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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음성군-2(자린고비 조륵 이야기)

최흔용 2009. 7. 26. 04:37

 

 

 자린고비란 구두쇠를 일컫는 말로 '결은고비'가 변하여 된 것이다. '결은'의 기본형 '겯다'는 '어떤 물건이나 종이 같은 것을 기름에 담그거나 적셔서 흠뻑 배도록 한다'는 뜻을 가진 동사다. '고비'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제사때 신위를 모시는 지방을 의미한다. 옛날 충주에 이씨 성을 가진 양반이 살았는데, 제사를 지낼 때마다 한번 사용하고 태워버리는 종이가 아까워 궁리 끝에 종이를 기름에 절여서 사용했다고 한다. 이에 부모 제사에 쓰는 종이 한장도 아까워할 만큼 인색한 사람을 '결은 고비'라 하였고, 이것이 변하여 자린고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 일설에는 충주의 그 이씨 부자가 지방으로 쓰는 종이가 아까워 태우지 않고 접어 두었다가 두고두고 쓰는 바람에 지방 속의 '고'자와 '비'자가 때에 절어 버렸다 해서 '절은 고비' 라는 말이 나왔고, 이것이 '저린고비->자린고비'로 변천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예부터 우리나라 전국 곳곳에서 자린고비가 속출하여 가난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부자가 된 사람들의 일화를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음성 금왕의 조륵이라는 사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표적인 자린고비로 손꼽힌 것으로 전해진다.

 

 

 조륵은 영조 때 사람으로 평범한 농부였는데 사람이 너무나 인색하고 지독한 구두쇠인지라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았다. 아닌게 아니라 그가 행한 이력은 보통 사람들은 손을 내저을 만큼 기상천외한 일들로 가득하다. 가령, 쉬파리가 장독에 앉았다가 날아가니 그 다리에 묻은 장이 아깝다 하여 장 도둑놈 잡으라고 외치며 단양 장벽루까지 쫓아간 일은 유명한 얘기고, 무더운 여름철이 되어 어쩌다 부채를 하나 사오면 그 부채가 닳을까 염려되어 부채를 벽에 매달아 놓고 그 앞에서 머리만 흔들었다. 또 어쩌다 제삿날이 돌아와 굴비를 사오면 제사를 지내고 난 다음 굴비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쳐다보면서 밥 한 그릇을 먹는데, 식구들이 어쩌다가 두번 이상 쳐다보면 " 얘, 너무 짜다.물켜라." 하고 호통을 치는 건 보통이고, 자기 없는 사이에 장모가 놀러 왔다가 인절미를 해서 먹고 남은 것을 보자기에 싸서 가져가는 것을 도중에 보고 펄쩍 뛰면서 도로 빼앗기도 하였다.

 

 이렇게 일전 한 푼도 남에게 주거나 빌려주는 일 없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만큼 목석같이 수십 년을 지나자 조륵은 그 고을에서 둘도 없는 큰 부자가 되었다. 음성의 자린고비가 큰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전라도에서 제일가는 구두쇠가 찾아왔다.

 " 조공, 나도 전라도에서는 소문난 구두쇠올시다만, 어느 정도 구두쇠가 되어야 이렇게 큰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이오?"

 조륵은 쓰다 달다 말도 없이 손님을 데리고 충주 탄금대로 향했다. 전라도 구두쇠가 신을 한 짝은 신고 한 짝은 들고 하며 교대로 신고 가며 보니 음성 자린고비는 아예 신발 두 짝을 모두 들고 가는 게 아닌가. 역시 한 수 위였다. 전라도 구두쇠를 탄금대까지 데리고 간 조륵은 시퍼렇게 굽이쳐 흐르는 강물 쪽으로 뻗은 소나무 가지를 가리키며

 "저 소나무 가지에 매달려 보시오."

하니 전라도 구두쇠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조륵이 한쪽 손을 놓으라고 하더니 잠시후에 다른 손마저 놓으라고 하자 전라도 구두쇠는 사색이 되어

 " 아니, 저 시퍼런 강물에 빠져 죽으란 말입니까?"

하며 두 손으로 나뭇가지를 꼭 붙들고 벌벌 떨었다.

 " 이제 됐으니 그만 올라오시오."

 전라도 구두쇠가 구사일생이라도 한 듯 겨우 올라오니 그제야 조륵은 부자가 되는 길을 일러 주었다.

 " 손님, 거부가 되려면 예사로운 구두쇠 정도로는 아니 됩니다. 지금 손님이 나뭇가지에 매달려서 죽게 되었을 때를 잊지 마시오. 손을 놓으면 바로 죽음이라는 생각, 만사를 죽기를 각오하고 실행한다면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오."

 아주 간단한 진리였지만 그 말에 담긴 의지와 철학을 충분히 새길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날이 저물어서야 음성 집에 돌아왔는데, 몇 년을 손 보지 않았는지 창에 구멍이 숭숭 뚫려 황소바람이 들락거렸다. 전라도 구두쇠는 밥을 먹을 때 밥풀 몇 알을 남겼다가 자기가 가지고 온 창호지 조각에 밥풀을 발라 대강 창구멍을 가리고 잠을 잤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 길을 나서며 고맙다고 인사말을 하고는 "조공, 문에 발랐던 종이는 내 것이니 뜯어가야겠소." 하니  " 암, 당연히 그래야지요."하고 서슴없이 승낙하였다.

 그리하여 길을 떠난 전라도 구두쇠는 많은 것을 배웠다는 기쁨에 발걸음도 가벼웠다. 한 오리쯤이나 갔을까,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손님, 날 좀 보고 가오." 하며 음성 자린고비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아닌가. 한참만에 숨이 턱에 받쳐 도착한 자린고비는 " 창호지는 손님의 것이니 가져가도 좋지만 종이에 묻은 밥풀은 우리 것이니 떼어 놓고 가야 마땅한 일 아니겠소?" 하는 것이었다. 전라도 구두쇠는 황당했지만 하는 수 없이 주머니 속에 꼬깃꼬깃 접어 넣었던 종이를 꺼내주자 자린고비는 준비해 가지고 나온 목침 위에 종이를 펼쳐 ?고 칼로 밥풀 바른 자리를 박박 긁어내더니 주머니에 담아 가지고 갔다. 전라도 구두쇠는 과연! 과연! 소리를 연발하며 돌아갔다.

 

 이렇게 지독한 자린고비 행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 마침내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너무 지독하고 불측한 행위느 미풍양속을 해치는 일이라 하여 암행어사를 보내어 사실을 알아보게 하였다. 평범한 과객 차림으로 자린고비로 소문난 조륵의 집을 찾아가 며칠을 묵으면서 살폈다. 자린고비가 어사의 정체를 알 리가 없으련만 웬일인지 날마다 진수성찬을 올리며 칙사 대접을 하니 전해들은 얘기와는 딴판이었다. 게다가 공손하고 친절하기가 비길 데가 없으니 오히려 의심이 들기도 하고 어사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며칠 후에 주인을 불러 인사하며 그만 떠나겠다고 말하자 조륵은 " 이삼일만 있으면 마침 내 환갑이니 기왕이면 좀더 쉬다가 잔치나 보고 가시지요." 하며 굳이 만류를 하는 것이었다. 못이기는 체 며칠을 더 묵으며 수소문을 해보니 자린고비가 환갑이 되는 해에 접어들면서부터는 한없이 너그러워져서 누구에게나 후하게 대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불러다가 돈과 쌀을 나누어 주는 인정을 베풀기도 하여 아주 딴 사람이 됐다는 것이었다.

 이윽고 자린고비의 환갑날이 되었다. 초대받아 오고 구경하러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소돼지를 수십 마리씩 잡아 술안주 또한 산을 이루어 아무리 먹고 마셔도 줄어들지 않을 듯했다. 잔치가 한창 무르익자 자린고비 조륵은 손님들을 향하여 말했다.

 " 여러분, 나는 혼자 잘살려고 구두쇠 노릇을 한 것이 아니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고자 근검절약을 평생 사업으로 실천해온 것인즉, 이제 그뜻도 이루어졌고 마침 내 환갑도 맞았으니 내가 할일은 끝난 것 같소."

하고는 자기 재산을 모두 이웃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이 같은 선행을 낱낱이 지켜본 암행어사는 자선가 조륵의 행적을 임금에게 자세히 고했고, 임금도 역시 가상하게 여겨 친히 가자(加資;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올리는 일)를 내리고 칭찬하였다. 또 혜택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너무나도 고맙고 아름다운 일이라 자린고비를 자인고비(慈仁考碑)라 고쳐 부르며 그의 행적을 기렸고, 전국 곳곳에 비를 세우고 역시 자인고비라 하였다. 여기서 '考'자는 '나를 낳아준 어버이'란 뜻인즉, 굶어 죽게 된 사람을 인정으로써 살게 하였으니 부모와 다름없다는 말이다.

 

 IMF 구제금융 한파로 경제난이 한창이던 1998년 음성군은 '자린고비상'을 제정하여 절약과 봉사로 남에게 모범이 될 만한 주민을 선정하여 시상하고, 금왕읍에 유래비를 세워 조륵의 생애를 기리고 있다.

  

 

출처 : Cho~i
글쓴이 : 초이 원글보기
메모 : 저린고비=결은고비에 관한 유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