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論語)에 나오는 활 이야기
子曰: “君子無所爭. 必也射乎! 揖讓而升, 下而飮. 其爭也君子.”
(자왈: “군자무소쟁. 필야사호! 읍양이승, 하이음. 기쟁야군자.”)
- 논어, 제3편 팔일(八佾), 7장
「공자왈, 군자는 다투는 일이 없으나 굳이 다툴 일이 있다면 활 쏠 때 일 것이다. 서로 읍하여 예를 갖추고 사대에 올라서서 활을 다 쏜 후에는 내려와서 진 사람이 벌주(罰酒)를 마시니 이것이야말로 군자다운 경쟁이다.」
공자(孔子 BC551-449)시대에도 군자들 간에 싸움이 잦았는가 보다.
오죽하면 군자들끼리의 싸움은 활터에서 활쏘기로 내기를 하여 진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이라고 했을까.
술 마시는 것 자체를 싸움이라고 한 것이 아니다.
사대에 오르기 전 서로 간 예의를 갖추고, 정정당당하게 활을 쏜 다음에 사대에서 물러나서 내기에 진 사람이 벌주를 마시는 것 자체를 아름다운 경쟁이자 싸움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논어의 이 한 구절을 보면 공자시대 활쏘기 문화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얼마나 당시 활터에서의 내기문화가 당당했으면 공자마저도 내기 활쏘기를 군자다운 싸움이라고 표현했을까.
지금으로부터 약 2500여 년 전 춘추전국시대에도 군자들이 활터에 모여 활을 쏘았고, 내기를 했고, 술을 마셨다는 사실은 그동안 잘못 알려진 고대 활쏘기문화의 유래를 되짚어 보게 된다.
지금까지는 근래의 활쏘기 문화가 일제시대 이후에 생겨 난 것으로 알고 있었고, 예전에는 활을 군사용, 수렵용으로만 사용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물론 일부의 상류지도층 인사나 무인(武人)들은 수시로 심신을 단련하기 위하여 활을 쏘았다는 기록이 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먼 옛날, 그것도 먼 중국 땅, 공자가 논어에서 한마디 한 것으로 활쏘기 문화를 가늠한다는 것은 억측일 뿐이라고 손가락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나 논어가 우리사회에 미친 역사적 영향력을 고려할 때 결코 가벼이 넘길 사안이 아니다.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공자나 논어에 대하여 한마디라도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하면 목숨이 왔다 갔다 했던 시절이었다.
논어에서 군자라 함은 사(士 : 벼슬하지 않는 지식인)와 대부(大夫 : 벼슬길에 오른 선비)를 일컫는 말이다. 논어에서는 도덕적, 정신적으로 군자가 갖춰야 할 요건을 수없이 많이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도덕적, 정신적으로 공자가 열거한 군자의 요건을 두루 갖춘 군자만이 활을 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자도 논어에서 언급된 군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끊임없이 군자의 요건을 강조하였을 것이다.
子曰: “射不主皮, 爲力不同科, 古之道也.”
(자왈: “사불주피, 위력부동과, 고지도야.”)
- 논어, 제3편 팔일(八佾) 16장
「공자 왈, 활쏘기 시합에서는 가죽을 뚫는 것만이 주가 아니다. 사람마다 힘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옛 부터 내려오는 법도(法道)이니라.」
공자 당시의 과녁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대체적으로 가죽이나 굵은 천을 많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당시에 힘이 센 어떤 궁사가 두꺼운 가죽을 뚫었노라고 자랑을 하고 다닌 모양이다. 그러자 공자가 한마디 한 것이다.
사람마다 힘이 다르기 때문에 똑 같은 거리에서 똑 같은 활을 쏘아도 과녁을 뚫기도 하고, 그냥 맞추기도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당시 활쏘기 문화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여러 명의 궁사가 동일한 과녁에 일정한 거리에서 궁사들 간 큰 차이가 없는 활과 화살로 활을 쏘아 관중했느냐 못했느냐를 가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중 한 궁사가 쏜 화살이 두꺼운 가죽의 과녁을 뚫고 나갔고, 그 사실을 그 궁사는 자랑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그러자 공자가 점잖게 타이른 것이다.
“여보게, 힘이 세다고 자랑하지 말게. 과녁에 맞혔으면 그만이지 뚫은 게 뭐 대수인가. 원래 활은 예부터 맞추기만 하면 되는 법이었다네.”
공자의 이 말은 요즘의 궁사들에게 뭔가 암시하는 바도 있지 않을까.
子釣而不網, 弋不射宿
(자조이불망, 익불사숙)
-논어, 제7편 술이(述而), 27장
「공자는 낚시질은 해도 그물로 고기를 잡지 않았고, 활을 쏘아 새를 잡아도 잠자는 새는 잡지 않았다.」
공자는 낚시도 했고, 활도 쏘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긴 논어를 보면 공자는 악기도 연주하고 노래도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일반 사람들이 하는 보통의 일을 공자 같은 성인도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익(弋)이라 함은 주살을 의미한다. 화살 끝에 실을 달아 놓은 것이다. 한자로는 “주살 익”이라 읽는다. 익렵(弋獵), 익사(弋射)는 주살을 단 화살로 새를 잡는 것을 말한다.
이 한구절로 또 당시의 사냥 문화를 가늠할 수 있다.
아마도 새를 사냥 할 때 화살이 새의 몸에 맞아도 한 순간은 멀리 날아가기 때문에 긴 실을 매달아 화살에 맞은 새를 회수하는데 용이하게 했을 것이다.
또한 설사 화살이 새를 맞추지 못했다 해도 화살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방책이었을 것이다. 요즘에야 신사가 처음 활을 배울 때 주살질을 하지만.
공자가 제자들과 사냥을 갔는데 나무위에서 잠자는 새를 발견하고 그냥 지나쳤다. 공자는 하늘을 나는 새를 향해서는 화살을 쏘았지만 잠자는 새는 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모습을 본 제자가 그 사실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공자의 의중을 자세히 기록 해 놓은 것이 없기 때문에 유추하여 생각 해 볼 수밖에 없다.
공자의 사상은 한마디로 인(仁)이다.
인에 대한 공자의 가르침은 몇 마디 말로써 단정 지을 수 없다.
잠자는 새를 잡지 않음은 바로 “인(仁)”을 실현코자 함이었을 것이다.
達巷黨人曰: “大哉孔子! 博學而無所成名,“ 子聞之, 謂門弟子曰: ”吾何哉? 執御乎? 執射乎? 吾執御矣.“
(달항당인왈: “대재공자! 박학이무소성명.” 자문지, 위문제자왈: “오하재? 집어호? 집사호? 오집어의.”)
- 논어 제9편 자한(子罕), 2장
「달항 지방의 한 사람이 말했다. 위대하도다. 공자여! 당신은 박학하지만 이름을 이룰만한 전문분야가 없구료. 이 말을 들은 공자가 제자에게 말하였다. “내가 무엇을 전문적으로 하겠느냐? 수레를 몰 것이냐? 활을 쏠 것이냐? 나는 수레를 몰겠노라.”
공자는 박학다식했지만 뚜렷하게 뭐하나 잘하는 게 없었다.
책 읽고, 사유(思惟)하고, 제자를 가르치는 게 전부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공자에 대해서 좋게 평가하기보다 나쁘게 이야기 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오죽하면 ‘상갓집 개’라는 평까지 했을까.
이 대화를 보면 공자 당시에도 전문분야에서 도통을 해야 이름을 날리고 인정을 받았는가 보다.
공자는 만약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면 가장 저급한 기예(技藝)인 수레를 모는 일을 하겠다고 했다.
대구(對句)로 언급한 ‘활을 쏠 것인가’ 라는 말을 보면 공자는 활도 제법 쏘았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케케묵은 논어를 들먹이며 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이미 수 천 년 전의 공자도 활을 즐기며 군자의 도를 닦았음을 새겨보기 위함이다.
요즘 활터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불미스런 이야기를 접하면서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요즘의 활터 분위기가 군자보다는 소인배들이 판을 치고, 활쏘기가 도(道)보다는 술(術)에 근접해 가기 때문이 아닐까.
2007년 2월 8일 김 용 욱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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