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이해

[스크랩] 장승업

최흔용 2010. 4. 5. 10:30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

조선 말기의 천재 화가 오원 장승업(1843~97). 중세적 전통 세계에서 근대 세계로의 변환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던 1870~90년대의 개화기 서울 화단의 최고 명수로 손꼽혔다. 장승업은 주로 무반을 배출했던 희소한 본관인 대원(大元) 장씨였다.


대원은 황해도 안악에 있는 지명으로 그의 출신지가 황해도 모처였다는 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곳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무반 출신이었다고는 하나 조실부모하고 의탁할 곳이 없어 먹을 것을 찾는 신세로 서울로 흘러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장승업이 정통화의 전문 화가로 비약하고 이름이 날리게 된 계기로 변원규와의 만남으로 이루어 진다. 변원규의 집에서 명화들을 통해 자신의 창작력을 확장시키기도 했다.


그로 인해 김은호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곳을 자주 방문했을 당시의 유숙과 같은 명화원과 사제의 인연을 맺으며 더욱 급성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중인 세력의 비호를 받으며 혜성처럼 등장한 장승업의 명성이 나날이 높아지자 도화서가 폐지된 후 그 업무를 물려 받은 규장각의 대령 화원으로 차출되어 <남극노인도>와 같은 왕실용의 세화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장승업은 중세적 교양과 문학성을 점차 배제하기 시작한 이러한 신화풍의 수용 이외에도 입체적인 음영법과 맑고 투명한 담채의 효과적인 사용을 통해 근대적 감각이 물씬 풍기는 정물화 계통의 기명절지도 양식을 도입해 완성시켰다. 선지의 보급과 이에 적합한 부드럽고 긴 양털 붓 기법의 개발과 함께 갈대와 기러기를 소재로 그린 노안도를 새롭게 유행시키기도 했다.


이와 같이 장승업은 비세습 화원이었으나, 역관층 중인들의 후원을 받아 개화기의 천재적인 명화가로 명성을 날리면서 새로운 화풍을 화목, 재료의 도입과 개발을 통해 근대 화단을 이끌어 갈 후배 화가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규범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탈속성과 천재성 등이 현실도피적 기제로 우상화되고 또 관념적으로 강조됨으로써 신화적인 작가상으로 남아있다. 그의 작가상을 바로 잡고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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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장승업(張承業)
아호 : 오원(吾園)
제목 : 송풍유수(松風流水) 및 귀거래도(歸去來圖)
언제 : 19세기
재료 : 족자 비단에 담채
규격 : 좌 : 137 x 32.2 cm
우: 136.7x32.4cm
소장 : 간송미술관

해설 : 송풍유수(松風流水) : 장승업이 활동하던 조선 말기는 秋史 金正喜가 길러낸 중인(中人)계급의 지식층 문인들이 추사 예술의 지극히 조선적인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외형적인 형사(形寫)에 급급하여 맹목적인 중국풍의 호상(好尙)이 유행하던 시기였고. 자연 그의 그림풍은 중국 취향이 농후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그림이 단순한 중국풍으로. 외형만을 모방한 것이었던 것에 비하면. 비록 같은 중국풍이긴 하지만 그는 이응헌의 사랑방에서 어깨너머로 보던 그림을, 어느날 갑자기 배우지도 않고 신들린 듯 그려낼수 있었던 천재의 기질이 있었기에. 그림속에 번득이는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다. 수백길 벼랑 위에서 입을 열어 팔방으로 부딪치며 꺾어져 내리다가. 마침내 아득히 ?아져 내리고 마는 거폭(巨瀑)아래. 이에 맞서듯 창연히 솟아올라 검붉은 송린(松鱗)을 자랑하는 장송의 모습은. 임금마져도 묶어 놓을수 없었던 장승업의 호방불기(豪放不羈)한 기질을 말해 주는 듯하다. 소나무 밑 너럭바위에 마주앉아 잠방이 차림에 가슴을 드러낸채. 폭포의 굉음을 들으며 찻물 끓기를 기다리는 선객(仙客)들의 소탈간략한 모습은. 용트림하며 치솟은 소나무와 거폭에 압도당한 눈의 긴장감을 풀어주기에 충분하다. 오원(吾園) 장승업의 그림에서는 이처럼 화면에 숨막힐 듯 번득이는 박진한 생동감이 항상 넘쳐 흐르니. 이 점은 세간에 살면서 시속(時俗)을 거부한 그의 대오(大悟)한 자취일 것이다.


귀거래도(歸去來圖) : 진(晋)의 도연명(陶淵明)은 팽택(彭澤)의 수령이 되었으나. 관리생활에 염증을 느끼자 80여일 만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며 자신의 심정을 읊은 귀거래사의. 첫 대목을 그려낸 것이 바로 이 그림이다. 도연명이 뱃머리에서 바라본 고향집의 소나무는. 늙은 둥치를 사립문 옆에 기대어 서 있고. 황국은 삿자리 울타리 밑에 무더기로 피어있다. 주인없이 닫혀 있던 서재도 활짝 열려 갑(匣) 속의 서책과 초록 비단으로 감싼 현금(弦琴)이 반쯤 드러나 주인을 반기는 향저(鄕邸)의 분위기를 한층 살려내고 있다. 바람맞은 버드나무의 물기 어린 생생한 모습이나. 이 같은 景物의 사실적인 표현은 장승업의 놀라운 기량을 대변해 주고 있지만. 문 곁에서 아비를 기다리는 어린자식 대신. 병아리 딸린 어미닭 한쌍을 그려 넣은 것은. 도연명의 격조 있는 전원취(田園趣)를 장승업이 자기식으로 이해하였던 데서 빚어진. 웃지못할 작은 실수라 할 것이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타고난 재주만으로. 무슨 그림이든지 그려내던 그가 생각하는 전원은. 당연히 삿자리울타리 위에 수탉이 한 마리 올라가 있어야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격식에 얽매이기 싫어하던 그의 성품으로 보아. 이런 소재의 변경이 그의 무식 탓이라기 보다. 혹시 고의성을 띨 수도 있다는 가정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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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 장승업(張承業)
아호 : 오원(吾園)
제목 : 고사세동도(高士洗桐圖) 및 관아도(觀鵞圖)
언제 : 19세기
재료 : 족자 비단에 수묵담채
규격 : 좌:142.2 x 40.3 cm
우:143.5 x 41 cm
소장 : 호암미술관

해설 : 고사세동도(高士洗桐圖) : 장승업의 작품은 산수. 인물로 시작하여 새나 짐승. 골동품. 화초등이 더할 나위 없이 세련되었을 뿐 아니라. 속도감 있는 운필과 담담한 색상의 구사는 독특한 수지법(樹枝法)과 준법(皴法)을 이용한 교묘한 구도와 병행하여 자유적절하게 과장된 분방함을 갖추고 있다. 이그림은 예운림(倪雲林)의 고사(故事)를 회화화(繪畵化)한 것으로. 왼편 아래쪽의 괴석 옆에 앉아 초연한 운림의 모습과. 이것과 서로 마주하고 있는 준열한 선으로 구성된 오동나무의 줄기와. 동자(童子)등 이러한 것들은 모두 화면에 생동감을 주고. 오동나무의 줄기는 뻗어 올라간 위쪽의 중심에서 왼쪽으로 화면을 채워 화면을 안정시키고 있다. 화의(畵意)는 운림의 고사에 유래한 것이지만. 구도와 설채. 준법과 수지법 등 어디까지나 장승업 특유의 천재적 기량에 의한 것으로. 조선조 최후를 장식하는 화원의 작품으로서 손색이 없다.

관아도(觀鵞圖) : “바위위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고. 물에서 노는 한 쌍의 거위에 시의(詩意)를 얻는다” 고 한 왕희지(王羲之)의 관아의 고사(故事)를 그린 것 같다. 극단적으로 휘고 굽은 바위 주름. 특이한 표정의 인물. 기괴한 바위너설을 어긋매껴 굴절시키면서 점경(點景)으로 처리한 구도법. 이러한 것들이 모두 한데 어울려서 이 작품에 일종의 괴이한 분위기를 빚어내고 있다. 화법상으로는 이른바 청조의 기상파(奇想波)와 통하는 점도 없지 않으나. 그의 그림에 보이는 표출주의적(表出主義的)인 경향은 전설적인 분방하고 괴팍한 성격과 잘 부합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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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 장승업(張承業)
아호 : 오원(吾園)
제목 : 쌍마인물(雙馬人物)
언제 : 19세기 후반
재료 : 족자 종이에 채색
규격 : 124 x 33.7 cm
소장 : 고려대학교 박물관

해설 : 장승업이 그린 그림 분야는 山水. 道釋人物. 翎毛. 四君子. 절지(折枝)등 두루 미쳤으며. 전래된 작품은 대소를 불문하고 가작(佳作)이 상당량에 이른다. 쌍마인물 에는 장승업의 관서(款署)나 인(印) 은 없고 다만 뛰어난 화격(畵格)과 화면의 오른쪽 상단에 있는 묵서(墨書)에 의해 장승업의 그림으로 인정되는 작품이다. 세로로 긴 화면의 상단에 소방하고 거친 나무와 하단의 성근풀을 배경으로 해서 중앙에 쌍마와 풍채가 예스럽고 고아(古雅)한 인물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의 그림에서 낯익은 얼굴이다. 좁고 긴 화면은 오른쪽 상단을 비운 변각(邊角)구도이다. 수묵이 중심이 된 유려한 필선과 채색에 있어 선염이 뛰어나며. 특히 갈색과 옅은 자주색에 흰점이 박힌 말은. 색 배합에 있어 독특한 효과를 보여준다. 도석과 영모의 기량을 아울러 살필수 있는 그림이다. 단 한 점만의 독립된 그림이 아닌. 여러 폭으로 이루어진 고사(故事)인물도 병풍의 한 폭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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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 장승업(張承業)
아호 : 오원(吾園)
제목 : 죽원양계(竹園養鷄)
언제 : 19세기 후반
재료 : 족자 비단에 채색
규격 : 74.9 x 31 cm
소장 : 간송미술관

해설 : 술 좋아하고 무엇에도 억매이기 싫어하던 활달한 장승업의 성격에 꼼꼼한 사실풍의 그림이 선뜻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양극은 서로 통한다는 진리를 생각해 보면 그가 이 같은 세밀화를 그린 것이 스긍이 간다. 실제 그의 산수화에서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변화를 보이는 주도면밀한 채색법을 발견해 낼 수있고. 수목의 표현에서도 송린(松鱗) 한 점까지도 그려내는 치밀함을 찾아볼수 있다. 대나무와 괴석이 있는 마당 가에서 닭들이 한가로이 모이를 쪼는 모습이다. 어미닭이 병아리를 거느리고. 빛깔도 현란한 수탉이 무슨 기척을 들었는지 일가를 수호하려는 듯 꿋꿋한 기상으로 사방을 살피고 있다. 가장으로서 손색없는 태도이다. 맨드라미와 냉이. 개미취 등 풀꽃과 잡초들이 마당 가에 가득 돋아나 있어 닭들이 놀기에는 마땅한 공간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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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 장승업(張承業)
아호 : 오원(吾園)
제목 : 계도(鷄圖)
언제 : 19세기 후반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140 x 43.5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세로로 긴 화폭 중앙에 고목같으면서도 괴석같기도 한 그루터기 위에 수탉한 마리가 좌측을 향해 왼발로 서 있다. 화폭 우단의 벼랑에서 뻗어 올라갔을 나뭇가지 하나가 담묵으로 꺾이면서 휑한 공간을 적절하게 메우고 있다. 바위 오른쪽에서 또 하나의 절지가 예리한 필선으로 간략히 묘사되고. 맨드라미나 영지(靈芝)같은 것이 바위 뒤로 화폭을 가로지른다. 장승업의 예사 기법과는 상당히 다르게 차분하면서 담묵에 주묵(朱墨)을 엷게 섞어 닭과 꽃. 나뭇잎 등을 같은 필치로 묘사해 나간 것이. 翎毛圖 에서 동물과 식물간의 기법의 차이가 보이는 전통적 화법과 다르다. 하단의 왼쪽 구석에 “오원(吾園) 장승업이 임양거사법(林良居士法)을 따른다” 라고 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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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장승업(張承業)
아호 : 오원(吾園)
제목 : 초원지록(蕉園芝鹿)
언제 : 19세기 후반
재료 : 족자 비단에 채색
규격 : 74.09 x 31 cm
소장 : 간송미술관

해설 : 장승업은 학자들의 내면세계를 표출한 문인까지도 형사(形似)로 모방해내려는 대담성을 보였는데. 이런 치기에 가까운 걸림 없는 태도가 오히려 천진과 상통하여 독특한 화격(畵格)을 갖게 하였던 것이다. 천진무구한 그의 성격은 유사한 성정(性情)을 가진 새나 동물에게 쉽게 감응되었던지. 그가 그린 영모(翎毛)畵 에는 천진함이 가득하다. 다만 정식으로 묘사(描寫)수련을 거치지 않았던 만큼. 그의 영모화는 간간 정확성이 결여되기도 한다. 파초 한 그루가 괴석 곁에 높이 자라 있는 동산에. 사슴 한 쌍이 한가롭게 노니는 장면이다. 수컷은 새 뿔이 한창 돋아나기 시작한 듯. 가지 친 두 뿔이 탱탱하게 솟아있고. 암컷은 영지(靈芝)를 뜯으려는 자세이다. 괴석 아래에는 장미꽃이 만발하여 더욱 감미로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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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장승업(張承業)
아호 : 오원(吾園)
제목 : 호취도(豪鷲圖)
언제 : 19세기 후반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135.4 x 55.4 cm
소장 : 호암미술관

해설 : 장승업은 어려서부터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수표교에 있는 이응헌(李應憲) 집과 한성판윤(漢城判尹) 변원규(卞元圭) 집 사랑에 기식(寄食)했다고 한다. 여기서 그는 중국 고화(顧畵)들을 많이 눈 익힐수 있었고. 이를 모방하는 화가들의 솜씨를 등너머로 배울수 있었는데. 그의 뛰어난 화재(畵才)를 알아차린 주인의 배려로 본격적인 그림공부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장승업은 산수. 인물. 영모. 기완(器玩). 절지. 에 이르기 까지 바람이 이는 듯한 속도있는 필력과. 담담한 색상의 구사와. 독특한 수집법과 준법을 세워서. 대상을 구도에 맞게 자유롭고도 적절하게 과장하는 그 분방한 솜씨를 이룩하였다. 비록 서권기(書卷氣)나 문자향(文字香)을 기대하기는 어려울지 모르나. 조선조를 판막음하는 다양한 활동을 벌인 천재화가가 그 기량을 마음껏 과시했음을 그림에서 엿볼수 있다.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 : 태원(太原)

호 : 오원(吾園)

별칭 : 자 경유(景猶)

활동분야 : 예술

주요작품 :《홍백매십정병(紅白梅十幀屛)》 《군마도(群馬圖)》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본관 태원(太原). 자 경유(景猶). 호 오원(吾園). 화원(畵員)을 지내고 벼슬은 감찰(監察)에 이르렀다. 고아로 자라 어려서 남의집살이를 하면서 주인 아들의 어깨너머로 그림을 배웠다. 화재(畵才)에 뛰어났고 술을 몹시 즐겨 아무 주석(酒席)에 나가서나 즉석에서 그림을 그려주었다. 절지(折枝)·기완(器玩)·산수·인물 등을 잘 그렸고 필치가 호방하고 대담하면서도 소탈한 맛이 풍겨 안견(安堅)·김홍도(金弘道)와 함께 조선시대의 3대 거장으로 일컬어진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주요 작품에 《홍백매십정병(紅白梅十幀屛)》 《군마도(群馬圖)》 《청록산수도(靑綠山水圖)》 《수상서금도(樹上棲禽圖)》 《영모절지병풍(翎毛折枝屛風)》 《풍림산수도(楓林山水圖)》 《화조곡병(花鳥曲屛)》 《담채산수(淡彩山水)》 《화조수도(花鳥獸圖)》 《포대도(包袋圖)》 《심양송객도(陽送客圖)》 《어옹도(漁翁圖)》 등이 있다. 1. 조선왕조의 마지막 대화가 장승업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은 조선시대의 수많은 빼어난 화가들 중에서도 3대 화가, 혹은 4대 화가 중의 한사람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3대 화가라면 안견(安堅), 김홍도(金弘道)와 장승업을, 4대 화가라면 정선(鄭敾)을 추가하여 일컫는다. 그리고 장승업은 이들 중에서도 가장 현대와 시대적으로 가까운 19세기 후반을 살다간 인물이다.

위에서든 화가들을 3대 화가, 혹은 4대 화가로 지칭하는 이유는 그들이 남긴 거대한 예술적 업적과 영향력 때문이다. 조선 초기 세종(世宗) 연간의 찬란한 문화 중 회화 예술을 대표하는 안견, 조선 후기 영조(英祖)·정조대(正祖代) 문예부흥이의 회화 예술을 대표하는 김홍도와 정선은 제각기 우리 회화 사에서 크나큰 업적을 남겼다. 안견은 조선 초기를 풍미한 소위 안견파 화풍의 창시자로서 그의 영향은 일본 무로마치 시대 수묵화에까지 미쳤다. 조선 후기의 김홍도는 당시의 사실주의적이고 진취적인 국가 기상을 반영하는 건강하고 화려하며 다양한 회화적 업적을 남겼다. 조선 후기 회화사의 주요한 업적으로 꼽히는 진경산수화를 대성한 정선도 기세가 넘치는 필법으로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아 오늘까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원한 감동을 느끼게 해준다.

오원 장승업은 시기적으로 이들 대가들 중 현대와 가장 가까운 시기에 활약한 화가이다. 그는 조선 왕조가 500년의 긴 역사를 타의에 의해 마감해 가는 암울한 시대를 살았다. 당시 조선 왕조는 내부의 모순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 근성을 배운 일본과 시대적 추세를 거스른 완고한 청나라, 그리고 러시아의 열강의 침략 속에서, 내부 개혁의 의지를 완성시키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몰락해 갔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500년을 지속한 문화대국(文化大國)답게 내부적으로는 풍부한 문화적 토양을 갖고 있었으니, 장승업의 회화는 바로 그런 문화대국 조선왕조가 마지막으로 빛을 발하듯이 배출한 천재화가이다.

오원 장승업의 회화적 업적은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지만 중국적인 소재를 많이 다룬 점,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안목이 작품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오해 등으로 인해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문학, 예술 전반의 소재는 대부분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었으며, 또한 진정한 예술가의 성취에서 꼭 시사적인 성격이 가미된 정치와 철학의 풍모가 있어야만 하는가? 오히려 가장 최고의 예술에서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바로 모든 현세적인 것을 초월한 진정한 아름다움 그 자체가 아닐까? 오원 장승업은 바로 그런 진정한 동양 예술정신의 진수를 체득한 화가였다. 그리고 진정한 프로정신으로 자신을 연마하여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기량과 넘치는 신운(神韻)으로 19세기 동아시아 회화사상 불후의 업적을 남겼다. 더구나 그가 활동했던 시대는 당시 조선인에게는 암울하기 짝이 없었으며, 그런 속에서 피어난 예술이기에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모든 진정한 예술가가 그렇듯이 장승업도 금새 당시 예술계의 총아가 되었으며, 위로는 고종 황제와 엘리트 지배관료로부터 아래로는 지방의 이름 없는 부호에 이르기까지 기꺼이 그의 후원자가 되고자 했다. 그래서 궁중에서 그림을 그려 바치라는 임금의 어명을 여러 차례 어기는 기행(奇行)에 조차 면죄부를 준 것은 세속을 초월한 진정한 예술 혼의 덕분이었다. 장승업이 당대를 오불관언(吾不關焉)하고 오직 술과 예술 속에 살다가 뜬구름처럼 간 것은 어쩌면 무너져 가는 조선왕조와 당시대인에 대한 치열한 무언(無言)의 거부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1897년 무너지기 직전의 조선왕조가 형식적 독립을 선포하는 광무원년(光武元年) 홀연히 세상을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원 장승업의 회화는 아직 상당수가 남아 진정한 예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웅변하고 있다. 그래서 서구 미술이념이 지배하는 현대 한국, 동양의 풍토에서 진정한 전통을 되살리는 길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2. 술과 예술, 그리고 방랑의 생애

장승업은 죽은지 1세기가 겨우 지난 인물로 조선 말기의 최대의 화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애에 대한 기록은 별로 많지 않다. 현재 알려져 있는 장승업의 생애는 대부분 한 말의 장지연(張池淵)이 지은 『일사유사(逸士遺事)』와 오세창(吳世昌)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의 기록, 그리고 김용준, 김은호 등이 장승업의 제자이거나 동시대인이었던 안중식과 조석진 등에게서 들은 이야기로써 재구성한 것이다. 장승업에 대한 기록이 이처럼 드문 것은 당시의 시대상황과 관련이 있다. 즉 당시는 500년을 이어온 문화대국 조선왕조가 쇠망해 가는 시기였고, 또 이어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기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문화예술 방면에 있어서 자기성찰과 자세한 기록·보존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조선왕조 최후의 대화가 장승업에 대한 기록이 이처럼 소략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앞으로 조선 말기의 시대사 연구가 더 진행되고, 현재 미간(未刊)된 구한말 인사들의 문집이 정리, 출간되면 장승업에 대한 좀더 자세한 사실들이 밝혀지리라 기대된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현재의 자료로써 그의 생애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장승업은 1843년에 태어났는데, 출생지나 부모 등은 알려지지 않았다. 장승업의 본관은 '대원(大元)'이며 무반(武班) 집안이었다고 한다. 대원이란 본관은 아주 희귀하지만 『국조방목(國朝榜目)』에 등재된 인물이 몇 사람 보인다. 또 대원이란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의하면 황해도 안악의 한 지명이기도 한데, 장승업의 본관과 같은지 불분명하다. 그런데 '승업(承業)'이란 가업(家業)을 세습하던 중인(中人) 집안에서 자주 보이는 이름이므로 장승업의 집안도 중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장승업은 일찍이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며 떠돌아다니다가 한양에 거주하던 역관(驛館) 이응헌(李應憲, 1838∼?)의 집에 붙어살게 되었다. 그런데 이응헌은 그림과 글씨를 모으고 감상하는 취미를 가졌던 인물로서, 장승업의 그림 재주를 알아보고 본격적으로 화가로서 활동하게끔 도와주었다고 한다. 즉 이응헌은 장승업이 화가로서 성공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인물인 것이다. 이런 사정을 장지연의 『일사유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장승업은) 일찍 부모를 잃고 집도 무척 가난하여 의지할 곳조차 없었다. 총각으로 굴러다니다가 서울에 와서, 수표교(水標橋)에 있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 벼슬을 지낸 이응헌의 집에 붙어살고 있었다. 장승업은 어릴 때 글을 못 배웠으므로 글씨(文字)에는 캄캄하였다. 그러나 천성이 총명하여 주인집의 글 읽는 아이들을 따라서 옆에서 듣고 거의 이해하게 되었다.

이응헌의 집에는 중국 원(元), 명(明) 이래의 이름난 사람들의 그림과 글씨를 많이 수장하고 있어, 그림을 연습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보는 일이 자주 있었다. 이럴 때마다 장승업도 함께 매번 유심히 바라보고는 하다가 하루는 마치 전생에 화가였던 듯이 문득 깨달음이 있어, 신(神)이 모이고 뜻이 통하였다. 평생에 붓 자루도 쥘 줄 몰랐는데, 하루는 문득 붓을 잡고서 손이 내키는 대로 붓을 휘두르고 먹물을 뿌려서 대나무(竹), 매화(梅), 난초(蘭), 바위(石), 산수, 영모 등을 그려보니 다 자연스레 하늘이 이루어 놓은 듯 하여 신운(神韻)이 떠돌았다. 이응헌이 보고 깜짝 놀래며 "이 그림을 누가 그린 거냐"고 하니 장승업은 사실대로 말하였다. 이응헌은 "신이 도우는 일이다"고 하며, 종이, 붓, 먹 등을 장만해 주고 그림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글부터 화명(畵名)이 세상에 날려 사방에서 그림을 청하는 이가 줄을 이었고, 수레와 말이 골목을 메웠다.

이 글을 통해 고아 장승업이 이응헌 집안의 그림들을 통해 회화에 대한 숨은 재능을 발굴하게 되었고, 또 당시 통용되던 한문(漢文)에 대해사도 초보적인 지식을 가질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장승업에게 이런 큰 도움을 주게 된 이응헌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이응헌은 『조선시대 잡과 합격자 총람』(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에 의하면 호가 송서(松西), 본관은 금산(金山)인데, 원래 계사(計士)였으나 18세 때(1855년) 역과 시험에 합격하여 중국어 역관(漢子 譯官)이 된 인물이다. 벼슬은 나중에 종2품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응헌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은 그가 조선 말기 역관 한시사대가(譯官 漢詩四大家) 중의 한 사람이자,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로부터 〈세한도(歲寒圖)〉를 그려 받은 서화금석 수장가 이상적(李尙迪, 1803〉1865)의 사위인 점이다. 이상적은 김정희의 <세한도>를 청나라로 가져가서 그곳의 유명인사들의 발문을 받아왔을 뿐 아니라, 조선 말기의 청나라와의 서화, 금석문(金石文) 교류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이응헌의 고서화 수집과 감상 취미는 당시 중인 지식인의 보편적인 경향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장인 이상적의 서화금석학계에서의 위치로 말미암아 더욱 깊어졌으리라 짐작된다. 한편 이응헌의 서화계에서의 위치는 이상적의 제자였던 소당 김석준(小棠 金奭準, 1831∼1915)의 『홍약루속회인시록(紅藥樓續人詩錄)』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서화계에서 이응헌을 사귀었던 김석준은 다음과 같이 애도하였다.

아름다운 용모 뛰어남을 드러내니, 부용이 물 속에서 피어난 듯 하네, 선량하고 일을 힘써 주관하니, 큰 명예 멀고 가까운데 두루 미쳤네, 어찌 알았는가 황화회에서, 매화 아래 추모 시를 지을 줄을, 이응헌은 장승업보다 불과 5세 위이지만 13세 때에 벌써 주학(籌學) 시험을 쳐 계사(計士)가 되었고, 18세 때에는 다시 역과 시험에 합격했던 조숙한 인물이었다. 또 위의 시에서 김석준이 이응헌을 평하여 "선량하고 일을 힘써 주관"한다고 하였으니, 불우하였으나 뛰어난 재능을 지닌 장승업을 힘써 후원하여 대화가가 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장승업이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고는 하나 처음 그림을 그릴 때에는 누구에게 배웠을 것으로 보이는데, 장승업의 초년의 스승이었다고 전해지는 화가로서 혜산 유숙(蕙山 劉淑, 1827∼1873)이 있다. 유숙은 이한철(李漢喆, 1812∼1893 이후), 백은배(白殷培, 1820∼1900) 등과 함께 19세기의 대표적 화원으로서 장승업보다 16세 연장이었다. 유숙은 산수, 인물, 화조 등 여러 소재에 능했고 풍속화도 몇 점 남겼는데, 그의 산수화나 화조화 중의 일부에는 장승업의 초기 작품과 화풍상 유사한 면이 있어 전해지는 말이 어느 정도 근거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유숙의 화풍은 정형화된 남종화풍 위주였으므로, 장승업이 후기에 이룩한 독창적이고 파격적인 화풍과는 상관이 없고, 주로 초년의 회화수업에 도움을 주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한편 고아 장승업이 한양으로 흘러 들어와 유명한 화가가 되기까지 큰 도움을 주었다고 전하는 인물로, 위에서 살펴본 이응헌 이외에 한성판윤을 지낸 변원규(卞元圭, 1837∼1894 이후)가 있다. 김용준의 『근원수필』에 의하면 장승업은 초년에 한성판윤 변원규의 집에서 고용살이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용준 이후의 여러 사람들이 장승업에 대해서 쓴 글들에서는 이응헌 보다도 변원규의 이름이 더 자주 등장하게 된다. 이것은 이응헌 보다도 변원규가 훨씬 유명한 사람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변원규는 구한말의 역관으로서 중국 청나라와의 외교업무에 깊이 관여하여 고종의 신임을 얻고, 후에 중인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한성판윤 벼슬을 여러 차례 역임하게 된 인물이다. 그래서 『고종순종실록』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고종순종실록』에 의하면 변원규가 외교 교섭 관계로 청나라를 왕래한 것이 44세 떼인 1880년부터이며, 또 5년 후인 1885년에 49세의 나이로 처음으로 한성판윤에 임명된다. 이때는 장승업의 나이도 43세의 장년기로 이미 화가로서 명성을 드날리던 시기이다. 따라서 한성판윤 변원규는 장승업의 초년기 후원자로서보다도 후년기의 유력한 후원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변원규도 이응헌처럼 서화 감상과 수집 취미가 있었으며, 당시 중인 출신 문예계 인사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 김석준의 『홍약루회인시록(紅藥樓懷人詩錄)』 상권에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빛나는 보검과 같은 시의 격조, 명사도 의연히 한 수 양보해야 하리,

하늘과 땅의 맑은 기운을 받아 지녔으니, 그대의 신령스러운 지혜 몇 생애에서 닦았는가.

장승업은 일찍이 놀라운 기량과 호방한 필력으로 큰 명성을 날렸다. 그런 장승업의 명성은 궁중에까지 들려 고종(高宗) 임금이 불러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러나 장승업에게는 임금의 부름도 크나큰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로운 창조에 있어서 구속으로 느껴져 궁궐에서 도망치게 된다. 장승업과 고종에 대한 이야기도 장지연의 『일사유사』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그런데 장승업의 명성이 궁중에까지 들리니, 고종 임금이 불러 들이라 명령하여 궁중에 조용한 방을 마련해주고 병풍 십수첩(十數疊)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미리 궁중의 음식을 감독하는 자에게 지시하여 술을 많이 주지 못하게 하고, 하루 두어 번 두세 잔씩만 주도록 하였다. 열흘이 지나자 장승업은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여 달아나고자 하였으나 경계가 엄중하므로, 문지기에게 그림 물감과 도구를 구하러 간다고 속이고 밤중에 탈주하였다. 고종이 이를 듣고 잡아오게 하여 더욱 경계를 엄중히 하고 그 그림을 완성시키게 하였다. 그러나 장승업은 또다시 자기의 의관 대신 금졸(禁卒)의 의복을 훔쳐 입고 달아나기를 두 세 번에 이르렀다. 마침내 고종이 화를 내어 포도청에 명령하여 잡아 가두도록 하였는데, 그때 마침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이 고종을 곁에서 모시고 있다가 아뢰기를, "신이 본래 장승업과 친하오니 저의 집에 가두어 두고 그 그림을 끝내도록 분부해 주시기를 간청하옵니다"하니 고종이 허락하였다. 민영환 공은 바로 사람을 시켜 이런 뜻을 장승업에게 설명해주고,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의관을 벗겨 감추고 별실(別室) 안에 처소를 정해주었다. 그리고 하인에게 빈틈없이 감시하는 동시에 매일 술대접을 잘 하되 다만 너무 많이 취하지 않도록 하였다. 민영환 공이 이처럼 대우해주니 장승업도 처음에는 감사하는 마음이 들어 차차 정신을 차리고 조용히 앉아 그림에 전념할 듯 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민영환 공이 입궐하고 감시하는 하인이 잠깐 자리를 비우자 장승업은 다시 다른 사람의 모자와 상복(喪服)을 바꿔 입고 술집으로 달아나 버렸다. 민영환 공은 여러 차례 사람을 시켜 장승업을 찾아 잡아 왔으나 끝내 그 일을 마치지 못하였다.

위의 일화는 장승업의 진정한 예술적 기질, 즉 일체의 세속적인 가치와 법도는 그에게 있어서 하찮은 것이었고, 오직 예술과 창작의 영감을 북돋아주는 술만이 전부였다. 그런 진정한 예술혼이 있었기에 그의 파격적인 행동에도 민영환 같은 분의 지우(知友)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위의 궁중에서의 일화는 대개 40세 경의 일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민영환이 고종을 가까이 모신 시기는 대략 그가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동부승지가 된 1881년 이후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장승업은 40대에 이르러 가장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하는 동시에 그림에도 원숙한 경지에 도달한 듯 하다. 이점은 현재 전하는 기년작(紀年作)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김용준의 『근원수필』에 의하면 장승업은 40세가 넘었을 때 오경연(吳慶淵)의 집을 드나들기 시작하여 중국 그림을 많이 보게 되고, 이것이 새로 기명절지도를 그리게 된 동기가 되었다 한다. 오경연은 조선말기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서화가였던 오경석(吳慶錫)의 네 번째 동생으로서,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의 숙부이기도 하다. 오경연은 형과 마찬가지로 서화를 좋아했으며 고람 전기(古藍 田琦)에게 산수화를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오경연은 중국을 자주 왕래했던 집안 내력상 당시 새로 수입된 중국화를 많이 수장하고 있었을 것이며, 이것이 장승업의 창작에도 많이 참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사유사』에 의하면 장승업은 또 40여 세에 부인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장승업에게 있어서 가정생활도 구속으로 여겨져 하룻밤을 지낸 후 다시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김용준의 『근원수필』에 의하면 장승업이 관수동(觀水洞)에 작은 집을 두고 왕래하였으며, 이 집이 장승업이 죽은 후에는 원남동(苑南洞) 부근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또 장승업의 관수동 소실(小室)의 이름이 박성녀(朴姓女)이며 원래 기생이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조석진과 안중식이 동대문 밖 멀리 조그만 집에 거주하던 장승업의 부인을 방문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어쨌든 이런 이야기들은 장승업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잘 보여주며, 그의 후손이 없는 이유도 설명해 준다.

조석진, 안중식과 비공식적 사제관계를 맺은 것도 같은 대략 40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석진과 안중식은 1881년 영선사를 따라 기계제도를 익히러 중국 천진에 1년간 다녀온 후부터 본격적으로 화가로서의 활약을 시작하는데, 이때가 장승업의 40대 초반에 해당한다.

조석진과 안중식은 당시 큰 명성을 날리던 장승업을 흠모하여 스승으로 사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안중식이 장승업을 스승으로 대한 점은 그가 장승업의 <삼협도(三俠圖)>(간송미술관)에 쓴 제발(題跋)에서 "일찍이 신묘년(1891) 봄에 육교화방(六橋畵舫)으로 오원 선생을 방문하니, 선생은 마침 이 그림을 그리고 계셨다"라고 한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석진, 안중식과 장승업 사이의 관계는 정식 사제 관계라기보다는, 두 사람이 스스로 좋아서 장승업을 스승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궁중에서의 그림 일도 구속으로 여기고 가정 생활도 돌보지 않던 장승업이, 정식으로 제자를 두고 가르쳤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장승업의 술을 좋아하는 성품과 기행(奇行)에 대해서는 『일사유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성품이 술을 목숨처럼 좋아하여 두어 말을 거뜬히 마시되 만취하지 않으면 그치지 않았다. 또 취하면 간혹 한 달이 되도록 깰 줄을 몰랐다. 그러한 이유로써 매양 그림 한 축을 그리려면 가끔 절반만 그리고 걷어치우는 일이 많았다. 또 그림 값으로 받은 금전(金錢)은 모두 술집에 맡겨두고 매일 가서 마시되, 그 금전이 얼마인지 계산도 하려 들지 않았다. 술집에서 "돈이 다 떨어졌다"고 하면, "나에게 술대접이나 할 따름이지, 돈은 물어서 무엇 하느냐"고 하였다.……… 성품이 또 여색(女色)을 좋아하여 노상 그림 그릴 때에는 반드시 미인을 옆에 두고, 술을 따르게 해야 득의작(得意作)이 나왔다고 한다.

장승업의 기행(奇行)은 어떤 행동 그 자체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예술을 향한 순수한 열정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세속적인 권위와 명성, 그리고 금전과 행복 따위를 포기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술을 좋아한 것은 술을 통해 현세를 잊고 예술적 영감의 세계로 비상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뛰어난 예술가와 술과의 관계는 장승업 이외에도 역사상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장승업의 생애는 술과 예술, 그리고 방랑으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임금의 명을 받드는 궁중 화사(畵師)로서의 명성도, 그림의 대가로 받은 금전도, 가정생활도 모두 그에게는 구속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술집과 그림을 부탁하는 사람들의 사랑방을 전전하며 생활하였다. 당시에 장승업의 그림을 구한 사람들은 위로는 왕과 고위 대신들로부터 아래로는 중인, 장사치, 부호 등 아주 많았다. 그러나 장승업의 그림을 구하려면 권위나 금전보다도 좋은 술과 인격적인 대우가 필요했다. 장승업은 아름다운 여인이 따라주는 좋은 술을 실컷 마시고는 취흥이 도도한 가운데 기운 생동하는 명화들을 그려냈다.

장승업에게 그림을 주문했던 후원자들 중 일부는 지금 전하는 장승업의 작품에 적힌 제발(題跋)이나 관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일화에 나오는 바, 고종 임금의 명령에 의해 그려진 그림들 중 일부도 현재 전한다. 즉 간송미술관 소장의 <신선도> 2폭에는 "임금님이 명령을 받들어 신 장승업이 그려 올립니다"라는 관서가 있다. 이 그림을 통해 장승업이 궁중의 그림 일을 모두 마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여러 점을 그려 받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으로 고종의 노여움 속에서 장승업을 구해준 민영환 공에게도 많은 그림을 그려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간에는 민충정공 집안의 구장품이라는 장승업의 작품이 몇 점 전하며, 또 같은 여흥 민씨 집안을 위해서도 많은 그림을 그려주었음이 확인된다. 그 중에는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의 생부(生父)로서 사대당의 핵심인물이었던 민태호(閔台鎬, 1834∼1884)에게 그려준 그림도 있다. 즉 선문대 박물관 소장의 <무림촌장도(茂林村庄圖)>와 서울대박물관의 <국석도(菊石圖)>, 그리고 순천제일대학 소장의 <연화도(蓮花圖)> 등이다. 이중 <국석도>와 <연화도>는 원래 한짝(對聯)이다. 또 장승업이 판서 민영달(閔泳達, 1859∼?)에게 그려준 <파조귀어도(罷釣歸漁圖)>, 그리고 민영달이 좌의정을 지낸 김병시(金炳始, 1832∼1898)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해 장승업에게 주문한 <어옹도(漁翁圖)> 등도 전한다. 장승업이 우의정 정범조(鄭範朝, 1833∼1898)를 위해 그려준 <산수도>도 『한국회화대관』에 실려있다.

이밖에도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1846∼1922), 석운(石雲) 권동수(權東壽, 1842∼?), 유복열의 부친 난사(蘭史) 유병각(劉秉珏), 오경석, 오경연 형제 등을 비롯하여 지금은 알 수 없는 당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장승업의 예술을 아끼고 사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장승업에게는 이들의 사랑방과 술집이 바로 자기 집이었던 셈이다.

오직 술과 예술, 그리고 방랑으로 일관했던 장승업은 1897년 55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한다. 그러나 장승업이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김용준은 장승업은 죽었다기보다는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였고, 정규는 "어느 마을 논두렁을 베고 죽었다"고 하였고, 또 어떤 이는 심지어 신선이 되었다고 까지 하였다. 어찌되었든 간에 장승업의 죽음은 그가 일생을 세속적인 가치를 거부하고 오직 순수한 예술을 위해 살았듯이 죽음도 신비하게 맞은 듯 하다. 이와 관련하여 김용준은 『근원수필』에서 "오원(吾園)이 평사시에 말하기를 사람의 생사(生死)란 뜬구름(浮雲)과 같은 것이니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숨어 버림이 좋을 것이요, 요란스럽게 앓는다, 죽는다, 장사(葬事)를 지낸다 하여 떠들 필요가 무어냐고 했다"라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어, 그의 생사관(生死觀)의 일단을 잘 보여준다. 장승업은 뜬구름 같은 인생에서 가치 있는 것이란 지고한 예술의 세계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 진리를 자신의 온 인생을 통해서 실현하다가 갔던 것이다.

예술가에게 있어서의 아름다움의 추구는 철학자에게 있어서 진리이며, 종교인에게 있어 절대자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3. 암울한 시대를 밝힌 찬란한 예술혼

1) 장승업의 회화(繪畵) 개관(槪觀)

장승업의 작품은 산수화, 인물화, 동물화, 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 등 아주 다양하며, 이 여러 종류에서 모두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다. 그런 중에서도 가장 많이 그린 것이 화조화, 동물화, 기명절지화이며, 산수화와 인물화는 상대적으로 적다. 장승업이 많이 그린 화조화, 동물화, 기명절지화는 형태상 병풍으로 그려진 경우가 많아 당시의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

장승업의 회화를 양식적으로 볼 때, 한마디로 전통화법과 외래화법을 종합·절충하여 자신의 세계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장승업이 활동하기 시작했던 19세기 후반, 우리 나라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이래 상당히 형식화된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런 화풍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 백은배(白殷培, 1820∼1900), 이학철(李漢喆, 1812∼1893 이후), 유숙(劉淑, 1827∼1873) 등이며, 이 중 유숙은 장승업의 초년 스승이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때에는 그 이전, 즉 18세기의 중국 양주팔괴(楊洲八怪)의 화풍이 이미 유입되어 있었고, 또 당시 중국의 신 화풍도 수입되고 있었다. 새로 수입된 신 화풍이란 당시 번창했던 신흥도시 상해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조지겸(趙之謙), 임백년(任伯年), 오창석(吳昌碩) 등 소위 해상파(海上派)와 광동성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거소(居巢)와 거렴(居廉) 형제 등의 초기 영남학파(嶺南學派)의 화풍을 말한다.

그러나 장승업의 화가로서의 위대성은 어떤 한 가지 유파나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는 뛰어난 기법과 양식적 다양성을 가진 독자적 경지를 이룬 데 있다. 장승업이 즐겨 사용한 기법으로는 필선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내는 백묘법(白描法), 정묘하고 아름다운 공필(工筆) 채색화법, 이와는 정반대인 호방한 필묵의 감필법(減筆法), 수묵의 깊은 맛을 보여주는 파묵법(破墨法), 근대적 감각을 보여주는 신선한 선염 담채법, 그리고 최후에 이룩한 깊은 정신미가 깃든 수묵 사의화법(寫意畵法) 등을 들 수 있다.

장승업은 조선 후기의 대화가 단원 김홍도를 의식하여 "나도 원이다"라는 뜻으로 오원(五園)으로 자기 호를 지었다. 그리고 매번 스스로 자신의 작품에는 신운(神韻)이 생동(生動)한다고 자부하였다고 한다. 이런 그의 자부심은 예술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에서 오는 내적 자신감의 표현이며, 이는 그의 뛰어난 작품들이 증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를 안견(安堅),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한국 회화사상 진정한 대가(大家)의 반열에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장승업의 회화는 초월적 예술정신의 발현이자 암울했던 시대를 밝힌 찬란한 예술혼으로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작 품

방황공방 산수도
(倣黃子久 山水圖)

송풍유수(松風流水)

귀거래도(歸去來圖)

산수도(山水圖)

미산이곡

영모도 대련(翎毛圖 對聯)

죽원양계(竹園養鷄)

원도(부분)

앵무도

쌍마인물(부분)

왕희지관아도

 

고사세동도(高士洗桐圖)

계도(鷄圖)

초원지록(蕉園芝鹿)

 

 



 .

 

 


 

출처 : 난사랑
글쓴이 : 창곡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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