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고문 금강경>을 통하여 주나라 말기 춘추전국시대에 사용되었던 다양한 문자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한 나라 안에서 그러한 여러가지 문자들이 사용된다면 여간한 혼란과 어려움이 생기지 않을 수 없고,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이상 통일된 나라 안에서는 원활한 통치를 위해서도 문자의 통일은 시급한 사안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승상 이사의 상소를 가납하여 소전으로 문자를 통일했으며, 통일된 문자를 널리 보급시키기 위하여 여러가지 시책을 시행하였고, 진시황의 순행시 그 공덕을 찬양하는 송덕비도 아래 탁본에서 보는 것처럼 이 소전체를 사용하여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역산각석의 탁본>
문자통일 이후 처음으로 보게 되는 소전체 글씨의 전형으로, 연대가 확실하게 증명된 가장 오래된 석각 글씨의 탁본입니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져 버렸습니다만 다행스럽게도 송나라 순화 4년(서기993년) 정문보가 중각한 탁본이 전래되어 소전의 전형으로서 진나라 재상이었던 이사가 쓴 글씨를 볼 수 있게 된 것은 서예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보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탁본의 글씨체는 아마도 진시황의 문자통일 이후 거의 초기 소전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진시황의 순행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태산각석이나 낭아대 각석보다 먼저 역산각석이 새겨진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마천이 쓴 역사서 <사기-시황본기>에, 진시황은 기원전 221년 천하를 통일하고 그리고는 내치에 주력하여 나라가 안정되자 서력기원 전 219년, 즉 천하통일 후 3년 뒤에 동방의 군현을 순시하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일곱차례에 걸쳐 중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그 때 마다 순행의 치적을 돌에 새겨놓았는데, 그 첫번 째가 산동성에 있는 역산에 올랐을 때 새긴 <역산각석 BC219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230년 전의 아득한 옛날에 돌에 새긴 글씨입니다.
물론 돌에 새긴 글씨로는 <석고문>이 이보다 연대가 오래된 것으로 추정하고는 있으나 확실한 연대를 밝힐 수가 없기 때문에 이 글씨는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입니다.
진시황의 순행기록에 관해서는 아래 글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http://blog.daum.net/imrdowon/8468106>
역산각석에 뒤이어 태산각석과 낭아대 각석이 새겨집니다만 태산각석의 글씨는 원석은 물론, 탁본글씨조차도 겨우 10자 밖에 남아있지 않은 현실입니다.
이 태산각석의 원석이 송대에 처음으로 발견되었는데 그 때 이미 1500여년이 지난 터라 문자가 마멸된 것이 많았고, 그 후 다시 흙 속에 매몰되었다가 명대에 재발견 되었을 때는 불과 29자 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이 29자의 잔석도 서기 1740년 청의 건륭황제 5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그 잔편이 2개 발견되었는데 불과 10자 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지금은 탁본의 복사본으로나마 볼 수 있는 것은 양수경이 소장하고 있던 29자의 정탁본인데, 탁본을 수집하는 과정에 명대 안국이 소장하였던 태산각석 탁본의 재복사본에서 53자 본을 발견하였으므로 여기에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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