조선, 고죽국, 그리고 고조선의 세계로 빠져들자.
1973년 랴오닝(遼寧)성 카줘(喀左)현 베이둥(北洞) 구산(孤山)에서 확인된 ‘기후(箕侯)’명, ‘고죽(孤竹)’명 청동기부터 이야기 하련다. “임시로 집어넣은 교장갱에서 발견된 청동기들을 보면 이상한 점이 있었어요. 두 곳 다 청동기 6점이 질서정연한 세트를 이루고 있잖아요. 또 발견 지점이 다링허(大凌河)와 그 지류가 서로 만나는 지점의 구릉 위였어요. 이것이 주는 의미는 매우 큽니다.”(이형구 교수) 그것은 이 교장갱이 모종의 특수 목적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즉, 지배층이 하늘신 혹은 조상신에게 제사 같은 의례를 행하고 매장한 예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 천도시야비야 제사? 제사라면 바로 동이족의 유별난 풍습이다. 적어도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BC 4500~BC 3000년) 때부터 제정일치 사회를 열었던 발해문명의 창조자들. “동이족(東夷族)은 군자의 나라요, 불사의 나라(후한서 동이열전)”가 아니었던가. 더욱 흥미로운 대목이 있으니 바로 은(상)의 왕족인 기자(箕子)와 고죽국의 왕족인 백이(伯夷)·숙제(叔齊)이다. 이 세 사람은 공자에 버금가는 군자이다. 공자·기자·백이·숙제 모두 군자의 나라, 불사의 나라인 동이의 후예들이라는 게 재미있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孤竹國)의 왕자들이었다. 왕위를 서로 양보한 두 형제는 북해지빈(北海之濱), 즉 지금의 발해연안을 떠돌았다. 그러다 주나라 문왕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주나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문왕은 죽은 뒤였다. 뒤를 이은 무왕은 은(상)의 주왕 정벌에 나설 참이었다. 백이·숙제가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간했다. “아버지 장례도 치르지 않고 전쟁을 일으키니 어찌 효(孝)라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려 하다니 어찌 인(仁)이라 할 수 있습니까.” 백이·숙제는 끝내 수양산(首陽山)에서 고사리를 먹고 살다가 굶어죽었다. 그들이 남긴 채미가(采薇歌)는 지금도 회자된다.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으니(以暴易暴兮), 그 잘못을 모르는 구나(不知其非矣)~.” 사마천은 ‘백이열전’을 쓰면서 백이·숙제의 죽음을 애도하며 울부짖었다. “천도(天道)는 늘 착한 이만 돕는다고 했다. 그런데 도척 (盜蹠·춘추시대 때 횡행한 큰 도적) 같은 자는 천수를 누리고 백이 · 숙제는 굶어 죽었다. 근자에도 나쁜 짓만 하면서도 대를 이어 호의호식하는 이들이 있는데, 과연 천도란 게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天道是耶非耶)?” 이 사마천의 한탄이 200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으니, 기자(記者)도 사마천처럼 감히 외치고 싶다. 과연 “천도시야비야(天道是耶非耶)?” ■ 동이족이 낳은 군자(君子)들 또 한 사람 동이가 낳은 군자가 있었으니 바로 기자(箕子)이다. 공자는 일찍이 “은에는 미자(微子)와 기자, 비간(比干) 등 3인(仁)이 있었다”고 했다. (사기 송미자세가) 3인 모두 은(상) 마지막 왕 주(紂)왕의 친척이다. 기자는 주왕이 상아 젓가락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장탄식 했다. 기자의 한탄. “상아 젓가락을 쓴다면 조금 뒤엔 옥잔을 쓸 거고, 더 조금 뒤엔 수레와 말, 궁실의 사치로움이 도를 넘을 것이다.” 간언이 통하지 않자 기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했다. 그러다 주왕에게 들켜 노예가 되었다. 풀려난 뒤에는 슬픔에 잠겨 거문고를 두드리며 세월을 보냈다. 참담했던 시절 거문고를 타며 시름을 달랬던 것은 훗날 공자도 마찬가지였으니, 역시 동이의 핏줄은 통하는 것일까. 주나라 무왕이 은(상)을 멸한 지 2년 뒤 기자를 찾았다. 망한 은나라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인 기자를 포섭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다. “은나라가 망한 까닭이 무엇입니까.”(무왕) 그러나 기자는 차마 주왕의 죄악을 고하지 못한 채 국가 존망의 도리만을 이야기했다. 머쓱해진 무왕도 화제를 바꾸어 천도(天道)에 대해 물었다. 이 때 기자가 전한 가르침이 그 유명한 ‘홍범구주(洪範九疇·백성을 안정시키는 하늘의 큰 법칙 9가지)’이다. 기자는 “정치란 하늘의 상도(常道)인 오행(五行)·오사(五事)·팔정(八政)·오기(五紀)·황극(皇極)·삼덕(三德)·계의(稽疑)·서징(庶徵)·오복(五福) 등 구주(九疇)에 의해 인식되고 실현된다”(기자·사기 송미자세가 참조)고 설파했다. “국가에 도움 되지 않은 자에게 작록을 하사하면 왕의 행위를 죄악으로 몰고 갑니다. 사적인 것에 치우치지 마세요. 그래야 성왕의 길이 넓어집니다. 간사한 것으로도 기울지 마세요. 그래야 성왕의 길은 정직해집니다.”(홍범구주 가운데 ‘황극’ 부분) 한수 지도 받은 무왕은 기자를 조선(朝鮮)에 봉했다. 그러나 그를 신하의 신분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기록은 2000여 년 뒤인 지금에도 엄청난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대목이다. ■ 비운의 기자(箕子) 우선 “무왕이 기자를 조선 땅에 봉했지만, 그를 신하로 대하지는 않았다(武王乃封箕子於朝鮮, 而不臣也)”는 사기 송미자세가의 내용을 보자. 하지만 ‘而不臣也’라는 대목은 “기자가 조선땅에 봉해졌지만 신하 되기를 거부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전자의 해석이라면 무왕이 기자를 조선땅에 봉했지만, 신하로 여기지 않을 만큼 존경했거나 아니면 조선을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후자의 해석이라면 봉했지만, 기자가 주나라 제후국임을 거부하고, 독립된 나라를 세웠다는 얘기가 된다. 이 문제는 나중에 거론하기로 하자. 여기서는 일단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것, 즉 기자조선의 존재에 대해 풀어보자. 기자는 무왕을 만난 뒤 과연 어디로 갔을까. 중국학계는 기자가 은나라 유민을 이끌고 한반도 대동강 유역에 둥지를 틀었으며, 그것이 바로 기자조선이라 했다. 이것은 중국학계의 흔들림 없는 정설이었다. 우리 학계는 어땠을까. 구당서 동이전 고려(고구려)조는 “음식을 먹을 때~ 기자(箕子)의 유풍이 남아있다. ‘기자신(箕子神)’을 모신다”는 내용이 보인다. “제왕운기는 전기조선-후기조선-위만조선기로 인식했는데, 전기조선의 시작은 단군, 후기조선의 시작은 기자로 보았지요. 단군-기자-위만조선이란 인식체계는 제왕운기에서 비롯됐어요.”(이형구 교수) 소중화(小中華) 의식이 강했던 조선에서는 기자는 고조선의 시조로 추앙되기도 했다. 기자가 정치적인 사대(事大)의 대상으로 이용된 것이다. 하지만 일제 침략기에 들자 양상이 180도 바뀐다. 대대적인 ‘고조선사’ 말살작전에 나선 것이다. 시라도리 구라기치(白鳥庫吉)는 1894년 ‘단군고’를 펴내면서 “단군사적은 불교설화에 근거하여 가공스러운 선담(仙譚)을 만든 것”이라고 포문을 열었다. “그뿐이 아니었지. 시라도리는 1910년 ‘기자는 조선의 시조가 아니다’라는 글에서 기자 기록도 조작됐다고 했어요.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또 어떻고. 1922년 ‘기자조선전설고’에서 ‘조선에 전해지는 기자전설은 연구의 가치가 조금도 없는 전설’이라 주장했고, 29년 발표한 ‘단군고’에서는 ‘중국과 조선민족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목청을 높였지.” 일제는 왜 ‘모화사상(慕華思想) 타파’의 기치를 올려 고조선의 존재를 부인하고, 우리 민족과 기자의 관련성을 극력 부정했을까. 조선의 자주성 회복을 위해서? 천만의 말씀이다. 기자(記者)는 이 대목에서 2003년에 읽었던 책(‘부끄러운 문화답사기’·다큐인포)의 구절이 떠오른다.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독립문의 ‘독립’은 실은 중국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뜻한 것일 뿐이다. 독립협회를 장악했던 이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이완용·윤치호(모두 협회 회장을 역임) 등 친일파가 대부분이었다.” 대륙 침략을 앞둔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 일조동조론(日朝同祖論)을 펴기 위해 조선과 중국을 분리시키기 위해 ‘모화사상 배격’ 운운하며 고조선과 기자를 한꺼번에 뭉갠 것이다. 민족주의 사학은 그 나름대로 민족사의 유구함과 주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독립투쟁의 수단으로 단군을 부각시켰다. “물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삼조선 분립의 시대’(조선상고사)를 기술하면서 삼조선 중 ‘불朝鮮’의 시조를 기자라 했어요. 기자의 동래설(東來說)을 인정한 거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민족주의 학자들은 중국인이라고 생각한 기자의 존재를 부정했어요.” ■ 터부시된 기자·기자조선 해방 후에는 더욱 얽히고 설켰다.
결국 식민사관의 짙은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단군은 신화로 변질되고, 기자는 역시 식민사관과 해방 후 정권 이데올로기 홍보차원에서 강조된 지나친 민족 주체성 때문에 허구의 인물로 치부된 것이다. 물론 은(상)나라를 동이의 문화로 봐야 한다고 일찍이 설파한 정인보·홍이섭 선생 같은 이와, 기자동래설을 인정한 단재 선생 같은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웬만한 내공을 갖추지 않고서는 기자와 기자조선을 운위한다는 자체가 터부시되었다. 기존의 학설을 뒤엎을 만한 학문(자료)과 기개를 갖춘 이가 없었다. 그러던 1979년 이형구 교수의 석사논문이 소개된 것이다. 이 논문이 폭풍을 일으킨 이유는 두가지였다. 발해연안에서 쏟아진 은말 주초 청동기들을 토대로 기자조선의 실체를 논증했다는 점이 하나고, 두번째는 기자조선이 그동안 알려진 대동강이 아니라 발해연안 북쪽에 둥지를 틀었다는 점이었다. <선양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후원 | 대순진리회>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4) 기자, 본향으로 돌아가다 | |||||||||
입력: 2008년 03월 28일 17:27:29 | |||||||||
ㆍ기자조선, 中 제후국 아닌 동이족 독립국 BC 1046년. 주나라 무왕이 은(상)의 주왕(紂王)을 죽이고 은(상)의 554년 역사를 종식시켰다. 이것은 동북아 고대사의 판도를 뒤바꾼 대사건이었다. 한족(漢族)의 하(夏·BC 2070~BC 1600년)를 무찌르고 동아시아의 주인공이 된 동이족의 천하가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한족(하)~동이족(은상)~한족(주)으로….
하지만 전쟁은 너무도 싱겁게 끝난다. 은 주왕의 학정에 몸서리를 친 은나라 군사들이 주 무왕의 군사에게 길을 열어준 것이다. 은나라 군사들은 창을 거꾸로 쥔 채(倒兵·자기 쪽을 향해 공격한다는 의미) 배반한 것이다. 결국 은 주왕은 분신 자살했고, 그의 애첩 달기는 목을 맸다. ‘사기’ 주본기는 “은(상)나라 사람들이 모두 교외에서 무왕을 기다렸고, 두 번 절을 하며 머리를 땅에 조아렸다”고 썼다. ‘사기’는 은 주왕의 폭정에 시달린 은나라 사람들이 주 무왕의 정벌을 반겼다는 투로 썼다. ■ 굴복하지 않은 기자(箕子) 과연 그랬을까. ‘사기’를 꼼꼼히 살펴보면 은 백성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주 무왕은 은나라 사람들을 달래려 몇가지 위무 정책을 단행한다. 은(상)의 3인(仁) 중 한 사람인 기자(箕子)를 석방시키고, 은 주왕의 아들인 무경(武庚)을 제후(諸侯)로 봉하면서 은나라 유민(은유·殷遺)들을 다스리라고 명했다. 은나라 역법(曆法)까지 그대로 사용해도 좋다는 특전까지 베푼다. 역법은 정권의 상징. 그런데 은의 역법까지 쓰라고 했으니 얼마나 은나라 백성들의 눈치를 본 것인가. 그러면서도 2중의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왕의 친동생들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무경의 사부로 임명, 감시토록 한 것이다.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했는데도) 무경이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음험한 마음을 품을까 무왕의 동생들인 관숙과 채숙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케 하였다.”(사기 위강숙세가)
우선 기자를 조선에 봉했지만(武王乃封箕子於朝鮮), 그를 신하로 여기지 않았을 만큼(而不臣也) 경외했다. 이것은 해석에 따라 기자가 무왕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했다(不臣)는 뜻으로도 된다. 여하간에 기자를 완전히 복종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다. 기자가 폐허로 변해버린 인쉬(은허·殷墟)를 지나다가 맥수지가(麥秀之歌)를 짓자, 그 노래를 들은 은나라 유민들이 구슬피 울었다는 대목(사기 송미자세가)이 있다. 은나라 백성들의 민심이 어땠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지 않는가.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다(以暴易暴兮)”는 백이·숙제의 비난이 당대 여론의 주류였을 것이다.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한 스트레스가 컸을까. 무왕은 은나라를 멸한 지 3년 만인 BC 1043년 병으로 죽고 만다. 나이 어린 왕(성왕·成王)이 등극하자 무왕의 동생(성왕의 삼촌)인 주공(周公) 단(旦)이 섭정에 들어간다. ■ 끝까지 저항한 망국의 은(상) 백성 이때 문제가 생긴다. 은나라 제사를 이은 무경(은 주왕의 아들)과, 무경의 감시자였던 관숙과 채숙(둘 다 역시 무왕의 동생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성왕을 대신해 섭정에 나선 주공이 권력을 찬탈할까 의심했던 것이다. 셋은 의기투합했고, 망국의 한을 품은 은나라 사람들이 반란군 세력으로 나섰다. 동이족 계열인 회이(淮夷·산둥 남부 지역의 동이족) 사람들이었다.
“은나라의 저항이 끈질겼어요. 성왕 때까지도 왕이 과거 은나라의 세력과 영역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곳곳에서 보입니다. 은을 멸한 지 10년이 훨씬 지났는데도….”(이형구 선문대 교수) 사기 주본기에 “성왕이 은의 잔여 세력을 소멸시킨 뒤에야 비로소 예의와 음악이 바로 잡히고 흥성해졌다”고 했으며, 그 뒤에도 “동이를 정벌하고…”하는 대목이 이어지는 걸 보면 은과 동이의 저항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 기자조선은 중국의 역사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왕에게 ‘홍범구주’의 가르침을 준 기자는 어디로 떠났을까. 사기는 분명히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썼다. 그러면서 무왕이 기자를 (존경한 나머지) 신하로 부르지 않았든지, 아니면 신하이기를 거부했든지 어쨌거나 기자는 무왕의 품을 떠났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자. 기자는 과연 주나라의 제후국이었을까. 이형구 교수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한다. “주나라의 제후국 이름을 보면 한결같이 진·한·위·노·제·송·채 같은 단명(單名)이잖아요. 그런데 조선(朝鮮)은 복명입니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는 자기 영역 밖의 종족이나 나라에 대해서는 복명을 썼거든. 조선, 선우, 중산, 흉노, 선비, 오환처럼…. 그러니까 주나라는 기자와 기자조선을 외국으로 친 겁니다.” 그러고보니 사마천의 ‘사기’는 기자와 관련된 기록을 ‘기자세가’가 아니라 ‘송미자세가’에 아주 자세하게 담았다. 만약 기자조선을 중국의 역사로 쳤다면 ‘기자세가(箕子世家)’라 해서 별도의 꼭지로 처리했을 것이다. 공자는 그렇다치고, 실패한 반란의 주인공인 진섭(陳涉·반란을 일으켜 秦나라를 무너뜨린 인물)마저 세가(제후국의 흥망성쇠를 담은 것)에 담은 사마천이지 않는가.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무장한 사마천이라면 홍범구주로 무왕을 가르쳐 결과적으로 주나라 건국정신의 토대를 쌓은 기자와 기자조선의 역사를 당연히 세가에 담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중국이 아니기에 차마 세가에 처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요즘 중국의 동북공정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도 기자가 가공 인물이며, 따라서 사마천의 ‘사기’가 거짓이라는 해석이 팽배한데요. 기자가 대동강 유역까지 진출해서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것에 거부감이 들어 그런 측면도 있고, ‘기자조선 인정 = 소중화 = 사대주의’라는 조선시대 이래의 역사 인식에 대한 거부감도 있고…. 또한 중국과 우리의 역사를 떼어놓으려는 일제 관학자들의 그림자도 아직 남아 있고….” 그런데 민족주의적 측면에서 기자를 거부하려는 시각이 있다면, 기자의 신분이 종족적으로 ‘한족’이 아니라 ‘동이족’이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또 기자에 대한 ‘사기’의 기록은 과연 거짓인가. “이미 기자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노나라 태사 좌구명이 쓴 역사책) 희공 15년조(645년)에 출현합니다. 또하나 사기의 정확성은 정평이 나있잖아요.” ‘있는 역사’를 왜곡하는 경우는 많지만, ‘없는 역사’를 있다고 하는 법은 드물다. 더욱이 1899년부터 확인된 은(상)시대의 갑골문을 해독한 결과 사기 은본기에 나온 은(상)나라 왕의 이름들과 거의 일치한다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BC 90년 무렵 완성된 사기가 진짜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사기’ 주본기, 송미자 세가와 노주공세가, 위강숙세가 등에 나타난 기자의 기록은 사실로 봐야 할 것 같다. ■ 가자! 본향으로 자, 이젠 기자의 행방을 쫓아가자. ‘기자조선의 존재’를 논증한 이형구 교수가 주목한 곳이 바로 카줘셴(喀左縣) 베이둥(北洞) 유적이었다. “기후(箕侯)와 고죽(孤竹)명 청동기가 나온 두 곳의 유적 거리가 불과 3.5라는 점이 눈에 띄었어요. 기자조선의 대동강 유역설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중국학계는 ‘기후’명을 기자로 해석하지 않았거든. 나는 거의 붙어있는 두 유적의 관계를 흥미롭게 여겼는데, 바로 두 제후국이 시간 차를 두고 계승한 것으로 보았어요.” 은말주초(殷末周初)의 명문 청동기는 비단 베이둥에서만 발견된 게 아니다. 카줘셴 산완쯔(山灣子)·샤오�쯔(小轉子)·샤오보타이거우(小波汰溝)와 이셴(義縣) 사오후잉쯔(稍戶營子) 교장갱 등에서도 나왔다. 그런데 베이둥에서 나온 청동기의 ‘기후’와 ‘고죽’ 명문 외에도 산완쯔·샤오�쯔·샤오보타이거우 등에서는 숙윤(叔尹), 술(戌), 백구(伯矩), 어(魚), 주(舟), 차(車), 사(史), 아(亞), 윤(尹), 채(蔡), 사벌(史伐), 과(戈) 등 여러 씨족들의 징표가 보인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은(상)이 망한 뒤 기자가 주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거부하고 여러 씨족들을 이끌고 동북으로, 동북으로 향했다고 보면…. 그리고 머나먼 조상 때부터(훙산문화 시절부터) 하늘신과 조상신 제사를 끔찍이도 모셨던 그들은 신주 모시듯 했던 청동예기(방정·뢰 등)들을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옛 고향으로 떠났다고….”(이형구 교수) 이와 관련, 1930년대 인쉬 발굴을 총지휘한 푸쓰녠(부사년·傅斯年)의 표현은 의미심장하다. “은상의 선조가 동북에서 황허 하류로 와서 나라를 건국하고, 은이 망하자 기자(箕子)가 동북(고향)으로 돌아갔다.”(동북사강·東北史綱) 중국의 유명한 역사학자인 왕궈웨이(王國維)도 “은이 망한 뒤 기자는 선조의 땅으로 돌아갔다(從先王居)”고 했다. 명나라 사람인 함허자(涵虛子)는 ‘주사(周史)’를 인용하면서 “기자는 중국인(즉 은나라 유민) 5000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또 하나 ‘수서(隋書)’ 배구전(裵矩傳)을 보면 “고려(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이었다. 주나라가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기자가 망국의 눈물을 흩뿌리며 은(상)의 백성들과 함께 험난한 옌산(燕山)을 넘어 도착한 곳이 그들의 본향인 고죽국, 바로 조선 땅이란다. <선양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후원 | 대순진리회>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5) 기자의 본향 ‘고죽국’ | |||||||||||
입력: 2008년 04월 04일 17:10:51 | |||||||||||
ㆍ‘천하통일 상징’ 청동솥은 신앙의 대상 그렇다면 기자(箕子)가 은 유민(遺民)들을 이끌고 찾아간 본향, 즉 고죽국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일까. 고고학 자료와 문헌을 잘 따져보자.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기자가 돌아간 옛 조상의 땅으로 대략 4곳을 꼽는다.
두번째는 산하이관(山海關)설. ‘요동지(遼東志)’ 지리지는 “순임금~하나라 땐 북기(北冀)의 동북을 분할하여 유주(幽州)라 했고, 상(商)나라 때는 고죽국이라 했다”면서 “위치는 산해관(山海關) 동쪽 90리, 발해 연안에서 20리 떨어진 곳”이라 했다. 이에 따르면 지금의 진시셴(금서현·錦西縣) 첸웨이(前衛) 일대이다. 세번째는 카줘(喀左) 일대설. ‘한서’ 지리지를 보면 “요서 영지현에 고죽성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청나라 시대 여조양(呂朝陽)은 “영지현은 바로 객자심좌익(喀刺沁左翼·지금의 카줘셴)”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차오양(朝陽) 일대설. ‘흠정성경통지(欽定盛京通志)’는 “유성현(柳城縣)은 원래 상나라 고죽국(本商孤竹國也)”이라 했다. 그런데 유성현은 고죽영자(孤竹營子)라는 지명이 보이는 차오양 서남이다. 카줘셴·젠창셴(建昌縣)·진시셴(錦西縣) 등 3개현의 경계 지점이다. 카줘 베이둥에서 ‘고죽’명 청동기가 발견된 곳을 현지 사람들은 구산(고산·孤山)이라 한다. 고죽국 명칭과 관련시켜보면 수상한 대목이다. 물론 위에서 거론한 4곳은 한결같이 은말 주초의 청동기가 발견되고 있는 지점과 일치한다. 기자(記者)는 이쯤해서 몇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왜 은 유민들은 그 무거운 청동기들을 짊어지고 험난한 옌산을 넘었을까. ■ 청동솥(정)의 비밀 “다링허 유역 교장갱 청동기를 봅시다. 모두 세발 혹은 네발 달린 청동솥(정·鼎)을 중심으로 술그릇, 술잔, 물그릇 등 주로 제사 지낼 때 쓰던 예기(禮器)라는 게 특징입니다. ‘기후’명이 새겨진 사각형 모양의 청동솥(방정·方鼎)은 31㎏이나 나가는데….”(이형구 선문대 교수) 여기서는 우선 청동솥을 주목하고자 한다. 주나라가 은을 멸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구정(九鼎·천자가 도읍에 모신 아홉개의 정)을 주나라 도읍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예전에 복희는 신정(神鼎) 하나를 만들었는데, 통일과 천지만물의 귀결을 뜻했습니다. 또한 황제(黃帝)는 보정 세 개를 만들어 천·지·인을 각각 상징하셨습니다. 하우(夏禹)는 구주(九州·9부족)의 금속을 모아 아홉개의 정을 만드셨습니다(九鼎). 어진 군주가 나타나면 정이 출현하고, 사직이 황폐해지면 정은 땅 속에 묻힙니다.”(사기 효무본기) 그래서 구정은 국가를 상징하기도 했다.
여기서 기자(記者)가 주목하는 대목은 예로부터 동방의 신으로 일컬어진 복희가 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최근 중국인들은 황제 또한 발해문명의 창시자이며, 동이계열이라고 하지 않는가. 황제가 천·지·인을 상징하는 정을 만들었다는 대목에서 훙산문화(BC4500~BC 3000년)가 연상되지 않는가.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을 연결하는 제정일치 시대가 개막된 바로 그 훙산문화. 게다가 BC 3500년 전 유적인 뉴허량(우하량·牛河梁) �산쯔(轉山子)의 청동 찌꺼기(동사·銅渣)와, 탕산(唐山) 다청산(大城山)에서 확인된 BC 2000년 전의 순동(純銅)장식 2점 등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바로 발해문명의 창조자들이 동아시아 청동기 제작의 원조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구정의 경중을 묻다
또 춘추시대 초(楚)나라 장왕(莊王)은 융족을 멸한 뒤 한껏 기세를 올리면서 주나라 도성 교외에서 열병식을 열었다. 때는 바야흐로 천자국인 주나라가 쇠퇴했던 시기. 주 정왕(BC 607~BC 586년)은 신하 왕손만(王孫滿)을 보내 장왕(莊王)을 위로했다. 천자이지만 제후인 장왕의 기세에 눌린 것이다. 초 장왕은 한껏 거들먹거리면서 ‘구정(九鼎)의 경중(輕重)’을 묻는다. 이것은 “내가(초 장왕) 구정을 들고 갈 수도 있다”, 즉 “천하가 이제는 나의 것이 아니냐”며 은근히 주나라를 협박한 것이다. 하지만 왕손만은 “(천하를 손아귀에 쥐는 것은) 덕행에 있지, 구정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일축해 버린다. 주 천자만이 ‘왕(王)’을 칭하였는데 초나라가 무왕(BC 740) 이래 왕을 잠칭(潛稱) 함을 빗댄 말이다. “덕행을 행하면 구정이 무거워져 들 수 없고, 세상이 혼란하면 구정이 가벼워집니다. 주왕실의 덕정이 비록 미약해졌다지만 하늘의 뜻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주 천자의 권위가 살아 있음을 역설한 것이다. 후대 한나라 신하들도 무제에게 “보정만은 반드시 조상의 묘당에 모셔야 한다”고 주청을 올렸을 만큼 정(청동솥)은 신앙의 대상이기도 했다. 특히 더욱이 조상신, 하늘신에 대한 제사를 끔찍하게 여겼던 은(상) 사람들에게는….
■ 기자조선은 랴오허를 건너지 않았다 그렇기에 기자가 이끈 은(상) 사람들은 나라가 망해 본향으로 도망갔을 때 기자족의 정을 비롯, 예기를 남부여대(男負女戴)하며 가지고 갔을 것이다. 그런데 은말 주초의 청동기, 즉 기자 일행이 묻은 청동기는 왜 그렇게 정연한 모습으로 발견됐을까. 아마도 천신만고 끝에 청동예기들을 들고와 제사를 지내던 은(상)의 유민들은 모종(周족의 침입 등)의 갑작스러운 변고를 겪었을 것이다. 너무도 급한 나머지 무거운 예기들을 들고 갈 수 없었기에 이것들을 땅 속에 정성껏 묻어두고 이곳을 떠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자 일행은 다시 동으로 동으로 향해, 중국학계가 정설로 여기는 대동강 유역에서 기자조선을 창업했을까. “아니지. 은(상)의 청동기는 랴오허(요하) 이동(以東)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아요. 랴오허를 건너지 않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기자조선의 영역은 랴오둥 이서(以西) 지역이었다는 뜻이에요.”(이형구 교수) 여기서 한 가지 착안해야 할 대목은 베이둥이나, 산�쯔, 샤오�쯔 등에서 출토된 은말 주초의 청동기 가운데는 은 유민들이 남부여대하며 가져온 제기와 함께 현지, 즉 다링허 연안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들이 일부 보인다는 점이다. 베이둥의 대취발형기(帶嘴鉢形器·주둥이 달린 그릇)와 산�쯔의 일부 청동기가 그렇고, 샤오�쯔의 반형정(盤形鼎·쟁반 형태의 솥), 관이호(貫耳壺·귀달린 항아리), 압형기(鴨形器·오리 형태의 그릇) 등이 그렇다. 즉, 신주모시듯 제사용 청동예기를 가져온 은 유민들이 현지 토착문화의 형태로 청동기를 제작, 고향 사람들과 ‘알콩달콩’ 살았다는 뜻이다. 또 하나 궁금한 것은 고죽국과 고조선의 관계이다. ‘사기’ 백이열전은 고죽국이 하나라를 멸하고 상나라를 세운 성탕 때 상의 제후국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이상한 대목이 있다. “주나라 무왕이 은(상)을 멸한 뒤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武王及封箕子於朝鮮)”는 ‘사기’ 송미자세가의 기사이다. 이는 “무왕이 (이미 존재했던) 조선이라는 나라에 기자를 봉했다”고 해석하는 게 일반적이다. 또 명나라 사람 함허자(涵虛子)가 주사(周史·주나라 역사)를 인용한 “기자가 중국인 5000명을 이끌고 조선 땅에 들어갔다(入朝鮮)”는 기사도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주나라 무왕 때, 즉 BC 1046년 이전부터 이미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 고죽국은 (고)조선의 영역 우리는 이미 BC 6000년부터(차하이·싱룽와 문화) 발해 연안 북부, 즉 다링허 유역에서 빗살무늬 토기를 중심으로 한 발해문명의 맹아가 싹텄음을 보았다. 그 문화는 단·묘·총으로 대표되는 제정일치 시대를 개막한 훙산문화(BC 4500~BC 3000년), 그리고 대규모 석성과 적석총을 특징으로 한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로 이어졌음을 논증해왔다. 이것은 전형적인 동이의 문명이다. 그리고 그 발해문명의 창조자 가운데 일파가 중원으로 내려와 한족인 하나라를 꺾고 은(상)나라를 세웠다.(BC 1600년) 그런 뒤 다시 한족의 주나라에 나라를 잃은 기자가 조상 땅인 발해 연안으로 돌아간 것이다.(BC 1046년) 그렇다면 조선과 고죽국은? 기자(記者)는 일단 (고)조선과 은(상), 고죽국이 모두 동이족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싶다. 이형구 교수는 ‘고죽국은 물론 (고)조선의 영역이었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추정한다. “고죽국은 시대를 달리하면서 옮겨간 것이 아닐까. 원래는 옌산산맥 남록, 즉 만리장성 밑(롼허 하류 누룽셴·盧龍懸)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아마도 백이·숙제가 굶어죽었다는 수양산도 옌산의 일부였을 것이고….” 이 고죽국이 BC 1600년 무렵 중원에서 은(상)을 건국한 성탕이 제후국으로 삼았다는 바로 그 고죽국이 아니었을까. 그러다 무슨 변고가 생겨 옌산을 넘어 카줘 일대로 둥지를 옮긴 것이 아닐까. 같은 동이족의 나라인 (고)조선의 영역으로…. 물론 (고)조선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고죽국이 카줘 일대로 옮겨간 것일 수도 있다. 고조선 문화인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BC 2000년부터 시작. 하한은 늦게 잡으면 BC 1300년 무렵)와 기자족의 이동에 따라 은말 주초의 청동기가 성행하는 BC 11세기와는 약 100~200년의 공백기가 있다. 이 때가 바로 고조선의 세력이 약화된 시기가 아닐까. <선양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후원 | 대순진리회>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6) 난산건의 비밀 | |||||||||
입력: 2008년 04월 11일 18:10:02 | |||||||||
ㆍ고조선문화 토대로 창조 독특한 발해연안 청동검 이쯤해서 ‘삼국유사’(제1권 고조선 왕검조선조)를 인용해보고자 한다. “(단군 왕검은) 150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호왕(무왕을 뜻함)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다. 이에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갔다가 뒤에 돌아와서 아사달(阿斯達)에 숨어 산신이 되니 나이는 1908세였다고 한다.” ■단군신화는 ‘신화’가 아니다 자, 이제 우리가 지금까지 검토해왔던 각종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복원한다면 아주 흥미로운 시사점을 끌어낼 수 있다. 즉 주나라 무왕이 은(상)을 멸한 시기는 BC 1046년쯤이다. 물론 이 연대는 최근 중국 측의 하·상·주 단대공정으로 결정된 것으로 100% 확신할 수 없다. 어쨌든 그쯤(BC 1046년)을 기준으로 단군왕검이 나라를 다스렸다는 1500년을 더한다면 BC 2600년쯤이 된다. 이게 다가 아니다. 단군 이전, 즉 환인과 그 아들 환웅, 그리고 곰이 변해 사람이 된 웅녀(熊女)의 시대를 감안해보자. 즉 곰신앙이 움텄고, 천·지·인을 소통시키는 무인(巫人)이 지배하는 제정일치 사회가 개막하기 시작한 훙산문화(紅山文化·BC 4500~BC 3000년)시대를 연상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환인→환웅↔웅녀→단군 시대, 즉 훙산문화를 모태로 단군조선, 즉 고조선이 성장했다. 여기서 단군은 물론 지도자, 즉 제정일치 사회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며, 이 ‘단군’ 가운데 ‘왕검’이라는 분이 단군조선의 시조라는 뜻일 게다. 그런데 BC 1600년쯤 단군조선 영역에서 출발한 동이족의 일파(성탕·成湯)가 중원의 하나라를 멸하고 은(상)을 세웠다. 그러니까 동이족이 험준한 옌산(연산·燕山)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천하를 양분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다 중원의 동이족 나라인 은(상)이 주(周)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자 은(상)의 왕족인 기자(箕子)가 이른바 종선왕거(從先王居), 즉 선조의 본향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다.
이것은 “중원 하나라(BC 2070~BC 1600년) 시절 발해연안에 하나라의 규모와 맞먹는 거대한 나라가 존재했다”고 인정한 쑤빙치(소병기·蘇秉琦) 등 중국학계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식민사관에 따라 단군신화를 신화로만 보았던 것이 잘못이지. 단군신화를 역사로 보고 연구해야 했는데 그게 안됐어요.”(이형구 교수) 그렇다면 기자(箕子)가 종선왕거, 즉 선조의 본향으로 돌아왔을 때 단군조선과는 어떤 방식으로 조화를 이뤘을까. 다시 ‘삼국유사’로 돌아가면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단군은 장단경으로 옮겨가~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됐다”는 내용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고도로 발전한 은(상)의 문화로 무장한 기자족은 지금으로 치면 엘리트 계층이었겠지. 갈등이 왜 없었겠습니까. 기자가 오자 단군이 장단경으로 옮겨가 결국 산신이 되었다는 것은 정권이 기자에게 돌아갔다는 뜻이 아닌가. 이때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이 교체되는데 우리는 기자가 단군과 같은 동이족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이형구 교수) 물론 갈등도 있었겠지만 같은 핏줄인 토착세력(고조선)과 은(상)의 유민(遺民)들이 곧 조화를 이루며 살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 답을 우리는 고고학 발굴성과로 풀어야 한다. ■난산건에서 쏟아진 청동무기들 1958년, 랴오닝성 닝청셴(寧城縣·지금은 네이멍구 자치구) 쿤두허(坤都河) 상류에 있는 난산건(남산근·南山根)에서 한 기의 무덤이 확인된다. 석곽이 있고 그 안에 목관의 흔적이 남아있는 무덤에서는 모두 71점의 청동기가 확인됐다. 5년 뒤인 63년 6월, 한 농부가 그 무덤에서 서쪽으로 120m 떨어진 곳에서 2기의 무덤을 더 발견한다. 그로부터 다시 3개월 뒤인 9월14일. 조·중 합동 고고학 발굴대가 이곳을 찾는다. 북한과 중국의 합동발굴이었다.(경향신문 2007년 12월8일자 ‘코리안루트를 찾아서-랴오허 동서쪽의 적석총들’ 참조) 조사결과는 무척 흥미로웠다. “전형적인 은말주초의 청동예기는 물론 토착(고조선)세력, 그리고 중국 북방의 영향을 받아 만든 청동기들이 쏟아진 겁니다. 청동솥의 다리가 날씬해지고 길어졌다든지, 은말주초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다른 항아리(雙聯罐·작은 단지를 이은 항아리), 뼈로 만든 구슬(骨珠), 금으로 만든 고리(金環) 등이 나왔다든지….”(이형구 교수) 두번째 중요한 변화는 무기의 다량 출토이다. 청동투구와 청동꺾창, 청동화살촉, 청동검, 청동도끼 등이 쏟아진 것이다. 은말주초의 청동기가 조상신, 하늘신에 대한 제사 위주의 예기였다면 난산건 유물은 다양한 지역 문화가 융합된 예기와, 전쟁에 쓰인 무기가 공반된 것이 특징이다.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난산건 문화(샤자뎬상층문화에 해당)는 BC 9~BC 7세기 사이에 유행한 문화예요. 그런데 잘 살펴봅시다. 춘추전국 시대의 도래를 검토해야죠.”(이형구 교수) 춘추전국시대라. 다시 문헌을 검토해보자. 무왕의 건국(BC 1046년) 이후 170년 가까이 이어지던 서주는 10대 여왕(려王·재위 BC 877~BC 841년)에 이르러 중대한 고비를 맞는다. 여왕이 부정부패의 화신으로 정권을 농단한 영이공(榮夷公)이라는 인물을 기용한 게 화근이었다. 여왕은 듣기 싫은 직언을 금하고 비방하는 자를 죽이자 백성들은 길에서 만나면 눈짓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충신 소공(召公)이 간했다.
“백성의 입을 막는 건 물을 막는 것보다 나쁩니다. 물이 막혔다 터지면 피해가 더 많지 않습니까. 치수하는 자는 수로를 열어 물을 흐르게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백성들을 이끌어 말을 하게 합니다. 백성이 말하는 것은 속으로 많이 생각한 후에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왕은 듣지 않았다. 3년 뒤 마침내 백성들이 난을 일으켜 여왕을 습격했다. 여왕은 체(체·산시성 훠셴:縣)로 달아났다. 이때부터 소공과 주공(周公·무왕때 주공의 둘째아들 후손) 등 두 재상이 나라를 14년간 다스리니 그 시대를 공화(共和)라 한다. ‘공화정’의 시효라 할 수 있다. 두 재상은 14년 뒤 성장한 여왕의 아들 선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39년 뒤 다시 강족(姜族)의 침략을 받고 대패한다. 이 때부터 천하에 혼란의 조짐이 보인 것이다. 그러다 선왕의 뒤를 이은 유왕(幽王·재위 BC 782~BC 771년)에 이르러 파국을 맞는다. 엄연히 정처(왕후·申侯의 딸)와, 그 사이에 낳은 태자(의구·宜臼)가 시퍼렇게 살아 있었는데, 그만 애첩 포사(褒사)를 너무도 사랑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포사를 정처로, 그가 낳은 아들 백복(伯服)을 태자로 삼으려 획책한다. 그런데 포사라는 여인은 용(龍)의 타액이 주나라 후궁의 몸에 들어가서 태어난 인물. 용의 타액은 주나라의 손에 망한 포나라 선왕(先王)의 변신물이라 하는데, 일설에는 망한 포나라의 복수를 위해 일부러 주 유왕의 품에 들어갔다고 한다. 어쨌든 유왕은 좀체 웃지 않는 포사의 환심을 사려 무진 애를 썼다. 그러다가 한가지 묘수를 알아냈으니 바로 봉화를 올리는 것이었다. 봉화를 피우자 제후들이 난리가 난 줄 알고 뛰어왔다가 거짓인 줄 알고 투덜댔다. 그런 제후들의 모습에 포사가 깔깔거리며 웃지 않는가. 유왕은 “옳다구나, 이거다” 싶어 계속 봉화를 피웠다. 마침내 제후들은 짜증을 내며 봉화를 올려도 달려오지 않았다. 비극의 서막이었다. 유왕이 포사와 백복을 왕후와 태자로 삼으려 하자 정처인 신후는 증(繒)나라와 견융(犬戎)과 연합하여 유왕을 공격했다. 유왕이 봉화를 올렸으나 제후들은 ‘양치기 소년’을 믿지 않았다. 유왕은 결국 죽었고, 제후들은 원래 태자인 의구를 왕위에 세웠으니 그가 바로 평왕(平王·재위 BC 771~BC 720년)이다. 평왕은 BC 770년 오랑캐의 침략을 피해 낙읍(洛邑·뤄양 洛陽)으로 동천했다. 바야흐로 동주(東周)시대의 개막이다. ■청동단검의 전통 하지만 천자의 권위는 회복 불능 상태로 빠졌고, 천하는 제후들간 약육강식의 시대로 접어든다. 제(齊), 초(楚), 진(晋), 진(秦)이 강대해졌고, 정권은 방백(方伯·제후들의 우두머리)에 의해 좌우된다.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한 것이다.(사기 주본기)
이 교수가 예로 든 것이 바로 서주말 동주초의 유적인 뤄양(洛陽) 중저우루(中州路)의 시궁돤(西工段) 주나라 무덤이다. “260기의 무덤 가운데 청동예기를 부장한 무덤이 9기인데, 청동병기를 수장한 예는 19기가 됩니다. 이것은 청동예기 시대에서 병기시대로 옮겨졌음을 알려주는 단적인 예가 됩니다.” 바로 여왕~평왕 사이, 즉 BC 9~BC 8세기 무렵에 대혼란의 시기, 즉 전쟁의 시기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문헌과, 중원(뤄양)은 물론 발해연안(난산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고고학 자료가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발해연안 난산건에서 확인된 병기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유물은 바로 ‘발해연안식 청동단검’(이른바 비파형 청동단검)이다. “발해연안식 청동검이야말로 고조선 청동기문화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유물이지. 이런 형태의 청동단검은 난산건을 필두로 랴오닝(遼寧)성 차오양(朝陽)·젠핑(建平)·진시(錦西)·푸순(撫順)·칭위안(淸原) ·뤼다(旅大) 등에서 쏟아집니다. 한반도에서는 평양시 서포동을 비롯해 황해북도 연안군 부흥리 금곡동과 충남 부여군 송국리, 전남 여천시 적량동 등에서도 보입니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청동단검이 석관묘와 석곽묘, 그리고 적석총 등 모두 우리의 전통 묘제에서 확인된다는 점이다. 또한 난산건에서 확인된 유물 가운데는 역시 동이의 전통문화의 하나인 복골(卜骨)이 있다는 것이다. BC 9세기부터 시작된 이 청동단검의 전통은 한반도로 이어져 급기야 ‘한국식 세형동검’이라는 독특한 청동기 문화를 낳는다.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대표격인 이 세형동검이 출현한 시기는 BC 4세기 무렵이다. 결국 발해연안식 청동단검과 세형동검은 샤자뎬 하층문화~은말주초의 청동기 문화, 즉 고조선이라 토대에서 창조된 독특한 문화인 것이다. <선양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후원 | 대순진리회>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7)수수께끼의 나라 선우·중산 | |||||||||
입력: 2008년 04월 18일 17:41:03 | |||||||||
ㆍ‘전국7웅’은 왜 작은나라 ‘중산’을 왕따시켰나 1974년 11월, 허베이성(河北省) 핑산(平山) 싼지셴(三汲縣). 수리공사가 한창이던 이곳에서 놀라운 발굴이 이뤄진다. 춘추전국시대 신비의 나라였던 중산국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중산왕인 착(錯·조 라고도 읽음)의 왕릉을 비롯, 3기의 왕릉이 확인되었고, 왕릉에서 출토된 정(鼎) 등 각종 예기에서 전국시대 역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어요.” 이제 일찍이 ‘전국시대의 중산국사략(대만대 학술지 ‘사원(史原)’ 11호, 1981)을 집필한 바 있는 이형구 교수(선문대)와 더불어 그 수수께끼를 풀어보자. 춘추전국시대, 그 약육강식의 혼란기에서 이리 차이고 저리 차였던 소국, 그러나 비록 작지만 강했던 나라, 바로 ’선우(鮮虞) 중산(中山)국‘의 신비를 풀어보자는 이야기였다. 왜 하필 이 조그만 나라를 주목하느냐. 바로 이 나라가 바로 동이의 나라요, 기자(箕子)의 후예가 세운 나라였기 때문이다. 주변 강대국에 끊임없이 시달리면서도 불꽃처럼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다 사라진…. ■ 전국시대의 개막 이제부터 그 ‘선우중산국을 만나기 위해’ 춘추전국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보자. BC 1046년 무렵. 동이의 나라 은(상)을 멸하고 나서 들어선 한족의 (서)주는 BC 770년 오랑캐의 침입을 피해 낙읍(洛邑·지금의 뤄양)으로 도읍을 옮긴다. 이른바 (동)주시대의 개막이다.(자세한 내막은 4월12일자 경향신문 23면 참조) 천자의 추상 같은 권위가 무뎌지고 170여개국의 나라가 난무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춘추시대에는 그래도 이 모든 나라들이 제후국이라는 이름으로 주나라를 천자로 인정했다. 다만 제후국 가운데 특히 강한 나라의 제후(覇)가 천하를 쥐락펴락했으니 그것이 바로 ‘춘추5패’이다. 춘추시대라는 말은 (동)주 시대의 전반부 즉 BC 770~BC 475년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공자가 쓴 춘추(春秋)는 엄밀하게 말해 노(魯)나라 은공(BC 722년)~애공(BC 481년)의 242년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그 뒤를 이은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일반적으로 주나라 위열왕 23년(BC 403년)부터 진(秦)시황의 천하통일(BC 221년)까지를 일컫는다. 사연을 들춰보면 이렇다. 춘추시대 가운데 중국 중원에서 강대국을 형성했던 제후국인 진(晉)나라가 있었다. 그런데 이 강대국의 권력이 차츰 왕(제후)이 아니라 6경(卿·대부)으로 넘어간다. 지(知)·한(韓)·위(魏)·조(趙)·범(范)·중항(中行)씨였다. 6대부는 치열한 정권다툼을 벌인다. 마침내 한·위·조씨가 연합, 범·중항씨에 이어 지씨마저 몰락시켰다.(BC 453년) 그러자 명목상의 천자에 불과했던 주 위열왕은 한·위·조씨를 제후로 봉한다.(BC 403년) 역사는 이를 두고 삼가분진(三家分晉), 즉 세 집안이 진나라를 분할했다고 기록한다. 이때부터 원래의 진(晉)나라는 물론 천자국 주나라의 권위까지 완전히 상실됐고, 둘 다 한낱 소국으로 전락한다. 천하는 본격적으로 서로 못잡아 먹어서 안달인 미증유의 전쟁시대, 즉 전국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그런데 춘추시대부터 살아남은 4국, 즉 진(秦)·초(楚)·연(燕)·제(齊·제나라는 姜씨에서 田씨로 왕통이 바뀌었다)와 진(晉)나라에서 분열된 신흥강국 한·위·조 등 3국을 합해 바로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한다. 이 전국시대는 약육강식 시대의 절정, 그 자체였다. 역시 예약이 무너지고 전쟁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춘추시대엔 그나마 천자인 주나라의 눈치를 보는 측면이 강했다. 누구도 감히 천자를 칭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어느 누구도 단 하루라도 발 뻗고 잠을 잘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 “중산국을 왕따 시켜라!” 자 이제, 이런 배경을 알고 선우·중산국 이야기를 풀자. 먼저 전국책(서한시대 유향이 전국시대 유세객들의 책략을 모은 책)을 보자.
이는 BC 323년 다섯나라, 즉 제·위·조·연과 함께 중산국이 왕을 칭한 것을 지적한 것이다. 동방의 강대국인 제나라로서는 소국인 중산국과 어찌 같이 놀 수 있느냐는 뜻이었다. 참고로 당시엔 황제(皇帝)의 개념은 없었다. 천자를 뜻하는 황제라는 말은 훗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따서 황제(皇帝)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 진시황 이전에는 왕(王)은 곧 천자를 뜻했다. 천하가 혼란스러워진 전국시대엔 저마다 천자를 칭한 것이다. 또 하나 만승이니 천승이니 개념에 대해 보자면, 만승지국은 전쟁이 났을 때 전차 1만승을 동원할 수 있는 나라, 즉 천자국을, 천승지국은 제후국을 뜻하는 말이다. 제나라 왕은 ‘천승의 나라’에 불과한 중산국이 왕을 칭한 것이 못견디도록 아니꼬웠나보다. 조·위나라는 물론 연나라에 뇌물까지 주어 “(주제 넘게 왕을 칭한) 중산국을 함께 치자”고 했으니 말이다. ‘왕따’의 전형이다. 당시 중산국왕이 유세가 장등(張登)을 불러 했다는 얘기가 가슴에 와 닿는다. “이러다가 나라가 망할까 두렵소이다. 왕호 따위는 필요 없으니 그대가 아니면 구해줄 자가 없소이다.”(전국책 ‘중산책’) 그러나 다행히 장등이 나서 세치 혀로 외교전을 펼쳐 당사국들을 설득시키면서 왕의 칭호를 보전할 수 있었다. 당대 중산국이 전국 7웅 가운데, 제·위·조·연이라는 4대 강국의 틈바구니에서 전전반측(輾轉反側)하며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슬픈 이야기이다. 그러나 거꾸로 보면 그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전국 12웅(전국 7웅+宋·魯·衛·越·中山)의 하나로 꼽혔으며, 급기야 다른 강대국과 함께 왕호를 칭할 수 있을 만큼 ‘작지만 강한 나라’였다는 것을 방증해준다. ■ 끝내 식민지가 된 중산 이 중산국은 앞선 춘추시대에는 선우(鮮虞)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사기색은’(索隱·당나라 사마정이 사기를 주석한 책)은 “중산은 옛 선우국”이라 했다. 춘추좌씨전 정공 4년조에는 “중산선우”라고 표현했고, 또 청나라 때 왕선겸(王先謙)이 작성한 ‘중산국사표강역도(中山國事表彊域圖)’에는 “중산은 춘추시대에는 선우인데 중산으로 바뀌었다”고 나와있다. 선우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나온 것은 BC 530년이다. 그런데 첫 기록부터가 전쟁 기록이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껴서 고난의 역사를 쓸 수밖에 없는 숙명이런가. “6월, 진(晉)나라 순오가 회합을 가장하여 선우에게 길을 비켜달라고 해서(假道於鮮虞) 비(肥)나라를 쳤다. 10월에는 진나라가~비나라의 일을 이유로 선우를 정벌했다.”(춘추좌전) ‘가도(假道)라’. 임진왜란 때의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명을 칠테니 (조선은) 길을 빌려달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간계가 떠오른다. 진나라 역시 ‘가도’의 구실삼아 선우를 친 것이다. 역사란 돌고 도는 것이다. 이때부터 시작된 진나라와 선우의 싸움은 BC 489년까지 41년 동안 무려 8차례나 벌어진다. 물론 대부분은 진나라가 도발했지만 BC 507~BC 489년 사이에 벌어진 4차례 전쟁에서는 선우가 3승1패의 우위를 보였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사실을 입증시킨 것이다. 하지만 춘추말 전국초에는 선우가 중산국으로 바뀐다. 선우와 중산이라는 이름들이 춘추좌전이나 죽서기년(竹書紀年) 등 사서에 단편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역사기록상 중산의 건국연대는 상당히 늦다. 사기 ‘조세가’는 “BC 414년 중산 무공(武公)이 초립(初立)했다”고 기록했다. 세본(世本)은 “중산 무공은 고(顧)에 거주했고, 환공(桓公)이 영수(靈壽)로 천도했다”고 했다. 어쨌든 중산의 역사 역시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선우 시절엔 진(晉)이 괴롭히더니 전국시대에 돌입하자 신흥강국이 된 위(魏)가 ‘중산 왕따 작전’의 바통을 이어받는다. 위나라 초대왕 문후는 BC 408년부터 3년간이나 중산을 친다. 당시 중산을 친 이는 위나라 장수 악양(樂羊)이었는데, 마침 악양의 아들이 중산국에 있었다. 다급해진 중산국은 악양의 아들을 삶아 그 국물을 보냈지만 악양은 눈하나 꿈쩍 하지 않고 그 국을 마신 뒤 중산국을 친다. 중산국은 결국 멸망하고(BC 406년) 위나라의 식민지가 된다. 하지만 위나라 왕(문후)은 아들을 삶은 국을 마신 악양이 너무 잔인하다 하여 크게 쓰지 않았다고 한다. 신하 중 한사람이 그랬다지. “(악양이) 그 아들의 살까지 먹었는데 누구의 살(임금을 지칭)은 먹지 못하겠습니까?”(전국책 ‘위책’) 어쨌든 여씨춘추(呂氏春秋)는 “중산은 남녀가 밤낮으로 껴앉고 비벼대며, 슬픈 노래를 좋아하고 질탕하며 그것이 나쁜지도 몰랐는데, 그것은 망국의 풍습”이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이는 망국의 역사에서는 빠짐없이 등장하는 진부한 레퍼토리가 아닌가. 조그만 나라가 3년이나 강대국의 침략을 받았는데 견딜 재간은 없었을 것이다. ■ 전국 12웅으로 뜨다 그러나 중산국은 놀라운 생명력을 발휘한다. “사기 ‘악의열전’에는 ‘중산이 위나라에 멸망 당했지만 제사는 끊어지지 않았고 후에 나라를 회복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패륜의 풍습을 지닌 나라였다면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없었겠지.”(이형구 교수) 어쨌든 중산국은 20여년 만인 BC 380년을 전후로 다시 복국(復國)했다. 중산 환공이라는 인물이 이때 도읍을 영수(靈壽·지금의 핑산·平山)로 옮겨 증흥의 기틀을 다졌을 것이다. 중흥군주(환공)의 치세에서 중산국은 욱일승천한다. BC 296년 조나라 무령왕에게 최후 멸망을 당할 때까지 80여년간 남부럽지 않은 전성기를 이룬다. 복국(復國) 이후 ‘중산국 왕따작전’의 계보는 조나라로 바뀐다. 정말 지긋지긋한 ‘집단 괴롭힘’이다. 선우 시절엔 진(晉)나라가 괴롭히더니 중산국 시절엔 위나라 때문에 끝내 멸망했고, 20여년 만에 천신만고 끝에 나라를 회복했더니 이번엔 조나라가 앞길을 막고 있지 않은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온 우리 역사와 어쩌면 그렇게 닮았는지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어요.”(이형구 교수) 그러나 복국 이후 영수로 천도한 중산국은 예전의 중산이 아니었다. BC 369년 조나라와의 국경선에 장성(長城)을 쌓아 조나라의 내습에 대비한다. 이후 70여년간은 도리어 중산국이 조나라와 연나라에 반격을 가하는 반전의 시대가 도래한다. 중산국을 소국으로 여기는 조나라로서는 치욕의 나날이었다. <선양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8)중산국의 위대한 문명 | |||||||||||||||
입력: 2008년 04월 25일 17:40:07 | |||||||||||||||
ㆍ전쟁 뿐 아니라 문화도 찬란했던 ‘강소국’ BC 307년, 조나라 무령왕(재위 BC 325~BC 299년)이 신료들을 부른다. “…지금 중산국이 우리나라 한가운데 버티고 있고(我腹心)…사직이 망하게 생겼으나 나는 호복(胡服)으로 갈아 입고서라도 그들을 치고자 합니다.”(사기 조세가) 벌집을 쑤셔놓은 발언이었다. 호복이라니. 주나라의 제후국인 조나라가 오랑캐 옷을 입고 뭘 어찌하겠다는 건가? 대신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아우성친다. 그러자 무령왕이 설득에 나선다. ■ 중산국을 타도하라! “백성들에게 호복의 착용과 말 타고 활 쏘는 법(호복기사·胡服騎射)을 가르치려 하는데 무슨 잔말이 많소? 옛날 순임금은 묘인(苗人)들 앞에서 춤을 추었고, 우임금은 옷을 벗고 나국(裸國)에 들어갔었소. 그분들은 덕정을 선양하기 위해 그러셨소. 설사 세상의 비웃음을 받더라도 난 반드시 오랑캐 땅, 중산을 반드시 차지할 것이오.”(雖驅世以笑我,胡地中山吾必有之)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조 무령왕이 중산을 오랑캐(이족)로 보았다고 하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각설하고 무령왕은 기어코 호복을 입었으나 왕족들까지도 왕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나보다. 무령왕은 숙부인 공자 성(成)을 직접 찾아가 ‘호복기사’ 정책의 배경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한다. “숙부님, ~과거에 중산국이 제나라의 강병을 등에 업고 우리 땅을 침입해 짓밟았으며, 백성들을 약탈하고 물을 끌어내 호 ()성을 포위했습니다.(引水圍) 사직의 신령이 지켜주지 않았다면 호성(城)을 지킬 수 없었을 겁니다. 선왕께서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지만 아직 복수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호복을 입고 기병과 사수(射手)로 방비하면 나라를 지킬 수 있으며 ~중산국의 원한을 갚을 수 있습니다.” 조카의 간곡한 설명에 감화를 받은 공자 성은 이튿날 스스로 호복을 입고 조회에 참석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조나라 무령왕의 ‘호복기사’ 정책의 전말이다. 조나라가 예법을 찾는다며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다녔던 구태에서 벗어나 간편한 옷(바지 형태)을 입고 말을 타서 활을 쏘는 이른바 기병작전을 펼친 것이다. 조나라는 무령왕의 호복기사 정책으로 전국7웅 가운데 선두주자로 나선다. 그런데 기록에서 나타났듯 무령왕의 ‘호복기사’ 정책 배경에 중산국이 있었다. 전국시대 때 세치 혀로 6국의 재상이 된 소진(蘇秦)의 발언에서도 읽을 수 있다. “지난날 중산국은 나라의 군대를 모두 동원해서 연나라와 조나라를 맞아 남쪽 장자(長子·산시성 진양·晋陽) 땅에서는 조나라를 패배시키고, 북으로는 연나라를 패배시켜 그 장수를 죽였습니다. 중산국은 겨우 천승(千乘)의 나라였는데, 두 만승(萬乘)의 나라(조나라와 연나라를 지칭)를 이겼습니다.~”(전국책 ‘제책·齊策’) 하지만 조나라는 무령왕의 호복기사 정책을 시행한 뒤(BC 307년)부터 BC 296년까지 해마다 중산국을 정벌한다. 선우국이던 춘추시대 때는 진(晉)의 침략으로 고난의 나날을 걸었고, 그 후 위나라의 침략에 급기야 나라를 잃고 식민지가 됐으며(BC 406년) 20여년 만에 나라를 회복한(BC 380년쯤) 중산국. 그 중산국은 다시 조나라의 내침을 받아 끝내 멸망하고 만다.(BC 296년) ■ 집단 따돌림 극복한 강소국 중산국은 이렇게 춘추시대부터 강대국들의 ‘집단 따돌림’을 받고 결국 두 번이나 멸망했지만 대책 없는 약소국은 아니었다.
1974년 허베이성(河北省) 핑안(平安) 싼지셴(三汲縣)에서 확인된 중산국 유적(왕릉+성터)의 위용은 우리의 역사를 빼닮은 ‘강소국’ 중산의 찬란한 문화를 대변해준다. 이 유적에서는 3기의 왕릉을 포함, 30여기의 무덤과 1만9000여점의 유물들이 쏟아졌다. 가장 중요한 유물들이 바로 중산왕 착(錯)의 무덤에서 확인된 철족대정(鐵足大鼎·다리는 쇠, 몸통은 청동으로 만든 예기) 및 방호(方壺·사각 항아리형의 예기)에 새겨진 명문이다. ‘강소국’ 중산의 역사를 한 눈에 짐작할 수 있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먼저 방호의 명문을 살펴보면 “14년, 중산왕 착(錯)이 재상인 사마주(司馬주)에게 명을 내려 ‘연(燕)나라’로부터 빼앗은 전리품(구리)으로 제기를 만들라고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 무려 469자(77행)가 새겨진 철족대정 명문의 내용을 살펴보자. “옛날에 연나라 왕 쾌(쾌·재위 BC 321~BC 316년)가 재상인 자지(子之)에게 왕위를 내줘 나라를 잃고 그 스스로도 목숨을 잃었다.~이에 어린 왕을 보좌한 (중산국) 재상 사마주가 삼군지중(三軍之衆), 즉 군대를 이끌고 연나라를 토벌, 500리 땅과 성 10곳을 빼앗았다.” 명문은 기존 역사서를 보충하고 오류를 잡는 데 결정적인 몫을 해낸다. 이 명문 내용과 기존의 사서를 토대로 당대의 역사를 복원해보자.
제나라 선왕(宣王·재위 BC 320~BC 301년)은 즉시 5도의 군사와 북지지중(北地之衆·북방의 군사)들을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 대승을 거둔다. 이때 연왕 쾌와 만 2년간 왕위에 올랐던 자지가 죽는다. “바로 사기에 기록된 ‘북지지중’, 즉 북방의 군사라는 표현이 중산국의 군사일 것입니다. 중산왕릉 명문에 나온 삼군지중과 사기의 북지지중이 일맥상통합니다.”(이형구 교수) 이 교수는 “중산국의 연나라·조나라 정벌은 아마도 제나라와 연합으로 이뤄졌으며 연과 조는 이때 거의 멸망의 지경까지 이른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한다. 중산왕릉에서 출토된 명문제기들은 연나라를 격파하고 의기양양해진 중산왕 착(錯)이 “연나라에서 빼앗은 구리(銅)를 택해 제기(대정)를 만들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중산왕릉 출토품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다.
■ 2300년 된 술, 개목걸이 장식까지 “왕릉 3기는 착왕(錯王)과 그의 아버지 성왕(成王), 할아버지 무공(武公)의 것으로 이뤄졌어요. 그런데 착왕의 묘에서는 천자를 뜻하는 구정(九鼎), 즉 정(鼎)이 아홉개나 나왔지. 주례(周禮)의 규정에 따르면 천자는 9정, 제후는 7정, 대부는 5정, 사(士)는 3정을 갖도록 규정해놓았거든. 이를 ‘열정(列鼎)’제도라고 하는데, BC 323년 중산국이 조·위·한·연과 더불어 왕(천자)을 칭했음을 방증해주는 결정적인 자료지. 또 다리는 철제로, 몸통은 청동으로 만들었다는 놀라운 주조기법도 특기할 만해요.”(이형구 교수) 또하나 착왕의 철족대정 속을 분석해보니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양, 돼지, 개 등의 고기를 삶은 결정체가 나온 것이다. 중국학계는 “아마도 제사용 고기를 삶은 것이 아닐까”하고 추측하고 있다. 또 있다. 출토품 가운데 밀폐된 술병들이 다수 나왔고, 그 안에서는 액체가 출렁거렸다. 그런데 두 개의 병을 열자 야릇한 술냄새가 나지 않은가. 성분 분석을 해보니 2개의 병에는 알코올 성분이 있었는데, 곡주(穀酒)일 가능성이 많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2300년 된 술이 처음 발견된 것이어서 흥미를 끌었다. 특히 ‘중산주(中山酒)’는 “한번 마시면 3년 동안 죽은 듯 무덤에 묻혀 있다가 깨어날 정도이며, 3년 후 깨어난 사람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그 술냄새에 3개월간이나 취할 정도”라는 재미있는 전설이 내려온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사냥에 동원된 마차가 2~3대 확인됐다는 점. 그런데 금·은으로 만든 목걸이를 찬 목에 찬 개 2마리의 뼈가 완전한 모습으로 확인되었다. “아마도 착왕은 애견가였겠지. 문헌에 따르면 중산에서는 북견(北犬)을 생산했고, 중원에서도 중산의 북견을 수입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이렇듯 놀라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 무엇보다 철과 동을 접합하는 기술, 그리고 다양한 방법의 주조·용접·금은상감기법 등이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작품들이 즐비해요. 전국시대 최고의 예술과 주조기술을 갖춘 강국입니다. ”(이형구 교수) ■ 아홉구멍에 넣은 옥(玉) 특히나 금은으로 상감하는 솜씨를 보면 중산국의 찬란한 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4마리 용과 4마리 봉황을 금은으로 상감한 책상(金銀象嵌龍鳳方案)과 잔 15개를 차례로 장식한 촛대(十五連盞燭臺), 요즘으로 치면 연예인 격인 중산국의 창우(倡優)를 표현한 촛대, 그리고 사슴을 잡아먹는 호랑이를 표현한 병풍꽂이 등은 그 아름다움과 정교한 솜씨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이 옥장식품들은 장식으로서의 기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포박자(抱朴子·신선방약과 불로장수의 비법을 서술한 도교서적)에 따르면 “금옥(金玉)이 9개 구멍에 있으면 죽은 자는 썩지 않는다”고 했다. 중산 왕릉과 그 배장묘에 출토된 옥기의 경우 ‘시신의 구멍(규·竅)’, 즉 눈(2)·귀(2)·코(2)·입(1) 음양(2) 등에 집어넣어 죽은 자의 기운을 보호했다. 한데….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중산국과 그 문화가 아무리 휘황찬란하다 한들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제부터 중산국과 그 문화, 그리고 우리 역사와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더듬어보자. 30여 년 전, 타이완 유학 시절(국립타이완대) 이형구 교수가 풀기 시작했던 중산국의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9)중원에 꽃 핀 동이족의 나라 | |||||||||
입력: 2008년 05월 02일 17:38:13 | |||||||||
ㆍ朝鮮의 이름을 딴 기자의 후예 선우·중산국 선우·중산국에 대한 역사서를 보면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다. ‘춘추좌전’ 소공 12년조의 두예(杜預) 주(注)는 “선우는 백적(白狄)의 별종”이라 했고, 사마정(司馬貞)이 ‘사기’를 주석한 색은(索隱)에는 “중산은 옛 선우국이며 성은 희성(姬姓)”이라 했다. 여기서 백적은 북방의 오랑캐이고, 희성은 주나라 왕의 성(姓)이다. 결국 이 사료에 따르면 선우나 선우의 뒤를 이은 중산은 (은)상, 즉 동이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 춘추전국시대판 창씨개명? “사서에 따르면 선우국은 춘추시대 때인 BC 660년 무렵 북방 오랑캐인 백적(白狄)으로부터, BC 530년부터는 강대국이었던 진(晉)의 침략을 계속 받았어요. 중산국으로 복국(復國)한 이후인 BC 406년에는 위(魏)의 침략을 받아 20여년간 식민지가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선우 중산의 역사가 왜곡되지 않았을까요?”(이형구 선문대 교수) 오랑캐 백적이 선우를 침략한 이후 선우의 족명이 백적의 별종으로 잘못 알려졌고, 원래 주나라의 봉국으로 희씨성을 하사받은 위나라의 식민지가 됨에 따라 희성(姬姓)으로 변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춘추전국시대판 ‘창씨개명’인가. 언뜻 그런 느낌도 들었다. 중산국의 본거지인 허베이성(河北省) 핑산(平山)시 싼지셴(三汲縣)에서 중산왕릉이 발굴되었다는 소식이 1978년 무렵 대만에도 전해졌다. 당시 국립대만대에서 유학 중이던 이형구의 눈이 빛났다. 이미 중산국이 은(상)의 후예가 세운 나라일 것이라고 확신했던 그였다. “역사서에 기록된 중산국=은(상)의 후예라는 대목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차였지. 당시 기자조선에 대해 천착하고 있었던 때였잖아요.” 이미 선우가 (은)상의 후예, 즉 다름 아닌 기자의 후예임을 시사하는 자료 하나 하나에 눈길을 주고 있던 때였다. 1968년 역사학자 천판(陳槃)이 펴낸 ‘춘추대사표열국작성급존멸선이(春秋大事表列國爵姓及存滅선異)’라는 책이었다. 기존 사서를 근거로 중국 중원에 산재했던 춘추시대 170여 소국의 역사를 비정한 역사책인데, 바로 선우라는 항목이 있다. “선우는 일명 중산이라 한다. 회남자는 우(虞)는 혹 우(于)라 했다. 선우(鮮于)는 그 선조가 자성인데(其先子姓), 기자는 조선에 봉하고(以箕子封朝鮮), 기자의 둘째 아들은 우(于·핑산으로 추정)에 봉했다. 여기서 자손들은 조선의 선(鮮)과 봉지 우(于)를 따서 선우(鮮于)씨라 했다.(子孫因合 ‘鮮于’爲氏)”(천판) 기막힌 일이다. 선우국이 조선의 선(鮮)과 봉지 우(于)를 딴 것이라니. 그런 와중에 중산국 발굴보고서를 입수한 것이었다. 우선 중산왕릉이 중산왕의 묘곽, 즉 석곽묘의 형태로 발견된 점이 눈에 띄었다. 석곽에 판축봉분의 형태로 조성된 묘제.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 검토해왔던 발해문명권의 전형적인 묘제가 아닌가. 또한 왕릉의 ‘중(中)’자형 대묘와 조주분(鳥柱盆·새 모양의 기둥을 박은 그릇), 그리고 옥기문화 등은 은(상)문화와 놀라운 일치를 보였다. 흥분을 감출 수 없었던 젊은 고고학도는 1년 뒤 깜짝 놀랄 소식을 접한다. ■ 선우도 기자(箕子)의 후예
“최근 톈진(天津) 우칭셴(武淸縣) 가오춘(高村)에서 발굴된 선우황(鮮于황)비는 ‘선우씨는 상나라 기자(箕子)의 후예다’(鮮于氏系商箕子後裔)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선우=은(상)의 후예인 것도 모자라 아예 기자(箕子)의 후예라는 비문이 발굴됐다는 얘기가 아닌가. 하지만 리쉐친 등은 짤막한 내용만을 전하고는 비문 내용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았다.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자료, 즉 중국사회과학원이 펴낸 ‘문물고고공작30년’이라는 책에는 선우황비에 대한 내용이 비교적 소상하게 나왔다. 즉, 1973년 5월 톈진시 우칭셴에서 827자가 새겨진 동한시대의 비석이 확인되었다는 것이었다. 비석 상단에는 고풍스러운 전서(篆書)로 ‘한나라의 안문태수 고 선우황비(漢故雁門太守鮮于璜碑)’라는 제목이 새겨져 있었다. 비문에는 동한시대 환제 때인 AD 165년임을 뜻하는 연호(연희·延熹 8년)가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감질나는 내용이었다. 책에 실린 비문 탁본은 전체가 아니라 오른쪽 상단이 잘린 채 실려 있어서 전체 내용은 알 수 없었다. 특히 비문 주인공의 출자와 성씨, 고향 등을 적은 오른쪽 상단, 즉 비문의 맨 첫 부분을 잘라 놓았으므로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선우의 비밀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인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없잖아요. 얼마나 기막힌지….” 이 교수는 당장 홍콩으로 날아갔다. 전체비문을 탁본한 자료를 입수하기 위함이었다. 수소문 끝에 전체탁본을 구할 수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탁본의 첫 줄을 읽으니 과연 ‘기자(箕子)’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선우)의 이름은 황이며, 자는 백겸인데, 그 조상은 은나라 기자(箕子)의 후예에서 나왔다.(君諱璜 字伯謙 其先祖出于殷箕子之苗裔~)”(장주본 탁본 첫머리) 결국 중산국 심장부에서 확인된 중산왕릉 묘의 발굴 성과와 베이징~톈진 사이 우칭셴에서 발견된 선우황비는 은(상)과 선우·중산국, 기자조선의 삼각함수를 풀 결정적인 열쇠가 된 것이다. 즉 ‘선우=은(상)의 후예=기자(箕子)의 후예’라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역사를 복원할 때 문헌은 움직일 수 없는 귀한 자료다. 하지만 명문이라고 하는 금석학 자료와는 결코 견줄 수 없다. 문헌은 전해 내려오면서 조작이나 왜곡, 오류의 위험성을 지니고 있지만 명문(금석문)은 당대에 당대인들이 직접 쓴 기록이기 때문이다. ■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의 희생양 된 선우황비
비석의 주인공인 선우황은 AD 107~113년 사이 지금의 산시(山西)성 다이셴(代縣) 부근을 관할하는 안문(雁門)태수가 되었고, 125년 81살을 일기로 죽는다. 비석은 그가 죽은 지 40년 뒤(165년)에 손자가 세운 것이다. 죽은 자를 추념하는 비문이므로 당연히 온갖 달콤한 수식어가 동원되었던 게 당연하다. 그런데 1974년 톈진시 문물관리처 우칭셴 문화관은 ‘문물’지라는 학술지에 희한한 내용의 글을 싣는다. “(발굴이 끝난 뒤) 문물관리처, 현(縣) 문화관, 란청대대의 동지들이 이 비문을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의 반면교재로 삼았다. 그래서 비문이 출토된 현장에서 란청대대원과 빈하중농들이 함께 모여 비림비공 대회를 열었다.~” 이 내용을 담은 쪽글의 소제목이 ‘비문을 반면교재로 삼고 린뱌오(임표·林彪)와 그가 선양하려 했던 공맹의 가르침을 호되게 비판하다(以碑文作反面敎材 狼批林彪和他宣揚的孔孟之道)’이다. 비문 하나 발견한 것 가지고 비림비공운동을 펼칠 만큼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극에 달할 때였다. 글에 실린 비판 내용을 보면 섬뜩하다. 우선 유심주의적 천명관을 고취시켜 착취계급의 인민통치를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또 인정(仁政)과 예치(禮治)를 선양, 반혁명정치의 사기극을 연출했으며, 역사를 마음껏 왜곡하여 지주계급의 죄상을 덮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선우황비를 세운 자는 봉건통치를 유지하는 입장에서 주인의 공덕을 기려 독초와 같은 유가반동사상을 퍼뜨렸다는 얘기다. 그 예로 비가 세워졌던 동한(東漢)시기 선우황이 다스렸던 “안문군에서는 기근이 심해서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人相食) 지경에 이르렀다”는 후한서 ‘안제기(安帝紀)’를 인용하기도 했다. 학술지는 한술 더 떠 “무도한 자의 행위는 그들의 바람과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마오쩌둥 주석의 어록까지 굵은 글씨로 인용했다. 선우황비가 만들어진 지 불과 19년 만인 AD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 끝내 멸망했음(AD 220년)을 빗댄 것이다. 1900년 만에 홀연히 나타난 기자(箕子)의 후예는 이렇게 공맹과 린뱌오(임표)의 추종세력으로 찍혀 졸지에 문화대혁명의 희생양으로 수모를 겪은 것이다. 하기야 아무리 저명한 학자나 정치가도 수정주의자, 주자파, 공맹·린바오 추종세력으로 찍히면 비참한 꼴로 생을 마감하기 일쑤였던 광란의 시기였으니…. ■ 중산국에 즐비한 은(상)의 흔적 또하나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어느 학술지에도 기자와 관련된 탁본 내용이 실리지 않는다는 거지. 중산국이 기자의 후예였음을 굳이 알릴 필요가 없었겠지.”(이 교수) 어떻든 이 선우황비가 발견됨으로써 선우·중산의 선조 논란과 성씨 논란은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리쉐친 등 중국 학자들도 선우황비뿐 아니라 중산군 근처에서 잇달아 출토되는 은(상)나라의 유적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중산의 땅으로 판명된 정딩(正定)시 신청푸(新城鋪) 유적에서는 명문이 있는 상나라 청동기가, 가오청(藁城)시 시타이(西臺) 유적에서는 상나라 청동기와 옥기가 세트로 확인된다. 또한 허베이성 성도 스자좡(石家庄)시에서는 27곳의 상나라 유적이 확인되었다.”(리쉐친) 이형구 교수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곳에 은(상)나라 후예인 자성(子姓)의 선우국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혹시 이 지역은 은(상)나라 시절 은(상)의 제후국인 기자의 기국(箕國)이 있었지 않았을까. 그리고 은(상)이 멸망하자 기자(箕子)는 첫째 아들과 옌산산맥을 넘어 본향, 즉 고조선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기자의 둘째 아들은 타이헝(태행·太行)산록에 숨어 들어 이 선우·중산국 영역에서 은(상)의 복국(復國)을 꿈꾸지 않았을까.” 이 교수의 이야기를 한번 조목조목 풀어보자.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30)우리 역사 빼닮은 선우·중산국 | |||||||||
입력: 2008년 05월 09일 17:39:02 | |||||||||
ㆍ중산왕릉 위 우뚝 선 ‘향당’은 동이족의 표식 1974년부터 발굴한 중산왕릉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을 하나하나 풀어보자.
먼저 무덤이 석곽으로 조성된 것이다. 무덤에 돌을 쓰는 행위는 우리가 누누이 강조했듯 발해문명권, 즉 동이문화의 대표적인 묘제이다. 또한 묘실을 중심으로 아(亞)자형 혹은 중(中)자형으로 묘도를 조영했다든지 하는 것들은 은(상)의 전통이 그대로 살아있는 예이다. 또한 리쉐친(李學勤) 등 중국 학자들이 검토해왔듯 중산국 영역에서 쏟아지는 은(상)의 유적들과, 우칭셴(武淸縣)에서 확인된 선우황비(鮮于璜碑) 등은 선우·중산국=기자(箕子)의 후예임을 증거해준다. ■ 山자형 청동기의 비밀 자, 이제 중산왕릉에서 출토된 ‘산(山)’자형 청동기를 살펴보자. 착왕(錯王)과 성왕(成王)의 무덤에서는 산(山)의 형태를 지닌 청동예기가 모두 11점(착왕릉 5점, 성왕릉 6점) 쏟아졌다. 그런데 중국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끈 것은 이 청동예기의 크기와 형태, 그리고 무게다. 삼지창 모양인데, 크기는 119~142㎝, 폭 74㎝ 내외, 무게는 52~57㎏에 달한다. 이 청동예기의 윗부분은 세개의 첨봉(尖鋒) 모양으로 되어있으며, 밑은 원통형이고 옆에는 못구멍을 뚫었는데, 그 원통(직경 13.5㎝ 내외) 안에는 목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제 아무리 힘 좋은 장사라도 이렇게 크고 무거운 것을 병기로 휘둘러 적을 제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청동기의 모양도 심상치 않다. “청동기는 산(山)중(中)이라는 두 글자, 즉 윗부분은 산(山)자, 밑부분은 중(中)자를 표시한 듯한 모양이다. 이것은 왕은 물론 백성들까지 산을 신성시하는 이른바 숭산(崇山)신앙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전국 중산국 영수성지 발굴보고서·허베이성 문물연구소·2005년) 발굴보고서는 “이 청동기가 타이헝(태행·太行)산록에서 기반을 닦은 뒤 중원으로 나가 만승(萬乘)의 두 나라인 조나라와 연나라를 연파한 중산국의 기세를 반영한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 예로 도읍을 정할 때 도읍 한가운데에 산(山)이 있는 곳을 택했는데, 중산국 도읍인 영수성(靈壽城) 안에는 독립된 작은 산이 있다. 이 대목에서 한마디 보태자면 도읍지 중심지와 주변에 산을 두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물다. 북악산과 안산, 남산, 북한산, 관악산 등을 둔 서울이 외국인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는 까닭이다. 풍수지리의 관점에서도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중국학계는 결국 “산(山)자형 청동기는 중산국의 왕권을 상징하는 예기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봉건사회에서는 왕권과 신분을 상징하기 위해 문 앞에 예기를 걸어놓는 예가 흔했다. 당나라 때 관직제도에 대해 쓴 ‘당육전(唐六典)’은 “삼품 이상의 고관과 중소주(中小州) 계급 이상의 관아에 예기들을 걸어놓았다”고 했다. 이것은 봉건시대의 등급제도를 표시하는 것인데, 걸어놓은 예기의 숫자에 따라 관직과 신분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중산국의 이 ‘산(山)’자형 청동기는 단순히 왕권과 신분의 상징으로만 해석할 수 있을까.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해석은 색다르다. ■ 황(皇)과 신라금관
이 교수에 따르면 고전체(古篆體)인 이 ‘황(皇)’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맨 위에 깃털이 천(川)자 모양으로, 밑에는 일(日), 즉 태양이 새겨져 있으며, 그 밑에는 왕(王)이나 토(土), 혹은 받침대(杆)와 같은 모양으로 돼있다. “예기(禮記) 왕제(王制)편을 보면 유우씨(有虞氏), 즉 순(舜)임금은 황(皇)으로 제사를 지냈다(有虞氏 皇而祭)라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에 보면 이렇게 설명했어요. 즉 ‘황(皇)이라는 것은 순(舜)임금 때는 종묘 제사를 지낼 때의 관(冠)을 뜻하는데, 하(夏)나라 때는 수(收)라고 했고, 은나라 때는 우(旴)라 했으며, 주(周)나라 때는 면(冕)이다’라고….” 수나 우·면 모두 관을 뜻한다. 또한 왕롱바오(汪榮寶)는 “황(皇)에서 보는 일(日)의 형상은 관(冠)의 테를 뜻하고, 천(川)의 형상은 관의 장식을 뜻하며, 토(土)의 형상은 그것을 세운다(皇, 日象冠卷 川象冠飾 土象其架)는 뜻”이라고 했다. 근세의 유명한 학자 궈모뤄(郭沫若)도 “황(皇)은 관(冠)이라 하는데 깃털(川의 형상)은 그것을 장식하는 것(皇亦謂冠 羽毛飾之)”이라 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황(皇)은 즉 관(冠)을 뜻한다는 기록이다. 이 교수는 “모든 것을 종합할 때 ‘황(皇)’자는 임금이 왕관을 쓴 모양을 형상화한 글자”라고 해석한다. 이쯤해서 산(山)자형 청동예기를 다시 보자.
그러고보니 이 ‘산(山)’형 청동기가 꼭 신라금관의 세움장식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렇지. 신라금관과 흡사하지. 아닌 게 아니라 신라금관의 모티브가 됐을 수도 있어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보면 “(BC 210~BC 206년 무렵) 진시황이 죽고 진섭(陳涉)과 항우(項羽)가 기병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 제, 조나라 백성들이 대거 기자(箕子)의 후예인 준(準)왕에게 망명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자 이렇게 볼 수도 있어요. 한국전쟁 때의 피란민 대열에서 보듯 천하가 어지러워질 때는 보다 안전한 곳이나 연고지로 인구의 대이동이 일어나잖아요. 조나라에 망했던(BC 296년) 중산국의 유민(遺民)들이 진(秦)말의 혼란기를 틈타 조선 땅으로 대거 유입되었고, 이들의 후예가 부여, 고구려를 거처 관(冠)의 모티브를 전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잖아요.” 물론 신라금관의 출자(出自)에 대해서는 여전히 수수께끼이며, 이 교수의 해석 역시 숱한 설(說)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향후 연구과제로서 충분한 질문거리를 던졌다고 봐야 한다. ■ 가장 오래된 설계도 중산왕릉 발굴이 던져준 또 하나의 착안점은 왕릉의 설계와 구조이다. 중산국의 최전성기인 BC 310년 무렵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착왕(錯王)의 능에서는 무덤의 기획설계도, 즉 청동판형으로 만든 조역도(兆域圖·길이 94㎝ 폭48㎝ 두께 1㎝)가 고스란히 발굴되었다. 금은상감의 완벽한 상태로 확인된 조역도는 궁전의 명칭과 크기, 위치까지 그려져 있었다. 최고(最古)의 설계도 발견에 건축사학계는 자지러졌다. 조역도엔 “재상 사마주에게 명하노니 능묘건축 때 규정된 촌법을 따르지 않는 자는 엄벌에 처하라. 그 자손까지 죄가 이어지게 하라~”는 국왕 조서까지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왕릉 위의 향당(享堂)의 존재였다. 향당은 선왕을 제사지내려고 능묘상에 세운 종교적인 목조건축물이다. “중산왕릉에서 향당이 존재했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어요. 향당은 동이족의 전형적인 묘지이거든.” 이미 은나라 무정(武丁·BC 1250~BC 1192년)의 왕비이자 여장군인 부호(婦好)의 능(인쉬·殷墟)에서 향당의 흔적이 확인된 바 있다. 중산국의 착왕릉를 보면 지하에 왕당(王堂·착왕), 왕후당(王后堂), 애후당(哀后堂), 부인당(夫人堂), 口口당 등 5기의 석곽묘에 시신을 묻은 뒤 각 능묘 위에 5채의 향당이 조성되었다. “형식을 보면 지하에 묘를 두고, 지표면은 높이 15m의 흙을 판축기법으로 쌓아올린 뒤 대사식고대(台사式高台·높은 누각을 조성한 건물) 3층단의 상부에 조성했어요. 3층 건물의 높은 향당은 왕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그렇게 장대하게 조성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향당은 고구려와 발해, 백제 등에서도 흔히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게 이형구 교수의 설명이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輯安)의 고구려 수도 국내성에 조성된 장군총이 대표적이다. 이미 1910년대에 장군총을 조사한 바 있는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장군총의) 정상에 기둥을 끼운 흔적들이 있는데, 이것은 난간을 둘러 무덤의 외관을 장엄하게 보이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해석했다. 세키노 다다시는 이때 장군총 정상에서 연화문 수막새 같은 기와편들을 다수 확인했다. 그는 “이런 기와편들은 빗물이 능침 안으로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각 단과 단 사이에 덮은 흔적일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장군총뿐 아니라 태왕릉, 천추총, 임강총, 서대총, 중대총 등 고구려 시대 적석총의 정상부에는 어김없이 기와편들이 집중 수습되었다. ■ 고구려에서 확인된 중산의 향당 하지만 이형구 교수는 “바로 고구려 적석총 정상부의 난간 기둥 흔적과 기와편, 전돌, 초석 등은 바로 이곳에 능묘상 건축인 향당이 존재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본다. “(장군총의 경우) 한 변의 길이가 31m, 높이 13m 되는 피라미드 위에 장엄하게 보이려고 난간만을 세웠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아요. 또한 숱하게 확인된 전돌과 기와편들이 단지 빗물방지용으로 덮은 흔적이라고 하는 것도 어색합니다. 또한 기와편을 보면 상이(上二), 상(上), 십(十) 같은 숫자와 기호들이 적혀 있는데 단지 난간만 둘렀다는 것은 이상하지.” 이 교수는 우메하라 스에지(梅源末治)의 실측도와 평남 순천군 용봉리에 있는 랴오둥성 총벽화, 평남 강서면 약수리 고분벽화에 나온 성곽도 등 각종 자료를 분석, 장군총 향당의 복원도를 만들었다. 이런 향당은 백제 석촌동 고분과 가락동 고분, 발해의 도읍 상경용천부가 있는 산링둔(三靈屯)고분에서도 그 흔적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우·중산국(?~BC 296년)은 은(상)(BC 1600~BC 1046년)으로부터 물려받은 향당제도를 고구려(BC 37~AD 668)·백제(BC 18~AD 660년)→발해(AD 698~926년)로 이어준 발해문명의 전달자 몫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선우·중산국은 이처럼 북방 오랑캐인 백적(白狄)의 나라가 아니라 성씨가 바뀌고 식민지가 되는 등 끈질긴 강대국들의 침략 속에서도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작지만 강한 동이(東夷)의 나라였다. 어떤가. 그 역사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온 오늘의 우리를 쏙 빼닮지 않았는가.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31) ‘연나라 강역도’와 조선 | |||||||
입력: 2008년 05월 16일 17:45:25 | |||||||
ㆍ조선을 연나라 땅이라고 우기는 中역사서 “연나라는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등 5군을 두어 오랑캐를 방어하였다.”(사기 흉노열전·연소공세가) “연나라는 전성기 때 일찍이 진번(眞番)과 조선을 공격하여 연나라에 귀속시켜 관리를 설치하고 요새에 성을 쌓았다.”(사기 조선열전)
■ 연나라가 한반도까지? 이런 자료를 토대로 역사를 요리하는 중국을 보면 부러움 반 자괴감 반의 복잡한 기분이 절로 든다. 랴오닝성 박물관에 붙어있는 전국시대 연나라의 강역도를 보자. 그 경계가 랴오둥(遼東)은 물론 한반도 서북부까지 이른다. 화가 치밀어올라도 어쩔 수 없다. 잘못 대들었다가는 일패도지(一敗塗地)할 수밖에…. 사료를 반박할 그럴듯한 근거를 대라 하면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그만한 사료도 갖추지 못했기에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성을 갖고 보면 그들이 신주 모시듯 하는 사료에 숨어있는 허점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 측 자료는 어차피 중국의 역사를 쓴 것이고, 주변국의 역사는 자기 역사를 치장하기 위한 양념일 뿐이다. 따라서 소략하게 취급하거나 폄훼하거나, 왜곡하기 일쑤다. 우리는 이쯤해서 마음을 다잡고 중국 측 사료에 담겨 있는 구절을 일일이 따져보고, 그것이 품고 있는 함의에서 진실을 찾을 참이다. 하지만 책장에서만, 그것도 숨은 뜻을 찾고자 하면 그 또한 자기 위주의 해석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여기에 중국학계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고고학적인 뒷받침, 곧 증거를 댈 참이다. 먼저 기자(箕子)조선의 강역 문제이다. 최근 지린대(吉林大) 역사교과서인 ‘동북사’는 “주나라 초기의 기자국(箕子國)은 고조선 땅에 있었는데, 지금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周初的箕子國位于古朝鮮地 也就是在今朝鮮大同江流域)”이라고 해놓았다.
“하지만 이 교과서는 여전히 ‘기자조선의 영역=대동강 유역’설을 철옹성처럼 지키고 있어요. 이미 살펴보았듯 기자(箕子) 일행이 신주 모시듯 하고 가져왔던 은말 주초의 청동기들은 랴오허(遼河) 동쪽에서는 보이지 않아요.” 이 고고학적 자료들은 기자(箕子)가 랴오허를 결코 넘지 못했다는 뜻이다. 대신 기자가 정착한 다링허(大凌河) 일대에서는 BC 9세기 무렵부터 기자 일행이 기존의 고조선 세력과 함께 만든 문화, 즉 발해연안식 청동단검(비파형 동검)을 중심으로 한 난산건(南山根) 문화가 성행했다. 또 춘추전국시대 중원의 북방, 즉 중산국과 고조선 등 동이의 나라들과 국경을 맞댄 연나라의 역사를 보면 몇가지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다. 주나라 무왕이 은(상)을 멸한 뒤(BC 1046년쯤) 소공(召公) 석(奭)을 연(燕)에 봉했다.
즉 “주나라 2대왕 성왕(成王·BC 1042~BC 1021년)이 소공에게 뤄이(洛邑·뤄양)를 건설하게 했고, 나중에는 섬(陝)의 서쪽 지방을 관장하게 하였다”(사기 주본기·사기 연소공세가)는 기록이 이를 입증한다. 더욱이 주나라 초에는 은(상) 유민들의 반발이 워낙 거셌다. 주 무왕의 동생들인 관숙과 채숙이 은나라 유민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성왕이 즉위한 뒤에야 겨우 산둥성(山東省)에 살던 동이족들을 정벌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동이족 계열인 은(상)의 반발이 거셌다는 얘기다. “이는 무왕이 소공을 연에 봉했을 때는 주나라의 세력이 아직은 크지 않았다는 뜻이지. 성왕 초기에도 동쪽인 산둥성에서 헤매고 있었거든…. 은(상)의 항거가 워낙 거셌던 탓에….” (이형구 교수) ■ 연나라의 유적·유물은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무왕이 소공에게 분봉했다는 연(燕)은 어디일까. “처음엔 지금의 허난성 옌스(河南省 偃師)일 가능성이 많아요. 언(偃)은 연(燕)자와 같거든. 그리고 성왕 이후에 지금의 베이징 서남쪽인 팡산셴(房山縣) 부근으로 둥지를 옮겼을 겁니다. 역사서에는 연의 도읍지를 지셴(계縣·上都)과 이셴(易縣·下都)이라고 했거든. 어쨌던 류리허(琉璃河)에서 확인된 연나라 왕의 무덤이 그 단서가 될 것 같아요. 류리허에서 서주 초에 축조된 연나라 성터와 왕의 무덤이 발굴되었거든.” 그런데 이것이 마지막이다. 이 류리허 유적의 북쪽, 즉 옌산(燕山) 이북에서는 전형적인 춘추시대 연나라 유적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전형적’이라 하면 하나의 세트, 하나의 패턴을 갖춘 유적과 유물의 조합을 뜻한다. “유적이나 유물들이 ‘하나의 문화’, 혹은 ‘하나의 영역’으로 규정되려면 유적·유물이 하나의 정연한 세트를 이뤄 일정한 패턴으로 확인돼야 합니다. 그냥 한 두 점씩 여기저기 흩어져 나온다면 유의미한 문화라 할 수 없어요.”(이 교수) 만약 춘추시대 연나라가 옌산을 넘어 다링허 유역은 물론 랴오둥 반도까지 영역을 넓혔다면 류리허 같은, 아니면 그에 버금가는 유적들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누누이 강조하지만 옌산 이북부터는 발해연안식 청동단검(비파형 단검) 문화로 대표되는 고조선(기자조선)의 문화가 보일 뿐이다. ■ 천하의 유세가 소진(蘇秦)이 남긴 한마디 또 하나 중요한 단서가 ‘전국책’ 연책(燕策)과 ‘사기’ 소진열전 등 사료에 숨어 있다. 전국시대를 혀(舌) 하나로 누빈 합종(合從)의 유세가로 6국의 재상을 겸한 소진(蘇秦)의 유세를 보자. BC 334년 소진은 합종을 위해 연나라로 가서 “연·제·위·한·조·초 등 6국이 합종하지 않으면 강대한 진(秦)나라를 이길 수 없다”고 설파한다. 그러면서 앞세운 말. “연나라는 동쪽으로 조선과 요동에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임호와 누번이 있습니다.(燕東有朝鮮遼東~)” 혀로 천하를 호령한 소진 같은 유세가가 연나라를 중심으로 말을 꺼낸다면 있는 순서대로, 즉 조선→요동 순으로 차례차례 말했다고 보는 게 상식이 아닐까. 그러니까 조선은 요동(랴오둥)의 서쪽, 즉 랴오시(遼西)에 있었다는 말이 아닐까. 또 하나 소진의 말에서 또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면 이 시기, 즉 BC 334년에는 최소한 조선과 랴오둥은 연나라의 영역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 연나라의 전성기 그렇다면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중국 사료, 즉 연의 강역이 동으로 랴오둥을 넘어 한반도까지 이른다는 기록은 어찌된 것인가. 여기에는 한가지 오해가 있다. 우선 춘추시대 연나라의 강역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지금 ‘사기’ 연소공세가와 조선열전, 흉노열전 등에 나오는 연나라의 강역은 전국시대 중기~말기, 즉 연나라 전성기의 기록이다. “연나라는 밖으로 만맥(蠻貊·북동쪽 동이족을 멸시한 명칭일 것) 등 여러 종족과 대항하고, 안으로는 제(齊)와 진(晉) 등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느라 국력이 가장 약했고, 망할 뻔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800~900년간 사직을 보존했으며~.” 사마천의 논평(연소공세가)은 전국 7웅이지만 국력이 가장 약한 연나라에 대한 연민을 표현한 것이다. 하기야 그랬을 것이다. BC 316년, 연왕 쾌(쾌)가 재상인 자지(子之)에게 왕권을 넘겨주자 연나라는 큰 혼란에 빠졌는데, 이 때를 틈타 제나라와 중산국이 손을 잡고 연나라를 쳤다.(경향신문 4월26일자 참조) 이때 중산국에 땅 500리와 성 10곳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고(314년), 나라는 거의 망국에 이른다. 이 때 등장한 이가 바로 연나라의 중흥군주 소왕(昭王·재위 BC 311~BC 279년)이다. 소왕은 인재를 널리 구하는 데 힘썼다. 군사전략가인 악의(樂毅·BC 406년 중산국을 멸한 위나라 악양의 후손)가 위(魏)에서, 음양오행에 해박한 추연(趨衍)이 제나라에서, 힘이 장사인 극신(劇辛)이 조나라에서 일제히 달려왔다. 소왕은 BC 283년 무렵 진(秦), 초, 한, 조, 위 등과 함께 제나라에 대한 복수를 감행했다. 다섯 나라 중 유일하게 연나라 군사만이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까지 진입, 제나라의 궁묘와 종묘를 불살라 버렸다. 제나라 성 가운데는 즉묵(卽墨·산동성 핑두셴:平度縣) 등 3성만이 남았고 나머지는 모두 연나라에 속했다. 이번에는 반대로 제나라가 6년간 멸망 일보 직전까지 몰린 것이다. ■ 진개의 침략 그런데 이 글의 맨 처음에 인용한 ‘사기’ 흉노열전을 보면 재미있는 기록이 나온다. “연나라 명장 진개(秦開)가 흉노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그들의 신뢰를 받은 후 돌아와 군대를 이끌고 동호(東胡)를 습격, 패주시켰다. 동호는 1000여리나 후퇴했다. 진개는 훗날 자객인 형가(荊軻)를 수행해서, 진왕(秦王·훗날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秦舞陽)의 할아버지이다. 연나라는 조양, 양평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 이제 이 문제의 인물인 ‘진개’가 등장한다. 진개는 언제 적 사람인가. 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유명한 ‘형가의 진시황 암살미수 사건’에서 추론할 수 있다. 형가 사건이 일어난 것이 BC 227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형가를 수행한 진무양의 할아버지인 진개는 연 소왕의 전성기, 즉 BC 283~BC 279년 사이에 활약했던 장수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자, 진개란 인물이 또 한 번 등장하는, 그 유명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韓)조를 보자. “조선후(朝鮮侯) 준(準)이 감히 왕(王)을 칭하였다. 연나라 망명인인 위만(衛滿)이 공격하여 (기자조선을) 빼앗았다.” 그런데 이 단 한 줄에 불과한 이 기록에 덧붙여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AD 233~297년)는 ‘위략(魏略)’이라는 역사서를 장황하게 인용한다. 전체적인 내용과 풀이는 다음 회로 넘기기로 하고 연나라의 강역 부분만 인용해보면…. “위략에 따르면 조선왕이 왕을 칭하는 등 점점 교만해지자 연나라가 장수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그 땅의 서방을 공격하여 땅 이천리를 취하였다.”(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에서 진수가 인용한 ‘위략’ 에서 부분 발췌) 그러니까 ‘사기’ 흉노열전과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 사서를 종합하면 연나라가 소왕 때, 즉 BC 300~BC 280년 사이 북방으로는 1000리, 동쪽으로는 2000리를 공격, 강토를 넓혔다는 얘기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다시 증거물, 즉 고고학적 자료와 역사서가 품고 있는 숨은 뜻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32) 천자를 칭한 조선 | |||||||
입력: 2008년 05월 23일 17:45:48 | |||||||
ㆍ연나라와 대등했던 고조선의 위세 ㅃ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韓)조의 내용을 조목조목 풀어보자. 기승전결을 갖춘 베스트셀러 소설 같다. “위략(魏略)에 이르기를 주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 연나라가 왕을 칭하고 동쪽 땅을 다스리려고 하자(欲東略地), 옛날 기자(箕子)의 후손인 조선후(朝鮮侯)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亦自爲王) 병사를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하여 ‘주(周)’의 왕실을 지키려 했다.”
“(조선이 연을 공격하려 하자) 대부 예(禮)가 ‘절대불가하다’고 간하자 (왕은) 공격을 멈췄고, 대부 예를 연나라에 보내 이야기하니 연나라도 (조선에 대한 공격을) 그쳤다.” 조선왕이 연나라 타도를 외치자 대부(大夫) 예(禮)가 강력하게 만류했다는 얘기다. 조선왕은 공격의 뜻을 철회한 뒤 대부 예를 연나라에 사신으로 보낸다. 연나라는 조선후가 왕을 칭한 것에 격분했을 것이다. 바야흐로 유세가들이 세치 혀로 천하를 주물렀던 전국시대 중기. 조선의 유세가 예는 화려한 언변으로 연나라왕을 녹여 연의 조선침공을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후에 (조선의) 자손들이 교만해지자 연나라는 장수 진개(秦開)를 파견, 그 땅(조선)의 서방을 공격하여(攻其西方), 땅 2000여리를 취하였다.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경계를 삼자 조선이 약해졌다. 진(秦)이 천하를 얻자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게 하였다. 이 때 조선왕 비(否)가 즉위했다. 진나라가 공격할까 두려워 진나라에 복속했지만 조회에 참석하지는(알현하지는) 않았다(不肯朝會).” 이 기록에 따르면 연나라는 마침내 진개를 보내 조선의 서방을 공략, 2000리나 되는 땅을 차지했다. 연나라 강역도를 보면 연나라는 한반도 청천강(만번한을 청천강으로 본 것)까지 이른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조선의 세력은 악화됐다. BC 221년 급기야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자 조선은 크게 두려워 해서 진나라에 복속했지만 진시황을 직접 찾아가 알현하지는 않았다. ■ 연개소문을 떠올리는 이유 일단 여기까지의 ‘위략’ 내용이 담고 있는 속뜻은 무엇일까.
“BC 4세기에서 BC 3세기 사이 조선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어요. 조선이 ‘감히’ 천자를 뜻하는 ‘왕’을 스스로 칭했잖아요. 연나라로서는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겠지. 게다가 연나라가 조선을 우습게 보고 공격하려 하자, 조선은 ‘주 왕실의 존숭을 지킨다’는 명목 아래 연나라를 오히려 공격하려 들고….”(이형구 선문대 교수) 조선의 대부 예의 외교로 양국은 충돌을 면했지만, 악감정은 눈덩이처럼 쌓이고 있었다. “당시 기자조선-연나라 관계로 훗날 고구려-당나라 관계를 떠올릴 수 있어요. 연개소문과 그 아들들, 그리고 기자조선의 왕과 그 자손들은 닮은 꼴로 중국과 대립한 것이거든….” 하지만 연나라는 BC 314년 제나라와 중산국의 침략 때문에 존망의 위기에 섰던 터라 조선을 넘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중흥군주인 소왕(昭王·재위 BC 312~BC 279년)이 즉위했고, 마침내 BC 280년을 전후로 진개를 파견, 조선 땅 2000리를 공략하고 랴오시(遼西)·랴오둥(遼東), 한반도 서북부까지 진출했다는 것이다. 고대사를 둘러싼 하나의 수수께끼는 해결하는 셈이다. 즉 적어도 BC 280년 무렵까지는 연나라가 랴오둥(요동)은 물론 랴오시(요서)까지도 진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제 남은 수수께끼 하나. 과연 연나라 진개 장군은 당시 랴오둥을 넘어 한반도 청천강까지 진출했을까. ■ 둥다장쯔 유적의 비밀 지난 2002년 봄, 당시 궈다순(郭大順) 랴오닝성 문물국장은 마침 선양(瀋陽)을 방문했던 이형구 교수에게 씩 미소를 흘렸다. “이 선생, 하나 재미있는 게 나왔어요. 청동단검이 나왔는데, 이 선생이 보면 아마 고조선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반농담조였지만 흥미로웠다. 이형구 교수는 마침내 ‘2000년 중국 중요고고발현’이라는 약(略)보고서를 입수할 수 있었다. “중국문물국이 2000년 발굴한 중요 유적 24곳에 대한 약보고서였어요. 그런데 만리장성을 넘어 다링허(대릉하)로 가는 길목에 있는 랴오닝성 젠창셴(建昌縣) 둥다장쯔(東大杖子)촌에서 전형적인 청동단검(후기형식·BC 4세기 말~BC 3세기 중엽)이 적석목곽묘에서 출토되었어요.” 마을의 거리와 식당에서 모두 54기의 고분이 확인됐는데, 서울 풍납토성처럼 이곳도 보존과 개발의 틈바구니에서 확인되었던 터라 학자들의 접근이 무척 껄끄러웠다. “지금도 현장은 볼 수 없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궈다순씨가 반농담조로 말했듯 한국 학자가 가면 고조선과 연결시키려 하기 때문에 기피하는 측면도 있을 것이고….” 문제는 (고)조선의 전형적인 석곽묘와 손잡이를 황금으로 만든 청동단검은 물론 전국시대 후기(연나라)의 전형적인 청동기들이 함께 나온다는 뜻이었다. “약보고서의 결론을 보면 흥미로워요. 우선 고조선의 대표문화인 청동단검들이 분포한 가장 서남단에 위치한 유적이라는 점, 그리고 고분의 분포가 광활하고 묘 주인의 신분이 높은 점 등을 보면 이 무덤의 주인공이 연나라 시대의 군사장령(軍事將領), 즉 장군의 무덤이라고 분명히 해두었어요.” 이 교수는 “여러가지 추측을 할 수 있지만 연나라가 파견한 장군이 이곳에서 현지인, 즉 고조선 사람들과 살면서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인 뒤 죽어 묻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기자(記者)는 이쯤해서 BC 280년 무렵 조선을 공격한 진개 장군이 퍼득 떠오른다. “무덤의 규모나 문화 양상을 보면 연나라 장수 진개의 무덤일 수도 있지. 시대와 유물양상 등을 보면….” 앞서 인용한 ‘위략’의 내용, 즉 “진개가 조선의 서쪽을 공격했다(攻其西方)”는 것과 진창셴 유적을 검토하면 만리장성을 넘으면 곧 고조선(기자조선) 의 영역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 랴오허를 넘지 못한 연나라 그렇다면 진개의 침략(BC 280년 무렵) 이후 연나라는 랴오둥을 건넜을까. 춘추시대 때 만리장성 너머 랴오시(遼西) 지방에서 전형적인 연나라 유적이 보이지 않았듯, 진개의 침입 이후에도 랴오둥 지역에서도 ‘전형적인’ 연나라 유적 및 유물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형구 교수는 사기 ‘흉노열전’을 주목한다. “진개가 군대를 이끌고 동호(東胡)를 공격, 1000리를 패주시켰다”는 기사. “이 동호라는 표현이 혹 조선을 뜻하는 게 아닐까. 옛 기록에 호(胡)=이(夷)라고도 했어요. 또 진개가 조선을 치고 2000리를 넓혔다는 기사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에서만 나오거든. 나머지 역사서는 모두 동호 1000리만을 기록했어요. 이 동호가 나는 조선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진개는 2000리가 아니라 1000리, 즉 랴오허 동쪽만 점령했다는 얘기다. 중국의 고고학자 천핑(陳平)은 ‘연문화(燕文化)’라는 책에서 조심스럽지만 이렇게 해석한다. “이우뤼산(醫無閭山·랴오시 푸신:阜新)을 기점으로 동쪽으로는 전국시대 연나라 문화의 전형적인 유적·유물이 보이지 않는다. 연나라 희왕(喜王) 33년(BC 222년) 랴오둥으로 피신하기 이전에는 연나라가 진정으로 랴오허(遼河)를 건너 랴오둥 지역에 진입하지 못했다.“ BC 222년은 연나라 희왕이 진나라의 공격을 피해 랴오둥 지역으로 피신했던 때였다. 이는 진개가 조선을 침략했지만 연나라는 60년 가까이 랴오허를 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하나,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진개의 침략 이후 조선은 약해졌으며, 이후 천하통일을 완성한 진나라가 두려워 복속했다”고 썼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고조선은 자존심만큼은 잃지 않았다. “복속은 했지만 (진시황을) 알현하지는 않았다”(삼국지 위지 동이전)는 기록이 이를 증명해준다. 천하를 떨게 한 진시황 치하인데도 직접 가서 무릎을 꿇지는 않은 것이다. ■ 위만의 조상은 동이족? 이제 다시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사기’ 조선열전을 검토해보자. “(조선에서는) 비왕이 죽고 준왕(準王)이 즉위했다. (중국에서는) 20여년 뒤 진섭(陳涉)과 항우(項羽)가 반란을 일으키자 연·조·제나라 백성들이 조선의 준왕에게 망명하니, 준왕이 이들을 서쪽에 머물게 했다. (한나라 때 연나라 왕으로 책봉된 노관이 흉노로 망명하자) 연나라 사람 위만이 (상투를 틀고) 오랑캐 옷을 입은 뒤 준왕에게 항복했다. 위만은 준왕에게 중국망명인으로서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고자 한다’고 간청했고, 준왕은 은혜를 베풀어 위만을 서쪽 변방을 지키는 우두머리로 봉했다.” 이것은 위만의 등장에 관한 기사다. 준왕은 ‘조선의 병풍이 되겠다’는 위만의 말을 믿고 그에게 박사 벼슬을 내리고 서쪽 100리의 땅까지 내주며 철석같이 믿고 말았다. 하지만…. “위만이 망한 무리들을 꾀어 세력을 키운 뒤 급기야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 거짓으로 고하길, ‘한나라 병사들이 열길로 쳐들어옵니다. 제가 가서 막아야겠습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위만은 돌아가 준왕을 공격했으며, 패배한 준왕은 바다를 건너 한(韓·마한)의 땅에 들어갔다.” BC 194년의 일이다. 가히 쿠데타였다. 위만은 준왕을 속여 서쪽 변방(아마도 랴오둥 지역이었을 것)에서 세력을 키운 뒤 군대를 이끌고 준왕의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이다. 이로써 BC 1046년 무렵 고조선과 은(상)의 문화를 계승한 기자조선은 900년 만에 정권을 위만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하지만 위만이 사서에 나온 대로 중국인이었을까. 꼭 그렇게 볼 수는 없다는 게 이 교수의 해석이다. 사서를 종합하면 위만은 다른 1만명과 함께 상투를 틀고(추결·추結), 호복(胡服·오랑캐의 옷)을 입은 뒤 조선의 준왕에게 망명했다. 당시는 진나라 말기 혼란 상황. 옛 제·연·조나라 백성들이 대거 조선으로 몰려들었고, 위만도 한나라 초기 혼란기에 수 천의 무리를 이끌고 조선 땅에 둥지를 틀었다. ”중국이 어지러울 때 많은 무리들이 옌산을 넘고, 랴오허를 넘어 몰려들었어요. 험준한 옌산과, 폭이 140㎞나 되는 지긋지긋한 요택을 둔 랴오허 유역을 건넌다는 것은 쫓는 무리들의 핍박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였을 테니까.“(이교수) 동이계인 중산이 마지막으로 망한 때는 BC 296년. 역시 동이족인 고조선이 진개의 침략으로 랴오시(요서·療西)를 잃었던 것이 BC 280년 무렵. 이후 조·연·진의 영역에서 삶을 부지했던 동이계 사람들 역시 변란이 생겼을 때 같은 종족을 찾았을 것이다. “연나라 사람이라는 위만과 그 수 천 무리도 ‘믿는 구석’, 즉 동이의 나라, 고조선으로, 고조선으로 향하지 않았을까.” 마치 은(상)의 멸망 이후 본향을 향해 총총히 떠났던 기자(箕子)처럼….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33) 단군신화, 게세르신화, 그리고 몽골 비사 | |||||||||
입력: 2008년 05월 30일 17:01:54 | |||||||||
ㆍ바이칼은 한민족의 출발지일까 종착지일까 “왕에게는 아들이 많았는데, 한 왕자의 재주가 다른 형제들을 늘 앞섰다. 여러 아들이 이 왕자를 죽이려 하니 왕자가 도망쳤다. 강에 이르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주어~.”
깜짝 놀랐다. 2007년 7월24일, 어룬춘(鄂倫春) 자치기 자거다치(加格達奇)에 도착한 직후 곧바로 러즈더(樂志德) 다워얼 학회장을 만난 자리였다. 다워얼(達斡爾)족은 이른바 원(元)고구려족일 수도 있다고 해서 관심을 받아온 종족. 그런데 여든세살이나 된 러즈더 회장은 탐사단을 만난 자리에서 주몽설화와 아주 비슷한 신화를 술술 말하지 않는가. 다워얼족=고구려의 원형?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런데 들을수록 이상했다. 이야기 구조가 주몽신화와 너무 똑같은 것이 아닌가. 작은 해프닝이었다. 러즈더 회장은 그동안 쌓아온 역사지식을 토대로 그저 고구려 신화를 이야기한 것일 뿐이었다. 잠깐의 흥분이 이내 실망으로 바뀌었다. ■ 닮은 꼴을 찾는다는 것 하지만 기자는 또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이른바 ‘코리안루트를 찾아서’라는 타이틀로 러시아와 중국을 누비는 것이 아닌가. 자칫 ‘10%의 닮은 꼴’에 매달려 ‘90%의 다름’을 사상(捨象)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취재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닮은 10%라도 찾으면 그것에 짜맞추어 해석을 시도하는 그런 우를 범하는 것이 아닌가. 7월12일,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300㎞ 떨어진 곳, 배를 갈아탄 시간까지 합해 모두 8시간 걸려 간 곳이 유명한 바이칼 호수였다. 들어서는 길에 왼쪽 저편에 보인 이른바 모녀 샤먼 바위(일명 부르한 바위)를 보고 박근우 교수(이르쿠츠크 국립언어대)가 귀띔한다. “꼭 우리나라 독도가 연상되지 않나요?” 듣고 보니 그럴 듯하다. 호수 안 알혼섬에서 만난 부랴트 샤먼 발렌친의 첫마디 역시 바로 한국인과의 친연관계였다. “옛날 옛적에 부랴트인(몽골 혈통의 종족)과 한국인의 조상은 연결되었다. 그대들을 솔롱고스라 했다. 몽고반점이 있지 않으냐. 그대들과 우리는 유대가 있고 정이 있다. 칭기즈칸과 한국 공주가 결혼하지 않았느냐.” 7월16일, 부랴트 공화국의 수도 울란우데에서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분소 부랴트 센터를 찾았다. 몽골학과 티베트학, 불교학, 생물학, 물리학을 연구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보리스 바자로프 윈장과 세르게이 다닐로프 고고학 분과위원장은 탐사단 앞에서 재미있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유전자 지도를 보면 부랴트인과 한국인 사이에 상당한 친연관계가 있다고 한다. 2년 전 울란우데에서 국제문화학회가 열렸는데, 그때 어떤 여성 인류학자(투멘이라는 이름을 가진)가 한국인과 부랴트인의 관계를 설명했다. 현대 부랴트 인근 지역의 경우 중국인보다 한국인의 게놈과 비슷하다는 연구 분석도 있었고….” 바자로프 원장은 “일본인들은 이미 1950~60년대 뿌리를 찾는다고 이곳을 들락날락거렸다”면서 “우리 연구소에서는 아직 한국 관련 연구는 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그날 밤, 샤먼센터(샤먼을 배출하는 일종의 학교)가 주최하는 샤먼 승급(5급) 심사장에 찾아갔다. 샤먼을 키우는 학교가 있고, 샤먼도 등급시험을 보아야 한다니 신기했다. “심사장에서는 절대 떠들지도, 방해도 하지 마라. 샤먼이 트렌스(신과의 교감)하는데 몸조심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해 조심 또 조심했다. 신화학자인 양민종 부산대 교수가 유창한 러시아말로 샤먼센터의 장(長·종정)인 마이예르 잠발로비치를 ‘알현’하고, ‘한 말씀’ 청하자 역시 한국인과의 친연관계를 언급한다. “한국인과 부랴트인은 가까운 친척이다. 신들이 말한 것이다. 둘 다 바이칼에서 왔다. 지성과 감성으로 느낄 수 있다. 지난해 한국인이 바이칼에서 왔다는 가설이 공표되었다.” 다음날, 다시 샤먼센터 쪽에서 알려왔다. “어젯밤 (탐사단이 간 뒤에) 접신(接神) 때 종정께 다시 여쭤보았는데 ‘언젠가 부랴트인과 한국인이 좁은 땅에서 머리를 맞대고 살았다’는 응답을 받았다고 하네요.” 하루 뒤에 다시 덤으로 응답을 해주는 것에 기자는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혹 탐사단을 위해 이들이 ‘립서비스’ 수준, 즉 ‘입맛에 맞는 맞춤형 대답을 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런 고민을 하던 중에 7월24일 다워얼의 해프닝이 일어난 것이다. “다 그렇지는 않겠지요. 동질적인 문화와 가치관, 신념체계를 갖고 있는 집단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유사성과 친연성을 이야기할 수 있겠죠. 신화의 이야기 구조가 비슷하고 세계관도 비슷하다면….”(양민종 교수) ■ 게세르와 단군의 친연성 하기야 그렇다. 현장을 찾는다는 것은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보고 어느 한 곳으로도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의 감각을 찾는 과정이 아닌가. 그런데 과연 무엇이 비슷하다는 걸까. 알혼섬에서 샤먼 발렌친이 술에 취해 암송하는 소리를 듣던 양 교수는 내심 깜짝 놀랐다고 한다. “원래 발렌친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신들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때는 달랐어요. 평소의 레퍼토리를 버리고 게세르시를 암송하는데, 그것이 꼭 단군신화에 스토리를 입힌 것 같았어요.” 게세르(Geser) 신화는 동북아시아와 시베리아를 아우르는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는 영웅 서사시의 제목이자 등장 인물의 이름이다. 내용의 얼개를 보면. “지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늘세계 회의가 열리고, 하늘신 히르마스가 둘째아들인 게세르를 지상으로 내려 보낸다. 게세르는 지상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한 뒤 인본주의와 조화를 이룬다. 결혼해서 아들을 낳은 게세르는 악한 무리와 전투를 벌인 뒤 지상의 악을 멸하고 제국을 건설한다. 그후 자손들과 승리의 주역들은 동서남북으로 확산, 제국을 확장시킨다.”(양민종이 옮긴 ‘바이칼의 게세르 신화’·2008년·솔) 단군신화도 닮은 꼴이다. 지상세계의 문제를 목격한 환웅이 환인의 허락을 얻어 무리 3000명과 함께 지상으로 내려온다. “이후 환웅은 신시(神市)로 일컬어지는 하늘신의 직접 통치구역을 설정하고 우사, 풍백, 운사 등과 함께 지상에서 인간들을 괴롭히는 악의 무리를 제압한 뒤 지상과 우주의 조화를 복원시키잖아요. 게세르 신화와 닮은 꼴이라 볼 수 있습니다.” 기자는 덧붙여 게세르 신화에서 하늘신인 히르마스가 맏아들이 아닌 둘째(게세르)를 내려보내는 것과, 단군신화에서 적자(嫡子)가 아닌 서자(庶子)를 보내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찍이 육당 최남선은 우리 민족을 찾으려면 부랴트에서 찾아보라고 했다고 한다. “육당은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에서 조선고대사의 수수께끼를 해결할 단서로 단군신화를 언급했는데요. 아마도 육당은 게세르 신화를 단군신화와 쌍둥이 형제로 인식한 것 같습니다.”(양민종 교수) 그런데 탐사 초반부터 기자의 뇌리를 떠나지 않은 의문점이 있었다. 왜 우리는 이 머나먼 바이칼 호수에서 단군신화의 원형을 찾는 것일까. 그리고 왜 우리는 몽골을 마치 ‘우리의 모국’처럼 여기고 있는 것일까. 혹 그 반대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통설의 노예가 되어 그저 기존의 학설을 공리(公理)처럼 받아 들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머릿속은 그저 뿌연 안개만 가득찰 뿐이었다. 근거없이 말하면 역시 지나친 민족주의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니까. 그런데 7월12일, 샤먼 발렌친의 의식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까 발렌친은 부랴트족의 신화인 게세르 신화와 단군신화는 닮은 꼴이고, 게세르 신화의 이동경로가 티베트-몽골-부랴트이며, 단군신화도 게세르의 영향을 받아 생겨났을 거라고 말하는데요. 사실은 단군신화가 이른바 게세르 계열의 신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채록본입니다.” 단군신화가 동북아에서 채록된 게세르 계열 신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신화학자인 양 교수의 설명을 듣고 나서 기자의 뿌연 머릿속의 안개가 말끔히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 몽골이 우리의 뿌리인가, 우리가 몽골의 뿌리인가 두 번째 의문점. 과연 13세기 때 나라가 선 몽골은 우리의 뿌리인가. 이것 또한 당연히 생기는 의문이다. 여기서 몽골제국을 세운 칭기즈칸의 출자를 보면 아주 흥미로운 대목을 만날 수 있다. ‘몽골비사’에 나온 칭기즈칸과 관련된 출생의 비밀. 주채혁 세종대 교수와 함께 몽골의 역사를 담은 ‘몽골비사’를 풀어보면. 바이칼 호수까지 흘러가는 셀렝가 강 일대에 자리잡은 메르키드족인 예케 칠레두라는 인물이 아내를 빼앗긴다. 약탈자는 몽골의 예수게이라는 인물이고, 약탈 당한 비운의 여인은 후엘룬이다. 그런데 후엘룬은 예케 칠레두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몽골로 끌려간 후엘룬이 낳은 아이는 바로 칭기즈칸이다. 그러니까 칭기즈칸의 생부는 몽골족인 예수게이가 아니라 메르키드족인 예케 칠레두라는 것이다. “칭기즈칸이 몽골 혈통이 아니라 메르키드 족의 핏줄이라는 것이 담고 있는 함의는 큽니다. 그리고 이 메르키드족이 다름 아닌 발해 말갈이라는 설이 주류를 이루니까요.”(주채혁 세종대 교수) 발해를 비롯한 우리 역사의 뿌리가 몽골이 아니라, 몽골의 뿌리가 발해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 또한 헛된 민족주의의 발로라는 비아냥을 들을까. 과연 그럴까. 기자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한 것은 부랴트계 러시아 학자들의 발언이었다.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분소에서 만난 바자로프 원장은 “북방에서 한반도(남쪽을 의미)로 건너갔다는 고정 관념 말고, 한반도 인근에서 북방으로 건너왔다는 설명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곁에 있던 다른 학자들도 “한국인이 부랴트에서 기원한 게 아니라 부랴트 사람들이 한국인으로부터 왔는지도 생각해봐야 하지 않으냐”고 입을 모았다. 고고학자인 니콜라이 이메노호예프는 아예 “거란이 일어났을 때(BC 907년 무렵) 한반도 부근의 한민족이 북단의 유목세계인 바이칼로 이동했을 수도 있다”는 추론을 내기도 했다.
물론 “신화라든가, DNA라든가, 언어학적 측면이라든가 모든 영역에서 한국인과 부랴트인을 포함한 북방 민족과 친연성이 있는 것은 사실 같지만, 더욱 딱딱한 증거들, 즉 과학적인 분석이 더 필요한 것 같다”는 이곳 학자들의 말은 맞다. 여기서 다시 게세르 신화와 단군신화, 그리고 몽골비사와 발해 유민과의 관계 등을 하나하나 분석해보자. 단군신화는 과연 게세르 신화의 아류인가. 그리고 단군신화는 과연 한민족만의 건국신화인가. 아니면 동북아시아 여러 민족, 아니 동이계 공통의 신화인가. 양민종 교수가 풀어주는 단군신화 이야기다. 또 하나 주채혁 교수로부터는 몽골비사가 담고 있는 수수께끼, 즉 몽골과 발해 관계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르쿠츠크·울란우데·자거다치(러시아·중국)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 후원 | 대순진리회>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34) 단군신화, 몽골비사의 숨은 뜻 | |||||||||
입력: 2008년 06월 06일 16:57:36 | |||||||||
ㆍ동북아 신화의 계보, 맨 위에 단군이 있다 우리는 이미 BC 4500~BC 3000년 전 발해연안에서 꽃을 피운 훙산문화에서 단군신화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음을 논증해왔다. 제단과 여신묘, 적석총 등 이른바 단·묘·총 3위일체 유적의 발견과 곰 이빨, 곰 소조상, 곰형 옥기 등의 출토가 이를 고고학적으로 입증시켜준다. 이미 훙산문화 시절에 제정일치 사회가 개막되었음도 보았다. 단군신화를 유심히 보면 이것은 단순한 신화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단군 왕검은~1500년간 나라를 다스리다가~주 무왕이 즉위한 해(BC 1046년 무렵)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삼국유사)
주 무왕이 은(상)을 멸한 시점으로부터 나라를 다스렸다는 1500년을 더하면 BC 2500년 무렵이 된다. 여기에 환인→환웅↔웅녀→단군의 시대를 감안하면 BC 3000년 무렵과 맞아 떨어진다. 그런 뒤 은(상)이 망하자 기자(箕子)가 본향인 단군조선의 영역으로 돌아오자, 정권을 내주고 장당경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얼마나 기승전결이 완벽한 스토리 구조인가. ■ “단군신화는 동이족의 공통신화” 그런데도 시라도리 구라기치(白鳥庫吉)와 이마니시 류(今西龍) 같은 일본학자들의 헛된 부르짖음으로 “단군신화는 잘 구성된 제국의 흥망성쇠”(양민종 부산대 교수)가 아니라 그저 ‘가공스러운 선담(仙譚)’, ‘일고의 가치도 없는 전설“이라고 폄훼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번 기획을 진행하면서 끈질기게 ‘동이(東夷)의 역사’임을 강조해온 것과 일맥상통한다. “단군신화를 있는 그대로 봐야하지 않을까요. 지금까지는 이데올로기에 끼워 맞춘 측면이 강하고…. 단군신화를 찬찬히 뜯어보면 우리가 상식처럼 배워온 특정 종족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투영된 건국신화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양민종 교수) 즉, 일연스님이 쓴 조선 건국 신화는 건국 이전의 하늘세계 모습과 건국 이후 국운이 다해 쇠락하는 과정까지를 고스란히 담은 제국의 흥망성쇠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 뼈대만을 기록한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 살을 붙인 서사시의 전개양상으로 분석해볼까요. 우선 하늘신의 세계가 있고, 환웅이 지상으로 강림하는 이유를 담은 프롤로그, 신시(神市)의 형성과 홍익인간과 제세이화(濟世理化)의 실현을 담은 제1부, 아사달에서 제국을 건설한 뒤 단군왕검 시대의 통치기를 담은 제2부, 그리고 제국의 쇠퇴와 부활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제3부…. 어떤가요. 특정종족의 건국 및 족조신화로만 축소시킬 수 있을까요?” 단군신화에 건국신화의 모티브가 분명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건국신화로만 보는 관점은 신화 내용을 축소시키는 우를 범한다는 게 양 교수의 설명이다. 또한 단군신화를 곰토템족이 호랑이 토템족을 꺾고 나라를 세운다는 특정종족의 국가성립 신화로 보는 관점 또한 좁은 해석이라는 것이다. “단군신화의 통치이념을 한번 들어봅시다. 특정 종족의 이념이 아닌 ‘홍익인간’과 ‘제세이화’ 아닙니까. 환웅이 지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곰과 호랑이로 대표되는 존재들이 과거의 모습을 탈피하고 조화롭고 보편적인 세계로 진입하려는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양 교수는 “단군신화는 곰 족이나 호랑이 족의 토템에서 비롯된 특정종족의 건국신화가 아니라 다양한 종족들의 보편적인 세계 건설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단군신화는 조화와 통합, 상생을 지향하는 인간주의 사상이 스며든, 고대세계의 보편적인 제국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대서사시라는 것이다. “결국 단군신화는 한민족만의 신화가 아니라 동이계로 대표되는 다종족, 즉 동북 아시아인의 신화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제와서야 순혈주의를 나무라고 세계화를 부르짖지만, 단군은 이미 다양한 종족들이 함께 꾸며가는 보편적 세계를 포괄하는 이상적인 제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해석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단일종족의 건국신화, 족조신화로만 축소시킨 것은 결국 우리 역사를 축소시키는 것입니다. 단군신화에서 볼 수 있는 조선은 벌써 여러 종족이 여러 문화를 조화롭게 융합, 공동가치를 지향한 동아시아 고대제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데 말입니다.” ■ 게세르 신화가 도리어 단군신화 계열 또 하나, 동북아시아 신화 속에서 단군신화의 위치는? 과연 단군신화는 바이칼 호수 주변 종족인 부랴트인들의 신화인 게세르 신화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인가. 육당 최남선도 단군신화의 얼개와 비슷한 신화로 게세르 신화를 꼽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과연 이 바이칼 호수 주변에서 단군신화의 모태를 찾는 작업이 유의미한 것일까. 과연 담딩수렝을 비롯한 몽골연구자들의 말처럼 “게세르 신화의 이동경로가 티베트→몽골→부랴트이며, 단군신화도 게세르 신화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일까. 기자는 여기서 양 교수의 이야기를 듣고 하나의 실마리를 부여잡았다. “중요한 것은 게세르 계열 신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티베트 판본(링 게세르)은 사실 19세기에 채록됐다는 겁니다. 몽골계 판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기록은 1716년입니다.” 더구나 게세르 이야기 가운데 가장 신화적이고, 샤머니즘 세계의 이상을 잘 표현한 것으로 평가되는 몽골계 부랴트 판본이 채록된 것은 불과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군신화는? 일연 스님(1206~1289년)이 삼국유사를 쓴 것은 1280년 무렵이다. 게세르 신화의 채록보다 500년 가까이 앞선 것이다. 한마디로 단군신화는 이른바 게세르 계열 신화 가운데 가장 먼저 채록된 신화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단군신화가 게세르 신화 계열이 아니라 도리어 게세르 신화가 단군신화 계열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는 얘기다. “확고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지금까지 불러온 게세르 계열의 신화는 이제 단군-게세르 계열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함의는 매우 크다. 우리는 그동안 새로운 역사학이나 고고학 자료만 나오면 일본이나 북방을 쳐다보면서 그 원류를 찾느라 법석을 떨기 일쑤였다. “이런 것들은 우리 역사의 타율성과 정체성을 강조한 식민사학의 영향이 크다”는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해석을 참고할 만하다. 양민종 교수도 “신화 내용까지 북방을 비롯한 다른 지역의 유사성을 강조하면서 일방적인 전파론의 잣대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고 있다. ■ 차라리 몽골의 조상을 찾아라
“메르키드족, 즉 발해 말갈의 후손이었던 칭기즈칸은 훗날 자신의 혈통, 즉 메르키드족을 부인하고 섬멸작전에 나섭니다. 순수한 몽골혈통임을 강조한 나머지 자신의 혈통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섬멸작전 뒤에 메르키드족의 아내와 딸들을 차지하는데, 그 가운데 훌란 공주라는 여인이 포함됩니다.”(주채혁 세종대 교수) 이 훌란 공주는 몽골 역사상 전설적인 미인으로 꼽힌다. 17세기 문헌인 ‘몽골원류’와 ‘알탄톱치(황금사략·黃金史略)’에는 훌란 공주를 ‘솔롱고스의 공주’라고 적고 있다. 주채혁 교수는 펠리오의 견해를 따라 “일반적으로 ‘무지개의 나라’를 뜻하는 솔롱고스(Solongos)는 사실 솔론, 즉 누렁족제비를 잡아 파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주장한다. “재미있는 것은 ‘알탄톱치’를 보면 훌란 공주의 아버지 다이르 우순 칸을 보카 차간 한이라고 적고 있다는 겁니다. 보카이(Booqai)의 보카는 ‘늑대’의 존칭어로 몽골에서 발해를 지칭합니다.” 주 교수는 “어쨌든 지금 헤름투라는 곳, 즉 훌룬부이르 몽골스텝의 하일라르 강변에 헌납된 훌란공주와 칭기즈칸이 신혼 초야를 보낸 것으로 짐작되는 유적이 있다”고 말한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훗날 몽골제국을 좌지우지한 여인 또한 고려여인인 기황후라는 것이다. 1333년쯤 원나라 황제 혜종이 마시는 차와 음료를 주관했던 궁녀에 불과했던 기(奇)씨는 총명하고 빼어난 미모로 일약 제2 황후에 오른 뒤 치열한 정권다툼 끝에 혜종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을 황태자로 등극시킨다.(1354년) 이후 기황후는 30여년 간 권세를 휘두른다. 탐사단에 합류한 몽골학자 에르데니 바타르 네이멍구대 몽골사연구소 박사는 ‘원서 후비열전(元書後妃列傳)’을 인용, 재미있는 논문을 썼다. 즉 “기황후가 1365년 정식 황후로 책봉된 뒤 숙량합(肅良哈)씨라는 성을 하사받았다”는 것이다. 황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은 기황후는 1359년 지금의 오르도스 지방에 식읍을 받는다. 에르데니 바타르 박사는 “지금도 오르도스 지방에는 솔롱고스, 즉 숙량합사(肅良哈思)라는 성을 가진 몽골인들이 많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그런 몽골이 7차례나 고려를 유린했으니, 끈질긴 인연이 도리어 악연으로 바뀐 셈이다. 다시 ‘몽골비사’를 반추해보면 흥미로운 추측을 할 수 있게 된다. 몽골이 지금 우리 선조가 아니라 우리가 몽골의 선조일 수도 있다는 추정이다. ■ “발해가 몽골의 뿌리” 칭기즈칸이 태어난 때가 1162년. 그런데 ‘몽골비사’는 칭기즈칸으로부터 12대 위의 역사부터 기록한 책이다. 몽골비사를 보면 여시조 알랑 고아가 빛의 교감으로 아들을 낳게 된다. 그런데 알랑 고아의 아버지는 코리-투메트 부족의 귀족인 코릴라르타이-메르겐, 어머니는 바르쿠진-고아였다. 하지만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는 스스로 코릴라르라는 씨족을 만든 뒤 정든 코리-투메트 족의 땅을 떠나 부르칸 산으로 떠난다. 그 과정에서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의 딸 알랑 고아가 부르칸 산에서 둥지를 틀고 있던 도분-메르겐이라는 남성을 만나 아이를 낳은 것이다. 이 신화를 뜯어보면 ‘빛의 감응’, 즉 일광감응(日光感應)이라는 측면에서는 유화부인의 설화와 비슷하고, 시기를 받아 정든 고향을 떠나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측면에서는 주몽설화와 흡사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유화부인 설화와 주몽설화가 칭기즈칸의 설화보다 최소한 800~900년은 앞선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고? 몽골비사가 칭기즈칸 시대(12세기 초)부터 앞선 12대의 역사를 쓴 것이라면 역산해볼 때 알랑고아의 시대는 800~900년쯤 되지 않는가. 그러니 늦어도 기원전 1세기의 신화인 유화부인·주몽설화보다 800~900년가량 늦을 수밖에.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몽골을 이룬 사람들은 발해의 고급문명을 바탕으로 강력한 무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겠어요. 셀렝게 강 일대는 철의 주산지였으니까 더욱 그랬겠지요.”(주채혁 교수) 기존의 뿌리 깊은 통념을 깨는 것. 역사를 공부하는 자세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울란우데·자거다치·모리다와/이기환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35) 에필로그-발해문명이 던진 메시지 | |||||
입력: 2008년 06월 13일 17:47:19 | |||||
ㆍ갇힌 역사를 넘어 동이족 8000년을 발굴하다 바로 이맘때였다. 기자는 지난해 비무장지대 일원, 즉 민통선 이북지역을 탐사 중이었다. 한창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이라는 기획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단과 한국전쟁, 그리고 냉전의 와중에 방치되고 훼손되고 있는 비무장지대 일원 문화유산을 찾는 기획이었다. ■ 휴전선 너머로 떠난 역사기행
때로는 순간 길을 잃기도 했다. 땅거미는 사납게 밀려오지, 발밑엔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지…. 허겁지겁 빠져나온 뒤 밤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상황을 복기하면 “미친 짓을 했구나”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군사분계선을 딱 반으로 가른 채 철원 풍천원 들판에 방치된 태봉국 도성은 손만 뻗으면 잡힐 듯했다. 철책선 너머 김화 전골총(병자호란 때 전사자들을 모은 무덤)도 마찬가지였다. 한걸음이면 다가갈 수 있는 그렇지만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곳…. 그랬다. 우리는 저 철책선 너머로는 단 한 발자국도 가지 못하는 신세인 것이다. 그런데 민통선 기획을 하던 도중 기자는 또 하나의 기획을 맡게 되었다. 바로 이 ‘코리안루트를 찾아서’라는 기획탐사였다. 러시아 연해주~바이칼호~중국 동북부~발해연안까지 1만㎞를 달리면서 이른바 ‘한민족의 시원’을 찾는 탐사였다. 비행기를 타고 훌쩍 날아간 곳은 연해주 체르냐치노 유적이었다. 러시아에서도 궁벽한 곳. 곰이 간간이 출몰하고, 모기떼가 들끓는 드넓은 초원지대. 그런데 이곳이 발해(AD 698~926년)의 솔빈부(率賓府·발해의 지방통치조직의 하나)가 존재했던 곳이라 하지 않는가. 더구나 여기까지 발해인과 말갈인이 오순도순 함께 살았던 흔적, 즉 발해인의 돌무덤과 말갈인의 흙무덤이 사이좋게 조성되어 있지 않은가. 또한 BC 3세기쯤으로 보이는 옥저인의 쪽구들과 발해인의 쪽구들이 같은 문화층에서 보이지 않은가. 더구나 이 유적은 1937년 소련 정부에 의해 시베리아로 강제이주 당할 때까지 고려인의 터전임을 보여주는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지 않은가. 정석배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의 말처럼 이 체르냐치노는 옥저~발해·말갈~고려인이 2300년 동안 끊길 듯하면서도 우리 역사의 명맥을 끈질기게 이어온 드라마틱한 유적인 것이다. 기자는 체르냐치노 마을의 야산에 올라 드넓은 평원과, 우리 역사의 맥을 묵묵히 지켜보며 흐른 솔빈강(라즈돌라야)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빠졌다. 한낱 철책선에 가로막혀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이 ‘처량한 인사여!’. 철책선 핑계만 댈 수 있을까. 식민·분단·냉전사관의 견고한 틀에 갇혀 한 치 앞도 나가지 못해온 딱한 신세여! 우리의 역사를 한반도 남부에 국한시켜 해석하고, 그 좁은 틀을 벗어나 폭넓게 역사를 보려고 하면 무슨 국수주의니 지나친 민족주의니 하면서 ‘재야사학’으로 몰아붙여 폄훼하기 일쑤이지 않는가. ■ 버려야 할 순혈주의 잠시 감상을 깨고 또 하나 던져버려야 할 망령이 있었으니 바로 순혈주의였다. 발해인과 말갈인이 오순도순 모여 산 체르냐치노 마을이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역사는 지금 우리가 말하는 ‘한민족’만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단순히 ‘한민족의 시원을 찾는’ 기획이라면 그것은 빨리 저 도도히 흐르는 솔빈강에 던져버려야 할 국수주의의 망령일 것이다. 작지만 의미 있는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의 역사는 결코 한반도, 그것도 한반도 남부에서만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과 우리 역사는 결코 한민족만의 역사가 아니라 주변 종족과의 융합을 통해 창조해낸 역사라는 것이다. 이 깨달음은 탐사 내내 자칫 빠지기 쉬운 이른바 지나친 민족주의의 유혹과, 역사를 찾아서 무엇하느냐는 식의 냉소 및 허무주의의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주었다. 체르냐치노를 떠나 바이칼호~울란우데~자거다치~하얼빈 등을 거치면서 기자는 “한국인과 (우리는) 매우 닮았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런데 탐사 도중 만난 몽골계 러시아 학자들은 “한국인의 뿌리가 몽골인이 아니라 몽골인의 뿌리가 한국인일 수 있지 않느냐”는 의문을 던졌다. 그랬다. 이것은 이른바 민족문화의 윈류를 북방에서만 찾는 무비판적인 시도에 대한 현지 전문가들의 죽비 소리이지 않는가. 신화학자인 양민종 부산대 교수는 “제국의 흥망성쇠를 담은 단군신화는 한민족만의 신화가 아니라 동이계열의 공통신화이며, 이른바 게세르 계열의 신화 가운데 가장 먼저 채록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1280년 무렵)는 게세르 신화의 채록(1712년)보다 500년 가까이 앞서며, 그 내용도 특정 종족의 건국신화가 아니라 다양한 종족이 여러 문화를 조화롭게 융합, 공동가치를 지향한 동아시아 고대 제국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주채혁 세종대 교수는 “적어도 몽골의 역사는 발해·말갈 유민의 역사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즉 칭기즈칸의 선조가 발해·말갈의 유민이고, 칭기즈칸(1162년 탄생)의 12대 선조(700~800년?)부터 쓴 ‘몽골비사’의 내용은 아무리 늦어도 BC 1세기 신화인 유화부인·주몽설화보다 800~900년가량 늦는다는 것이다. ■ 발해문명의 의미 러시아~중국 동북방을 돌아 발해연안에 닿은 기자는 BC 6000년부터 동이족이 창조해낸 발해문명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목도하고 파천황의 경지를 경험한다. 30년 넘게 발해문명을 연구해온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이끎에 기자는 차하이(査海)·싱룽와(興隆窪)마을, 즉 동이의 본향을 목격한다. 빗살무늬·덧띠무늬 토기와 용신앙·옥문화의 탄생, 그리고 씨족마을의 형성 등…. 훙산문화(紅山文化·BC 4500~BC 3000년)의 중심지, 즉 제단·신전·적석총 등 정신문명의 3위일체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뉴허량(牛河梁) 유적…. 기자는 이곳에서 웅녀(熊女)의 원형을 짐작할 수 있는 여신상과 곰뼈, 곰 소조상 등을 목도했고, 찬란한 옥기문화를 통해 일인독존의 시대, 즉 제정일치 시대의 개막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 민족을 중심으로 한 동이족의 예제가 탄생했고, 청동기의 맹아가 엿보이는 시기였다. 단군신화의 원형을 벌써 이 훙산문화 시대에 볼 수 있는 것이다. 중국학계는 중원의 황허(黃河) 문명보다 앞선 문명이 그들이 그토록 오랑캐의 땅으로 폄훼했던 만리장성 이북에서 출현하자 그야말로 충격에 빠진다. 결국 통고(痛苦)의 과정을 거친 중국학계는 “중국문명의 효시는 바로 랴오허 문명(발해문명)이었고, 바로 이 랴오허 문명과 중원의 황허문명 등이 융합해서 오늘날의 중국문명을 이뤘다”고 견강부회한다. 이른바 다원일체론이다. 중국학계는 엉뚱하게도 중국인의 조상으로 추앙했던 황제(黃帝)를 훙산문화의 대표로 앉힌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 발해문명의 창시자인 동이는 BC 2000년 이전부터 거대한 석성을 쌓고 청동기의 예제화를 통해 강력한 국가, 즉 조선(단군)시대를 연다. 츠펑(赤峰) 싼줘뎬(三座店)에는 본 치(雉)만 13개나 되는 거대하고 견고한 석성을 보고 깜짝 놀랐다. 또 하나, 수이서우잉쯔(水手營子)에서 확인된 청동예기, 즉 청동꺾창도 의미심장한 유물이다. “어쩌면 그렇게 고구려와 백제의 석성 축조방식과 똑같은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왕이 지녔을 것으로 보이는 청동꺾창의 경우 예제의 완성을 뜻합니다.”(이형구 교수) 그런데 만리장성 이북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단군)조선의 일파 중 하나가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중원으로 향한다. BC 1600년 무렵이다. 최첨단 청동기를 장착한 동이의 일파는 중원의 하(夏)나라를 제압하고 천하를 통일한다. 은(상·BC 1600~BC 1046년) 시대의 개막이다. 그후 550여년간 중원은 동이족의 차지가 되었다. 그들은 중원 민족과 갑골문자를 창조하고, 찬란한 청동기 문화를 꽃피운다. 정저우(鄭州)와 옌스(偃師), 인쉬(殷墟) 등에 대규모 궁전을 건설하고 노예제를 채택한다. 달은 차면 기우는 법. 은(상)의 말기에 세력을 키운 주(周)나라가 은(상)을 멸하고 다시 한족(漢族)의 나라를 세웠다. 은(상)의 왕족인 기자(箕子)는 종선왕거(從先王居), 즉 본향인 발해연안으로 떠난다. BC 1046년 쯤, 즉 BC 11세기 무렵이다. 은(상)의 엘리트 계층인 기자(箕子)는 단군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이에 단군은 정권을 내주고(잃고) 장당경(藏唐京)으로 은신한다. 기자조선은 단군조선의 토착문화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이른바 난산건(南山根)문화를 창조한다. 또한 춘추 전국시대의 개막(BC 770년)으로 전쟁의 시대가 도래하자 예기보다는 무기가 성행하게 된다. 훗날 ‘한국형 세형동검’으로 발전하는 발해연안식 청동검(비파형 동검)이 탄생하는 것도 이때다. 석관·곽묘와 적석총, 복골문화 등 동이계 특유의 문화 역시 그대로 이어진다. 기자조선은 BC 323년 천자를 칭하고, 중원의 연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강성대국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 사이(전국시대) 만리장성 이남 중원에서는 기자(箕子)의 후예로서 전국 12웅의 위세를 떨친 작지만 강한 나라 선우·중산국이 화려한 문화를 꽃피운다.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식민지가 되기도 했던 선우·중산은 80여년간(BC 380~BC 296년) 전성기를 이룬 뒤 멸망한다. 한편 만리장성 이북의 기자조선은 900년 가까이 존속하다가 연(燕)나라 망명인인 위만에 의해 멸망한다. BC 194년 무렵이다. 그러나 “위만도 어쩌면 중산국 혹은 조선의 후예일 가능성이 크다”는 해석(이형구 교수)도 유념해야 한다. 기자조선을 이은 위만조선 시기(BC 194~BC 108년)에도 조선은 천하를 통일한 한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중개무역을 독점하고 한나라 황제를 우습게 여기는 등 기세를 올리다가 1년간에 걸친 한나라의 공격을 받고 끝내 멸망한다. 한편 저 멀리 동북방에는 은(상)의 풍습을 빼닮은 군자의 나라 부여(BC 3세기~AD 494년)가 어느새 둥지를 틀었다. 점복, 제사, 음주가무, 은(상)의 역법 사용 등…. 그래, 그렇게 700년 넘게 꽃핀 부여의 역사가 다시 고구려·백제로 이어지고, 또 그 역사가 지금 이 순간까지 흘러오고 있는 것이다. ■ 식민·분단·냉전사관을 극복하며 자, 이제 눈을 들어 시야를 좀 넓히자. 그러면 한반도 남부, 철책선에서 꽉 막힌 우리 역사의 체증이 좀 뚫릴 것이다. 이번 탐사 내용이 100% 다 맞는 해석이라는 뜻인가. 절대 아니다. 학문은 절대진리가 없다. 이번 탐사가 식민사관·분단 및 냉전사관으로 갇혀버린 우리네 사고의 폭을 그저 넓혀주는 몫을 했다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지나간 일을 되돌아보고 다가올 일을 생각하기 위함이다.” 불멸의 역사가 사마천이 발분(發憤)의 역사서 ‘사기(史記)’를 쓴 까닭이다. 역사는 과거일 뿐이며, 미래의 길목을 가로막는 전봇대일 뿐이라는 인식에 대한 2000년 전 사마천의 대답이다. 일국의 지도자가 취임하자마자 먼저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향해 나가자”고 손길을 내밀었다. 그러자 일본은 중학교 사회과목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를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명기할 방침을 세우는 것으로 대답했다. 또한 우리 안에서 탈민족주의, 탈역사주의가 똬리를 틀기 시작할 때 중국은 발해문명을 중국의 문명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우리는 아직 식민주의·분단주의·냉전주의의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는 왜 돈을 버는가. 자기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단순히 돈의 가치만을 최고의 선으로 삼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제대로 된 역사인식없이, 그리고 삶의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지 않은채 돈만 벌면 그뿐이라는 사고가 지금 이땅의 백성들에게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감을 심어주고 있지 않는가.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후원 | 대순진리회> <시리즈 끝> |
출처 : Damduck Story -재미사마-
글쓴이 : damduck 원글보기
메모 :
'한문의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Re: 고대 피라미드에도 전기 사용됐다? (0) | 2009.06.15 |
---|---|
[스크랩] 코리안루트를 찾아서(경향신문) (0) | 2009.06.15 |
[스크랩] 재미있는 상식여행 (0) | 2009.06.15 |
[스크랩] 고구려벽화 (0) | 2009.06.13 |
[스크랩] 고구려 벽화.. (0) | 2009.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