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들의 행로를 바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후덥지근한 기운이 식영정까지 따라 온다.
명옥헌원림에서 떠나 보낸 님을 그리워하고, 시간이 멈춰버린 죽림재에서 흥선대원군의 서슬퍼런 국령을 받들고,
수남학구당에 들러 창평의 양반, 평민 자제들의 낭랑한 천자문 읽는 소리를 들으니 과거와 현재의 갈림길에 서 있는 듯 하다.
수남학구당에서 식영정까지는 광주호를 구비도는 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면 된다.
시원하게 에어컨 틀고 창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가로수 사이로 검푸르게 보이는 광주호를 보면서
그 언젠가 저 곳에 누군가의 사랑을 풍덩 빠뜨렸다는 여인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빠뜨려도 다시 솟구치고 다시 빠뜨려도 솟구쳐 올랐다는 그 슬프디 슬픈 전설같은 이야기..
추천에 감사드립니다
식영정(息影亭)은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의 정자로 조선 명종15년(1560)에 서하당 김성원(棲霞堂 金成遠)이
장인인 임억령을 위해 지었다.
식영정에 올라 뒤뜰의 적송사이로 내려보이는 성산사(聖山祠)는 1721년 부터 식영정을 지켜온 소은 정민하와
그의 장남 계당 정근 등 일곱분의 제향을 모시고 있으며 오래전에 없어진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석천 임억령은 이곳에서 식영정 20영(影)을 지었는데 김성원, 고경명, 정철 등의 제자들이 차운하였으며, 3명의 제자를 포함
임억령까지 4사람을 식영사선(息影四仙)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그래서 식영정을 달리 사선정(四仙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곳에 송강 정철 가사의 터라는 기념탑이 있는 것은 정철이 어린시절 식영정인근의 환벽당에서 임억령의 사위인 김성원과 공부를
하였고, 임억령에게 시를 배웠으며 부용당과 서하당을 다니며 학문을 공부하고, 훗날 성산별곡(星山別曲)등 많은 시가(詩歌)를
지었기에 식영정일원을 송강 문학의 산실로 부르게 된 것이다.
송강정철에 대해서는 인물에 대한 평이 각양각색 이길레 어느 한쪽의 말을 듣고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다.
그래서 송강 정철에 대한 부분은 송강정 편에서 역사적사실에 의한 판단과 그에 따른 반대논리를 소개할 생각이다.
식영정 근처엔 한국가사문학관과 별도의 무료주차장이 있어 주차하기는 아주 편리하다.
모든 정자가 그러하듯 다소 길다란 계단길을 걸어 올라 광주호가 바라보이는 풍광 좋은 자리에 위치해 있지만
식영정이 지어졌을 당시엔 광주호가 없었을 것이고 아마 창계천이 길다랗게 구비져 흘러 내려가는 계곡이 바라보이는 곳에
시를 읊을 정자를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식영정으로 올라가기전에 정면으로 보이는 두 건물은 좌측이 부용당이고 우측이 서하당이다.
장서각은 서하당 좌편에 있으며 1973년 송강의 성산별곡 목판집을 보관하기위해 지었지만 지금은 굳게 문이 잠겨있다.
이곳에 보관했던 목판집은 근처 한국가사문학관으로 옮겨져 과학적인 방법으로 보존되고 있기에 그 안에 무엇이
보관되어 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이 36세때인 1560년 경에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건물인 서하당(棲霞堂)은
장인 임억령을 위해 식영정을 먼저 짓고 나서 바로 자신의 별장인 서하당과 부용당을 근처에 같이 지었다고 한다.
병자호란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95년 담양군에서 이곳에 다시 복원하였다.
그러나 서하당과 부용당이 자리한 터는 일반적인 정자의 개념으로 본다면 다소 의외의 장소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쇄원이 깎아 지른 계곡을 벗삼아 자리잡고, 환벽당과 취가루 역시 조그만 동산의 몬당에 있으며, 바로 옆의 식영정만 봐도
수십개의 계단을 걸어올라야 되는 풍광 좋은 곳에 위치해 있고, 저 멀리 송강정과 면앙정도 수십개의 계단을 땀 뻘뻘 흘리며
올라가야 되는 풍광 좋은 곳에 위치해 있다.
계곡과 하천가, 또는 동산의 몬당위에 세워져 있는 대부분의 정자와 달리 서하당과 부용당을 식영정부근에 나란히 복원시켜
놓은 것은 그 연유를 알지 못하지만 분명 정자가 들어설 만한 위치가 아님을 금방 알수가 있다.
하지만 그 옛날 자미탄이 어떻게 구비져 흘렀는지에 대한 지형적 자료가 없기에 식영정아래 구비져서 흐르는 자미탄 물줄기는
분명 서하당과 부용당 근처까지 넘실댔을 것으로 보이고, 서하당이 장인 임억령을 위해 식영정을 짓고 자신을 낮추며 옆에서 보살
폈다면, 아마도 식영정이 바라보이는 지척에 서하당과 부용당을 지었을 것으로 보이기에, 지금 이 자리에 세워진 듯 하다.
서하당 김성원은 송강 정철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학문과 문학적 깊이가 깊었으며 거문고를 잘타는 팔방미인이었다고 한다.
그는 서하당과 식영정을 오가며 당시 식영사선(息影四仙)이라 불리웠던 장인 임억령, 고경명, 정철 등과 함께 성산의 경치좋은 곳
20곳을 택해 각자 20수씩 모두 80여수에 달하는 식영정이십영을 지었다.
식영정이십영(影)은 훗날 송강의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되었으며 창계천(옛이름은 자미탄)의 조대로 멱감고 낚시 다니다가
지칠 무렵 다시 돌아와 시를 읋던 그 시절 그 자리가 바로 이곳인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서하당이라는 상징성을 놓고 본다면
이곳 마루에 누워 오수를 청하며 시를 구상했을 수도 있다.
송강보다 11살이 많은 서하당은 훗날 송강의 처외재당숙으로 환벽당의 주인장 김윤제의 외손녀와 결혼한 어린 송강과 함께
김윤제의 환벽당에서 같이 공부하며 송강이 면앙정 송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같은 당대의 석학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봉 고경명, 옥봉 백광훈, 귀봉 송익필 등과 교우하며 가사문학의 최고봉 성산별곡을 창작해 내는데 음양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어린 정철에게 서하당은 큰 형님같은 존재로 그의 학문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창평면 지곡리에 있는 별뫼(星山)의
춘하추동 4계절의 변화와 서하당(棲霞堂)의 주인인 김성원의 풍류를 읊은 성산별곡을 정철이 만든것으로 보면 그가 얼마나 송강에게
영향력을 끼친 인물인지를 알 수 가 있다.
서하당은 전면 3칸, 측면2칸에 왼쪽으로 방이 하나 딸려있으며 방앞엔 또 다른 마루가 하나 있어
차를 마시며 시를 읊기에 좋은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부용당은 서하당을 1995년에 복원한 것보다 훨씬 전인 1972년에 복원하였다.
보통 부용당같은 정자는 네모진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으며 네개의 기둥 중 2개의 기둥을 물속에 담궈야 하나
지금의 부용당은 물이 만수가 되어도 두 기둥이 물속에 잠기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연꽃 줄기는 한 줄이 넘고 못의 깊이는 배꼽을 차네'라고 한 서하당의 글귀로 본다면 현재의 부용당은 그 의미가
상당히 퇴색되었다고 할 것이다. 복원을 하더라도 역사적 고증과 건물의 위치등을 살펴 연못의 깊이를 맞추었다면
훨씬 더 좋은 모습으로 다가 왔을 것이다.
전면 1칸에 측면 2칸인 부용당은 1칸이 방이고 1칸은 마루로 되어 있다.
성산사(聖山祠)는 1721년 부터 식영정을 지켜온 소은 정민하와 그의 장남 계당 정근 등 일곱분의 제향을 모셨던 곳으로
수재(水災)로 소실되었던 것을 송강의 11대손인 정조원이 1861년 환벽당을 인수하면서 그곳에 복원하였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없던 것을 담양군에서 식영정 뒤 편에 2005년에 복원시켜 놓았다.
식영정으로 올라가는 길은 송강 정철 가사의 터 기념비 옆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도 되고
나 처럼 서하당과 부용당을 먼저 보고 성산사를 거쳐 식영정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가도 된다.
아마도 식영정이 생기기 전 부터 있었을 이 적송은 수 백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곳을 지키며 자미탄을
내려다 보고 있다.
아주 오래전 옆의 적송이 벼락에 맞아 꺾어 졌다고 하는데 오래된 친구 하나를 보내고도 이렇게 의젓하게
서서 또 몇 백년을 식영정과 같이 희노애락을 겪을 것이다.
식영정 아래에서 서하당을 지나면서 식영정의 주인공이 서하당의 장인인 석천 임억령이라는 것은 이미 이야기 했다.
임억령(1496∼1568)은 본관이 선산(善山)이고 호는 석천(石川)으로 전남해남(海南)에서 태어났다.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고 1525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였고, 1545년(명종 즉위) 금산군수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
소윤(小尹)인 동생 임백령(百齡)이 대윤(大尹)의 선배들을 내 몰자 자책을 느껴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 해남으로 낙향하였다.
그러다가 1552년에 동부승지에 재등용되어 병조참지를 지내고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557년 담양부사로 옥과현감을 겸임하였다.
그후 1558년 벼슬을 버리고 담양 성산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동복(同福) 도원서원(道源書院) 등에도 배향되었있다.
문집으로는 '석천집(石川集)'이 있다.
석천 임억령은 하서 김인후, 눌재 박상, 면앙정 송순, 옥봉 백광훈, 백호 임제, 소쇄원 양산보, 고봉 기대승등과
긴밀한 인간관계를 맺었고 그들의 학문과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어 호남시학의 흐름을 형성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율곡 이이가 그의 시재와 학덕에 탄복하여 석천에게 시를 보냈을 만큼 율곡의 존경도 받았던 대학자이자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관직을 버리고 담양 성산에 안착한 석천은 일생동안 3천여수의 시를 지어 성산동 계산풍류의 시종으로 추앙을 받으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내 성산 시단을 형성했다고 한다.
가사와 시조의 대가라 불리는 송강 정철도 석천을 스승으로 받들고 시를 배웠다.
호남삼고(湖南三高)중의 한 사람이었던 석천은 고고히 간직한 선비정신만큼이나 정철 등 후학들에게도 존경받았던 인물로,
그 의 묘지는 현재 해남군 마산면 장촌리에 있으며 해남읍 구교리 해촌사에도 배향되어 있다.
환벽당에 걸려있는 임억령의 시 한 수는 5살 연상인 임억령이 김윤제가 환벽당을 지을 때 기념으로 준 시라고 한다.
烟氣兼雲氣 (연기의 기운인지 구름까지 겸했는지)
琴聲雜水聲 (거문고 소리인지 물소리가 섞이었는지)
斜陽乘醉返 (석양 무렵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오니)
沙路竹與鳴 (모래길에 대밭가마 소리쳐 우네)
이렇게 임억령은 동시대를 산 소쇄원의 양산보, 환벽당의 김윤제와 더불어 서하당을 비롯한 송강 정철 등의 학문과 사상의 정립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훗날 성산별곡의 기반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바람도 쉬어가는 식영정은 그 역사적 가치를 높히고 있을 것이다.
서하당을 흠모하여 만든 정철의 성산별곡을 감상해 보자.
성산별곡은 송강이 25세때 지은것으로 되어 있지만 여러가지 역사적 사실정황으로 보면
27세때 한양으로 올라가 40세때 처음 창평으로 낙향하여 4년간 지낼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서사
어떤 지나가는 사람이 성산에 머물면서(하는 말이)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들어보소
인생 세간에도 좋은 일이 많은데
어떠한 강산(자연을)을 갈수록 좋게 여겨
적막 산중에 들어서는 아니 나오시는고
소나무뿌리를 다시 쓸고 대나무 침상에 자리 보아(자리를 잡고)
잠깐 올라앉아 어떤가 (자연의 모습을) 다시 보니
하늘 가에 떠 있는 구름 서석을 집을 삼아
나는 듯 드는 모양이 주인과 어떠한고
맑은 시내의 횐 물결이 정자 앞에 둘러 있으니
직녀가 짠 아름다운 비단(은하수)을 뉘라서 베어 내어
잇는 듯 펼치는 듯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구나
산중에 책력(달력) 없어 사시(계절)를 모르더니
눈 아래 혜쳐 있는 경치 철마다 절로 나니
듣고 보는 것들 모두가 신선의 땅이로다.
성산의 봄풍경
매화가 피어있는 창문의 아침 볕에 향기에 잠을 깨니
선옹이 할 일이 딱히 없지도 않다.
울 밑 양지 편에 외씨를 뿌려 두고
매거니 돋우거니 빗김에 다루어 내니
(옛날 중국의)청문(이라는 사람의) 고사를 이제도 있다 할까
신을 바삐 신고 대지팡이를 흩던지니
도화 핀 시냇길이 꽃다운 풀 우거진 물가에 이어 있구나
잘 닦은 맑은 거울 속에 저절로 그려진
석병풍 그림자를 벗을 삼아 서하로 함께 가니
도원은 어디메뇨 무릉이 여기로다
성산의 여름풍경
남풍이 건듯 불어 녹음을 혜쳐 내니
계절을 아는 꾀꼬리는 어디에서 오던가.
희황 베개 위에(태평스럽게, 편안하게) 풋잠을 얼핏 깨니
공중 젖은 난간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구나
삼베 옷을 여며 입고 갈건을 기울여 쓰고
굽을락 기댈락 보는 것이 고기로다
하룻밤 비 내린 기운에 흥백련이 섞어 피니
바람기 없이도 온 산에 향기로다
염계 주돈이를 마주보고 태극(이 무엇인지)을 묻는 듯
태을진인이 옥자를 헤쳐서 얻었듯
노자암 건너다보며 자미탄 곁에 두고
큰 소나무를 차일로 삼아 석경에 앉으니
인간 세상은 유월이지만 여기는 삼추(늦가을)로다
깨끗한 강에 떴던 오리가 흰 모래밭에 옮아 앉아
백구를 벗을 삼고 잠 깰 줄 모르나니
무심하고 한가함이 주인과 (비교해서)어떠한가
성산의 가을풍경
오동나무에 서리달이 사경(밤 1시-3시)에 돋아 오니
깊은 산이 낮인들 그러할까
호주 수정궁을 뉘라서 옮겨 왔는고
은하수를 뛰어 건너 광한전에 올랐는 듯
짝 맞은 늙은 솔은 조대(낚시터)에 세워 두고
그 아래 배 를 띄워 가는 대로 던져 두니
흥료화 백빈주 어느 사이 지났관대
환벽당 용의 못이 뱃머리에 닿았구나
청강 푸른 풀이 우거진 물가에 소 먹이는 아이들이
석양에 흥겨워 짧은 피리를 비껴 부니
물 아래 잠긴 용이 잠 깨어 일어날 듯
연기 기운에 나온 학이 제 깃을 던져 두고
반공에 솟아 뜰 듯
소식(송나라의 시인)은 적벽의 추칠월이 좋다 했지만
팔월 십오야를 모두 어찌 칭찬하겠는가
고운 구름이 사방에 걷히고 물결이 다 잘 때에
하늘에 돋은 달이 소나무 위에 걸렸거든
잡다가 빠진 줄이 적선(이백)이 야단스럽구나
성산의 겨울풍경
공산(빈 산)에 쌓인 잎올 삭풍이 거둬 불어
떼구름 거느리고 눈조차 몰아오니
천공(조물주)이 호사로워 옥으로 꽃을 지어
만수천림(산의 숲과 나무)을 꾸며도 내는구나
앞 여을 가려져 얼어 독목교 비꼈는데
막대 멘 늙은 중이 어느 절로 간단 말인가
산늙은이 이 부귀를 남에게 자랑 마오
경요굴(=성산) 은거지를 찾을 이 있으리라
결사(結辭)
산중에 벗이 없어 책을 쌓아 두고
역사 속의 인물들을 거슬레 생각하니
성현도 많거니와 호걸도 많고 많다
하늘이 사람을 태어나게 할 때 곧 무심할까마는
어떠한 시운이 흥했다 망했다하였는가
모를 일도 많거니와 애달픔도 그지없다
기산의 늙은이(허유) 귀는 어찌 씻었던가
(표주)박소리도 귀찮아서 지조만 가진 행장이 가장 높다
인심이 낯 같아서 볼수록 새롭거늘
세사는 구름이라 험하기도 험하구나
엊그제 빛은 술이 얼마나 익었는가
잡거니 밀거니 실컷 기울이니
마음에 맺힌 시름 조금이나마 낫는구나
거문고를 연주하니 풍입송(곡이름) 이어지는구나.
손인지 주인인지 다 잊어 버렸어라.
장공에 떠 있는 학이 이 골의 진선이라
신선사는 땅에 행여 아니 만나셨는가
손이 주인에게 이르되 그대가 그(신선)인가 하노라
성산별곡에는 서하당과 무등산 서석대, 자미탄, 환벽당과 조대 등 성산일대의 지명이 나오고(파란글씨 부분)
거문고를 타는 신선같은 삶을 사는 김성원의 풍류를 부러워하는 것이 주류인 것으로 봐서
강원도 관찰사를 그만두고 창평으로 내려와 은거하고 있을 때 인 40세 이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진흙탕 같은 정치판에서 유배와 등용을 반복하는 자신의 삶과 신선처럼 사는 김성원의 삶을 비교해 보고
고향으로 내려오기를 잘했다는 마음에서 쓰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식영정을 나와 근처 자판기에서 차에 있던 동전을 털어 사이다를 한 병 사서 마시니 탈진현상이 사라진다.
아침식사도 거르고 새벽잠을 설쳐가며 가사문화유적 탐방에 나선 지금 명옥헌과 죽림재, 수남학구당을 거쳐
식영정일원까지 탐방을 마쳤다.
근처의 소쇄원과 환병당 취가정, 그리고 한국가사문학관 등은 이미 작년에 포스팅을 완료하였기에 이제
고서 쌍교에 있는 송강 정철의 송강정과 송순의 면앙정으로 간다.
(광주기행)남도의 환벽당과 취가정으로 가는 아름다운 길(남도문화유적 답사기)
(담양기행)소쇄원과 소쇄48영으로 가는 길(남도문화유적 답사기)
(담양기행)한국 가사문학관으로 가는길(남도문화유적 답사기)
(담양기행)명옥헌원림 배롱나무꽃에 떠나간 님 그리워하며(남도문화유적 답사기)
(담양기행)타임머신 타고간 흥선대원군시절의 죽림재(남도문화유적 답사기)
(담양기행)전국에 단2곳. 양반 평민이 평등했던 담양 수남학구당(남도문화유적 답사기)
(글 : 포토뉴스 코리아 simpro) 트위터 ☞ http://twitter.com/huha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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