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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정(李霆, 1541-?) 의 풍죽도(風竹圖)

최흔용 2009. 6. 13. 01:00

*풍죽도(風竹圖)

 


풍죽도는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선비들은 사군자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대나무를 어떤 눈으로 보았으며,
이 그림을 통하여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 알아본다

 

*이정(李霆, 1541-?)

 

세종의 현손(玄孫)으로 자는 중섭(仲燮), 호는 탄은(灘隱)이라 한다. 시·서·화에 모두 뛰어났으며 특히 대나무그림으로 이름을 떨쳤다. 묵죽화에 있어서 그는 유덕장(柳德章)·신위(申緯)와 함께 조선시대 3대화가로 꼽힌다. 또한, 그는 묵죽화뿐 아니라 묵란·묵매에도 조예가 깊었고,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그의 묵죽은 줄기와 잎의 비례가 좀더 보기 좋게 어울리며, 대나무의 특징인 강인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작품의 위치 및 작품 분석

 

 

〈풍죽도〉를 그린 이정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종친 사대부 화가이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문집 등 문헌 자료를 통해서 보면 대나무 그림에 있어서는 당대의 명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헌 자료뿐만 아니라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을 보아도 조선 시대의 제일인자로 꼽는데 주저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풍죽도〉는 그의 선비다운 기개와 뚜렷한 개성을 보여 주고 있으면서 한국적인 화풍을 함께 제시하고 있어 한국 묵죽화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림이다.
〈풍죽도〉는 세 그루의 대나무가 스산한 바람에 스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잎이 흔들리는 방향을 보아 바람이 화면의 왼쪽에서 불어오는 것 같은데, 바람을 맞아 휘는 듯 버티는 대나무의 탄성(彈性)이 절묘하게 그려져 있다. 전경의 대나무는 진한 먹색으로, 배경 역할을 하고 있는 두 그루의 대나무는 옅은 먹색으로 처리되어 있어 공간감이 살아나고 있다. 특히 대나무 잎의 묘사에 보이는 날렵하면서도 세련된 필법은 선비화가의 풍모를 여실히 보여 준다.
〈풍죽도〉는 지조라든가 절개의 상징형으로 그린 묵죽도에서 느낄 수 있는 경직성이나 근엄함 같은 것은 찾아 볼 수 없고, 선비의 기개를 느끼게 하는 단정함과 정숙함을 그리고 있다. 담묵과 농묵을 구사한 세 그루의 대나무가 연출해 내는 그윽한 공간감은 시적(詩的)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바람결에 밀리는 대나무는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의 대나무를 연상케 해준다. 대나무 잎의 묘사에 보이는 세련된 운필에는 기교를 초월한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이 배어 있다. 이런 점에서 〈풍죽도〉는 선비 이정의 교양과 인품,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대자연의 섭리가 함께 용해되어 있는 참다운 문인화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표현 기법과 회화 정신

 

대나무 잎의 묘사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경아식(驚鴉式), 개자식( 字式), 분자식(分字式) 이다. 〈풍죽도〉에서는 바람을 맞이하는 쪽의 대나무 잎은 사필경아식(四筆驚鴉式, 네 잎을 까마귀가 놀라 날개를 펴고 달아나는 모양으로 그리는 방식)을 구사하였고, 그 반대쪽 대나무 잎은 첩분자식(疊分字式, 한자의 分字를 여러 개 겹친 모양으로 그리는 방식)삼필개자식(三筆 字式, 字를 풀어 쓴 방식)의 형식을 취하였다.

이처럼 대나무 잎을 그릴 때 한자의 필획을 차용하는 것은 동양화 특유의 서화일체(書畵一體)사상과 관계가 깊다. 서예가로 유명한 조맹부(趙孟 )는 서화일체를 강조하면서 “바위는 비백법으로, 나무는 전서체로, 대나무를 그리는 데는 반드시 팔분법(八分法), 즉 예서의 일체를 통달해야 한다. 만일 사람들이 이와 같은 것을 잘 이해한다면 서화는 원래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의 김정희는 묵란(墨蘭), 묵죽(默竹)에 서예의 기법을 적용시킬 것을 강조하여, 예서의 획과 묵란의 획을 동일시하였고, 또한 대나무 그림에도 문인 정신의 표현인 서권기(書卷氣)를 강조하였다. 이것은 서예의 필력 자체가 쓴 사람의 인품을 반영한다는 원리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대나무의 상징적 의미

 

그런데, 선비들이 대나무를 즐겨 소재로 삼아 그리는 데에는 대나무가 지니고 있는 상징적 의미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다른 소재도 많은데 굳이 대나무를 비롯한 사군자를 고집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대나무는 다른 식물들과 달리 사계절을 통하여 푸르름을 잃지 않으며 곧게 자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속성을 지닌 대나무를 동양의 옛 사람들은 군자에 비유하였다. 대나무를 군자에 비유한 최초의 사례는 《시경 詩經》의 위풍(衛風) 편의 기오(淇奧) 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아래에 소개하는 것은 제1절의 내용이다.

 

저쪽 기수 후미를 보아라 (瞻彼淇奧)
푸른 대나무는 청초하고 무성하니 (綠竹 )
고아한 군자가 거기 있네 (有匪君子)
뼈와 상아를 다듬은 듯 (如切如磋)
구슬과 돌 갈고 간 듯 (如琢如磨)
정중하고 너그러운 모습이여 (瑟兮 兮)
빛나고 뛰어난 모습이여 (赫兮 兮)
고아한 군자가 거기 있네 (有匪君子)
결코 잊지 못하겠네 (終不可 )

 

〈기오〉는 기수(淇水) 가의 대나무를 위(衛)나라 무왕의 인품에 비유하여 읊은 시로, 모두 3절로 되어 있다. 3절을 통하여 ‘비군자(匪君子)’라는 말이 다섯 번 나오는데, 모두 대나무를 의인화해서 비유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시경》 이후 대나무와 군자 사이가 가까웠던 때는 선비들의 풍류로 유명한 중국 육조 시대(六朝時代)이다. 죽림칠현들이 대나무 숲을 은거처로 삼아 군자를 자처하며 풍류를 즐긴 것이라든지, 왕희지(王羲之)의 아들 왕휘지(王徽之)가 대나무를 가리켜 “차군(此君) 없이 어찌 하루라도 지낼 수 있느냐”고 하였다는 일화가 이를 입증해 준다. 대나무에 대한 이와 같은 정서는 “내 벗이 몇인고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고 읊은 윤선도의 〈오우가 五友歌〉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작화 태도

 

선비화가들은 대나무 등 사군자를 그림에 있어서 작화 태도의 확립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그 때문에 사군자를 그리는 사람은 예술의 기법에 앞서서 문학의 교양을 필요 불가결한 것으로 여겼다. ‘서권기’가 바로 그것이다. 서권의 기운이 없고서는 대나무건 난초건 그 격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였다. 선비들은 그래서 단순한 기예(技藝)는 서권의 기를 구비하지 못한 교묘(巧妙)한 손재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문인화의 기본 정신은 인품과 화품(畵品)을 동일시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대나무 그림이 마치 아무나 손쉽게 기법을 습득해서 그릴 수 있는 화목인 것처럼 착각되고 있는 느낌이 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풍죽도〉는 오늘날 잘못된 사군자 그림의 추세에 많은 점을 깨우쳐 주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출처;디지털한국학

출처 : 산그늘솔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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