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이해

[스크랩] 사군자 역사

최흔용 2010. 4. 5. 10:10

       우리나라 四君子 그림의 역사

      사군자 그림이란 매화(梅) · 난초(蘭) · 국화(菊) · 대나무(竹)의 네 가지 식물을 소재로 해서 水墨 위주로 그려진 畵目을 말한다. 이처럼 각기 다른 네 종류의 식물 그림을 한벌로 묶어서 부르기 시작한 것은 文人畵의 득세에 따라 水雲花奔高가 부흥되는 16세기 무렵의 明代 후기부터였지만, 사군자 그림의 역사 자체는 그보다 오래되었다.

      이러한 명칭이 나오기 전부터 사군자그림은 墨竹·墨梅·墨蘭 ·墨菊 등의

      이름으로 그려져 왔으며, 처음에는 인물화의 배경이나 화조화의 부분으로 다루어지

      다가 北宋代에 이르러 새로운 지식계층으로 부상된 支人士大夫들의 취향과 밀착되

      어 대나무와 매화를 선두로 독립되었고, 元 ·明代를 거치면서 문인화의 대표적 화

      목으로 성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군자 그림은 문인화 중에서도 가장 많이 그려졌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들 소재들이 함축하고 있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이른 봄의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

      저 피는 매화의 맑은 기품과 깊은 산골짜기에서 흘로 향기를 퍼트리며 피는 난초의

      고결함, 그리고 가을의 찬서리에도 허리를 굽힐 줄 모르고 늦게까지 피는 국화의 정

      절과 곧은 줄기로 겨울이 되어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의 변함없는 절개 등이 도덕적 인격의 완성자이며 참다운 삶의 구현자로 숭앙되던 군자의 정신적 상징으로 애 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식물의 가장 커다란 생존적 고난인 추위 속에서도 스스로의 의지를 굽히지 아니하는 생태적 특성은 君子的 삶을 지향하던 문인사대부들로부터 더욱 각별한 사랑과 존경을 받았었다. 이에 따라 사군자는 理想的 人間像을 구현하기 위해 덕성과 심성을 함양하는 매체로서 크게 각광을 받게 되었으며, 이를

      그리고 완상하는 풍조가 문인사대부들 사이에서 갖추어야할 필수교양의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사군자 그림은 이러한 상징성 뿐 아니라, 먹과 붓만의 최소한의 媒村 로서 최대한

      의 표현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에 보다 폭넓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특히 당시

      의 문인사대부들이면 누구나 필기의 수단으로 습득하고 있던 서예의 필획을 그대로

      응용하여 형상화 할 수 있다는 기법적 친근감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사군자 그림은 12세기 무렵 고려 중기부터 대나무와 매화를 필두

      로 그려지기 시작하여 고려후기와 조선시대에 걸쳐 문인사대부들의 삶을 확충하고 心  표출하는 매체로서 크게 유행했으며, 墨竹의 경우 조선초기의 화원들 시험의 1 등 과목으로 채택될 만큼 높은 비중을 차지했었다. 그리고 조선후기에 이르러는 서민들의 방안 장식용으로까지 널리 보급되었을 정도로 우리 민족의 대표적 정서양식의 한 줄기로서 일반화되기도 했다.

      緖畵史的으로도 사군자는 12세기를 전후하여 우리 나라 그림이 종래의 실용적인

      차원에서 감상물로 전환하는데 선구적 구실을 했을 뿐아니라 , 水墨主義와 書畵一致

      論과 같은 文人畵的 회화사조의 보급에도 앞장 섰으며, 또한 각 시대별 변화에 따

      라 새로운 화풍을 모색하는 등, 한국화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여기서는 이러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우리 나라 사군자 그럼의 역사를 시대별로 나

      누어 그 요점만 간략하게 개관해 보고자 한다.

       

      고려시대 (918~ 1392)

      우리 나라 사군자 그림의 역사는 고려시대에 시작되었다. 고려는 국가자체가 힘

      에 의해 지배되던 古代的 모순과 한계에 반발하여 출현했기 때문에 도덕과 예의와

      같은 유교적 윤리개념을 통치의 기본원리로 삼았을 뿐 아니라, 중앙집권 체제수립에

      방해가 되는 지방호족세력의 武的인 성격을 약화시키기 위해 개국초부터 文治主

      義를 지향했었다. 그래서 이러한 국가적, 시대적 과제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새로운

      인재를 뽑기 위해 과거제를 실시하고 崇文풍조와 유학진흥을 정책적으로 추진했으

      며, 그 결과 지도층들은 문인적, 학자적 성향을 기본속성으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이들은 자기들의 삶의 모델을 北宋의 문인사대부들을 통해 구하고자했고 그

      중에서도 崇蘇熱을 이를 정도로 蘇東城에 대한 열의가 가장 높았기 때문에 그를 중

      심으로 형성된 墨竹 등의 문인화와 詩書畵一律論과 같은 문인화 이념의 수용에도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었다. 이에 따라 그림을 통해 심의를 표출하고 심성을 양성하

      는 문인화의 회화사조가 12세기 고려화단에 전래되면서 金富較은 墨竹을, 鄭知常

      은 雲梅를 최초로 그리고, 우리 나라 사군자 그림의 역사 뿐 아니라 文人畵吏의 첫

      장을 장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고려후기를 통해 새로운 문화담당층으로 부상하는 能支能吏型의

      사대부들에 의해 더욱 확산되었으며, 墨梅와 墨蘭도 그려졌지만 무엇보다도 墨竹

      에서 비약직인 발전을 보였다. 鄭談, 李仁老, 安置民, 金君緩 등의 대가들이 계속

      배출되었고, 그 중에서 홍문관 학사와 비서감을 지낸 丁瀉進의 경우 더욱 두드러져

      고려 뿐 아니라 중국에까지 그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특히 李奎報는 그를 가리켜

      北宋 최고의 묵죽 매가인 文同을 능가한다고까지 평한 바 있다. 이러한 평가는 곧

      정홍진의 뛰어난 기량뿐 아니라, 당시 크게 성장한 고려 묵죽화의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 기도 하다.

      그러나 이 무렵의 사군자 그림은 기록으로만 전할 뿐 애석하게도 실물 유작이 한점

      도 남아 있지 않아 그 구체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이들 문인사대부들이

      사물의 겉모습 보다는 生成化育하는 自然의 창생력을 구유한 참모습을 그릴 것을 중

      시한 점이라든지 北宋의 蘇東鑛와 亥同, 또 이들을 추종한 南宋의 湖州竹派 문인화

      가들의 화풍을 참고로 삼았던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대상물의 기운생동하는 생명

      력의 유출을 강조한 그러한 그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4세기의 고려말기에는 독립된 유작은 남아 있지 않지만, 日本 西梧寺 祈藏의(觀

      經序品變相圖) 속의 누각안에 있는 병풍그림의 墨竹과 海涯의 (歲寒三友圖) 중의

      墨竹, 墨梅를 통해 그 편영을 엿볼 수 있다. 墨竹의 경우 규칙적인 竹葉의 배합이라

      든가 서예설의 가미 등에서 元代 묵죽의 양식이 반영되어 있으나 가는 줄기의 모

      습 등은 조선 초기 화풍의 선구적 특색을 보여준다. 그리고 매화에 있어서의 꽃의

      성근 양태와 직선적 줄기의 간소한 분위기 등도 그 이후 전통의 선구를 이룬다는

      점에서 고려시대 사군자 그럼의 역사적 의의를 더욱 높게 해준다.


      조선초기 (1392~약1550)

      조선왕조는 고려말기를 통해 정치적으로 부상한 문인사대부들이 자기들의 성리학

      적 이념에 맞는 나라로서 새롭게 개편한 것이다. 문인사대부들은 왕조운영의 주체세

      력으로서 문화창달을 주도해 나갔으며, 이에 따라 이들의 성향과 밀착되어 고려시대

      를 통해 기반이 마련된 사군자 그림의 전통도 곧바로 계승되어 문인화 뿐 아니라 일

      반 그림 중에서도 대종을 이루며 성장하게 되었다. 특히 초기에는 새로운 시대의 주

      역으로 등장한 사대부상의 정립을 위해 君子的 인품을 상징하는 사군자 그림의 수

      요와 보급이 크게 요구되었던 만큼 이 시기의 文集에도 이에 관한 題畵詩文이 가장

      많이 보이고 있으며, 또 당시 圖書署 화원들의 시험에 1등 과목으로 채택되었던 것

      도 이러한 儒敎至上主義의 사회적 분위기의 맥락에서 이해된다.

      조선초기에는 왕에서부터 화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사군자를 즐겨 그

      린 바 있으나, 그중 화명을 남긴 작가로는 대나무에서 申潛,  卿辰全, 李宗準, 매화

      에서 責宗, 李叢, 蒙無逸, 裵連, 난초에서 成宗, 姜希孟 등이 있다. 그리고 鄭積,

      安璉, 安堅 등은 梅竹에서, 撚宗은 蘭竹, 姜希顔은 蘭竹梅에서 이름을 남겼다.

      조선초기에도 유행에 비해 전하는 유작이 거의 없다시피하여 그 실상을 구체적으

      로 파악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지만, 대나무의 경우 申潛, 朴努年 申師任堂이 그린

      것으로 전칭되고 있는 작품과 1542년경 제작된 (蓮街同年一時曺司契會圖)의 배경에 그려진 墨竹들을 보면, 중국이나 일본과는 구별되는 한국적 특색으로 다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는 줄기에 상대적으로 잎은 크면서 폭이 좁고 끝이 길고 날카롭게 빠진 모습으로 요약되는 이러한 일련의 특징은 그 당시 중국의 사신으로우리나라에 온 金提이 우리의 묵죽을 보고 席나 갈대와 같이 생겼다고 말한 평과도 상통된 다. 그리고 국적불명의 수수께끼 화가로 알려져 있다가 최근 우리 나라 출신으로 간

      주되고 띤는 秀文이 1425년에 그린 10장의 (墨竹畵冊)에도 이러한 細長形의 특색이나타나 있다. 특히 이 화책에서 보이는 댓닢들이 서로 병행해 있거나 이들이 겹쳐서 우물 井字를 이루며 밀집해 있는 모습은 그 계보를 찾을 수 없는 특이한 예로 주목된다.

      조선초기의 묵매화 역시 남아 있는 유품이 없어 그 양상은 파악하기 어렵지만, 申

      師任堂의 전칭작 8폭을 통해 그 대체적인 경향만은 엿볼 수 있다. 이들 그림은 대칭

      을 이루는 橫貫式구도에 줄기와 가지의 직선적인 모습, 태점의 규칙적인 배열, 그리

      고 먹빛에서 흑백의 강렬한 대조를 보여준다. 이러한 특징은 당시의 靑華白磁에 그

      려진 생략된 구성과 소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매화문양과도 서로 통하는 것으로 고

      려말기의 전통을 계승하여 조선중기로 이어주는 양식적 위치를 반영하고 있다.


      조선중기 (약 1550~약 1700)  

      조선중기는 壬辰侵亂과 丙子胡亂과 같은 파괴적인 전쟁이 속발하고 문연사대부 사

      회가 분열되는 고난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은 더욱 심화발전되어 朝鮮化되었으며, 사군자그림 또한 梅·蘭 ·菊·竹의 네 화목이 모두 갖추어지고 대나무와 매화를 중심으로 한국적 화풍을 완성하는 등의 발전을 이루었다.

      묵죽은 세종대왕의 玄孫으로 石陽君을 제수받았던 國朝제일의 명가 李遷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그의 화풍은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많은 영항을 미쳤다. 風竹,雪竹,

      衛竹 등 다양한 소재의 묵죽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던 그는 줄기의 평팽한 탄력과

      끝이 말린듯 휜 가는 댓닢, 그리고 먹색의 절묘한 운영과 함께 화면을 미묘하게 울

      리며 자아내는 꼿꼿한 기상의 생동감과 부드럽고 은은한 서정적 분위기의 연출에 특

      히 뛰어났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나무그림의 구도에 있어서 濃淡을 구사하여 앞

      대와 됫대의 원근을 통한 공간감의 조성 솜씨는 중국의 북송화가들도 따를 수 없는

      훌륭한 경지를 이룩하였다.

      이와 같이 自然美와 理想美가 융합된 사생적인필법과 개성적인 농담대비의표현형

      식에서 탁월한 기량을 보였던 이정의 독보적인 양식은 동시대의 金世緣과 趙翼,許總, 李候뿐 아니라, 다음 시대의 柳德章, 宋祥來 등에까지 영향을 미치는등 조선초기 묵죽 화풍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묵매화 또한 이 시기를 통해 크게 꽃 피웠다. 신사임당의 자녀인 李瑞와李夫人,魚

      夢龍, 宋民古, 趙浦, 趙之.諒, 異達晋, 異達濟, 全忠孝 등 수많은 명가들이 속출하

      여 우리 나라 매화그림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어몽룡의 명성이 가장 뛰어나 이정의 묵죽과 함께 쌍벽을 이루

      었다. 교교한 달빛 아래에서 단아하게 피어오른 매화를 그린 그의 (月梅圖)에서보이

      는 간소하면서도 고아한 매화의 모습이라든지 성근 붓질로 표면처리된 부러진 術核

      形 늙은 줄기와 새로 돋아난 어린 잔가지들의 대비, 매화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수직

      으로 힘차게 솟아오른 직립식 구도의 간일함, 그리고 농도를 달리하는 먹색의 묘한

      진동과 직선적 필획으로 처리된 가지들의 좌우주변에 짙은 먹점들을 규칙적으로 짧

      게 끊어 찍어 조용한 분위기에 정신적 활기를 불어 넣는 액센트의 활용 등은 화면을

      빈틈없이 채우는 번잡하고 곡선적인 중국의 묵매와는 현저하게 다른 한국적 특색으

      로 넘쳐 있다. 이러한 일련의 특징들은 조선중기의 다른 묵매도 들에서도 공통적으

      로 발견되는 것으로 우리나라 묵매의 한 전형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朴業普를 통하

      여 기온 낭까이 (視園南海) 등 일본 에도(江戶) 시대 초기의 매화그림에까지 영향

      을 미친 바 있다.

      묵란에서는 秋史 金正春에 의해 중국 묵란의 대가인 鄭所南의 筆意와 비교되었

      던 宣祖의 활약이 이 분야의 수준을 높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李焉,李遷, 李

      橙의 작품으로 전하는 墨蘭圖들을 보면 삼각형 구도와 난엽이 중간중간 끊어질 듯 이어지는 표현에서 元代 雪憲의 화풍을 연상시키는 古武을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난엽과 난엽 사이의 규칙적 배열이라든가 중앙으로 몰려 배치된 꽃잎의 양태 등이 전반적으로 부자연스런 느낌을 주고 있어 당시의 묵죽이나 묵매의 높은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중기에는 墨菊이 등장하여 사군자 그림의 전 종목이 다루어지기 시작했던 것도 특기할 만 하다. 국화는 고려시대의 象嶽靑磁와 조선초기의 粉靑沙器에 문양으로 크게 유행된 바 있지만 문인화의 소재로는 이 무렵부터 사대부서화가인 李山海에 의해 대두되기 시작했다. 그는 한 折被에 달린 네송이의 국화를 클로즈엎하여 부드럽고 감각적인 필치로 담백하게 그려낸 (墨菊圖)를 남겼다. 그리고 洪晋龜는鉤 구도로 그렸는데 이러한 표현법은 그 이후 우리나라 묵죽화의 기본 양식이 되었다.


      조선후기 (약 1700~약 1800)  

      조선후기에는 侵亂과 胡亂으로 황폐해진 여러 분야의 성공적 복구사업을 기반으

      로 英·正年間의 새로운 문화가 꽃피게 되었다. 특히 그동안 오랑캐나라라고 업신여

      겨왔던 淸朝의 문물을 中華전통의 계승으로 간주하고 후기문화의 부흥을 위해 적극

      수용함으로써 회화분야 전반과 함께 사군자 그림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이

      때부터 明末이래로 중국화단을 지배해 온 南宗畵風이 <唐諮畵譜>와 <弄子園畵傳>

      과 같은 畵譜類 등을 통해 일반화되면서 寫意的이고 서예성이 강조된 화풍이 크게

      대두되었고, 또 植·蘭 ·菊 ·竹을 함께 묶어 사군자란 명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조선후기의 묵죽분야에서는 그 초반에 柳德章의 명성이 가장 높았는데, 그는 李

      遷의 양식을 계승하여 많은 작품을 남기고 조선시대 3大 묵죽화가의 한 사람으로 이

      름을 날린바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수준은 濃淡의 변화라든가 공간감의 조성 등에

      서 李遷의 기량에 미치지 못했으며, 이 점은 宋祥來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 대나무 그림의 새로운 변모는 南宗譜約인 필치로 그려진 沈師正의 (墨竹

      隱)에서 어느 정도 감지되지만, 그 본격적인 전개는 당시 예림의 총수로 지칭되던

      姜世梁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는 묵죽 뿐 아니라, 묵매, 묵란, 묵국에서도 남종문인

      화풍의 부드러우면서 서예적인 필획이 살아 있는 붓으로 깔끔하고 담백한 寫意的인

      화풍을 이룩하고 당대와 후대의 문인 및 직업화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또한

      사군자 전 종목을 한벌그림으로 의식하고 그린 최초의 작가로도 특기할만 하다.

      강세황의 사군자그림은 화보의 법식에 토대를 두고 있으면서도 묵죽의 경우 마디

      사이가 긴 대줄기와 잎끝이 갈라지지 않은 단정하게 생긴 댓잎을 沒骨의 부드럽고 차분한 필치로 즐겨 다루었으며, 묵매는 대각선으로 뻗은 굵은 줄기에 잔가지를 대비시키고 꽃심이 강조된 모습을 주로 그렸다. 그리고 묵란에서는 균형잡힌 구도와 깔끔고한 필선으로 간결한 난잎을 구성하여 시원하고 깨끗한 공간감을 잘 나타냈으며, 묵국에서는 飾勒法으로그린 秊頂長辯式의 납작한 꽃송이와 濃淡조절이 잘된 沒骨法으로 묘사한 비교적 많은 잎들을 대조시키는 등 상반된 요소의 배합에 뛰어났

      었다.

      강세황의 이러한 사군자그림은 단순한 餘技的 산물이 아니라 그의 예술세계와 기

      예가 응집된 것으로 許泌, 金喜詠, 林熙之, 尹濟弘, 申練 등을 거쳐 말기화단으로

      까지 이어지는 남종문인풍 계열의 선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이 중에서 林熙之의

      흐늘어지게 뻗은 아름다운 春蘭과 느슨하면서 떨리는 듯한 붓 길을 소략하게 사용한

      尹濟弘의 梅蘭도 일품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강세황 만년의 제자로서 특히 스승의 묵

      죽화풍을 계승 발전시킨 申緯의 업적을 잊을 수가 없다. 詩·書 ·畵 삼절로도 이름

      높았던 그는 섬세한 농담변화, 부드러운 필치, 潤墨의 절묘한 구사, 題詩의 본격적

      인 도입 등으로 스승이 이룩한 격조를 한 단계 더 높이고 李遷, 柳德章과 더불어 조

      선시대 3대 묵죽화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조선말기 (약 1800~ 1910)  

      조선말기를 통해 사군자그림은 시대적 격동에도 불구하고 더욱 성행하면서 이 분

      야의 역사에서 가장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흐름은 문화수용등의 양적 팽창

      에 따른 상층문화의 확산현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세기의 조선말기에 이르르

      면 그 전 시기부터 성장해온 중인계층과 평민부유층의 신분상승 욕구로 말미암아 양

      반층이 전 인구의 6할 이상으로 증가되었으며, 이들 신흥 양반들 역시 기존의 문인

      취향적 상층교양문화를 통해 자신들의 향상된 지위와 품위를 과시하고자 했을 뿐 아

      니라, 일반 서민들 또한 상층 문인문화와의 동화를 통해 신분 상승의 보상적 효과를

      얻고자 했기 때문에 四君子類 文人畵目의 수요는 급증되고 이를 전문적으로도 취급

      하는 직업화가까지 출현햐는 양상을 낳았다. 이와 같은 풍조는 西學 등 서구문화침

      투의 위기의식에서 야기된 衛正斥邪的인 守舊的 성향과 밀착되어 더욱 확산되었으

      며 여기에 淸代의 문인화가들에 의해 크게 발흥된 水墨花奔畵의 성향도 중요한배경

      으로 작용하였다.

      이 시기의 사군자그림은 전시기의 남종문인화풍이 더욱 보편화되면서 서예성과寫

      意性의 강조와 함께 文氣와 書卷氣와 같은 이념미가 크게 중시되었다. 그리고 淸代

      의 水量花奔畵風중에서 鄭燮, 金農, 羅聘 등 場州八怪의 참신한 구도와 분방한 붓

      놀림, 독특한 조형미와 淡彩의 풍부함을 이용한 새로운 감각의 개성적인 화풍도 널

      리 보급되었다.

      조선말기 사군자그림의 이러한 흐름을 주도한 것은 金正喜를 중심으로 하는 秋史

      派 화가들이었으며, 특히 이들에 의해 墨蘭畵가 성행했던 것도 이 시기의 특징중의

      하나다. 이 시기의 묵란은 金正喜에 의해 대성되고 또 크게 유행되었다. 秋史體를

      창안한 서예의 대가이기도 했던 그는 특히 隸壽의 획을 이용한 禪味넘치는 붓놀림을

      통하여 묵란화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 놓았다. 한 잎마다 붓질의 방향을 세번 바꾸는

      난엽의 三轉浩則을 지키면서도 가슴 속의 농축된 心象을 특유의 먹향기로 나타낸

      그의 묵란화는 필선미와 이념미의 극치라 할 만하다.

      金正喜의 이러한 이념과 화법은 그의 주변의 흥선대원군 李是應을 비롯하여 趙熙

      龍, 洪祿吉, 申漑治, 許維 등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 중 대원군이 묵란으로

      특히 더 유명한데 그는 金正喜의 영향을 토대로 실처럼 가늘고 예리하면서도 긴 잎

      을 지닌 난초를 넓은 여백을 두고 그리는 등 나름대로의 일가를 이루기도 했다. 그런

      데 요즈음 시중에 나도는 그의 묵란들 중에는 方允明에게 代筆시킨 것이 적지않게

      포함되어 있어 그의 진품을 가리는 데는 각별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이밖에 조선말기의 묵란화를 꽃 피운 인물로 閨泳端과金應元을 빼 놓을 수 없다.

      閨泳端은 구한말의 정치적 격변속에서 여러 차례의 중국 망명을 통해 그 곳에서 익

      힌 淸末의 문인화풍을 토대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바 있다. 그리고金應元은 小湖

      蘭으로 불리울 정도로 난초에서 크게 이름을 날렸는데 잎 끝이 비교적 짧고, 뭉툭한

      난엽과 매우 길고 가는 난엽과의 대조라든가 까칠하고 담백한 마른 붓질의 감각적 효과와 갈대잎처럼 생긴 鐘繼의 길쭉한 양태 등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小湖蘭은 金正喜와 대원군의 화법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으로 일제시대 화단에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

      조선말기에는 난초 뿐 아니라 매화도 많이 그려졌는데, 특히 추위를 견디며 피는

      종래의 강인한 모습과는 달리 화사한봄의 정취를 가득 담고 활짝 핀 모습의 紅梅가

      유행했다. 이러한 변화는 金正壽의 제자였던 趙熙龍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는 寫意

      와 寫生, 支氣와 감각의 대조적인 요소들을 융합하고 여기에 場州八怪중 金農과 灌

      士愼. 羅聘 등의 장식적이고 조형적인 독특한 화풍을 가미하여 새로운 양식을 형성

      하였다. 좁고 긴 화면에 두세번 크게 방향을 바꾸며 힘차게 올라가는 굵은 둥치를 중

      심으로 잔가지와 꽃이 많이 달린 화려한 구도와 고운 담채의 감각적인 격조를 특징

      으로 하는 그의 화풍은 吳慶錫, 李公愚, 丁學敎, 楊基蒸 등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또

      趙錫晋, 姜雌熙 등을 통하여 보다 기교적인 필치와 꽃의 크기 등이 강조되면서 일제

      시대의 화단으로 전해졌다.

      趙熙龍은 이 시기의 묵죽 전개에도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는 姜從累과 申緯의 화

      풍을 토대로 세련된 墨調의 구사 등을 통해 文氣 넘치는 화면을 이룩했으며, 이러한

      경향과 격조는 동시대의 許維, 申命術, 宋修勉등에게서도 공통적으로 간취된다.

      이들의 문기 짙은 화풍은 조선 말기의 關凉端에게 계승되어 뛰어난 필력을 배경으

      로 이루어진 서예성이 돋보이는 명품들을 많이 남기게 하였다. 묵란화로도 유명했던

      그의 힘찬 대나무 그림들에는 망해가는 왕조에 대한 절개와 지조의 기운이 서려 있어 더욱 각별한 느낌이 든다.

      이 시기의 묵죽화 역시 다른 종목들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했지만 전시대보다는활

      발하게 그려진 편이다. 화법에 있어서는 姜世果에 의해 계도되었던 남종문인화풍이

      趙熙龍, 許維, 申命術 등을 통해 주류를 이루었고 이밖에 金秀哲이 그 특유의 異色

      畵風으로 다룬 청신한 감각의 작품들이 매화그림과 함께 몇점 전하고 있다. 그러나

      국화그림은 오히려 金容鎭 등에 의해 일제시대의 근대화단에서 더욱 많이 그려지게

      된다.


      일제시대와 해방이후(1910~ )  

      日帝에 의해 王朝는 망했어도 조선시대 문화를 애호하고 수호하는 계층들이 강하

      게 뿌리 박고 있었기 때문에 시대는 바뀌었어도 조선말기에 성행된 사군자그림의 열

      기는 그대로 지속되었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창설된 조선미술전람회 (鮮展)에서 서예와 함께 사군자그림이

      전문분야로서 중시되었던 것도 이와같은 강력한 전통때문이었다.

      일제시대의 사군자그림은 근대전통화단대부분의 화가들과 서예가들이 하나의 풍

      류적 격식 내지는 기본 종목으로 즐겨 다루었지만 이 분야에서 가장 크게 활약했던

      대표적 인물로 金圭鎭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남종문인풍의 묵죽도 많이 그렸으나,줄

      기에 입체감을 주면서 사실적으로 처리한 대륙풍의 王竹그림에서 남다른 기량을 보

      였다. 그리고 1915년에는 書畵硏究會 강습소를 창설하고 <海周蘭竹譜> 등을 간행

      하여 사군자그림의 일반 보급과 함께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으며, 또한

      鮮展의 심사위원으로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기도 했다. 이 때 鮮展의 사군자부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李秉直, 金振宇, 李應魯 등은 모두 그의 제자들이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 사군자그림은 鮮展에서도 출품부가 없어지는 등 전반적으로 침

      체된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920년대 후반부터 대두되었던

      좌파의 계급주의 문예관에 맞서 계급을 초월한 민족정신의 유대감을 조선시대의 전

      통문화를 통해 부흥하고자했고 또 식민지정책에 의해 진취적인 성향을 억제했기 때

      문에 문화 전반에서 복고적이고 회고적인 경향이 팽배해졌으며, 이에 따라 사군자그

      림도 새시대의 삶의 의식을 반영하는 근대적 표현방법으로의 전환을 적극적으로 모

      색하지 않은채 전통고수와 답습의 길을 걷게 됨으로써 점차 구시대의 유물로 퇴색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은 해방이후에도 그대로 지속되었으며, 鮮展 후기에 없어진 사군자부

      가 신설된 國展에서 부활은 되었지만 서예부에 편입됨으로써 서예의 부수적인 종목

      으로 인식되는 경향을 남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산업화로 야기된 삶의 구조

      적 변질과 서구지향적 가치관의 만연과 일제시대 이래로 체질화된 자기전통의 비하풍조속에서 사군자그림은 명맥의 유지 자체가 미덕이 되어 버림으로써 대부분 창작의 영역에서 보다 인습적인 차원에서 되풀이 되는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사군자그림은 문인화의 정신이 집약되고 그 기

      법을 대표하는 화목으로 우레 회화사의 전개와 한국적 화풍형성에 기여해 왔으며,회

      화의 예비적 단계나 餘拉的 차원이 아닌 당시의 삶의 질서정립과 내적자원을 함양하

      는매체로서 크게 기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사군자그림은 지난 시대의 화

      법이나 상징적 의미와 같은 형식적 요소의 옹호와 답습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회화

      사의 발전과 삶의 올바른 방법제시와 정서를 윤기나게 하는 등의 역사적 사회적 과

      제수행에 앞장서고 적극 기능해 왔던 그 정신과 잠재된 에너지를 계승하여 새로운

      현대성으로의 개발이 절실하다고 본다. 전통과 역사는 변화를 거부함으로써 보존되

      는 것이 아니라 끓임없는 자기갱신의 과정을 통하여 올바르게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

      이다.

 

출처 : 난사랑
글쓴이 : 창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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