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의세계

[스크랩] 코리안루트를 찾아서(경향신문)

최흔용 2009. 6. 15. 17:51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中·한반도·日문명의 젖줄 ‘발해문명’
입력: 2007년 10월 07일 17:50:01
 
-발해만 동이족, 동아시아의 새벽을 열다-

경향신문이 1만㎞를 달렸습니다. ‘코리안루트를 찾아서’라는 기획탐사를 위한 쉼 없는 발걸음이었습니다. 한국 언론사상 처음 있는 역사대탐험입니다. 지난 7월9일부터 8월1일까지 23박24일간이었습니다. 러시아 연해주-바이칼호-울란우데-훌룬부이르-하일라얼-오룬춘-건허-하얼빈-선양-츠펑-링위안-차오양까지. 까마득한 선사시대부터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를 더듬어보았습니다. 한반도, 아니 한반도 남부에 갇혀있는 역사를 이제는 넓은 시야로 바라보자는 뜻입니다. 우리 역사는 결코 한반도에서만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피를 나눈 형제일 수도, 이웃사촌일 수도 있는 종족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함께 풀어갈 것입니다. 이번 탐사에는 이형구 선문대 교수(역사·고고학), 주채혁 세종대 교수(몽골학), 윤명철 동국대 교수(역사학), 양민종 부산대 교수(신화학), 정석배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고고학), 시미즈 순천향대 초빙교수(언어학), 정재승 봉우사상연구소장 등이 참여했습니다. 이후 시리즈는 13일자부터 매주 토요일자(‘책과 삶’ 섹션)에 실립니다.
[코리안루트를 찾아서]신화 잉태한 ‘바이칼’을 가다
입력: 2007년 10월 07일 19:10:34
 

몽골을 비롯한 동북아시아 여러 종족의 신화와 전설이 잉태된 시베리아 바이칼 호 알혼섬 주변의 일출 모습. 경향신문 탐사단은 창간 61주년을 맞아 ‘코리안루트를 찾아서’를 주제로 역사대탐험에 나섰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출발해 바이칼을 거쳐 발해만까지 이어진 ‘1만㎞ 대장정’. 탐사단은 24일 동안 우리 민족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동아시아 문명을 연 이웃 종족들의 발자취를 살폈다.

<바이칼호/김문석기자>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 고조선 추정 청쯔산·싼줘뎬 유적
입력: 2007년 10월 12일 14:57:01
-거대한 성, 수천년 전 韓민족을 증거하다-
고조선의 성일 가능성이 많은 싼줘뎬 석성 안에 있는 원형건축물 흔적. 조상신·하늘신에 제사 지낸 제단일 가능성이 높다.

월28일.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오후였다.

36도 불볕더위 속에 츠펑(적봉, 赤峰) 인근 청쯔산(성자산, 城子山) 유적을 찾아 나선 길. “일정에 없다”며 몽니를 부리는 버스 기사와 한바탕 큰소리가 오간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가도가도 끝 없는 길. 아는 길이라고 자신했던 안내인이 연방 고개를 갸웃거린다. 길을 묻느라 가다 서다를 반복하기를 무려 10여차례.



천신만고 끝에 쓰다오완쯔(사도만자, 四道灣子)역에 닿았다. ‘다 왔나’ 싶었더니 아니란다. 안내원이 뭔가 흥정을 하더니 다시 마을 6인승 승합차에 타란다.
치가 13개나 되는 싼줘뎬 석성의 위용.

# 위험천만 역주행

황토먼지를 일으키며 10여분 달리더니 어라 이상한 곳으로 들어간다. 츠펑~퉁랴오(통료, 通遼) 간 고속도로 공사구간이다. 아직 공사가 한창인 미개통 도로라 출입금지 팻말을 달아놓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휙 진입해버린다.

‘어어!’ 탐사단은 비명을 질렀다. 역주행길이다! 고속도로를 역주행하고 있는 것이다. 모골이 송연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길. 그냥 소름 돋는 스릴을 즐길 수밖에. 20여분 ‘역주행’의 경험을 맛본 뒤 역시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리곤 등산이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수풀 가득한 청쯔산. 뛸 듯이 단숨에 올라갔다. 1분1초라도 빨리 올라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그 놈의 욕심 때문에.

과연 그랬다. 서요하 상류, 평원을 조망할 수 있는 정상, 그리고 수풀 사이로 펼쳐지는 끊임없는 돌, 돌의 흔적.

10여개의 작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청쯔산의 전체 유적 규모는 6.6㎢다. 아(亞)자 형태인 주봉 유적만 해도 총 면적이 15만㎡나 된다. 주위에는 성벽 같은 반원형의 마면식(馬面式·치) 석축이 있다. 찬찬히 뜯어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200기에 달하는 적석총과 석관묘, 그리고 하늘신과 조상신에 제사를 지냈다는 돌로 쌓은 제단터와 사람들이 살았거나 공무를 보았을 대형 건물터…. 많은 적석총과 석관묘…. 외성과 내성으로 잘 조성된 성벽…. 여섯구역에서 확인된 원형석축건물지만 무려 232개나 된다니….

# 청쯔산 정상에 선 나라는?

싼줘뎬에서 수습한 덧띠무늬 토기편. <츠펑/김문석기자>
이형구 선문대 교수와 윤명철 동국대 교수는 “거대한 무덤터이자 제단터이며, 유적의 규모와 내용으로 보면 국가단계의 사회조직일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내성에서는 최고위층이 거주한 것으로 보이는 건물지 10개가 확인되었습니다. 중국 학자들의 말처럼 고국(古國)의 형태가 분명합니다.”(이형구 교수)

탐사단의 눈을 끄는 것은 우리와의 친연성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샤자뎬(하가점, 夏家店) 하층문화의 대표적인 유적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그런데 샤자뎬 하층문화는 학자들 간 논란이 있지만 늦춰 잡아도 대략 BC 2000~BC 1200년 사이의 문화이다. 눈치 챘을 테지만 고조선의 연대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적석총과 석관묘, 제단터는 물론이고, 성벽의 축조 방법을 보면 고구려·백제와 비슷합니다. 할석으로 한 면만 다듬어 삼각형으로 쌓고, 다음 것은 역삼각형으로 쌓는 형식 말입니다.”

이형구 교수는 “할석과 삼각석(견치석), 그리고 역삼각형의 돌로 견고하게 쌓은 성벽은 인천 계양산성의 축성 방식을 연상시킨다”고 밝혔다. 기자를 비롯한 탐사단은 청쯔산 정상에 널려 있는 이른바 덧띠무늬 토기편을 수습했다. 이 역시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문양이다.

그렇다면 혹 고조선? 기자는 솟구치는 의문점을 가슴에 담아둔 채 하산하고 말았다. 학자들도 기자의 구미에 맞는 속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 어마어마한 석성의 실체는?

그런데 청쯔산 탐사는 그저 리허설에 불과했다. 다음날. 츠펑에서 북서쪽으로 40㎞쯤 떨어진 싼줘뎬(삼좌점, 三座店)으로 향했다. 역시 힘겨운 여정이었으나 탐사단은 소풍 가는 어린아이처럼 설●다. 지난해 정식 발굴을 끝낸, 그래서 발굴보고서도 아직 나오지 않았고, 국내 언론에도 소개되지 않은 ‘싱싱한’ 싼줘뎬 유적을 찾아가는 참이니…. 유적은 2005년 인허(음하, 陰河) 다목적댐 공사 도중 발견되었고, 지난해 말까지 발굴을 끝냈다.

과연 댐 공사가 한창이었다. 오른쪽엔 야트막한 야산이 보였다. 청쯔산과 비슷한 입지다. 기자 일행은 메마른 산등성이를 서둘러 올라갔다.




“와!” 역시 1착으로 뛰어오른 기자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저 보이는 대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댈 뿐. 마치 어제의 청쯔산 집터처럼 완연하게 드러난 집터와 적석총이 끊임없이 펼쳐져 있었고, 제사터와 그리고 도로 혹은 수로가 구획 사이에 조성돼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양념. 정상부에 오르자 거대한 성벽의 행렬이 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학자들도 처음 보는 유적이라 흥분에 휩싸인 듯했다.

“치(雉·적을 제압하려고 성벽 밖으로 군데군데 내밀어 쌓은 돌출부)가 도대체 몇 개야?”(이형구 교수)

이교수가 성의 행렬을 더듬으며 세어보니 확인할 수 있는 것만 13개나 되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성벽이다. 유적의 연대는 BC 2000~BC 1500년 사이(샤자뎬 하층문화)의 것이란다.

# 고구려·백제를 빼닮은 전통

“전형적인 초기 형식의 석성이네요. 기저석을 쌓고 수평으로 기저를 받친 뒤 ‘들여쌓기’를 한 모습…. 횡으로 쌓은 뒤 다음 단은 종을 쌓았어요. 4000년 전에 이렇듯 성벽이 무너지지 않게 견고하게 쌓았다니….”(이교수)

윤명철 교수는 “주거지에 샤자덴 하층문화 때의 토기편들이 널려 있다”면서 “치가 촘촘하게 있다는 것은 육박전 같은 대규모 전투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교수가 실측해보니 치는 5m 간격으로 서 있었다. 대각선을 뚫은 문지(門址)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은신하면서 드나들 수 있는 출입문이다.

성이 무너지지 않게 견치석을 적절하게 배치한 석성의 또 다른 특징은 아군의 추락을 막고 적병의 침입을 방어하려고 여장을 쌓았다는 것이다. 유적의 전체 면적은 1만4000㎡였고, 건물지 수십기와 석축원형제단, 적석총, 그리고 석축 저장공(13개)이 확인되었다.

석성은 츠펑 지구를 포함한 발해만 북부지역에서 발전한 축성술이다. 이 전통은 고구려와 백제로 그대로 이어진다. 또한 조선시대에 쌓은 수원 화성의 공심돈(치의 역할)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는 유서 깊은 우리 축성술의 전통이다.

놀라운 석성과 제단터, 주거지, 무덤…. 어쩌면 이렇게 어제 본 청쯔산성과 오늘 확인한 싼줘뎬 석성이 빼닮았고, 이 전통이 고구려와 백제로 이어질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또 한번 생기는 궁금증…. 고조선의 채취가 물씬 풍기지 않나. 정녕 고조선의 성은 아닌가.

# 중원엔 하(夏), 동북엔 고조선?

중국학계의 분석에서 어떤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랴오시(요서, 遼西)의 샤자뎬 하층문화는 하(夏)나라와 같은 강력한 방국(方國)이 존재했다는 증거이다.”(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

“(청쯔산 같은) 유적은 초기 국가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하(夏)~상(商)나라를 아우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우한치 박물관 도록)

이형구 교수도 “중원의 하나라(BC 2070년 건국)와 동시대에 청쯔산과 싼줘뎬 같은, 수천기의 석성을 쌓은 국가권력을 갖춘 왕권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중국 학자들도 동의하듯 제사 공간, 주거지는 물론 거대한 적석총·석관묘까지, 여기에 행정 조직과 공장을 갖춘 왕권 말이다. 이교수는 “산 위에 이런 큰 규모의 돌들을 운반해서 성을 쌓고 건축물과 돌무덤을 조성할 정도면 전제권력을 갖춘 국가가 아니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라고 부연한다.

그렇다면 고조선이냐. 이형구 교수나 윤명철 교수는 확언하지 못하지만 뉘앙스는 짙게 풍긴다. 여러 증거로 보아 “중원 하왕조 시기에 섰던 동이족의 왕권국가”가 분명하며, 이것은 ‘4000년 전의 고구려성’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고조선의 경우 ‘내가 고조선 유물·유적이요’하는 명문(銘文)을 달고 나오지 않는 이상 100% 확인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고구려의 것’을 빼다 박았지만 2000년의 시차가 있다는 점도 풀어야 할 과제이다.

# 고조선 연구의 밑거름

그러나 지난해 싼줘뎬 석성과 청쯔산 유적을 보았던 복기대 단국대 박물관 연구원은 “백암성 같은 고구려의 성과 너무도 똑같지 않으냐”면서 한가지 시사점을 던진다.

즉, 샤자뎬 하층문화 인골 134기를 분석한 주홍(朱泓) 지린대 교수는 “샤자뎬 하층문화 인골은 정수리가 높고, 평평한 얼굴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이는 ‘고동북유형’이 속한다”면서 “이 같은 유형은 랴오시 지역과 전체 동북지역에서 가장 빠른 문화주민”이라고 분석했다. 허베이성(하북생, 河北省), 산시성(산서생, 山西省), 산시성(섬서생, 陝西省), 네이멍구(내몽고, 內蒙古) 중남부 지구에서 보이는 ‘고화북유형’과는 다른 인종이라는 것이다. 결국 샤자뎬 하층문화인들은 동북유형의 문화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측정된 12곳의 샤자뎬 하층문화 유적 탄소연대측정값이 BC 2400~BC 1300년이라는 점이나, 고조선의 연대와 부합된다는 점도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어쨌든 막 발굴을 끝낸 싼줘뎬 석성과 청쯔산 유적은 우리 고대사와 고대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이들 유적을 만든 이들의 문화전통은 동이의 것, 그 가운데서도 석성과 제단, 돌무덤의 전통을 쌓은 우리 민족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전통의 흔적은 청쯔산, 싼줘뎬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까지 소급된다. 아니 그 이상 장구한 세월 동안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가야 할 탐사단의 여정은 그 머나먼 세월의 발자취를 찾는 것이다. 처음부터 “고조선이 아니냐”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기자의 조급함에 스스로 채찍을 가한다.

〈츠펑|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코리안루트를 찾아서](3) 중국 조상 ‘진뉴산인 기원설’
입력: 2007년 10월 19일 15:07:58
-“발해만-한반도 구석기문화 한 영역”-

발해만에서 확인된 인류화석인 진뉴산인(28만년전)의 복원모습. 랴오닝성 박물관은 이 진뉴산인은 중국인의 조상으로 꼽고 ‘진화의 흐름도’에 진뉴산인을 그려넣고 있다. 선양/김문석기자
“挑戰 夏娃學說(도전 하와학설).”

7월30일. 탐사단은 선양에 있는 랴오닝성 박물관 첫번째 전시실에서 흥미로운 문구를 발견했다. ‘하와(夏娃)’는 아담과 이브의 ‘이브’이며, 이 문구는 “이브학설(The Eve of Theory)”에 도전한다는 뜻이다.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이곳에서는 이른바 ‘랴오허문명전(발해문명전)’이 상설전시되고 있었다. 이미 독자 여러분들에게 요점을 밝혔듯(경향신문 10월8일자 보도) 이 전시는 “중국문명의 시원을 발해문명(랴오허문명)”으로 인정하면서 발해만 유역에서 확인된 문명의 역사와 증거들을 소개하는 것이다.

# 흑인 ‘이브’의 출현

그런데 ‘도전 하와학설’이란 무엇인가. 우선은 중국인들이 말하는 이른바 ‘하와학설’을 설명해야 할 것 같다.

1987년 버클리의 유전학자들인 앨런 윌슨과 레베카 칸, 마크 스톤킹은 전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결과를 발표한다. 지구촌에 살고 있는 60억명 인류의 조상은 지금부터 약 15만년 전 아프리카에 살고 있던 어느 여성이라고 입증해낸 것이다.



어떻게 분석해낸 것일까. 이들은 세포에 들어있는 미토콘드리아라는 작은 세포구조에 주목했다. 미토콘드리아는 복잡한 구조의 화학물질을 분해해서 단순구조의 고에너지 물질로 만드는 일종의 세포전지 구실을 한다. 그런데 미토콘드리아에는 1만6500개의 독특한 DNA가 존재하고 있다. 이 DNA의 염기서열은 사람마다 아주 조금씩 다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이 미토콘드리아를 어머니의 난자에게서만 물려받는다는 점이다.

정자? 정자는 염색체만을 전달하며, 약간의 미토콘드리아를 갖고 있지만 수정과정에서 팽개쳐버린다. 윌슨 등 과학자들은 바로 이 점에 착안했다.

지금 세상에 살고 있는 30억명의 여성에게 있는 미토콘드리아 DNA를 계속 역추적하면…. 미토콘드리아 계보의 수는 윗세대 여성으로 올라갈수록 수십억에서 수백만, 수천, 수십, 한자릿수로 줄어들게 된다. 이 결과 과학자들은 현생인류의 조상을 ‘15만년 전(처음엔 20만년 전이었으나 후에 교정되었다) 아프리카에 살던 자매인 두 여성’이라고 결론내렸다. 이 여인에게 붙은 이름이 바로 ‘미토콘드리아 이브’인 것이다.

그리고 이 이브의 후손 중 일부는 약 10만년 전 아프리카를 탈출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간다. 이것이 미토콘드리아 이브 학설에 뒤이은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 학설이다. 처음엔 회의적이었다.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흑인 이브가 흑인 아담에게 사과를 주는, 다소 냉소적인 그림을 싣기도 했다.(스티브 올슨 저 ‘우리 조상은 아프리카인이었다·Maping Human History·몸과 마음 출판사’ 참조)

# ‘이브’에 도전장 내민 중국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상황은 변했다. 배기동 한양대 교수는 “과학자들의 후속연구를 통해 이 ‘아웃 오브 아프리카 학설’을 뒷받침하는 결과들이 속출했다”면서 “현생인류가 아프리카에서 기원했다는 것은 이제 정설로 굳어졌다”고 말했다.

이로써 아프리카인은 원시 호모 사피엔스(아프리카)에서, 아시아인은 호모 에렉투스(아시아)에서, 유럽인은 네안데르탈인(유럽)에서 진화했다는 다지역기원론은 힘을 잃어갔다. 그러나 중국학계 주류는 이 같은 정설을 거부해왔다. 랴오닝성 박물관의 ‘도전 하와학설’은 바로 이 같은 흐름을 단적으로 일러주는 것이다.

중화주의를 신주 모시듯 하는 중국으로서는 절대 ‘하와학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특히 1923년 중국 베이징 남쪽 저우커우뎬(周口店)에서 발견된 베이징 원인, 즉 50만년 전의 호모에렉투스가 중국인의 조상이라고 주장해왔다.

특히 중국인들이 ‘믿는 구석’인 것이 바로 랴오둥(요동, 遼東) 반도에서 발굴한 진뉴산인(금우산인, 金牛山人)이다. 1986년 랴오닝성 잉커우(營口)현 서남쪽, 발해만에서 30㎞ 떨어진 작은 섬 같은 산에서 완전한 형태의 인류화석이 발견되자 중국은 호떡집에 불난 듯했다. 분석 결과 이 인골은 28만년 전 20~22살의 젊은 여인으로 추정되었다. 무엇보다 원시적 형태의 화덕이 확인된 게 중국인들을 흥분시켰다. 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은 “진뉴산인의 두개골과 상지골, 그리고 불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 등을 종합하면 동시대의 베이징원인보다 발달한 인과(人科)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중국학계는 나아가 진뉴산인의 존재를 인류진화의 큰 과정으로 설명해놓고 있다. 즉 진뉴산인을 호모에렉투스(直立人·200만년 전)와 호모사피엔스(智人·20만~5만년 전)의 사이, 즉 초기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하는 과도기적 단계를 이끈 것으로 평가해 놓고 있다.

# 중국인의 조상은 발해만 진뉴산인

‘랴오허 문명전’은 또한 약 25만년 전 인류화석인 먀오허우산인(묘후산인, 廟後山人)에도 주목하고 있다. 먀오허우산은 랴오둥 산간지역인 번시(本溪)시에 있다.

특히 전시실 설명서에는 먀오허우산인은 화베이(화북, 華北)지구의 커허-딩춘 대석기 문화는 물론 ‘한반도의 구석기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설명해놓고 있다.

전시회는 또 랴오시 카줘현 다링허(대릉하, 大凌河) 유역에서 확인된 7만년 전의 거쯔둥(합子洞) 유적과, 랴오둥에서 발견된 4만~1만8000년 전의 샤오구산(小孤山) 유적도 중요한 구석기 유적으로 전시해놓고 있다.

랴오닝성 박물관은 이렇게 진뉴산인(28만년 전)과 먀오허우산인(25만년 전), 거쯔둥인(7만년 전), 샤오구산인(4만년 전) 등을 이른바 ‘랴오허문명전’의 첫번째 전시실로 꾸몄다. 그리곤 ‘도전 하와학설’이라는 문구를 걸어놓고 “‘미토콘드리아 이브’의 가설에 도전장을 내밀었다”면서 세계학계의 정설에 도발적인 설명을 내건 이유는 분명하다.

중국문명의 원류는 발해만에서 탄생한 발해문명(랴오허문명)이며, 그 발해문명은 멀리 28만년 전에 아시아 동북에 존재했던 진뉴산인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저명한 인류학자인 자란보(賈蘭波)는 “베이징인이 살고 있을 당시, 베이징인보다 진보적인 특징을 가진, 즉 원시 부엌까지 갖춘 진뉴산인이 있었다”면서 “진뉴산인부터 초기 호모사피엔스의 신시대로 돌입했다”고 말했다. ‘중화민족’의 원류를 28만년 전의 발해만에서 찾는 것이다.

궈다순은 발해만 유역에서 나타난 체계적인 구석기문화의 연계성을 설명한다. 즉 발해만 유역에서는 진뉴산인·먀오허우산인·거쯔둥인·샤오구산인 말고도 음미할 만한 구석기 유적들이 많다는 것이다. 즉 압록강 하구인 둥강(東港)시 첸양(前陽) 동굴 인류화석과 젠핑인(建平人), 젠셴(錦縣) 선자타이(沈家台) 유적, 링위안(凌源)의 시바젠팡(西八間房) 유적 등이다.

그는 “랴오시(遼西) 구릉과 랴오둥(遼東) 산간지역에서 구석기 전기·중기·후기 유적이 두루 관찰된다”면서 “이는 고인류가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중국은 ‘미토콘드리아 이브’가 아프리카를 나와(‘아웃 오브 아프리카’) 각지로 떠났다는 학계의 정설을 단호히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진뉴산인이 발견된 랴오닝성 잉커우 현장. <이형구교수 제공>

# 발해만과 한반도 모두 같은 문화권

그렇다면 과연 10만년 전에 아프리카를 탈출했다는 현생인류가 아닌, 28만년 전 고인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배기동 교수는 “만약 중국인들이 진뉴산인을 중국민족의 원류라고 본다면 그것은 지나친 민족주의적인 시각이며, 지나친 중화주의”라면서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검토하면 고인류와 현생인류 간에는 어떤 유전자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했다. 고인류는 요즘 사람들의 조상이 될 수 없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진뉴산인이나 먀오허우산인 같은 전기 구석기인들을 무슨 ‘민족의 원류이거나 뿌리’라고 여기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훗날 문명의 젖줄이 된 발해만 유역에서 잇달아 확인되는 구석기 유적들에 대해서는 우리도 관심을 둬야 할 것이다.

배교수도 “국경이 없던 시절이던 구석기 시대인 만큼 발해만뿐 아니라 한반도와 만주까지 같은 구석기 문화영역이었다”면서 “우리 학계의 연구도 한반도에만 국한시키지 말고 발해만까지 넓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른바 ‘랴오허 문명전’ 전시실이 먀오허우산인을 설명하면서 “조선반도(한반도) 구석기 문화와 관련성이 있다”고 구체적으로 표기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사실 베이징인과 진뉴산인이 살았을 무렵, 한반도 전곡리 같은 곳에서도 고인류는 살고 있었다(약 30만년 전). 한반도에서는 이미 70곳이 넘는 구석기 유적이 확인됐고, 앞에서 살펴봤듯 발해만 유역을 비롯한 만주 일대에서도 10곳이 넘는 구석기 유적이 조사됐다.

북한에서는 1973년 평남 덕천군 승리산에서 ‘덕천인(10만~4만년 전)’과 ‘승리산인(4만~3만년 전)’이 잇달아 발견됐다. 77년엔 평양시 력포구역 대현동에서 력포인이, 80년에는 평양 검은모루 동굴에서 후기 구석기시대의 인류화석(룡곡인)과 석기가 확인됐다. 또한 같은 해 평양 승호구역 만달리에서는 ‘만달인’ 화석이 나왔다.

남한에서도 충북 청원군 두루봉 홍수굴에서 ‘흥수아이’로 이름붙인 인류화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예컨대 룡곡 1호 동굴유적의 경우 구석기는 물론 신석기 인류화석도 나왔다”면서 “이것은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까지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살았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구석기인들이 1만4000년 전까지 한반도에 살다가 물러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북방에서 내려왔다는 이른바 ‘북방전래설’ 같은 학설은 폐기되어야 한다”며 “발해만 구석기유적을 연구하는 것이 그래서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선양|이기환선임기자〉,〈동영상|이다일기자〉
[코리안루트를 찾아서](4) 동이의 본향, 차하이
입력: 2007년 10월 26일 15:01:55
-마을중심에 용 돌무더기 ‘그렇다면…’-
다링허 상류 낮은 구릉지대에 자리잡은 차하이 유적에서 확인된 돌무더기 용의 형상이다. 주거지와 주거지 사이에서 발견됐으며, 용 신앙의 시원으로 평가된다. <차하이/김문석기자>

7월27일 오전 7시. 일정을 소화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탐사단이었지만 이날은 야릇한 흥분에 휩싸여 있었다.

30년간 발해문명권을 연구해온 이형구 선문대 교수도 똑같은 심정이었으리라. 선양을 출발하여 8000년 유적인 차하이(査海·사해)~싱룽와(興隆窪·흥륭와) 탐사에 나서는 길.

중국인들이 ‘중화 제1촌(차하이)’, ‘화하(華夏) 제1촌(싱룽와)’이라 하여 중국 시조의 마을로 떠받드는 곳이다. 하지만 이 두 곳은 발해문명. 즉 우리 민족뿐 아니라 중국·일본까지 아우르는 동아시아 문명의 젖줄이 된 발해문명의 여명을 열어젖힌 곳이 아닌가.




# ‘중화 제1촌’은 ‘동이 제1촌’

용 혹은 뱀이 두꺼비를 삼키는 모습을 새긴 빗살무늬 토기(위)와 용을 새긴 토기편. 모두 차하이에서 발견됐다.
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중화 제1촌’이나 ‘화하 제1촌’이 아니라 ‘동이(東夷) 제1촌’쯤으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탐사단은 ‘동이의 본향’을 찾아가는 것이다.

버스가 출발하자 이형구 교수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교수는 자못 감회가 깊은 듯했다.

“발해문명을 연구한 지 30년이 됐는데, 경향신문이 바로 그 연구의 마침표를 찍게 해주었네요.”

그러면서 발해문명에 대한 열강을 펼쳐나갔다. 발해를 지중해의 개념으로 보면 어떨까. 지중해를 중심으로 이집트·로마문명이 일어나 서양문명의 요람이 되었듯 발해가 동양문명의 새벽을 활짝 열었다는 요지의 강연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열강이 끝나자 ‘고구려 해양사’가 전공인 윤명철 동국대 교수도 이른바 해륙문화론에 대한 지론을 개진했다. 그랬다. 탐사단이 지금 찾아가는 곳은 동이족이 창조한 발해문명의 불씨를 더듬어 가는 여정인 것이다.

설렘에 3시간50분을 훌쩍 달려간 곳은 바로 랴오닝성 푸신(阜新)시에서 동북으로 20㎞ 떨어진 사라샹(沙拉鄕) 마을이었다. 우리의 목적지인 ‘차하이’ 유적으로 빠지는 길엔 ‘차하이 마을, 방문 환영’이란 철제 아치가 눈에 띈다.

그러나 정작 ‘환영’ 아치를 걸었지만 버스의 키보다 30㎝나 낮으니 ‘환영’을 하는 건지 ‘문전박대’를 하는 건지 원…. 차하이 유적까지는 4㎞나 남았다는데, 기자는 ‘이참에 걸으면 어떠냐’고는 했지만 남은 일정을 소화하려면 걷기에는 부담스러운 길이다.

# S라인 여신

방법을 찾고자 고민하면서 입구 오른쪽에 서있는 여신상을 보러 갔다. ‘중화 제1촌’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대한 여신상이다. 여신상 앞엔 귀여운 나귀 두 마리가 하릴없이 노닐고 있는데, 사진 및 비디오 촬영에 그럴 듯한 모델 노릇을 해주고 있었다. 여신은 전지현·이효리도 부럽지 않을 완벽한 S라인을 자랑하고 있다.

‘중화 제1촌’을 상징하는 여신상. 옥귀고리와 빗살무늬 토기, 용을 함께 만들었다.
이른바 중화 제1촌, 즉 차하이 문화를 이끌었던 여인이 100% 서양의 여신을 빼닮았다니…. 실소를 금치 못하며 그 자태를 유심히 살펴보니 무척 재미 있다. 여신이 두 손을 모아 높이 받쳐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봤더니 옥결(玉결·옥으로 만든 귀고리)이었다. 여신 바로 곁을 보니 거기엔 빗살무늬 토기가 있었다. 그런 다음 좀 민망한 곳, 즉 허리 아래에서 허벅지까지 무슨 문양이 있는 것 같아 자세히 살펴보니 용이 휘감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차하이 유적에서 발견된 ‘빅3’ 유구와 유물, 즉 용과 옥, 그리고 빗살무늬 토기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갑시다.”

한참 ‘여신 삼매경’에 빠져있는데 저쪽에서 고함 소리가 들린다. 인근 마을에서 오토바이와 ‘딸딸이’를 빌렸다는 것이다. 옥수수밭, 땅콩밭 사이로 시원스레 달려가는 길. 이제 정말 8000년 전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10여분간 달렸을까. 차하이 박물관이 보인다. 꼭 우리네 폐교 같은 남루한 건물에, 관리인들도 농부들 같다. 화장실을 찾으니 직원이 바깥쪽을 가리킨다. 아무도 보는 이 없으니 그냥 들판에서 해결하라는 뜻이다.


# 마음의 본향

탐사단이 오토바이를 개조한 ‘딸딸이’로 차하이 유적에 들어가고 있다.
내심 실망감이 고였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라고 해서 ‘중화 제1촌’이라 해놓고 이렇게밖에 꾸미지 못하나. 박물관 전시실을 둘러본 뒤 차하이 유적을 찾았다. 발굴이 끝난 지 오래된 탓인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탓인지 발굴했던 곳엔 수풀이 무성했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속이 다 시원할 정도다. 낮은 구릉지대 위에서 보는 뻥 뚫린 시야…. 이곳은 지리상 상당히 드라마틱한 곳이다.

특히 우리 민족을 비롯한 동이족의 활동무대인 랴오시(遼西)와 랴오둥(遼東)이 이곳을 지나면서 서로 이어져 있다. 이곳은 랴오시의 가장 동쪽 평탄한 구릉지대이며, 랴오시와 랴오둥을 구분하는 이우리산(발巫閭山)이 끝을 이룬다. 서쪽은 다링허(大凌河)와 이어지고, 동쪽은 랴오허 하류로 이어져 발해만으로 연결된다.

북쪽은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동남부 초원과 접해있다. 지금 다링허 상류지역인 이 지역은 메마른 하천이 많다. 하지만 8000년 전 이곳에 마을이 들어섰을 때는 고온 습윤했다고 한다. 발해와 다링허, 랴오허 등 바다와 강이 인간의 삶을 도와주면서 교역로의 구실을 해주고, 원시농경 등 생산활동에 유리한 개활지가 넓은 이곳. 그랬으니 이곳에 ‘중화 제1촌’, 아니, ‘동이의 제1촌’이 탄생한 것이다.

# 8000년 전의 용(龍)

뻥뻥 뚫린 채 방치된 수풀이 무성한 발굴 흔적 너머로 인공 울타리가 보인다. 가까이 가보니 돌무더기를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보호해놓았다. 차하이 유적에서 가장 그럴 듯하게 보전해놓은 것이다.

“이 기자, 잘 보세요. 이게 용 형상의 돌무더기입니다.”

“저, 여기가 머리, 여기는 갈기, 여기는 발, 여기는 꼬리부분….”

이형구 교수가 돌무더기 형상 주변을 돌며 언뜻 구체적인 형상을 그려내지 못하는 기자에게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해준다. 정말이다. 용 머리와 용 몸 부분의 돌무더기는 두껍고 조밀하게 용을 표현했다. 반면 꼬리부분의 돌무더기는 느슨하게 흩어져 있다. 용은 머리를 쳐들고 입을 벌리고 있으며, 몸을 뒤틀고 있다.

꼬리는 숨긴 듯 드러나게 해서 마치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듯한 느낌이다.

“용의 전체 길이는 19.7m이고, 몸의 폭은 1.9~2m에 달합니다.”

희한한 것은 이 용 형상의 돌무더기가 마을의 중심부에 있다는 점이다. 사방에 60기에 가까운 주거지가 둘러싸여 있고, 용의 머리 앞에는 10여기의 무덤이 있었다. 용 모양의 방향인 215도였는데, 이는 주거지의 건축 방향과 일치한다. 1982년, 랴오닝성 전체에 대한 발굴조사 때 주거지와 함께 이 용 형 돌무더기를 확인했다.

# 용의 고향은 발해만

발굴자는 깜짝 놀랐지만 처음엔 무척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보통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차하이 주거지 유적의 탄소측정 연대는 7500년 전. 그러나 수륜교정 연대(나이테를 분석한 연대)에 따르면 8000년 전까지 올려볼 수 있다. 만약 8000년 전 차하이 마을 사람들이 이미 용을 형상화하고 신성시했다면….

그때까지 알려진 가장 원시적인 형태, 즉 돌로 쌓아 모양을 만들어간 용 형상은 허난성(河南省) 푸양(푸陽)과 후베이성(湖北省) 황메이룽(黃梅龍)이었다. 연대는 6000년 전이다. 그런데 그보다 2000년이나 앞선 8000년 전에 중국 동북쪽, 즉 오랑캐의 소굴이라고 폄훼했던 발해만 연안의 동이지역에서 용이 발견되다니. 이 돌무더기는 과연 인간이 어떤 뜻을 갖고 쌓은 것인가, 아니면 그저 자연스러운 돌무더기에 불과한 것인가.

중국학계는 술렁거렸다. 중국 사상의 원형인 용신앙은 과연 중원이 아니라 발해만에서 태어난 것인가. 그러나 종내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용신앙의 원천이 차하이 유적임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들이 잇달아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즉 토기 위에 부조로 장식된 용의 문양이었다.

이 용문양 토기편은 역시 차하이 유적의 주거지에서 발견된 빗살무늬 토기편이다. 기자는 랴오닝성 박물관에 전시된 용문양 토기편 2점을 보았다. 하나는 감아도는 용의 몸뚱이이며, 다른 하나는 위로 오르는 용의 꼬리가 맞았다.

“봐요. 몸의 표면에 벌집처럼 빽빽하게 무늬를 그려놓았는데, 마치 용의 비늘 같잖아요. 용을 그릴 때의 기본적인 특성이 그대로 나타나 있어요.”(이형구 교수)

# 중국인만 용의 자손?

더욱 재미있는 것은 완형의 원형도관(圓形陶罐) 표면에 선명하게 새겨놓은 두꺼비와 뱀의 형상이다. 이는 뱀이 두꺼비를 입에 물고 삼키는 극적인 장면을 표현했는데, 8000년 전 사람들의 사실적인 표현력을 알 수 있다.

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은 “이런 것들은 모두 용의 형상을 표현하는 수법이며 강렬한 신비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았다. 궈다순은 더 나아가 “이런 수법은 분명 제사와 관계 있는 것이며, 용 숭배 사상이 8000년 전 차하이 마을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차하이 박물관 전시실은 ‘중국 제1용’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설명해놓고 있다.

“차하이는 농업생산 위주의 씨족 부락이었는데, 용은 원시종교와 원시문화의 산물이다. 차하이 사람들은 허무적인 용신앙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킨 사람들이다. 차하이 용은 우리나라(중국) 최초의 용이다. 용은 농경문화에서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용은 과연 중화민족만이 사랑하고 숭배한 영물인가. 그렇지는 않다. 역사적으로 중국인들은 용의 자손이라 했고 용을 신앙으로 추앙했다. 하지만 차하이에서, 그리고 곧 방문할 싱룽와에서 보이는 문화의 양상을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차하이|이기환 선임기자〉
[코리안루트를 찾아서](5) 신러유물 권장(權仗)의 비밀
입력: 2007년 11월 02일 14:53:05
 
용과 새는 동이족 상징 아닐까

‘사기 고조본기’에 한나라 창업주 고조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를 전한다.

“고조(유방)의 어머니 유오가 연못가에서 잠깐 잠든 사이… 번갯불이 번쩍이더니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졌다. 이때 아버지 태공이 달려가보니 교룡(蛟龍·큰 물을 일으킨다는 용)이 부인의 몸에 올라가 있었다. 얼마 후 유오가 임신하여 고조를 출산했다.”
용과 새가 한꺼번에 표현된 유물(지팡이)가 출토된 선양 신러유적. 사진은 유적을 복원해놓은 모습이다. 새는 홍산문화의 옥에서도 잘 표현됐다. 신러/김문석기자

한마디로 한고조 유방은 용(교룡)의 자손인 셈이다. 고조본기는 한술 더 떠 “고조는 콧날이 높고 이마가 튀어나와 용을 닮았다(隆準而龍顔)”고 했다. 임금의 얼굴을 뜻하는 용안의 유래다. 젊었을 때 무뢰배였던 고조는 동네 술집에서 외상술을 먹고 술에 취해 드러눕기 일쑤였는데, 그의 몸 위에 용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런데 고조가 외상술을 먹는 날이면 그 주막의 매상이 몇 배나 올랐다.



비단 고조뿐이 아니다. 태양신이자 농업의 신인 신농씨(염제)의 탄생 전설 가운데도 용이 나타난다. 신농씨의 어머니 여등은 볕을 쬐려고 나들이에 나섰다가 신비로운 용을 보았다. 여등은 순간 온몸이 감전된 듯한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임신한 것이다. 여등은 열달 후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염제 신농씨다.

# 만리장성을 쌓은 이유

예를 더 들 것도 없이 ‘용=황제’이며, 중국 민족은 용의 자손으로 굳게 믿어왔다. 용은 봉황과 기린, 거북과 함께 ‘4령(靈)’의 하나였는데, 유일한 상상의 동물로 최고의 권위를 지녔다. 용은 물을 다스리는 물의 제왕이며, 농경중심사회에서 치수를 담당하는 지배자는 용으로 비유됐다.

중국문헌인 ‘광아(廣雅·위나라 장읍이 편찬한 자전)’의 익조(翼條)를 보면 아홉가지 짐승의 장점만을 다 땄다.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덜미는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하다. 입 주위에 긴 수염, 턱 밑에 명주, 목 아래는 역린이… 있다.”

용의 모습은 시대에 따라 변했다. 상나라(BC 1600~BC 1046년) 때는 악어와 뱀, 제비가 결합한 형태로 나타났으며, 서주(BC 1046~BC 771년) 때는 입을 벌리고 있고, 세 개의 발가락을 가진 용의 특징이 나타난다. 진나라(BC 221~BC 206년) 때는 봉황, 악어, 도롱뇽, 뱀이 복합된 응룡(應龍)이 등장한다.

‘용의 후손’인 고조가 세운 한대(BC 206~AD 220년)에는 사방신(청룡·백호·주작·현무)의 하나인 청룡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발톱이 세 개인 용의 모습이 고착화한다. 이렇게 용은 중국인의 상징으로 여겼다.

# 차하이 용의 수수께끼

그런데 8000년 전 마을인 차하이에서, 즉 중국인들도 인정하듯 동이의 고향인 발해만 연안에서 용 형상 돌무더기와 용이 부조된 토기들이 발견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만리장성을 중국의 마지노선으로 여겼어요. 만리장성을 쌓은 까닭이 무엇이겠어요. 장성을 넘으면 그것은 중원이 아니고 오랑캐의 땅이라 여겼거든….”(이형구 선문대 교수)

그런 가운데 8000년 전 유적인 차하이에서 용이 발견되니, 숱한 격론을 벌인 끝에 차하이를 ‘중화 제1촌’, 즉 중화의 본향으로 인정하는 고육책을 쓴 것이다. 하지만 누누이 강조하지만 용신앙은 중국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봐도 용과의 관계는 뿌리 깊다.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장은 “우리나라에서는 용이 설화의 중요한 화소(話素)로 등장하며 물의 신, 시조의 어버이, 제왕, 호국·호법의 신, 예시·예언자적인 존재로 나타난다”면서 “천후(天候)의 다스림이 절대 필요한 농경문화권에서는 용과 군왕이 자연스레 결합된다”고 말했다.

우선 삼국유사 북부여조를 보면 “BC 58년 4월8일 해모수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내려와 북부여를 창업했다”고 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 알영을 낳은 것은 계룡(鷄龍)이며, 신라 4대왕 석탈해는 용성국(龍城國) 왕과 적녀국 왕의 아들이었다.(삼국유사)

또 백제 30대 무왕은 과부(寡婦)인 어머니가 못 속의 용(龍)과 관계하여 낳은 아들(삼국유사)이며, 소정방은 백마강의 용을 잡고서야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홍만종의 순오지·旬五志) 우리나라 용이 호국·호법의 상징으로 표출된다는 것이 가장 특이한 점이다. 삼한 통일의 대업을 문무왕은 평소 “죽으면 나라를 지키는 동해의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삼국사기 문무왕조) 문무왕은 그 말대로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됐으며, 아들 신문왕은 682년 감은사 금당 밑 섬돌을 파고 동쪽으로 향하는 구멍 하나를 냈다. 용(문무왕)의 출입문으로 말이다.(삼국유사 만파식적조)

수호신으로서 용 이야기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에만도 86편이나 기록돼 있을 정도다. 삼국사기에는 최소한 23건, 삼국유사엔 24건의 용 관련 기록들이 나타난다. 고려 창업주 왕건도 용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려사)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 서해바다 한복판에서 부처로 변신한 여우에게 핍박을 당하는 용왕을 구해주고 그의 딸 용녀를 아내로 맞이한다. 작제건과 용녀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장남이 왕건의 아버지인 용건이다. 그러니까 왕건의 할머니가 용인 것이다. 용이 국가 권력의 신성성을 인정해주는 보증수표였던 것이다.

용 관련 유물들도 차고 넘친다. 고구려의 경우 무용총, 삼실총, 장천1호분, 약수리 벽화분, 덕화리 1호분, 호남리 사신총, 강서중묘 등에 사신도의 일원으로 청룡이 등장한다. 신라의 경우도 고리자루칼, 청동초두, 허리띠 장식, 와당, 서수형 토기 등에 용이 표현됐다. 백제도 무령왕릉의 팔찌, 동탁은잔, 고리자루칼, 금동대향로 등에서 용을 썼다.
우리나라에서 확인되는 용 유물들.

# 용의 몸을 지닌 새(鳥)

그런데 ‘차하이(査海) 용’을 보던 기자에게는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전통적으로 용은 중국 민족의 상징이라고 하고, 동이족의 토템은 ‘새’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이의 상징이라는 ‘새’는 어찌된 걸까.

2400년 전 유적인 대전 괴정동에서는 따비로 밭을 가는 모습을 그려넣은 농경문청동기가 확인됐는데, 청동기 뒷면엔 새 한 쌍이 마주보는 솟대가 보였다. 그만큼 새 신앙의 역사가 뿌리 깊은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 때까지는 용이 임금을 상징했지만, 지금은 봉황이 대통령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기자는 7월30일 선양 신러(新樂) 유적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을 보고 지울 수 없었던 수수께끼를 풀 하나의 단서를 움켜잡았다. 차하이에서 140㎞ 정도 떨어진 신러 유적은 차하이보다 약 500년 늦은 7500년 전 유적이다.

“자, 이 유물은 권장(權仗·권력을 상징하는 지팡이)이라는데, 새 모양이잖아요.”(이형구 교수)

38.5㎝의 나무 지팡이는 신러 유적의 가장 큰 주거지에서 발견됐다. 발굴자는 이 유물은 나무로 새의 부리와 머리, 눈, 코, 꼬리를 조각한 것으로 새를 토템으로 삼는 씨족이 남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차하이의 ‘용’과 신러의 ‘새’라. 자.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그런데 기자는 궈다순(郭大順)의 책, 즉 ‘용은 랴오허에서 태어났다(龍出遼河源)’를 들춰보다가 아주 흥미로운 문구를 발견했다. 궈다순은 이 새 모양의 지팡이를 용으로 볼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새의 몸을 자세히 보면 용의 비늘 같은 문양이다. 즉 용을 나무에 새긴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용은 권장일 수도 있지만 비녀로 볼 수도 있다. 민족지 자료를 보면 비녀는 계급을 나타내는 예기(禮器)이다. 신러에서 발견된 유물은 여인이 실제 사용하기엔 부담스러운 크기다. 예기였다는 증거다.”

# 용과 새는 동이의 상징

궈다순의 해석처럼 이 유물이 권장인지, 아니면 비녀인지, 그리고 그것이 용을 표현한 것인지, 새를 표현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용의 몸을 하고 태어난 새. 즉 용과 새를 한꺼번에 표현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어쨌든 이형구 교수가 의견을 내놓는다.

“결국 7000~8000년 전 발해만에서 살던 사람들은 용과 새를 함께 모신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교수는 차하이·싱룽와(興隆窪)-신러문화의 뒤를 잇는 홍산문화에서도 용과 새 문양의 옥제품이 섞여 나오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용과 새를 함께 모신 사람들.

그렇게 해석하면 모든 의문점이 풀린다. 앞서 우리 민족과 용의 밀접한 관계를 사료와 고고학적 증거로 언급했지만, 우리 민족과 새의 관계 또한 두껍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앞서 예를 든 부여 창업주 해모수와 신라 박혁거세, 석탈해 신화는 용은 물론 새가 상징하는 천강(天降·하늘에서 내려오는) 신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용과 새가 같은 신화 안에 공존한다는 뜻이다.

백제예술의 정수인 금동대향로는 용이 입을 벌린 채 향로를 받치고 있고, 맨 꼭대기에는 하늘과 교통할 수 있는 봉황이 서있다.

이형구 교수는 “용은 물을 상징하지만, 새와 마찬가지로 하늘을 상징하기 때문에 천계를 넘나드는 하늘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중국인들은 용을 신앙으로 삼지만 새는 그렇게까지는 신성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천진기 과장은 “물론 봉황을 태평성대에 나타나는 상상의 새라고 하지만 용처럼 그렇게 다양한 양상으로 숭배하지는 않는다”고 전했다.

다만 동이의 나라인 상나라만이 난생신화를 건국신화로 삼고 있다. ‘사기’ 은본기에는 “은(상)의 시조 설의 어머니 간적이 제비알을 삼켜 임신한 뒤 낳은 이가 바로 설(契)이다”라고 기록해 두었다. 결국 용과 새를 동시에 신성시한 종족은 중국인이 아니라 동이족이었다는 뜻이다.

〈차하이·신러|이기환 선임기자〉
〈동영상|이다일기자 crodail@khan.co.kr〉
[코리안루트를 찾아서](6) 싱룽와 신석기 유적-동이의 발상
입력: 2007년 11월 09일 14:47:50
 
도시처럼 계획된 ‘8000년전 東夷마을’



7월27일 오후 2시.

중화 제1촌, 아니 동이 제1촌인 차하이 마을을 탐사한 기자일행은 서둘러 행장을 꾸렸다. 차하이(사해·査海)에서 서쪽으로 200㎞ 떨어진 싱룽와(흥륭와·興隆窪)로 향하는 길이다. 싱룽와는 ‘중화시조취락(中華始祖聚落)’이라는 별명이 붙은 곳이다. 기자가 물었다.

“아니 ‘중화 제1촌(차하이)’은 뭐고, ‘중화 시조의 취락(싱룽와)’은 또 무슨 말인가요?”

이형구 교수가 웃으며 대답한다.

“차하이는 랴오닝성(遼寧省) 후신에, 싱룽와는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츠펑에 속해있어요. 서로 자기네 동네에서 나온 유적을 최고로 치는 것이죠.”
천신만고 끝에 찾은 8000년전 싱룽와 마을. 175가구의 집이 계획도시처럼 질서정연했다. 빗살무늬토기와 옥결이 나왔다. 지금은 발굴이 끝나 덮었으며 중국 사적으로 지정됐다. <싱룽와/김문석기자>

# 중화제1촌, 중화시조취락

요컨대 ‘중국 최초의 마을’ 자리를 두고 네이멍구 자치구와 랴오닝성이 다툼을 벌이고 있다는 뜻이다. 아닌게 아니라 서로 자기네 마을이 8000년 전의 것이고, 다른 마을은 7500년 전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세계 최고(最古)니, 최대니 하는 것에 민감한 것은 우리나 그들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러니 고심 끝에 ‘중화제1촌’이니, ‘중화시조취락’이니 하는 말장난으로 ‘첫째’를 나눠갖는 것이 아닐까. 각설하고 우리 같으면 200㎞라면 한 2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 하지만 도로망이 열악한 중국의 촌구석을 달리는 것인 만큼 4시간도 장담할 수 없다. 단순히 도로사정의 문제만은 아니다.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네요.”

예비답사를 다녀온 윤명철 동국대 교수와 정재승 봉우사상연구소장의 걱정이 하늘을 찌른다.

“예비답사 때도 길을 잃어 그냥 지나치고 말았어요.”

우려는 현실로 다가왔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황톳길…. 지나치는 마을마다 우리네 1960년대 시골동네의 모습이다. 자욱한 먼지를 내뿜으며 달리는 버스는 곧 막다른 길에 닿아 낭패를 겪기 일쑤. 버스기사와 가이드는 억센 중국말로 수시로 대책을 논의하는데, 잔뜩 찌푸린 얼굴은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시로 내려 마주치는 마을 사람들에게 길을 물었다. 하지만 호떡집에 불난 듯 다투어 나서긴 하지만 뾰족한 정답을 가르쳐주지 않는 듯했다. 물어물어 간신히 이어진 길을 따라 가니 어느 깡촌에 닿았다. 다 왔나 싶어 안도한 것은 찰나. 웬걸 길이 막힌 것이다.

낭패였다. 가이드와 버스기사가 한바탕 소란을 피우더니 길을 안다는 마을 사람이 버스에 올랐다.
차하이 옥결, 싱룽와 옥결, 고성 문암리 옥결(왼쪽부터)

# “경향신문이 운이 좋네요”

좁디좁은 마을의 사잇길로 아슬아슬 인도하더니 간신히 외줄처럼 이어진 비포장도로로 버스를 데려다 준다. 그러나 마을사람이 “저기!”라고 가르쳐준 길로 갔지만 무신통이다. 역시 가도가도 싱룽와 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마침 100m 정도 앞에 허름한 입석버스가 가고 있으니 무작정 그 시골버스를 따라갈 수밖에….

한 10여분 달렸을까. 갑자기 시골버스도 사라졌다. 다시 옥수수밭, 메밀밭 사이 외길을 무작정 가야 한다. 갑자기 절망감이 엄습한다. 저녁 6시가 넘는데…. 이렇게 힘들게 찾아왔는데 여기서 포기해야 하나. 어두워지면 한줄기 불빛도 찾을 수 없는 허허벌판에서 길도 찾지 못할텐데….

한데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포기상태에서 20여분을 더 헤매자 저기 저편에서 황톳빛 마을이 신기루처럼 다가온다. 드디어 마을이다. 지나치던 촌로가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야트막한 저편의 구릉지대, 꿈처럼 펼쳐진 지평선을 가리킨다.

“저기가 싱룽와 유적입니다.”

저 멀리 짙은 황사 사이로 표지석 세 개가 어렴풋이 보인다.

“경향신문이 운이 좋네요. 오고 싶다고 다 올 수 있는 곳은 아닌데….”

여기저기서 덕담을 건넨다. 30년을 발해문명 연구에 쏟아온 이형구 교수의 얼굴도 붉게 상기돼 있었다.

“정말 감개무량하네요. 2번이나 이곳(싱룽와)을 찾아오려고 했지만 다 실패했는데….”

마치 성지(聖地)를 찾은 듯 이교수의 얼굴엔 경건함이 배어 있었다. 동이족이 문명의 새벽을 연 곳, 바로 그곳 차하이와 싱룽와를 잇달아 찾은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터이다. 경향신문 탐사단은 바로 이곳, 성지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싱룽와에서는 사람과 돼지가 함께 순장된 장례풍습이 확인됐다.

# 중국 100대발굴

싱룽와 유적. 네이멍구 자치구 우한치(오한기·敖漢旗) 바오궈투(寶國吐)향 싱룽와 촌에서 동남쪽 1.3㎞에 자리잡고 있다. 82년 지표조사에서 처음 발견됐으며, 중국 고고학 역사상 100대 발굴 중 하나로 기록됐을 정도로 중요한 유적이다. 96년에는 우리로 치면 사적(전국중점보호단위)으로 지정됐다. 우한치 박물관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이곳을 역사유적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해마다 많은 국내외 학자들이 오고간다고 소개해 놓았다. 하지만 탐사단이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찾아왔고, 인근 주민들도 정확한 위치를 잘 모를 정도이니 어떻게들 찾아온다는 것인지 원!

발굴이 끝나 지금은 유적을 덮어놓은 상태. 풀밭과 옥수수밭으로 남게 되었으니 힘겹게 찾아온 사람들은 다소간 실망할 수 있다. 하지만 다링허(대릉하·大凌河) 지류인 왕뉴허(牛河)와 맞닿은 싱룽와 유적이 갖는 의미는 같은 다링허 지류에 속한 차하이 못지 않다.

탐사단이 먼저 가본 차하이는 용의 고향이며, 그곳에서도 옥과 빗살무늬 토기가 나왔다. 기자는 차하이를 설명하면서 ‘용’에 대해서는 언급했지만 옥과 빗살무늬 토기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쓰지 않았다. 빗살무늬 토기에 대해서는 차하이와 같은 시대인 싱룽와 유적, 옥에 대해서는 차하이-싱룽와 문화를 잇는 홍산문화를 설명하면서 하기 위함이었다.

# 8000년 전의 계획도시

그런데 싱룽와는 왜 ‘중화시조취락’이라는 명성을 얻었을까. 83~94년 사이 7차례나 발굴한 조사단은 깜짝깜짝 놀랐다. 무려 175기의 집자리가 마치 도시계획으로 조성된 주택단지의 형태로 고스란히 확인된 것이다.(차하이에서도 55기의 주거지가 발견됐지만, 싱룽와보다는 규모가 작은 편이다)

중국에서 가장 넓고 보존이 잘된 신석기 시대 대규모 취락이다. 4만㎡에 달하는 마을은 환호(環壕·적의 침입을 막으려 도랑으로 두른 것)로 보호돼 있었다. 집자리의 규모는 보통 60㎡(약 18평)인데, 가장 큰 두 곳은 140㎡(약 42평)를 훌쩍 넘었다. 중국학자들은 바로 이 대목을 주목한다.

마을 한복판에 있는 두 개의 집자리엔 영도자가 살았거나, 회의 혹은 원시종교의식을 행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8000년 전의 마을에 벌써 2개의 씨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웅변해준다. 학계는 이 원시마을에 약 300명이 살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각 방의 모습을 보면 취사용구뿐 아니라 생산도구, 심지어 식품저장용 움막까지 지니고 있었다. 이는 가정마다 경제적인 독립성을 지녔다는 얘기다. 또한 마을은 10개 정도의 열(列)을 지어 일정하게 구획됐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같은 배열에 살았던 가정끼리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1개 마을의 최소단위인 가정과, 같은 열에 사는 혈연관계로 맺은 가까운 친척, 그리고 마을 안에서 함께 살았던 먼 친척까지 하나의 씨족마을을 이뤘음을 말해준다.

# 싱룽와 마을의 비밀

“차하이 유적도 마찬가지인데 이상한 점은 무덤이 주거지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이죠. 옛날 사람들은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고 믿었나봐요.”(이형구 교수)

무덤에는 빗살무늬 토기와 옥기, 골기 등과 함께 사람과 돼지를 합장한 흔적도 보였다. 이것을 순장(殉葬)이라 한다면 훗날 동이족의 나라인 상(은)도 순장의 풍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제사용 구덩이에서도 돼지뼈가 다수 발견됐는데, (지금의 돼지머리처럼) 돼지는 8000년 전에도 제수용품으로 사랑받은 게 분명하다. 돼지 외에도 사슴뼈와 물고기뼈가 대량으로 나왔다.

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은 “돼지사육과 돼지숭배는 원시농업의 시작을 보여주는 단서이므로 차하이-싱룽와인들은 어렵과 수렵을 주요 생산활동으로 하면서 농업을 막 시작한 단계로 볼 수 있다”고 추정한다.

사족을 달면 차하이와 싱룽와는 200㎞나 떨어져 있지만 연대와 문화양상은 매우 비슷하다. 따라서 중국학계는 차하이-싱룽와 문화라는 용어로 묶는다.

차하이-싱룽와 유적이 중요한 것은 용(차하이)이나 취락의 규모(싱룽와) 때문만은 아니다. 차하이, 싱룽와에서 동시에 출토된 옥과 정교한 빗살무늬 토기 덕분이다. 또한 확인된 175기의 주거지 가운데 5기가 동이의 문화인 홍산문화 주거지라는 점이다. 이것은 홍산문화(BC 4500~BC 2000년)가 싱룽와 문화의 전통을 그대로 이었음을 웅변해준다.

옥 문화에 관해서는 옥 문화가 찬란한 꽃을 피운 홍산문화를 다룰 때 다시 언급하겠다. 다만 차하이·싱룽와에서 발견된 옥결(玉결·옥귀고리)과 똑같은 것이 최근 한반도 중부(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7000년전 유적에서 나왔다는 사실만 우선 언급해두고 싶다.

여기서는 빗살무늬 토기에 주목하고자 한다. 중국고고학계의 태두 쑤빙치(蘇秉琦)는 차하이와 싱룽와에서 발견된 빗살무늬 토기를 두고 “(발해문명을 꽃피운) 홍산문화의 근원이 중국중원에 있다는 믿음이 깨졌다”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중원(황허)과 동북(싱룽와)의 신석기문화는 서로의 특색을 지닌 채 발전했으며, 두 곳의 공통점은 중화민족의 발상지 중 하나라는 점이며 모두 영도자가 살았다는 것”이라고 견강부회했다.

하지만 빗살무늬 토기 문화는 주지하듯 한반도 신석기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발해연안에 있는 차하이-싱룽와는 중국인들도 인정하듯 동이의 영역이다.

〈싱룽와|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동영상|이다일 기자 crodail@khan.co.kr〉
[코리안루트를 찾아서](7)빗살무늬 토기문화
입력: 2007년 11월 16일 16:01:51
 



“이건 빗살무늬 아닌가요? 아! 여기 덧띠무늬(토기)도 있네.”

차하이(사해·査海)와 싱룽와(흥륭와·興隆窪) 마을은 물론 신러(신락·新樂), 뉴허량(우하량·牛河梁) 유적을 둘러본 기자는 깜짝깜짝 놀랐다. 싼줘뎬(삼좌점·三座店)과 청쯔산(성자산·城子山) 유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발길에 부딪히는 토기편을 주우면 어김없이 관찰되는 빗살무늬와 덧띠무늬….
츠펑대 유물관리실에 전시된 싱룽와 마을 출토 빗살무늬 토기들. 덧띠-현문-덧띠-현문-빗살문-사격문-편직문 등 다양한 문양을 차례로 새겨넣었다. <츠펑/김문석기자>

두 말 할 것도 없다. 기자가 금방 다녀온 차하이와 지금 서있는 이 싱룽와는 8000년 전 동이의 마을. 랴오둥(遼東) 선양시의 신러유적과 동이의 문화가 꽃피운 훙산문화의 본거지 뉴허량 유적도 마찬가지다. 이미 탐사단이 살펴봤던 싼줘뎬과 청쯔산은 BC 2000년 고조선의 영역일 가능성이 짙은 곳이 아닌가.

갈짓자 문양을 새기는 방법.
기자는 이제서야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그토록 “우리 신석기 문화의 고향은 발해연안이며, 시베리아가 절대 아니다”라면서 가슴을 치며 끈질지게 주장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빗살무늬는 과연 무엇이고, 시베리아 설은 또 무엇인가.

신석기 문화의 상징

빗살무늬 토기. 고고학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들일지라도 ‘빗살무늬 토기’라 하면 금방 알 것이다. 초기 동북아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지표유물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수렵 및 채집생활로 이리저리 떠돌던 구석기시대를 지나(약 1만년 전) 가장 획기적인 발명품을 창조해낸다. 바로 토기이다. 토기의 발명은 빙하기를 극복한 인류가 정착 및 농경생활을 시작했으며, 비로소 문명의 새벽을 열어젖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부터 한 곳에 모여 살면서 무리를 이루고, 씨족을 형성했으며, 훗날에는 부족, 그리고 더 나중에는 국가를 이뤘다.

물론 동북아인들이 창조한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만은 아니다. 토기 표면에 아무런 무늬가 없는 민무늬 토기와 덧띠무늬 토기(토기 겉면에 덧띠를 두른 토기) 등도 있다. 요즘들어 한반도에서 잇달아 확인되는 덧띠무늬 토기도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지금까지는 빗살무늬 토기가 단연 각광을 받아왔다. 빗살무늬 토기는 토기의 표면을 머리빗 같은 시문구(施紋具)로 긋거나 찍어 무늬를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형구 교수에 따르면 빗살무늬 기법에는 빗점무늬와 좁은 의미의 빗살무늬가 있다. 빗점무늬는 빗살로 그릇의 표면을 점점이 찍는 것이며, 좁은 의미의 빗살무늬는 빗살로 사선, 평행선, 곡선 등 갖가지 기하문을 그릇 표면에 그린 토기를 말한다. 빗살무늬의 종류로는 이른바 ‘지(之)자문’, 즉 지그재그형 빗살무늬와 ‘사람 인(人)자문’ 등이 있다.
싱룽와(왼쪽)와 함북 서포항에서 나온 빗살무늬 통형관. 기형과 아가리 모양과 문양이 비슷하다.


철옹성, 시베리아 기원설

“빗살무늬를 쓰던 사람들은 시베리아, 몽고의 신석기 문화를 폭넓게 받아들이면서 각지의 문화를 발전시켰다.”(1983년판 국사교과서)

“빗살무늬 토기와 함께 빗살무늬 토기를 쓰던 사람들이 시베리아에서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한국고고학개설’ 73년판)

최근까지도 빗살무늬 토기의 기원은 유럽이며, 시베리아~몽골·만주~한반도로 건너왔다는 설이 우리 학계를 지배해왔다. 가히 철옹성 같았다. 불과 5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이 펴낸 도록(2002년간)을 보면 극명해진다.

“한반도 신석기문화는 기원전 8000년 시베리아 여러 곳에 흩어져 살던 고아시아족(고 시베리아족)들이 중국 동북지방과 연해주 지역을 거쳐 한반도로 이주해오면서부터다. 빗살무늬를 비롯한 출토 유물은 내몽고, 바이칼호 주변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연관 관계를 갖고 있고 우리나라 신석기문화의 뿌리를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런데 시베리아 기원설의 근거가 된 토기 유형은 이른바 오목점 빗점무늬 토기문화였다. 이 문화는 주로 동부 유럽과 시베리아 삼림지대, 즉 볼가-올가지방에서 유행했다. (6400~4500년 전)

시베리아 전래설을 처음 주장한 것은 일본인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 였다. 이형구 교수는 “후지다가 1930년대 한반도에서 출토된 새김무늬(선무늬의 일종)를 유럽과 시베리아에서 보이는 토기와 연결시켜 즐목문(櫛目文) 토기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견해가 70여년간 줄곧 정설로 굳어진 것이다.

일제관학의 퇴출

그런데 2005년 용산시대를 맞아 새롭게 펴낸 국립중앙박물관의 도록은 180도 바뀐다.

네이멍구 츠펑 싱룽와(맨 위)와 강원 고성 문암리(가운데), 함북 굴포리 서포항(밑)에서 출토된 빗살무늬 토기들. 기형과 문양의 토기들이 매우 흡사하다.
“신석기인들은 처음엔 가까운 지역과 필요한 물자를 교류하다가 점차 일본 열도, 중국 동북지역, 러시아 연해주 등으로 범위를 넓혀갔다. 빗살무늬 토기는 약 6500년 전 중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난 포탄 모양이다.”(2005년판 도록 ‘국립중앙박물관’)

이형구 교수는 “그 영역을 여전히 ‘한반도’로 묶어두었지만 일단 시베리아 기원설을 완전히 삭제한 것은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일제시대 후지다가 제기한 견해를 엎고, 민족문화의 자생설을 강조했다는 것 자체가 획기적인 역사 인식의 전환이라는 평가다.

“국가를 대표하는 공간물, 즉 국립중앙박물관 도록이 일제관학에서 유래된 외래전래설을 떨쳐낸 것은 의미있는 일이었죠.”(이형구 교수)

사실 1970년대 후반부터 발해문명을 연구해온 이교수는 줄기차게 ‘신석기 문화의 본향은 발해연안’이라고 주장해왔다. 1970년대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발해유역의 신석기 시대 자료를 토대로 ‘시베리아설의 허구’를 논증해온 것이다.

“시베리아 빗살무늬 토기의 연대는 빨라봐야 BC 4500년이지만, 싱룽와와 차하이에서 보듯 발해연안 빗살무늬 연대는 BC 6000년까지 올라가잖아요. 1000년 이상 차이가 나는데 무슨….”

동이의 영역에서 속출한 빗살무늬

발해만 유역에서 빗살무늬 토기 문화가 발견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 73년 신러유적에서 BC 5300~BC 4400년으로 편년되는 지(之)자형 토기가 확인된 것이다. 이후 76년 황허 하류인 허베이(河北)성 우안(武安)의 츠산(磁山)유적과 77년 페이리강(裴李崗) 유적에서 잇달아 之자와 人자 토기가 확인됐다. 연대는 BC 6000~BC 5500년이었다. 이런 형태의 토기들은 훙산문화의 본거지인 둥산쭈이(동산취·東山嘴·1979년)와 링위안(凌源)현 뉴허량 유적(1984·85년)에서도 잇달아 확인됐다. 이런 가운데 80년대 초반 동이의 본향인 차하이-싱룽와 마을에서 8000년 전 사람들이 새긴 정교한 빗살무늬 토기들이 확인되자 중국 학계도 깜짝 놀란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랴오둥 반도 최남단 섬인 샤오주산(小珠山)과 다롄(大連)시 뤼순(旅順)의 궈자춘(郭家村)에서도 之자, 人자형 토기들이 속출했다.

빗살무늬 토기들이 나온 곳들을 살피면 이른바 발해문명권, 다시 말해 중국인들이 말하는 동이족의 영역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인(人)자형은 한반도 압록강·대동강·재령강·한강유역은 물론 두만강과 동해안, 그리고 남해안 등 전국적으로 분포되고 있어요. 지(之)자형은 평북 의주읍 미송리 동굴유적, 경남 통영 상노대도, 김해 수가리 유적에서 보이고…. 빗점무늬는 대동강의 궁산·남경유적, 재령강의 지탑리 유적, 한강유역의 암사동 유적, 동북부의 서포항 유적 등에서 확인됩니다. 한반도 전역을 포함한 발해연안이 바로 빗살무늬 토기문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이형구 교수)

또한 한반도에서는 처음으로 옥결(옥귀고리)이 나온 강원 고성 문암리(BC 6000년)와, 양양 오산리(BC 5000년)에서는 초기 신석기 문화의 양대토기인 덧띠무늬 토기와 빗살무늬 토기가 함께 나오기도 했다. 문암리 유적을 발굴한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관은 “차하이-싱룽와에서 나온 유물을 본 결과 문양을 그려넣은 기법이나 토기의 기형이 문암리와 상당히 유사하다”면서 “발해연안과 한반도가 같은 문화권임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보았다.



8000년 예술의 정수

또하나 강조할 부분은 빗살무늬 토기의 예술성. 이형구 교수는 빗살무늬 토기를 “8000년 전 예술의 정수”라고 극찬한다.

“신석기인들은 토기를 요즘으로 치면 화폭으로 여기고 빼어난 예술감각을 자랑했어요. 크게 상·중·하로 화폭(토기표면)을 나눠 3~7단까지 구성하여 갖가지 문양을 새겼어요. 상부는 빗금, 배부분은 갈지자, 밑바닥은 선무늬…. 뭐 이런 식으로 예술적인 욕구를 정교하게 표출한 거죠.”

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은 “토기 하나에 눌러찍은 압인무늬와 빗살무늬와 덧띠무늬를 동시에 표현했으며, 무늬 자체도 직선 혹은 활무늬, 之자무늬, 마름모무늬, 교차무늬, 그물무늬, 번개무늬, 꽃무늬 등 매우 다채롭다”고 극찬했다. 이런 예술적 감수성은 한반도 출토 토기에도 그대로 투영돼 있다.

차하이-싱룽와에서 확인된 계획도시를 방불케 하는 주거지와 빼어난 예술감각을 표현한 빗살무늬토기, 그리고 신앙의 상징인 용과 옥결까지….

저명한 중국 고고학자인 쑤빙치가 “(차하이-싱룽와 문화는) 문명의 시작을 알린 표지이며, 중화문명의 시원이라 할 수 있다”고 평가했던 이유다.

한반도를 극복하라

7월27일 저녁 6시20분. 싱룽와를 떠나는 기자는 동이의 본향을 짙게 물들인 석양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빠졌다.

이제. 우리 역사를 살필 때 ‘한반도 신석기 문화’ ‘한반도 청동기 문화’라 해서 ‘한반도’라는 좁은 틀로 가두면 안되지 않을까. 올해 초 ‘한반도 청동기문화의 시작’과 관련된 개정 국사교과서 논쟁도 역시 ‘한반도’라는 좁은 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빚어진 것은 아닐까.

8000년 전 동이는 결코 한반도라는 좁은 영역에서만 살지 않았을 것인데…. 발해연안에서 출발해서 황허유역을 포함한 산둥반도, 지금의 만주 일대와 한반도까지를 누볐을 것인데….

〈싱룽와|이기환 선임기자〉
〈동영상|이다일기자 crodail@khan.co.kr〉
[코리안루트를 찾아서](8)차오마오산과 홍산문화
입력: 2007년 11월 23일 15:36:58
 
제단과 무덤, 여기도 동이의 흔적…

“우한치 쓰자쯔(四家子) 차오마오산(초모산·草帽山) 유적에서 5500년전 홍산문화 시기의 제단+무덤 결합형식의 의례(儀禮) 건축물이 발견됐다. 이는 원시종교와 장례풍습, 제사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새로운 자료다.”




가장 최근에 확인된 차오마오산 유적. 이형구 교수와 기자가 석관묘를 실측하고 있다. 차오마오산/김문석기자
2006년 6월5일, 네이멍구 츠펑 방송은 ‘5500년전 홍산문화(BC 4500~BC 3000년) 시대 적석총의 발견’ 소식을 숨가쁘게 전했다.

그로부터 1년여 뒤인 올 7월 28일. 경향신문 탐사단은 폐부를 뒤덮는 자욱한 황토먼지, 그리고 뜨거운 불볕더위가 숨을 턱턱 막아버리는 따끈따끈한 유적, 바로 차오마오산을 찾았다. 늘 그랬듯 목표지점은 오리무중이다. 탐사단은 2m가 훌쩍 넘는 남의 집 옥수수밭을 헤치면서 정처없는 발길을 옮겨야 했다.

-‘따끈따끈한’ 피라미드-

“제기랄, 길이 만날 이 모양이야?”

불평불만이 절로 나왔으나 환갑을 훌쩍 넘긴 이형구 선문대 교수와 주채혁 세종대 교수 또한 노구를 이끌고 힘겨운 길을 재촉하니 비지땀을 흘리며 갈 수밖에…. 또하나 마냥 투덜거릴 틈도 없는 이유. 국내 학자들 가운데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처녀지. 그래서 학자‘적’인, 그리고 기자‘적’인 의식이 발동하니 야릇한 흥분감이 발길을 바삐 잡아끄는 것이다. 중국 땅에서 중국이 발굴한 유적을 1년여 만에 볼 수 있는 기회가 오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터이니….

“다 왔네요.”

저만큼 앞서간 윤명철 동국대 교수가 자리를 잡는다. 학자들 또한 흥분에 도취된 듯하다. 차오마오산은 그야말로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하는 천혜의 곳이다. 해발 40m의 낮은 구릉인데 정남쪽 500m 앞에는 다링허(大凌河) 지류인 라오후산허(老虎山河)가 흐르고 있다.
홍산문화의 이름을 낳게한 네이멍구 츠펑시 잉진하 유역에 있는 홍산.(위) 츠펑대 박물관 유물관리실에 진열된 홍산문화·샤자뎬 하층문화 유물들.(아래)

원래 이 유적은 1983년 처음 발견되었지만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2001년부터였다. 당시 제2지점에서 석관묘 7기, 제단 1기와 돌로 만든 여신상 1점, 남성생식기 모양의 돌인형(石祖), 뼈로 만든 피리(骨笛), 그리고 토기 표면에 ‘미(米)’자, ‘십(十)’자로 읽을 수 있는 수수께끼의 부호가 확인했다.

발굴단은 “3층으로 잘 쌓은 제단과 돌무덤떼가 발견됐는데, 이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금자탑(피라미드의 중국말)”이라고 의미를 두었다. 지난해 제3지점 발굴 때도 비슷한 양상의 유구가 발견됐다.

-빙산의 일각-

원형제단 중간에 사각형의 대형 석관묘가 있었는데, 석관묘 앞에는 불에 탄 붉은 흙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늘 와서 불을 피우고 제사를 지냈다는 증거였다. 결국 이 적석총 안에 누워있었던 이가 숭배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대량의 토기들이 띠를 이루며 무덤 주위를 둘렀다.

홍산문화의 토기.
이는 특수한 장례 풍습을 웅변해준다. 이 풍습은 앞선 문화인 싱룽와에서도 보이며 수천년 후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도 그 전통이 이어진다. 그런데 라오후산의 양쪽 강가 10㎞ 인근에는 샤오구리투(小古力吐) 등 차오마오와 같은 유적들이 즐비한데, 제단과 돌건축물들이 대부분 층층이 높아지는 피라미드 형태이다.

“보세요. 석판을 차곡차곡 쌓고, 판석을 덮는 형식이네요. 전형적인 석관묘네요. 그리고 저기 적석총도 있고…. 저기 3단으로 쌓은 제단도 있고….”

이교수는 “장례풍속과 제사 유적 등을 미뤄볼 때 발해문명의 출현과정을 추론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보고 있다. 중국 학계가 가장 최근까지 발굴한 차오마오산 유적에 비상한 관심을 두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차오마오산 유적은 홍산문화의 ‘단적인 예’일 뿐이다. 탐사단은 맨처음, 4000년전 조성된 고조선의 성일 가능성이 짙은 싼줘뎬(삼좌점·三座店)·청쯔산(성자산·城子山) 석성을 실마리로 발해문명 탐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8000년전 동이의 본향인 차하이(査海)-싱룽와(興隆窪) 마을을 지나 이제 홍산문화의 땅, 바로 차오마오산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토기 가운데는 남녀가 춤을 추면서 구애 혹은 성접촉을 상징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홍산문화는 차하이·싱룽와 문화-홍산문화-하가점 하층문화(고조선의 석성들)로 면면이 이어지는 발해문명 계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인들은 “황허문명=중화문명이라는 철옹성 같은 관념을 마침내 버리고 발해문명이 중국문명의 기원이며, 홍산문화에서 이미 초기 국가의 형태인 고국(古國)이 탄생했다”(쑤빙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국 학계도 인정하듯 발해문명의 창시자는 우리 민족을 포함한 동이족이다.

-붉은 봉우리-

그렇다면 홍산문화란 대체 무엇인가. 홍산문화에 대한 연구·조사가 시작된 것은 올해로 딱 100년이 됐을 만큼 깊지만, 제대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지는 불과 30년전부터다. 지금까지 츠펑, 링위안(凌源), 젠핑(建平), 차오양(朝陽) 등에서 500여곳의 홍산문화 유적이 쏟아졌다.

홍산문화의 토기들.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1908년 일본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였다. 이쯤해서 사족 하나. 제국주의 침략에 앞서 필수적인 과정이 있는데 바로 식민지로 지목한 곳에 대한 철저한 인류학적인 조사다.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해서다.

“전율을 느낄 정도죠. 1868년 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은 조선학을 시작했는데, 급기야 조선을 합병했잖아요. 또 만주 침략을 획책한 일제는 20세기 초부터 교토대를 중심으로 만주학이라는 걸 만듭니다. 그후 동북3성을 점령하잖아요(1931년).”

도리이 류조 역시 마찬가지 목적으로 당시 네이멍구 동남부 츠펑(赤峰·당시엔 열하성) 잉진허(英金河) 유역 일대를 조사했다. 이 유적은 훗날 홍산허우(后) 유적으로 일컬어졌다. 그는 당시 일련의 신석기 유적과 적석묘를 발견하고는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홍산(紅山)이란 명칭은 홍산허우 유적이 있었던 암홍색 화강암산에서 비롯됐다. 츠펑(赤峰)이라는 도시이름도 이 산의 ‘붉은 봉우리’에서 유래됐다.

-일제의 야욕-

각설하고 저우커우뎬(주구점·周口店)과 양사오(앙소·仰韶)문화 발견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스웨덴의 안데르손은 1921년 6월 아주 중요한 발굴을 수행한다. 랴오닝성 후루다오(葫蘆島)시 사궈툰(沙鍋屯) 동굴유적에서 갈지(之)자와 줄무늬가 새겨진 토기와 귀가 두개 달린 붉은 토기 등 갖가지 유물, 그리고 40여명분의 인골을 발굴한 것이다. 이 유적은 중국 고고학 역사에서 정식 발굴을 거친 최초의 유적이라는 점에서도 각광을 받았으나 층위 구분의 과학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폄하됐다. 하지만 최근들어 사궈툰에서 30㎞ 떨어진 카줘에서 비슷한 문화층을 가진 동굴을 발견함으로써 다시 주목을 끌고 있다.

둘 다 범상치 않은 제사유적일 가능성이 크다. 계몽운동가인 량치차오(梁啓超)의 아들인 고고학자 량쓰융(梁思永)은 1930년 그 혹독한 겨울에 츠펑 일대를 샅샅이 훑었다. 그는 츠펑에서 발견된 양사오식 채도에 큰 관심을 가졌다. 채색토기는 중국 중원인 양사오 문화의 대표 유물. 그런데 왜 만리장성 이북에서 채도가 발견되는가. 만리장성 이북은 중국인들이 오랑캐 문화라 해서 무시했던 곳이 아닌가. 량쓰융은 바로 양사오와 장성이북 문화(후에 홍산문화)의 문화접촉에 관심을 기울였다. 량쓰융은 장성 이남과 이북의 문화 접촉 지역이 어디인지를 알아보기로 했다.

“펑톈(봉천·奉天·선양의 옛이름) 서남부이거나 즈리(직예·直隸·지금의 베이징 부근)일 가능성이 큽니다.”(량쓰융)

당시 량치차오는 이를 위해 동북고고탐사계획을 세웠으나 일본군의 동북침략(1931년)으로 수포로 돌아간다. 2년 뒤인 1933년 집총한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야하다 이치로(八幡一郞)가 중심이 된 제1차 만몽 학술조사연구단이 들이닥치고, 35년엔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가 주축이 된 일본동아고고학회가 ‘쳐들어온다.’

“일제의 의도는 뻔했어요. 만주 역사를 중국의 역사에서 떼어내, 일제가 점령하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함이었어요. 바로 만주국을 세우는 것. 일제관학이 그래서 무서운 거죠. 1935년 일제는 원래 청동기시대 석관묘를 위주로 조사했는데, 홍산허우 유적 조사과정에서 신석기시대 유적을 대거 발굴했죠.”(이형구 교수)

이곳에서 대량의 홍도와 채도, 세석기(중기구석기~초기 신석기까지 유행한 잔석기. 폭 1~1.5㎝, 길이 5㎝ 이하의 잔석기), 동물뼈, 옥구슬, 골기, 그리고 아궁이터 등 신석기시대 유물이 터져나온 것이다. 일제는 1938년 ‘츠펑 홍산허우’라는 발굴보고서를 냈다.

-문명의 3조건-

지금과 같은 ‘홍산문화’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은 1955년이었다. 고고학자이자 역사학자 인다(尹達)는 저서 ‘중국신석기시대’라는 책을 내면서 ‘홍산허우 유적’을 전문적으로 분석하는 장(章)을 마련했다. 그는 이 책에서 “홍산문화는 남북문화의 접촉후 생겨난 일종의 새로운 문화”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1970년대 말까지도 홍산문화 연구는 토기와 세석기 등에 집중됐고, 그저 넓은 의미의 북방 세석기문화, 즉 일종의 변경문화로만 인식됐다. 그러나 1979년 카줘 둥산쭈이(동산취·東山嘴)에서 임신한 여인의 소조상을 포함한 엄청난 제사유적이 발견되고, 83년에는 뉴허량(우하량·牛河梁)에서 제단(壇)과 신전(廟), 무덤 등 이른바 단묘총 유적이 3위일체로 출현한다. 두 유적과 후터우거우(호두구·胡頭溝) 유적에서는 세계가 깜짝 놀랄 대량의 옥기로 도배되다시피했다.

“제단, 신전, 무덤은 문명탄생의 세 조건이라 하죠. 옥기로만 도배되다시피한 무덤은 사회분화, 계급탄생의 신호죠. 결국 쑤빙치를 중심으로 한 중국학계는 홍산문화를 중화문명의 기원을 상징하는 문화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이형구 교수)

그런데 조상숭배와 하늘숭배, 적석총·석관묘를 포함한 홍산문화는 다름아닌 동이의 문화였다. 중국학계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 차오마오산에서 홍산문화의 맛을 살짝 본 탐사단은 바로 그 유명한 뉴허량 유적을 찾아 발길을 돌렸다.

〈차오마오산|이기환선임기자〉
코리안루트를 찾아서](9)뉴허량의 적석총들
입력: 2007년 11월 30일 15:56:37
 
제단(壇)과 신전(廟), 무덤(적석총), 그리고 옥기(玉器). 흔히 집과 금속, 문자를 문명의 3요소라 하지만 인간의 정신세계와 관련 깊은 제단과 신전, 무덤은 이 3요소를 초월한다. 또한 옥기는 계급·사회분화, 그리고 제정일치 사회의 상징물이다. 바로 발해문명의 뼈대가 된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BC 4500~BC 3000년)의 빛나는 창조물들이다.



이형구 교수가 뉴허량 제2지점에 있는 계단식 적석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2지점은 제단과 적석총, 그리고 26기의 석관묘가 묻힌 적석유구 등으로 구성됐다. 뉴허량/김문석기자

지난 7월30일 탐사단은 바로 그 훙산문화의 정수를 엿볼 수 있는 뉴허량(우하량·牛河梁) 유적을 찾았다. 이제 훙산문화의 정수인 돌무덤과 제단·신전, 그리고 옥 문화 등을 차근차근 탐구할 참이다. 오전 9시20분 탐사단을 태운 버스가 닿은 곳은 랴오닝성 문물고고연구소 뉴허량 공작참(站)이다.

-30년 연구의 내공-

“(공작참) 관리소장이 회의를 하고 있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네요. 우선 (유물 진열실로) 들어갑시다.”

주인(소장)이 없다는 데도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진열실로 안내한다. 신동호 탐사단장과 기자는 요 며칠간 입이 떡 벌어졌다. 이형구 교수의 전화 한 통화와 얼굴이 바로 명함 같았다. 예컨대 훙산문화 발굴을 총 지휘하는 츠펑대 훙산문화 연구중심의 유물수장고는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히 금지된 곳. 자국의 연구자들에게도 출입을 쉽게 허용하지 못하는 곳이다.

하지만 이형구 교수 덕분에 수장고 안에 켜켜이 진열된 수많은 훙산문화·샤자뎬 하층문화의 유물들을 원없이 보고, 촬영할 수 있었다. 엄청난 양의 빗살무늬·덧띠토기를 비롯한 눈부신 유물들. 그뿐이랴. 차하이·우한치 박물관과 나중에 보게 될 선양박물관에서도 바로 이교수의 ‘얼굴 명함’ 덕분에 수많은 사진·영상자료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날도 같았다. 뉴허량 발굴 유물들을 마치 현장 책임자처럼 설명해주는 이교수의 30년 내공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30년 이상 중국 학자들과 교분을 쌓으며 끊임없이 학술토론을 벌여나간 결과겠지요. 연구 축적 없이 대증적으로 중국의 동북공정을 욕하는 것으로는 역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요. 감정적으로만 대응하게 되면 (중국인들이) 문만 걸어 잠그게 되고…. 우리는 또 접근할 수 없고….”(이교수)

-내친김에 부산까지-

뉴허량 유적은 랴오닝성 차오양시 젠핑(건평·建平)과 링위안(능원·凌源)의 경계선에 걸쳐 있다. 1940년 역사교사 둥주천(동주신·冬柱臣)이 채색토기를 발견했고, 1979년 역시 이곳 영역내인 싼관뎬쯔(三官甸子)에서 옥기묘를 발굴한 적이 있다. 하지만 본격 발굴된 것은 1983년이었다. 쑨서우다오(손수도·孫守道)와 함께 발굴을 주도한 궈다순(郭大順)의 회고.

“지난 100년 동안 500여곳의 훙산문화 유적을 발견했는데, 무덤이 확인된 예는 거의 없었습니다. 뉴허량 유적이 하나하나 벗겨질 때마다 학계가 경악했어요. 적석총과 제단, 신전은 물론 다량의 옥기가 쏟아진 것이죠. 그리고 한 변이 100m에 달하는 수수께끼의 금자탑(피라미드)까지…. 발굴단은 모두 20여곳의 유적을 확인했고, 16개 지점에 대한 번호를 매겼어요. 확인된 유적의 면적은 무려 50㎢에 달했고….”
1992년에 확인된 동방의 피라미드(제13지점). 아직 정식 발굴이 이뤄지지 않았다.

탐사단의 이날 목표는 제2지점(적석총+제단+옥기)과 1지점(여신묘), 13지점(대형 피라미드)이다. 제일 먼저 찾은 것은 적석총과 제단, 옥기가 나온 뉴허량에서 가장 유명한 2지점이다. 철장으로 둘러싸인 유적 안에는 감시 초소가 있는데, 이교수가 ‘문을 열어 달라’고 소리치니 금방 문을 연다.

발굴이 끝나 파릇파릇한 풀 사이로 나타난 것은 온통 돌무더기였다.

“유적의 이편 저편에는 베이징~단둥으로 향하는 도로와 철도가 지나고 있어요. 이 도로와 철도는 의주를 거쳐 한반도 끝인 부산까지 닿을 수 있지요.”

이교수의 말이 기자의 가슴 벅찬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 옛날 돌무덤을 썼던 우리의 선조들 가운데 일부가 이 바로 이곳에서 랴오허(遼河)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건너가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들은 다시 남으로 남으로 향해 한반도 저 끝, 부산까지 닿지 않았을까.

-1인 독존의 사회-

“이기자, 이리로 와봐요.”

이형구 교수가 바삐 손을 잡아 끈다. 뉴허량 16개 지점 가운데 13곳이 적석총으로 조성됐다. 그 가운데 이곳(2지점)의 적석총이 대표적이다.

들어가자마자 가운데 조성된 적석총은 남북 18.7m×동서 17.5m의 방형으로 조성됐는데, 3층으로 된 계단식 적석총이다. 적석총 안에는 석곽을 놓았고, 그 안에 석관을 조성했다. 석관 안에서는 성인 남성의 인골과 홍산문화 옥(玉)의 대표격인 용 모양의 구부러진 옥이 확인되었다.

대형 적석총은 양 옆으로 원형 제단과 거대한 적석유구를 거느리고 있다. 이런 계단식 적석총의 전통은 훗날 고구려·백제 적석총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뉴허량 2지점 항공사진.
또한 제단과 관련한 이야기는 후술하겠고, 여기에서 언급할 것은 적석유구이다. 이 돌로 쌓은 유구 안에는 무려 26기의 크고 작은 석관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큰 석관은 길이 2m, 높이 60㎝를 넘고, 작은 석관은 길이 55㎝ 정도인 것도 있다. 순장의 흔적도 보이는데 순장은 상(은)나라와 부여의 풍습으로 이어지는 장례 풍습이다. 그리고 적석유구 속에 석관묘를 밀집시켜 조성한 것은 한반도 황해도 황주 침촌리 적석총과 강원도 춘천 천전리 적석총과 비슷하다.

이 유적의 모티브는 뻔하다. 가운데 중심대묘, 즉 대규모 적석총은 이 지역 수장급의 무덤이 분명하며, 적석유구 속에 조성된 26기의 무덤은 씨족사회의 구성원들이 계급별로 묻힌 것이다. 그리고 제단은 그들이 지모신과 조상신을 모신 증거이다. 중국 학계는 3단 계단식 적석총의 위용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 “이는 훙산문화 사회는 일인독존(一人獨尊)의 사회였으며, 신분과 계층의 차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훙산문화처럼 계급이 확실하게 나타난 선사시대 유적은 없어요. 이미 단순한 씨족사회를 넘어선 고국(古國)의 단계로 볼 수밖에 없는 증거들이 속출했어요.”

이교수는 “더 봐야 할 게 있다”면서 다시 기자 일행의 소매를 끌었다. 동방의 피라미드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동방의 피라미드-

“동방의 피라미드요?”

“가보면 압니다.”

잠깐 길을 잃었다가 뉴허량에서 1㎞ 정도 남쪽으로 떨어진 �산쯔(전산자·轉山子)라는 곳을 ‘발견’했다. 저 멀리 낮은 나무가 서있는 아주 낮은 구릉이 보이는데, 바로 그곳이 동방의 피라미드(제13지점), 즉 중국말로 진쯔타(金字塔), 즉 금자탑이란다. 이집트의 웅장한 피라미드와 비교한다면 ‘피식’거릴지 몰라도 중국학계의 자부심은 대단하단다.

“그럴 만도 하죠.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1000년이나 앞선 시기의 피라미드니까요.”

기자는 속으로 중국인들 특유의 ‘뻥’인가 싶어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계단식 적석총을 흔히 피라미드라 하고, 그런 측면에서 고구려 장군총 역시 피라미드라 일컫는다. 그보다도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범상치 않은 모양이다.

“한변이 100m나 되는 거대한 층급형 피라미드예요. 지금 확인되는 것은 7층까지랍니다.”

이교수의 설명이 이어진다.

“가운데는 판축의 형태로 흙을 다지고(층마다 8~10㎝로) 바깥 쪽은 돌로 쌓았어요. 다진 할석의 면을 바깥으로 하고, 무너지지 않도록 견치석과 엇박자로 쌓는 석축의 방법은 훙산문화~샤자뎬 하층문화~부여~고구려·백제·신라~일본 규슈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한마디로 적석총과 같은 모티브라는 것이다. 또하나 재미있는 것은 피라미드가 조성된 앞에 제단(60×40m)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훙산문화 사람들이 이 제단에서 피라미드의 주인공에게 제사를 드렸다는 얘기가 된다. 이 피라미드는 1992년 본격적으로 확인됐다. 아직도 표면만 발굴했을 뿐 중앙부에는 접근조차 하지 못한 상태다. 중국인들이 이 수수께끼 유적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피라미드라 일컫는 이런 거대한 적석총의 존재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는 이집트 사카라에 있는 제2왕조 파라오인 조세르(BC 2630~BC 2612년 추정)의 계단식 피라미드다. 그런데 이 동방의 피라미드는 이보다 1000년 앞선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이교수는 “모티브는 이집트 피라미드와 같다”면서 “이 건축물은 제단을 갖춘 무덤이며 그리스 신전 같은 역할을 했으니 훙산문화가 다른 세계문명보다 결코 뒤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청동기 문화는 동이가 창조했다?-

또 하나, 이 피라미드에서는 청동기를 제조할 때 청동주물을 떠서 옮기는 그릇과 청동찌꺼기(슬래그)가 발견됐다.

이를 두고 중국의 저명한 야금학자는 “기존 중국의 청동기 시작 연대(BC 2000년설)보다 1000년 이상 앞선 BC 3500~BC 3000년 사이에 이미 청동기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고 주장해왔다. 아직은 그의 견해가 세계학계에서 공인되지 않고 있다. 만약 공인된다면 다링허(대릉하·大凌河) 유역에서 동방 최초로 청동기가 창조됐다는 이야기이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무엇보다 이곳은 동이의 영역 아닌가.

중국학계는 입이 딱 벌어졌다. 중국 고고학자 옌원밍(엄문명·嚴文明)은 “이 피라미드는 왕의 묘일 가능성이 높다”면서 “중화문명 5000년 역사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이런 피라미드는 어떻게 다링허와 랴오허(遼河)를 건너 랴오둥 반도와 만주 일대, 그리고 한반도로 퍼졌을까. 고구려 지안(集安) 국내성 일대에서 발견된 1만여기의 적석총은 이 뉴허량 적석총과 어떤 친연관계를 갖고 있을까. 기자는 이형구 교수와 함께 그 수수께끼를 푸는 여행을 떠나보련다.

〈뉴허량|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동영상|이다일 기자 crodail@khan.co.kr〉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0)랴오허 동서쪽의 적석총
입력: 2007년 12월 07일 15:15:00
 
“돌무덤이 고인돌로 발전했을 것”

혹 맹목적인 순혈·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우리 것’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다. 우리 문화의 원류와 정체성을 찾는 것이 단순한 피가름이 아니다. 한민족이 단일민족이 아니라 다종족으로 이뤄졌다면 그 여러 종족이 힘을 모아 이뤄낸 역사와 문화를 탐구하는 것 역시 뜻깊은 일이다.

-외줄타기-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여전히 식민·분단·냉전사학은 떠도는 원혼처럼 우리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북한·중국·러시아 등 우리 역사의 중요한 무대에 대한 현장 조사가 시작된 것은 20년도 되지 않았다. 이형구 교수처럼 일찍이 한·중 수교 이전에 중국 본토의 역사와 고고학을 공부한 이도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런 가운데 중국은 동북공정, 하·상·대 단대공정, 중국문명 탐원 공정 등 장기 프로젝트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다.
이형구 교수가 뉴허량 2지점에 조성된 석관묘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왼쪽) 이교수는 이런 석관묘가 훗날 고인돌 무덤으로 발전했다고 보고 있다. 뉴허량·선양/김문석 기자


역사왜곡의 주범인 일본은 말할 것도 없다. 반면 우리는 어떤가. 단적인 예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믿지 못해 AD 0~300년 사이의 역사를 ‘원삼국시대’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둔갑시킨 지 어언 40년 되지 않은가. 그런 마당에 “남의 땅(중국·러시아)에서 우리 것을 찾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폄훼한다면 지나친 냉소·허무주의가 아닐까.




“우리 것이라고 굳이 주장할 필요도 없어요. 그저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는 대로 쓰면 됩니다.”

기자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는 이렇게 끝났다. 탐사 내내 지나친 민족주의와, 우리 문화의 원류 및 정체성 탐구를 사이에 두고 벌였던 끊임없는 마음 속 갈등. 뉴허량(우하량·牛河梁)의 대형 피라미드와 적석총군을 직접 보면서 외줄타기의 갈등을 이렇게 확실하게 정리했다.

-랴오허 동쪽과 서쪽-

뉴허량 2지점 무덤 주위에는 토기들이 정렬돼 있다.
적석총·피라미드와 함께 또 하나의 단서는 무덤 주변을 빙 둘러서 꽂아놓은 통형관(밑이 없는 토기) 행렬. 모종의 장례 습속이 분명한 이 행렬은 훗날 한반도 전남지방에서 그대로 보이며, 일본 열도의 하니와(埴輪)로도 연결된다.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 돌무덤은 라오닝성 푸신(阜新) 후터우거우(호두구·胡頭溝)에서도 확인됐다. 이 또한 의미심장했다. 훙산문화 시대(BC 4500~BC 3000년) 위 문화층에서 한반도와 발해연안의 대표 유물인 비파형 청동단검이 나왔기 때문이다. 비파형 청동단검을 썼던 사람들이 훙산문화인들의 묘제를 그대로 사용했다는 의미. 이 얼마나 끈질긴 문화적인 연속성과 계승성인가. 돌이켜보면 우리 민족은 끔찍하게 돌무덤을 사랑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 직전 중국 정부는 지안(輯安)의 국내성 주변에서만 1만3000여기의 고구려 적석총을 확인했다. 43년이 흐른 지금에도 약 6000기가 남아 있다.

“(장례 때) 고구려는 돌로 쌓아 봉분을 만든다(積石爲封)”(삼국지 위서 동이전)는 기록이 단적인 예다. 그런데 고구려 시대보다 무려 3500년 전에 조성된 엄청난 적석총과 피라미드가 랴오허 동쪽인 랴오둥(요동·遼東)이 아니라 서쪽인 다링허(大凌河) 유역에서 확인됐으니 무슨 조화인가.

“적석총은 그전까지는 랴오허를 중심으로 서쪽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어요. 랴오둥 반도, 그것도 신석기 말~청동기 초기의 무덤이었거든.”

이교수의 말마따나 랴오둥 반도에는 BC 2500~BC 2000년의 돌무덤이 곳곳이 흩어져 있다. 적석총뿐 아니라 석곽묘·석관묘, 그리고 지석묘(고인돌무덤)까지 다양하다. 우선 랴오둥 반도에는 뤼순(旅順)시 라오톄산(老鐵山)과 장쥔산(將軍山)을 비롯해 쓰핑산(四平山)·위자춘(于家村)·바이강쯔(柏崗子)·다타이산(大臺山) 등 이름을 열거하기도 힘든 적석총들이 있다. 이 돌무덤들은 주로 바닷가에 면한 산등성이와 낮은 언덕에 수기 혹은 수십기씩 연속적으로 배열돼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광주 명화동 고분에서도 같은 형식의 장례풍속이 나온다.

이 가운데 만주침략의 사전 준비에 나선 일본 인류학자 도리이 류코(鳥居龍藏)가 가장 먼저 라오톄산 적석총(1909년)을 발견했다. 적석총 안에서는 여러 개의 석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훗날 발견된 훙산문화 시기의 뉴허량 적석총과 비슷한 구조다.

-대국의 풍모 보인 저우언라이-

또한 인근의 장쥔산 적석총은 1963~65년 북한과 중국의 합동조사단이 발굴했는데, 모두 9개의 묘실을 갖추고 있었다. 조·중 합동조사단이라. 이쯤해서 왜 60년대 초중반 조·중 합동조사단이 발족했는지 알아보자.

62년 당시 북한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에게 “고조선의 발원지를 찾고 싶다”며 중국 동북지방의 고고학 조사를 요청했다. 저우언라이는 “고조선 기원은 동북지방이 아니라 푸젠(복건·福建)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하고 의문을 제기했지만 합동조사는 용인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 문헌기록은 대국 쇼비니즘에 빠져 객관성을 결여한 불공정한 기록이 많다”고 중국의 역사왜곡 풍토를 인정한 것이다.

“그래도 당시 중국은 명실상부한 대국의 마인드를 갖췄어요. 열린 마음으로 소수민족의 역사를 인정했으니까….”(이형구 교수)

이에 따라 조·중 합동 고고학발굴대가 구성되어 63년 8월부터 65년 8월까지 동북지방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에 나섰다.

“조·중 합의는 재미있었어요. 예컨대 유물 2점 이상이 나오면 반씩 나눠 갖기로 하고, 1점만 나오면 북한이 가져가서 연구하도록 하는 내용이 있어요.”

1960년대 초반 북한과 중국의 합동조사로 확인된 장쥔산 적석총의 그림. 적석총 안에는 9개의 석곽묘가 조성돼있었다.
하지만 조·중 관계는 66년부터 중국 문화대혁명 발발과 함께 모든 학술행위가 중단된 것을 계기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북한이 66년 7월, 외부에 공개하지 않기로 한 발굴보고서를 공동조사단의 이름으로 내버린 것이다. 고조선의 기원이 중국 동북이고,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자라는 내용으로…. 중국의 분노는 극에 달해 그때부터 양국간 학술교류는 빙점에서 맴돌았다.

“물론 북한도 신의를 저버렸다지만, 핵심은 그후 중국이 명실상부한 대국의 면모를 버리고 소아병적인 중화주의로 빠졌다는 것입니다. 90년대 들어 중국내 모든 소수민족의 역사를 중화의 역사로 편입시킨 것입니다.”

-4000년 이어진 돌무덤의 전통-

랴오둥 반도의 고고학 조사는 이런 풍상을 겪으면서 진행되었다. 라오톄산과 장쥔산 외에도 우자춘에서는 58기의 묘실을 담은 엄청난 크기의 적석총이 확인됐다. 어떤 묘실에는 무려 21구의 인골이 매장됐다. 또한 뤼순시 허우무청역(後牧城驛) 강상(崗上)·러우상(樓上) 적석총에서는 23개 혹은 10개의 석관이 중앙의 큰 석관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배치돼 있었다. 그런데 시기는 다소 늦지만 한반도에서도 비슷한 돌무덤들이 속출한다.
황해도 황주 침촌리 적석총

BC 1500년으로 편년되는 시도(矢島·인천 옹진군)적석총과 황해도 황주의 침촌리 적석총, 그리고 강원도 춘천 천전리 적석총이 그것이다. 이밖에 평북 강계 일원과 대동강 유역, 평남 강서·북창 일대, 재령강 유역의 황해도 봉산·인산·서흥·사리원, 한강유역의 양평, 경남 김해·진주, 충남 아산·예산·부여, 충북 단양 등지에 분포됐다. 돌무덤의 전통은 백제의 서울 석촌동 고분과 공주·부여의 석실묘까지 4000년 이상 이어진다. 이형구 교수의 정리를 들어보자.

“뉴허량 적석총은 BC 3500년으로 편년됩니다. 그리고 랴오둥 반도의 적석총군은 BC 2500~BC 2000년, 한반도의 적석총은 BC 1500년 이하…. 이것은 돌무덤의 원류는 홍산문화이며, 이것이 랴오허를 건너 랴오둥 반도를 거쳐 한반도~일본 열도로, 지린(吉林)~연해주로, 몽골~시베리아로 건너갔다는 얘기죠.”

-1000년의 공백? 고인돌?-

여기서 기자가 좀처럼 풀 수 없는 두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하나는 랴오허를 기준으로 왜 1000년의 공백이 생기는 것일까. 이형구 교수는 “훙산문화는 다링허(大凌河)와 랴오허를 건너 랴오둥을 거치는 동안 시간·공간의 과도기를 겪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이교수 역시 랴오허를 건너는 동안 생긴 1000년 가까운 공백에 대해서는 “학계가 풀어야 할 과제”라고 결론을 유보한다. 뉴허량에서 랴오허를 건너 선양(瀋陽)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갖가지 상념에 젖어 있던 기자가 눈을 떴다.

“저기가 바로 645년 당나라 대군이 궤멸당한 요택(遼澤)이야.”

누군가 소리친 것이다. 과연 대단했다. 수풀이 무성하고 물길이 수없이 뚫린 대습지. “세계 최대의 습지”라는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가이드는 “다링허~랴오허 삼각주는 무려 140㎞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과연 “진창이 되어 수레와 말이 지날 수 없으므로~얼어 죽는 이가 많았고~황제(당태종)가 스스로~일을 도울 정도”(삼국사기 보장왕조)라 할 만했다. 훙산문화 시기에는 더하면 더했겠지. 이런 습지로 극복하고 랴오허를 건너는 일은 엔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건널 엄두를 내지 못했겠지. 그게 돌무덤의 전파를 늦춘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기자의 천박한 상상력이다.

또하나 의문점은 지석묘(고인돌 무덤)이다. 고인돌은 우리나라에만 3만여기가 분포된 대표적인 청동기 시대 묘제이다. 가히 고인돌의 천국이라 할 만하다.

고인돌 전문가 쉬위린(許玉林)은 “고인돌은 BC 2000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중국 동북에서는 랴오허를 기준으로 서쪽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일까. 이형구 교수는 조심스럽게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뉴허량의 적석총·석관묘 같은 훙산문화 돌무덤이 랴오둥 반도에서 고인돌로 발전한 게 아닐까요. 석관의 4벽이 높아져 지상으로 올라가고, 그 위에 큰 개석을 덮게 되고…. 하나의 고인돌 무덤이 된 겁니다.”

-고조선의 숨결-

고인돌 무덤을 축조한 랴오둥의 사람들은 분명 고조선 사회의 구성원들이었다. 물론 랴오허 서쪽 츠펑(赤峰)에서 석성을 쌓았던 산줘뎬(三座店)과 청쯔산(城子山) 사람들도 고조선인들일 것이다.(경향신문 10월27일자) 쑤빙치(蘇秉琦)도 “이곳에 하나라(BC 2070년 건국)와 같은 시대의 강력한 방국(方國)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그들은 대규모 석성과 피라미드를 방불케 하는 돌무덤과 빗살무늬토기, 갈지(之)자무늬 토기, 옥기 등을 공통분모로 발해문명을 이끌었던 것이다.

〈뉴허량|이기환선임기자〉
〈동영상|이다일기자 crodail@khan.co.kr〉
“옥기 쥔 巫人은 神과 소통한 왕”

1989년 가을. 뉴허량(우하량·牛河梁) 제2지점 1호 적석총을 발굴 중이던 조사단은 기이한 모습에 꿈을 꾸는 듯했다.

21호묘에서 무려 20점의 옥기가 쏟아진 것이다. 이것은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 무덤 한 곳에서 나온 가장 많은 옥기였다. 무덤에는 옥기로 도배하다시피한 성인 남성이 누워 있었다. 입을 활짝 벌린 채 반듯이 누워 있는 인골은 짐승 얼굴 모양의 옥패(玉牌), 옥거북이, 옥베개 등으로 잔뜩 치장했다.




-옥으로 도배한 인골-

뉴허량 제1지점 중심대묘에서 확인된 인골. 양손에 옥거북이를 쥐고 있는 것을 비롯, 7점의 옥기만 부장돼 있다. 일인독존의 무인(巫人)으로 추정된다. 뉴허량·선양/김문석기자
희한했다. 다른 부장품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선사시대 무덤에서 흔히 보이는 토기와 석기 같은 것들은 단 한 점도 없었다. 중국학계는 이런 기이한 장례 풍습을 두고 ‘유옥위장(唯玉爲葬)’, 즉 옥으로만 장례를 치렀다고 정리했다. 뉴허량 유적군에서 정식 발굴을 끝낸 적석총은 모두 4곳에 이른다. 탐사단이 서 있는 이곳 제2지점과, 3지점, 5지점, 16지점이다.

“뉴허량 유적군에서 발굴을 끝낸 묘장은 모두 61기인데, 그 가운데 부장묘(副葬墓)는 31기이다. 그런데 이 31기 중 옥기만 넣은 묘는 26기에 이른다.”(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

부장묘의 83.9%가 ‘유옥위장’의 훙산문화 전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제2지점만 보죠. 26기의 석관묘가 묻힌 1호 적석총의 경우 옥기로만 장례를 지낸 것이 14기에 이릅니다. 부장품이 없는 묘가 11기이니 부장묘=옥기묘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거죠.”(이형구 선문대 교수)

비단 뉴허량의 옥기묘뿐만 아니다. 이곳에서 200㎞ 동쪽으로 떨어진 후터우거우(胡頭溝·랴오닝성 후신) 유적과, 바이인창한(白音長漢·네이멍구 린시), 난타이쯔(南台子·네이멍구 커스커텅치)에서도 비슷한 양상의 옥기묘가 출현했다. 예컨대 후터우거우 적석총에서는 10점의 옥기가 출토되었고 토기는 없었다. 이 후터우거우 유적 훙산문화 문화층의 바로 위에서 한반도 및 발해 연안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비파형청동단검이 나왔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양손에 꼭 쥔 옥거북이-

뉴허량에서 확인된 다양한 옥기들. 봉황과 쌍가락지·구름형·짐승얼굴형 옥장신구와 옥기는 물론 하늘과 인간의 소통을 독점한 무인(巫人)을 상징한 옥기가 쏟아졌다. (위로부터)
뉴허량 옥기묘의 모습을 다시 재현해보자. 탐사단이 서있는 제2지점에는 앞서 살펴본 1호 적석총 21호묘 말고도 4호묘에도 성인 남성이 묻혀 있었다. 역시 3점의 옥기가 부장돼 있었다. 말발굽형 베개 1점이 머리 위에 놓여 있었고, 가슴팍에는 옥룡이 있었다. 묘 주인은 뭔가 특별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제5지점과 16지점에서 확인된 인골과 옥기를 보면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제5지점의 중심대묘에서는 노년 남성 1구의 인골과 7점의 옥기가 출토됐다. 양 귀에 옥벽(玉璧), 즉 둥근 옥이 양 귀 밑에 가지런히 놓여 있고, 가슴팍엔 구름형 옥장식이 놓여 있다. 또한 그 아래 말발굽형 옥기가 있으며, 오른팔엔 옥팔찌가 놓여 있다. 무엇보다 양손에 옥거북이가 쥐어져 있다는 게 재미 있다. 조사단은 이 무덤의 주인공을 ‘무인(巫人·요즘의 무당과는 다른 차원이다)’이라고 추정했다.

뉴허량 유적군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제16지점의 중심대묘에도 성인 남성이 묻혀 있었다. 이 묘의 주인공도 5지점 중심대묘와 마찬가지로 신(神)과 소통할 권리를 독점한 무인(巫人)일 것 같다. 특히 이곳에서는 옥으로 만든 무인인형과 봉황이 특징적이다.

나중에 랴오닝성 박물관을 들른 기자는 잘 복원하여 전시해놓은 뉴허량 무덤들을 보며 흐르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미 죽었는 데도 영생불멸의 상징인 옥으로 거북이까지 만들어 양손에 꼬옥 쥐고 있는 모습이라니 참…. 애처롭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재미 있기도 해서…. 더군다나 묘의 주인공은 하늘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무인이라지 않는가. 하기야 죽어서도 죽지 않으려는 사람의 욕심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이려니….

-신과 소통하는 도구-

왜 옥인가. 훙산문화의 주인공들은 왜 그토록 옥에 집착했을까.

“갑골문자의 ‘예(禮)’자는 본디 제기를 뜻하는 ‘두(豆)’자 위에 두 개의 옥을 올려 놓은 것을 묘사한 것이다.(禮자 가운데 오른쪽 豊자를 보라.) 그것은 곧 신을 섬기는 일이었다.”

저명한 고증학자인 왕궈웨이(왕국유·王國維·1877~1927년)의 말이다. 옥이 범상치 않은 신물(神物)임을 잘 파악한 것이다.

예로부터 중국은 옥을 숭상하는 나라였다. ‘예기(禮記)’는 “자고로 군자는 반드시 패옥을 찬다”고 기록했다. 선사인들은 하늘 운행의 궤적에 있는 태양을 관찰하고 둥근 옥벽(玉璧)을 만들었다. 이것으로 하늘과 태양을 숭배했다. 또한 땅을 사각형으로 생각하고 옥종(玉琮·사각형 형태의 옥)을 만들어 땅에 제사를 지냈다. 중요한 것은 석기와 토기 같은 것들은 생활용품들이지만 옥기는 관념 형태의 창작물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생명은 하늘이 부여하는 것이며, 신령한 동물과 산수, 토지 등은 서로 영물처럼 치환된다고 보았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제기에 신비로운 문양과 부호, 상형문자 등을 깎아넣은 것이다. 씨족부락은 각종 동물 옥장식으로 제사에 쓰이는 신기(神器)와 그들이 숭배하는 토템을 만들었고, 씨족사회의 번성과 풍성한 수확을 바랐다. 훙산인들은 정신문화 범주에 속하는 옥을 무덤에 도배하는 장례 풍속으로 물질문화를 배척하고, 정신문화를 중시하는 사유관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巫人과 옥과 하늘-

여기서 (뉴허량의 무덤에서 보이는 것 같은) 무인(巫人)이 등장한다. 한나라 때 자전인 ‘설문(說文)’이 ‘옥(玉)자’를 설명한 내용을 보자.

“영(靈)자는 밑의 무(巫)가 옥으로(가운데 입 口자 3개) 신과 소통한다(以玉通神)는 뜻이다.”

머우융캉(牟永抗)·우루쭤(吳汝祚) 등 중국 학자들은 “무(巫)는 인간과 신의 왕래자”라고 해석했다. 인간의 대표이면서 신의 의지를 체현(體現)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무인인 것이다. 여기서 옥은 무인이 신에게 헌납하는 예물이다.

“금은 변하지만 옥은 변하지 않죠. 그런 뜻에서 옥은 영생불멸과 영원한 사랑을 뜻합니다. 여인들이 왜 옥을 그리 귀하게 여겼겠어요.”(이형구 교수)

무인은 신과 소통을 통해 옥을 독점하고, 또 옥을 통해 스스로가 신적인 존재임을 만천하에 알린다. 결국 무인(巫人)과 하늘(神)과 옥(玉)은 삼위일체인 셈이다.

그런데 무인은 옥을 제작하는 기술을 독점함으로써 천지신에게 제사 지내는 특권을 농단하고 천지를 관통하는 능력을 보였으며, 하늘과 땅의 경지를 아는 지자(智者)로 우뚝 섰다. ‘옥으로 신에게 보인다(以玉示神)’는 옛말이 바로 그것이며, 그 주인공은 바로 무인이라는 말이다.

뉴허량 등 훙산문화 본거지에서 보이는 ‘옥 도배 무덤’을 다시 보자. 많은 적석총 가운데서도 우뚝 서 있는 중심대묘의 옥기는 수량과 질의 측면에서도 다른 무덤들과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앞서 기자는 옥거북이를 양손에 쥐고 있는 인골을 두고 “죽어서도 영원히 살려는 모습이 다소 애처롭다”고 비아냥댔는데, 그것은 아주 천박한 해석일지 모른다. 궈다순 등 중국 학자들의 해석은 사뭇 진지하다.

“고인은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신과 통하는 권력임을 체현하고 있다. 고인이 묻힌 중심대묘는 중소형 무덤들의 호위를 받고 있으며, 거대한 방형 혹은 원형의 적석총으로 돼 있다. 옥거북이를 쥔 주인공인 일인독존(一人獨尊)의 위상을 나타내주고 있다.”

즉 이 중심대묘의 주인공은 신과 통하는 독점자로서 교주이면서, 왕(王)의 신분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정일치 시대의 단적인 모습이다.

-옥으로 덕을 견준다-

이것이 바로 중국고고학계의 태두 쑤빙치가 장고 끝에 “훙산문화 시대에 이미 고국(古國), 즉 원시국가 단계에 돌입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훙산문화, 즉 발해문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옥 문화는 문명의 단계에서도 의미 있는 획을 그었다.

보통 중국 상고사를 (구·신)석기-청동기-철기 등 3단계로 구분한다. 그런데 여기에 옥(玉)의 시대를 넣어 석기-옥기-청동기-철기 등 4단계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이미 2000년 전부터 나왔다. 후한 때 원강이 지었다는 월절서(越絶書·춘추전국시대 월국의 흥망을 기록한 책)에 따르면…. 풍호자(風胡子)라는 사람이 초나라 왕에게 치국의 도를 이야기 하면서 옥기시대를 언급했다.

“헌원·신농·혁서의 시대인 돌을 병기로 삼았고(석기), 황제의 시대엔 옥(玉)으로 병기와 신주(神主)를 삼았다. 우임금 때는 청동기를, 그 이후엔 철기를 썼다.”

훙산인들은 ‘옥=인간·자연의 조화’ 관념을 지녔는데, 이 전통은 후대 유학자들의 심금을 사로잡았다.

특히 공자는 ‘군자는 옥으로 덕을 견준다(以玉比德)’(‘예기’ 빙의·聘義편 )고 강조했다. 공자는 재질과 광택, 구조, 소리 등 옥의 자연적인 특성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도덕적 가치에 부여한 것이다.

“옥(玉)이 온유한 것은 인(仁)과 같고, 치밀한 것은 지(知)와 같고, 곧아서 남을 해치지 않은 것은 의(義)이며, 정연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예(禮)를 닮았다. 소리가 청아하고 여운이 끝이지 않는 것은 악(樂)이고, 옥의 티와 좋은 마음을 감출 수 없으니 충(忠)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군자는 온유하고 마치 옥과 같이 생겼으니 그래서 군자가 귀한 것이다.”(예기)

적석총과 제단과 여신묘. 그리고 찬란한 옥기 시대. 이형구 교수가 한마디 했다.

“옥기의 출현·제작은 엄청난 의미가 있어요. 옥기를 독점하고 제작하는 과정에서 신분계급이 생기고, 전문화·분업화가 이뤄지고…. 하늘과 소통하는 독점자가 고국을 통치하는 이른바 제정일치 사회의 개막을 뜻합니다. 그걸 동이족이 창조해낸 겁니다.”

그런데 이쯤해서 소름 돋는 한가지. 뉴허량 등 훙산문화에서 출현한 곰(熊) 모양의 옥과 곰의 뼈다. 과연 이 수수께끼는 무엇인가.

〈뉴허량|이기환 선임기자〉
〈동영상|이다일 기자〉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2)훙산 곰의 정체
입력: 2007년 12월 21일 17:01:32
 
단군신화까지 훔쳐가려는 중국




“이 옥기에는 참 많은 뜻이 담겨 있어요.”

지난 7월30일 랴오닝성 박물관. 이른바 ‘랴오허(遼河) 문명’ 특별전을 지켜보던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기자를 붙든다. 뉴허량(牛河梁) 16지점 3호 무덤에서 확인된 짐승머리형 옥기를 가리킨 것이다. 짐승머리 형태로 3개의 구멍이 뚫린 희한한 모양이다.
뉴허량 16지점에서 확인된 곰형 옥기. 곰 두마리가 양쪽 끝에 원조(圓雕) 기법으로 조각됐다. 훙산문화 옥기예술의 정수라는 평이다. 뉴허량·선양/김문석기자

“이기자가 보기엔 무슨 동물 같아요?”

“쌍웅수삼공기(雙熊首三孔器)라고 했으니 응당 두마리의 곰과 3개의 구멍이 뚫린 옥기라는 뜻이겠죠.”

유물 설명에 나온 대로 대답할 수밖에.

“그동안엔 돼지머리로 보아 저수삼공기(猪首三孔器)라 했거든. 그런데 최근들어 해석이 바뀐거지. 돼지에서 곰으로….”

곰의 정체는?

뉴허량에서 출토된 진흙으로 만든 곰 발 조소상.
자세히 보았다. 매우 사실적인 기법이다. 짧지만 둥근 귀와 눈, 모가 났으면서도 둥근 이마, 뾰족하면서도 둥근 입, 얇고 벌어진 아랫입술…. 그러고보니 영락없는 곰의 모습이다. 기자는 순간 심상치 않은 냄새를 맡았다. 곰(熊)이라.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BC 4500~BC 3000년)의 본거지에서 곰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곰은 바로 단군신화의 주인공이 아닌가.

“이뿐이 아니라, 발해문명의 영역에서 곰 관련 옥기와 곰뼈가 잇달아 쏟아졌어요. 그러니 중국학계가 비상한 관심을 쏟을 수밖에….”

원래 곰은 중국학계의 관심 밖이었다. ‘용의 자손’이라는 믿음 때문에 용(하늘과 물을 상징)이 추앙되었고, 또한 농경생활과 관계가 깊은 돼지가 의미 있는 동물로 여겨졌다. 따라서 훙산문화 영역에서 확인된 옥룡들의 원형은 돼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게 그럴듯한 학설이었다.

사실 옥으로 만든 용 조각품을 본다면 그 형태를 대략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C자형과 결형(한쪽이 트인 고리모양의 패옥)이다. C자형 가운데는 네이멍구 싼싱타라(三星他拉)에서 출토된 크기 26㎝ 짜리 옥룡이 가장 유명하다. 이 C자형 옥룡이 정말 용이 맞는지 그조차 의심스럽다는 주장도 나오고, 머리와 등 뒤의 장식이 돼지가 아니라 사슴뿔이라는 설도 난무하는 등 복잡하다.

그러나 요즘엔 이 C자형 옥룡의 원형은 돼지 혹은 사슴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결형 옥’은 그 원형이 곰(熊)이라는 설이 지배적인 상황이다. 시리즈를 계속 읽어온 독자 여러분이라면 간파할 수 있으리라. 즉 이 결형 옥이 훙산문화의 전신인 차하이(사해·査海)-싱룽와(흥륭와·興隆窪·BC 6000년전)에서 확인된 옥결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최근 한반도 강원도 고성 문암리에서도 차하이-싱룽와와 같은 시대(BC 6000년전)의 옥결이 출토되었음을….

여하튼 중국학계는 뉴허량에서 나온 결형 옥의 원형을 예전에는 돼지로 보았지만, 요즘엔 곰으로 보고 있다. 뉴허량 적석총에서 잇달아 출토된 곰뼈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즉, 뉴허량 2지점 4호총 적석총에서는 완벽한 형태의 곰아래턱 뼈가 나왔다. 이뿐이 아니다. 후술하겠지만 뉴허량 여신묘에서 나온 진흙으로 만든 동물 가운데는 두 개체의 짐승류가 확인됐다. 발굴단은 처음엔 이 동물이 으레 돼지이겠거니 했다. 출토 사실을 보도한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돼지 주둥이는 두 개의 타원형 콧구멍이 있고~ 상하 턱 사이에는 입술 밖으로 긴 이가 노출돼있고, 앞니 역시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봤다면 돼지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두 마리의 동물은 비교적 긴 아래턱과 길면서 구부러진 이빨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곰의 특성에 가까웠다.”(궈다순의 회고)

특히나 여신묘의 주실(主室)에서 확인된 동물의 양발은 영락없는 곰의 발이었다. 네 발톱이 이렇게 노출된 동물은 곰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결국 뉴허량 여신묘에서 확인된 두 마리 짐승은 모두 곰이었던 것이다. 뉴허량 적석총에서 확인된 쌍웅수삼공기와 곰뼈, 그리고 바로 곁 여신묘에서 확인된 진흙으로 만든 곰 형상….

곰을 숭배한 훙산인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고 하니 훙산인들이 곰으로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곰 숭배 전통은 훙산문화를 이은 샤오허옌 문화(小河沿文化·BC 3000~BC 2500년)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네이멍구 우한치(敖漢旗) 바이스랑 잉쯔(白斯郞 營子) 유적에서 발견된 ‘곰머리 채도(熊首彩陶)’가 대표적이다.

애초엔 ‘개머리 장식’이라고 보고되었지만, 넓은 이마와 뾰족한 주둥이, 짧은 두 귀, 그리고 머리에 비해 굉장히 넓은 목 부분은 전형적인 곰의 머리이다. 또 하나의 예는 츠펑현에서 수집된 곰머리형 채도단지인데, 몸체엔 곰머리와 툭 튀어나온 주둥이 형상이 붙어있다. 이 모두 곰의 특징이며, 곰 모양의 제기(熊尊)라 일컬어진다.

“이렇듯 옥으로 조각한 웅룡(熊龍)은 훙산문화 옥기 가운데 가장 많은데 한 20여건이라고 보고됐어요. 웅룡은 말굽형 베개, 구름형 옥패, 방원형 옥벽(玉璧) 등과 함께 훙산문화 옥기의 4대 유형 중 하나로 꼽혀요.”(이형구 교수)

웅룡은 뉴허량뿐 아니라 츠펑 우한치, 시라무륜(西拉木倫) 강 이북의 바린여우치(巴林右旗)와 바린쭤치(巴林左旗), 허베이성(河北省)의 웨이창(圍場)현 등 폭넓은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특히 웅룡은 죽은 자의 가슴팍에 주로 놓여 있었는데(뉴허량 제2지점 1호총에서 보듯), 가슴팍에는 가장 등급이 높은 옥기가 놓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일종의 신물(神物)이었던 것이다. 이 옥으로 만든 웅룡은 후대에까지 폭넓게 퍼졌는데, 허베이성 양위안(陽原)현 장자량(姜家梁)과 허난성 상춘링(上村嶺)의 괵국(서주 후기의 소국) 묘지에서도 웅룡 옥조각이 나온다. 또한 량저우(良渚)문화 옥기에서 보이는 신인(神人)의 발톱도 곰의 발톱으로 밝혀졌다.

훙산인의 후예가 분명한 상나라에도 훙산문화 옥조각 웅룡의 전통은 당연히 이어졌다. 상나라 유적인 안양(安陽) 인쉬(殷墟)에서도 훙산문화와 유사한 결형 옥이 확인된다는 게 중국학계의 해석이다. 이처럼 뉴허량 등지에서 확인되는 심상치 않은 곰의 흔적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궈다순의 해석을 보자.

“훙산인이 숭배한 동물신은 여러 신(神) 가운데 으뜸인 주신(主神)이었을 것이고, 훙산인은 바로 곰을 숭배한 족속이었다.”

곰이 황제라고?

이렇듯 뜻밖에 출현하는 곰의 모습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리스(李實)였다. 그는 훙산문화 영역에서 확인되는 곰의 흔적을 보고, “훙산인들은 곰을 숭배했고, (중국인의 조상인) 황제(黃帝)는 중국 고대사에 기록된 ‘유웅씨(有熊氏)’”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학계는 리스의 주장에 주목하여 훙산문화의 곰을 황제와 본격적으로 연결시켰다.

“만리장성 이북, 즉 오랑캐의 소굴이라고 치부하던 발해연안에서 곰의 흔적이 쏟아지니 중국학계는 어쩔 수 없었어요. 견강부회할 수밖에….”(이교수)

‘황제가 곰(熊)족’이라는 기록은 사실 궁색하기 이를 때 없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황제를 유웅씨라 불렀다(又號有熊氏)”는 기록이 있고, 서진(西晋·AD 265~316년) 때 학자 황보밀이 쓴 제왕세기(帝王世紀)에는 “황제는 유웅이다(黃帝爲有熊)”라고 표현돼 있을 뿐이다. 또 하나의 관련 기록은 사기 오제본기에 나왔다.

“황제가 염제와의 싸움에 곰(熊), 큰곰, 비·휴(범과 비슷한 동물. 비는 수컷, 휴는 암컷), 추( ·큰 살쾡이), 호랑이(虎) 등 사나운 짐승들을 훈련시켜 염제와 싸웠다.”

중국학자들은 황제가 이런 짐승들을 토템으로 삼고 있는 족속들을 이끌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런 기록으로 볼 때 북방민족과 수렵민족의 색채가 짙다”(궈다순)고까지 표현한다. 더 나아가 저명한 고고학자 쑤빙치(蘇秉琦)는 “황제시대의 활동중심은 훙산문화의 시공과 상응한다”고까지 했다. 이 말은 ‘황제가 훙산인의 왕이었다’는 소리다.

단군신화의 원형

동이의 본향 차하이에서 확인된 옥결.
하지만 억지춘향도 유분수지. 곰 숭배는 중국보다는 동북아시아 종족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신앙이다. 그 중의 대표격인 나라가 바로 고조선이었다. 중국 역사서에서 황제와 곰의 기록은 빈약하기 이를 때 없지만 고조선의 건국신화를 기록한 삼국유사를 보라.

“환인의 서자 환웅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 신단수 밑에 내려왔다. 풍백과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모든 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했다. 이때 범과 곰이 한마리씩 같이 살고 있었는데, 환웅에게 빌어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환웅이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너희는 이걸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라 했다. 곰과 범은 삼칠일간(21일간) 조심했으나 곰은 여자의 몸으로 변했지만, 범은 조심을 잘못해서 사람으로 변하지 못했다. ~(사람이 된) 웅녀(熊女)가~ 단수(壇樹) 밑에서 임신을 빌었더니 환웅이 잠시 거짓 변하여 혼인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단군 왕검이다.”

차하이와 싱룽와, 그리고 한반도 고성 문암리에서 확인된 옥결이 훙산시대엔 이렇게 곰형 옥으로 발전했다.
이 얼마나 완벽한 스토리 구조인가. 신화학자인 양민종 부산대 교수의 말처럼 “몇 자 안되는 단편의 기록(중국측)과, 기·승·전·결이 완벽하고 제국의 흥망성쇠가 담겨있는 단군신화”를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황제=곰 숭배=훙산문화의 주인공’이라 단정하려는 중국학계의 몸부림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보여준다.

기자의 상상력은 한도 끝도 없다. 그렇다면 인근 적석총에서 곰뼈와 옥웅·옥룡이 나왔고, 진흙으로 만든 곰형상이 확인된 뉴허량의 여신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또…. 여신묘에서 확인된 여신상은 과연 누구일까. 혹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熊女)의 원형은 아닐까.

〈뉴허량·선양|이기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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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루트를 찾아서](13)훙산인의 어머니
입력: 2007년 12월 28일 17:25:02
 
“이제 우리 여신(女神)님 보러 가야지.”

7월30일. 뉴허량(우하량·牛河梁) 적석총 및 제단(제2지점)을 탐사하던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농을 건다. 여신묘(뉴허량 제1지점)를 ‘친견’할 시간이다. 유적 바로 곁을 지나는 베이징~차오양 간 공도(公道)를 무단횡단해서 북쪽 산길로 향했다. 여신묘로 향하는 길은 몸단장이 한창이다. 길가엔 도로용 석재들이 쌓여 있고, 인부들이 그 석재를 깔아 길을 만들고 있다.




#세계유산 등재 위해

“중국 정부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사전작업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중국 정부가 발해문명의 꽃을 피운 훙산문화의 본거지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작업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한 20분 정도 산길을 걸으니 저편 숲 속에 허름한 건물 두 채가 보인다. 건물 한 채 한쪽에는 늙수그레한 관리인이 열심히 숫돌을 갈면서 이방인의 방문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다. 여신묘를 보호하는 다른 가건물은 철문으로 굳게 잠겨 있었다.

다른 방문객 같으면 콧방귀도 안뀔 관리인이지만 ‘얼굴이 명함’인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뭐라 한 마디하자 군말 없이 문을 따준다. 철커덕! 둔탁한 쇳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풀리자마자 기자는 어두컴컴한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공을 훌쩍 뛰어넘은 듯했다. 5000여년 전 여신의 세계로….

#동방의 비너스

“왜, 중국에는 선사시대 인물조각상이 없을까.”

동방의 여신상이 출토된 뉴허량 제1지점 여신묘. 여신상과 함께 지(之)자문 빗살무늬 토기와 곰(熊)뼈 등이 출토되어 우리 민족과 강한 친연성을 감지할 수 있다. 뉴허량/김문석기자
30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 학자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중국학계가 곤혹스럽게 생각하는 의문점이었다. 서양에서는 찬란한 인물 조각 예술이 꽃을 피웠는데, 왜 중국에서는 비너스와 같은 조각품이 보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중국의 인체 조각 예술은 모두 외래 요소만을 담은 것일까.

그런데 1979년 중국학계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기화(奇貨)’가 발견됐다. 다링허(대릉하·大凌河) 유역인 랴오닝성 카줘(喀左)현 둥산쭈이(동산취·東山嘴)에서 드디어 인체조각상 조각편을 발견한 것이다. 유적의 남쪽은 원형, 북쪽은 방형이었으며 양날개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이곳에서 함께 확인된 유물들은 지(之)자형 빗살무늬토기 채도통형관(밑이 없는 토기)과 삼족소배(三足小杯·세발 달린 작은 잔) 등이었다. 이 유물들은 한결같이 생활용기가 아니었다.

결정적인 것은 원형 석축지에서 나온 인물조각상과 임신부 모습의 소조상이다. 두 점의 ‘도소잉부상(陶塑孕婦像)’은 머리부분과 왼쪽 어깨가 이미 없어진 채 발견됐지만, 다리는 남아있었고, 몸의 형태는 확실했다. 하나는 잔존 높이가 7.9㎝였고 몸은 긴 편이었으며, 나머지 한 점은 잔존 높이가 5.8㎝였고 좀 뚱뚱했다.
발굴직후 속살을 드러낸 여신묘 조사현장.

이 임신부 인형 말고도 다른 인체 조각상이 확인되었는데, 인체의 상부와 대퇴부 등의 남아 있는 높이는 18㎝, 두께는 22㎝였다. 남은 조각들을 끼워맞추니 실제 사람의 3분의 1 정도 되었다. 잉부상은 나체였으며, 비록 목 부분은 없어졌지만 당대 조각예술의 높은 수준을 웅변해주었다. 소조 수법이라든지 손과 발 등 세부의 처리가 간단하지만 형체의 동작이 매우 자연스럽고 인체 비례가 완벽하다.

“굉장히 육감적이죠. 소아시아에서 출토된 소형 임신부상은 여성적인 특징만 강조하고 다른 부분은 간략하게 추상화했는데, 둥산쭈이 출토 잉부(孕婦)상은 사실성이 강한 작품입니다.”(이형구 교수)

뉴허량에서 가까운 둥산쭈이 제사유적에서 나온 임신한 여인의 조각상. 동방의 비너스라 일컬어진다.
학자들은 “중국의 비너스(維納斯)”라고 치켜세웠다. 중국학계는 “훙산시대는 문화교류가 빈번했고, 사회가 격렬한 변혁기였다”면서 “잉부상은 모계사회 출현의 단적인 예이며, 5000년 전 원시문명의 증거”라고 해석했다. 둥산쭈이 유적연대의 탄소연대 측정 결과는 지금부터 5485±110년이었다.

4년 뒤인 1983년 7월, 내로라하는 중국 학자들이 차오양(朝陽)에 속속 모습을 드러낸다. 둥산쭈이 조사 성과에 대한 모종의 결론을 내리기 위함이었다.

“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둥산쭈이가 중국 최초의 제사유적이라는 것이었어요. 이곳에서 불에 탄 흙(홍소토)의 잔존덩어리가 확인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신(神)이 살았던 곳이라는 추정도 함께 했고….”

#동방의 여신

그러나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1년3개월 뒤인 1984년 10월31일 오전. 둥산쭈이에서 멀지 않은 뉴허량 제1지점에서 5500~5000년 전 여신의 자태가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당시 발굴단의 일원이었던 궈다순(郭大順)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은 비디오 카메라를 돌려보듯 당시의 벅찬 감격을 풀어헤친다.

“뉴허량 유적(제1지점) 발굴 현장은 폭풍전야 같았다. 발굴단의 꽃삽소리만 사각사각 났다. 모두 발굴이 이어질수록 ‘뭔가 큰 것이 걸리겠구나’하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긴장감에 휩싸여 입을 떼는 이들이 없었다. 그런데….”

주실(主室)의 서측, 바로 그곳에서 중국고고학사에 빛나는 발견이 일어난 것이다.

뉴허량에서 확인된 동방의 여신. 혹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의 원형은 아닐까.
“한덩어리의 진흙덩어리가 떨어졌는데, 거기서 사람 머리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흙을 살살 지워보니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이마와 눈이 노출되었다.”

마침내 여신이 현현(顯現)한 것이다. 난리가 났다. 일순 사람들이 쏟아져오고, 촬영기사가 미친 듯 그 발굴 현장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5000년 이상 긴 잠에 빠져 있던 여신이 마침내 부끄러운 듯 기지개를 켠 것이다. 머리상의 잔존 크기는 높이 22.5㎝, 폭(귀에서 귀) 23.5㎝, 미간의 넓이 3㎝, 코 길이 4.5㎝, 귀의 길이 7.5㎝, 입 4.5㎝ 였다.

“영락없는 여인의 자태였어요. 왼쪽 귀를 뚫은 흔적이 있고, 입술엔 붉은 칠(朱漆)이 남아있고, 가슴과 궁둥이, 팔, 다리 등을 조합해보니….”(이형구 교수)

귀가 작고 섬세하며 얼굴 표면이 둥근데다 자르르 윤기가 흐르고 머리 위에 테를 두른 모습하고는…. 조각기법 또한 빼어났다. 가장 어렵다는 원조(圓雕)기법을 사용했다. 아마도 당대 최고의 장인이 작품을 만들었을 것이다.

제작은 크게 4단계를 거쳤다. 먼저 나무로 골격을 세우고 풀 같은 식물로 둘러싸맸다. 둘째, 재료는 깨끗하고 치밀하며 점성이 크고 붉은 진흙을 사용했으며, 셋째 조형단계는 처음엔 거친 흙을 골조 위에 붙인 뒤 광택을 냈다. 그림을 그리고 상감하는 작업은 돌출 부위를 강조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눈을 청록색 보석으로 박아놓았다는 게 특이했다. 문제는 여신의 인종을 확정하는 것. 학계는 여러가지 특징으로 미루어 ‘몽골 인종’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얼굴이 방원(方圓)형의 형태로 납작하고 광대뼈가 나왔고, 눈은 비스듬히 섰고, 콧잔등은 낮고 짧고, 콧날과 콧날개는 원두형(圓頭型)이고…. 전형적인 몽골 인종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어요.”(이형구 교수)

여기서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오해 한가지. 몽골 인종에 관한 이야기다. 고대 몽골 인종이라 함은 지금의 몽골인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넓은 의미의 ‘동양인’을 뜻한다는 것이다. 인종학상으로 몽골 인종(Mongoloid)란 말은 마르코폴로가 1271~1295년 사이 원나라에서 체류하고 돌아간 뒤 구술한 ‘동방견문록’에서 처음 나왔다. 마르코폴로는 그때 황인종, 즉 동양의 모든 인종을 몽골 인종이라 했다. 지금의 몽골인을 콕 찍어 지칭한 건 절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뉴허량 여신은 한 분이 아니었다. 여신의 머리상이 발견되기 전까지도 67점의 진흙조각편이 쏟아져 나왔다. 조사단은 당시 대략 3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었다. 먼저 주실의 중앙에서 확인된 코의 잔해와 큰 귀 등을 검토한 결과 이 여신의 크기는 사람의 3배에 달했다. 또한 서측실의 손목과 다리를 분석한 결과 사람의 2배 크기였으며, 주실에서 발견된 어깨, 유방, 왼쪽 손등을 검토하니 등신대의 형태였다.

그런 가운데 바로 사람의 크기와 비슷한 여신의 머리상이 출토되면서 등신대의 여신이 어느 정도 조립된 것이다. 결국 이 여신묘에는 ‘사람 크기의 3배, 2배, 등신대’라는 최소한 세 사람의 여신을 모셨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최소한’ 3명이란 말을 쓸 수밖에 없다. 흩어진 잔해로 봐서는 더 많은 여신들을 모셨을 수 있다. 이것은 여신도 최소한 3개 등급, 아니 그 이상으로도 나눌 수 있다는 얘기다.

중앙부의 여신(사람 크기 3배)은 주신(主神)이며, 다른 여신들(사람 크기의 2배, 등신대, 그리고 나머지)은 그 주신을 모시는 군신(群神)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웅녀의 환생?

여신묘에서는 여신상 말고도 제사유적임을 나타내는 다른 유구와 유물들이 쏟아졌다. 유적의 총 규모는 총 4만㎡에 이른다. 특히 여신묘 주변에 있는 저장용 구덩이에서는 지(之)자문 빗살무늬토기 통형관(밑 없는 토기)과 소구관(小口罐·입이 작은 토기), 주발 등 다양한 토기와 사슴·양뼈 등 많은 동물뼈가 나왔다.

또한 다른 구덩이에서는 100점 이상의 통형관이 쏟아졌다. 이뿐이 아니다. 여신묘의 벽체 파편에는 회(回)자 무늬 도안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벽화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또한 대형 향로뚜껑을 비롯한 각종 제사용기들도 심상치 않은 여신묘의 위상을 전해준다.

또 하나, 이미 언급했듯(경향신문 12월22일자) 진흙으로 만든 동물상도 잇달아 확인되었는데, 중국학계가 면밀하게 관찰한 결과 주실과 곰(熊)이라고 단정했다.

원래는 용머리(龍頭)로 판단됐지만, 납작하고 둥근형의 입, 두 개의 타원형 콧구멍, 발가락 4개 등 종합적으로 볼 때 곰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는 곧 웅녀의 환생 아닌가. 과연 5000년 이상 잠자던 여신의 부활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인근에 집중된 적석총과 제단, 그리고 이곳 여신묘가 주는 함축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 민족과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

〈뉴허량|이기환 선임기자〉
〈동영상|이다일기자 crodail@khan.co.kr〉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4)훙산인의 성지
입력: 2008년 01월 04일 17:21:41
 
우리의 孝와 닮은 꼴…훙산인의 여신 숭배

뉴허량(우하량·牛河梁) 여신묘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국 학계가 ‘여신은 훙산인(홍산인·紅山人)의 조상이며, 뉴허량은 훙산인의 신전이자 성지’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중국 학계는 아예 훙산인을 중국인의 ‘공동’ 조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훙산인은 동이족의 조상이라는 사실은 중국 학계도 인정하는 바다. 그러니 뉴허량은 ‘동이족의 신전이자 성지’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도 비상한 곳일 수밖에 없다.




#한반도에도 여신이…

하나하나 따져보자. 우선 여신상 같은 소조상은 지금의 만주 일대와 한반도에서도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함북 청진시 농포동과 웅기군 서포항 유적에서도 소조인물상이 나왔다.

“특히 1956년 출토된 농포동 인물상은 허리를 잘록하게 좁힌 다음 그 아래는 다시 퍼지게 만드는 등 ‘여신’의 인상을 지울 수 없어요. 둥산쭈이(東山嘴)의 임산부상을 연상시킵니다. 서포항 것은 가슴을 희화적으로 표현한 게 매우 인상적이고….”(이형구 선문대 교수)

랴오둥 반도 궈자춘(郭家村)에서 나온 소조상의 치켜진 눈과 광대뼈는 뉴허량 여신상 및 츠펑 시수이취안(西水泉) 유적에서 출토된 소조 여인상과 일맥상통한다. 옌볜 자치주 샤오잉쯔춘(小營子村)에서 출토된 뼈로 만든 인물상도 치켜올라간 눈매와 광대뼈 등 뉴허량 여신상과 비교할 수 있겠다. 과연 5500~5000년 전 여신의 존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숭배의 대상은?

뉴허량의 여신묘에서 출토된 조각상과 자료를 토대로 복원한 ‘여신상’.
콕 집어 단정을 내릴 수 없다. 뉴허량의 여신 조각상을 보자.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이다. 이것은 인간을 신화한 것이다. 한마디로 인격화한 신(神)이라 할 수 있다. 중국 학계는 이 사실적인 인물 조상이 조상 숭배의 우상이라고 해석했다. 또 하나 뉴허량 여신묘에서는 사람 크기의 3배, 2배, 등신대 등 ‘최소한’ 세 명의 여신상이 있었던 것으로 정리됐다. 여신의 지위가 최소한 3등급은 되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중국 학계는 ‘사람 크기 3배의 여신’이 주신(主神)이며, 이 주신을 다른 여신들이 호위하고 있는 형태라고 봐요. 이것은 조상 숭배의 대상도 굉장히 고차원적인 단계로 넘어갔음을 알려주는 대목이죠.”

하지만 조상 숭배만이냐.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뉴허량 유적군은 이른바 제단·신전·무덤 등 이른바 단(壇)·묘(廟)·총(塚) 등이 3위 일체로 구성됐다. 제단과 무덤이 한꺼번에 조성된 적석총(제2지점)에서뿐 아니라 그곳에서 900m 떨어진 여신묘에서도 제사를 지냈다는 뜻이다.

“‘적석총+제단(2지점)’에서는 그곳에 묻힌 씨족의 조상에게 주로 참배하고, 여신묘에서는 요즘의 시제 같은 큰 제사를 지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어요. 여신묘에서는 여러 씨족의 공동 조상 한 분을 모셨을 수 있죠.”(이교수)

이교수는 “제단과 여신묘를 보면 훙산인들의 조상 숭배가 얼마나 지극한지를 알 수 있는데, 이것은 효(孝)사상의 원형이며 우리 민족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하나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지모신에 대한 신앙이다. 제사유적인 둥산쭈이에서 나온 잉부(孕婦)상과 뉴허량 여신 모두 여성임을 잊지 말자.

“고대사회에서는 여성이 생육과 대지를 상징합니다. 지모신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풍년과 다산(농사를 지을 노동력을 상징)을 기원했어요. 이것은 농경 및 정착생활로 접어든 신석기인들로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었을 겁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핵심적인 요소는 뉴허량 여신묘와 적석총에서 나온 곰뼈와 곰형 옥기 등의 존재이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웅녀(熊女)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웅녀는 바로 훙산인들이 모셨던 지모신의 원형일 가능성이 짙다는 점이다.

#하늘과 땅의 통로를 이은 이는?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은 여신묘에서 조상과 하늘을 함께 모셨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장광즈(張光直)의 말을 들어보자.

“훗날 상나라(商·훙산인들의 후예) 때는 왕이 큰 일을 행할 때 무인(巫人)이 하늘과 교통하면서 복점을 쳐서 조상의 하명을 받았다.”

이것은 조상숭배와 하늘숭배가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쑤빙치(蘇秉琦)도 “뉴허량 유적군의 단·묘·총의 결합으로 볼 때 고대의 제왕들이 거행했던 교(郊:야외에서 지내는 제사)·료(燎·하늘신에게 제사), 그리고 체(조상신에게 제사)가 함께 이뤄졌을 것”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또 하나 여신묘에 숨겨진 비밀을 들춰보면…. 바로 여신묘가 상당히 좁다는 것이다. 궈다순(郭大順)은 “여신묘의 총 면적이 100㎡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좁디좁은 면적에 몇 명의 여신들이 모셔져 있었고, 곰이빨 같은 것이 상징하는 동물신들이 포함돼 있다. 좁은 면적에 비해 너무도 풍부하고 방대한 유물의 진용을 갖추고 있었다.”

엄청난 함의를 품고 있다. 이 좁고 폐쇄적인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의 특권층이었을 것이고, 심지어는 단 한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여신묘에서 혼자 들어가 제사를 지낸 이는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제정일치 사회의 왕(王)일 수도 있지요.”(이교수)

옛날 황제(黃帝)의 뒤를 이은 전욱이 신하 중여(重黎)를 시켜 ‘하늘과 땅의 통로를 끊어버렸다(絶地天通)’는 기록이 있다. 그전까지는 누구나 하늘과의 통로로 왕래했는데, 황제 때 치우가 통로를 통해 황제에게 도전했다는 것. 그러자 황제의 후계자 전욱이 신과 인간의 영역을 확실하게 구분지었다는 것이다. 중국 학계는 바로 이런 고사(故事)가 뉴허량 여신묘와 훙산문화 영역에서 쏟아지는 다량의 옥기와 부합되는 기록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끊어진 하늘과 땅의 통로는 누가 잇는가. 그것은 바로 천지를 농단한 전욱과 같은 왕의 고유권한이라는 뜻이다.

#종묘의 원형
훙산인의 성지인 뉴허량 여신묘의 상상도.1m가량 땅을 파 조성한 반지하식 구조로 신석기시대의 취락구조와 비슷하다.

뉴허량 여신묘는 지상 건축물이 아니라 90㎝~1m가량 땅을 파고 조성한 반지하식 건축구조로 돼 있다. 이것은 당대(신석기시대) 취락구조와 기본적으로 같다는 뜻이다. 인간이 살았던 주거지와 사당(신묘)의 구조가 같다는 것은 인간이 살았던 곳이, 바로 ‘신이 살았던 곳(神居之所)’이라는 뜻이다.

“이 역시 신의 인격화라 할까. 여신의 사실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죠.”

그러나 주거지의 기본 구조는 같을지언정 건축물의 배치구조는 사뭇 다르다는 점은 간과해서는 안된다. 주실이 있고 측실이 있고 전후실이 있는 등 나름대로는 주부(主副) 관계가 뚜렷하고, 좌우 대칭, 전후 호응의 치밀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중국 학계가 바로 이것을 후대 종묘(宗廟)의 원형이라 판단하는 겁니다. 일반 주거지와는 다른 후대의 전당(殿堂)과 종묘 배치의 물꼬를 튼 것으로 본거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자전(字典)인 ‘이아(爾雅)’의 ‘석궁(釋宮)’편은 “신묘(사당)는 동서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해놓았는데, 바로 뉴허량의 여신묘 구조와 부합된다. 종묘(宗廟)는 정권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부계 씨족사회에서 계급사회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시작되었으리라.

#훙산인의 성도(聖都)

기자는 여신묘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기면 벗길수록 점점 빠져들었다. 이형구 교수가 한가지 수수께끼를 냈다.

“왜, 이 뉴허량 인근에서는 훙산인들이 살았던 주거지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

듣고보니 그랬다.

“무덤과 제단, 신전 등 단·묘·총 3위 일체로 갖춰졌는데 뉴허량 유적군을 기준으로 100만㎡ 이내에서 어떤 주거지 유적도 확인하지 못했거든.”

중국 학계는 고민 끝에 해답을 풀었다. 즉 뉴허량은 명실상부한 종묘의 원형이며, 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제사의 중심지였다는 것. 이는 한 씨족과 부락 단위를 넘어선 단계라는 것. 즉 이 뉴허량은 훙산문화 공동체가 더불어 사용했으며, 그들이 함께 숭배한 선조들의 성지였다는 것이다.

“훙산문화 공동체가 신성시했던 곳이니 그 주변에 주거지를 세우지 못했겠지. 생각해보면 아주 상식적인 답이죠.”

장광즈는 “상나라 때는 종묘가 중심이 된 성도(聖都)와 사람들이 살았던 속도(俗都)의 구별이 있었다”고 해석했다. “훙산문화 시대에 이미 고국(古國)의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게 쑤빙치의 견해이고 보면, 뉴허량은 곧 훙산인들의 성도(聖都)였던 것이다.

결국 쑤빙치를 중심으로 한 중국 학계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뉴허량 여신은 5500년 전 훙산인들이 진짜 사람을 토대로 만든 신상이지, 후세 사람들이 상상해서 창조한 신이 아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훙산인의 여자 조상이며, 중화민족의 공동 조상이다.”(중국문물보·1989년 5월12일자)

그러나 쑤빙치 스스로도 인정했듯 발해문명을 꽃피운 훙산문화는 동이의 문화이다. 기자가 만난 쉬쯔펑(徐子峰) 츠펑대 교수의 말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황허문명은 농업 중심의 왕권국가였고, 랴오허 문명(발해문명)은 복합적인 신권국가였던 것 같다. 차하이·싱룽와 문화(BC 6000년 전)에서 훙산문화(BC 4500~BC 3000년)에 이르기까지…. 용형 돌무더기와 옥결이 출현하고(차하이·싱룽와) 곰과 용, 새를 형상화한 옥문화가 꽃피고, 신전과 제단, 적석총 등 제사유적이 출현하고(훙산문화)…. 신권 중심의 문화였다.”

쉬쯔펑은 이어 “황허문명과 랴오허 문명은 훗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치우와 황제의 싸움은 바로 양대 문명의 충돌이자 습합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형구 교수의 한 마디.

“발해문명의 창시자인 동이의 족적은 엄청납니다. 이 훙산문화는 사방으로 퍼져 발해문명을 꽃피웠고, 남으로는 중원의 황허문명과 만나 드디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합니다. 그것이 훗날 상나라가 되는 거고….”

〈뉴허량·선양|이기환선임기자〉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5)훙산·량주문화 중원을 향해 달리다
입력: 2008년 01월 11일 17:16:48
 
“헌원(황제)의 시대에 신농씨의 세력이 쇠약해지는 시기였다. ~헌원이 곰(熊), 큰 곰, 비·휴·범과 비슷한 동물. 비는 수컷, 휴는 암컷), 추(·큰 살쾡이), 호랑이(虎) 등 사나운 짐승들을 길들여 판천(阪泉)의 들에서 염제와 싸웠는데 여러 번 싸운 끝에 뜻을 이뤘다.”

“치우가 또다시 난을 일으켜 헌원의 명을 듣지 않아 헌원이 제후들로부터 군대를 징집하여 탁록의 들판에서 싸워 결국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천자로 삼아 신농씨(염제)를 대신하였으니 그가 바로 황제다.”

중국 역사서 사기 오제본기 첫머리에 나오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 담긴 함의와 선후관계를 떠올리면서 이 글을 풀어야 할 것 같다.

#깨지는 중화사상

량주 문화의 본산인 량주 판산 무덤. 한 개의 무덤에서 수많은 옥벽(둥근 옥)이 쏟아졌다. 훙산 옥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중국 역사계는 중원중심, 한족(漢族)중심, 왕조중심의 중화사상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중국인들이 왜 춘추전국 시대부터 만리장성을 쌓았겠습니까. 그것은 장성이북, 옌산(연산·燕山)이북은 본래 오랑캐의 소굴이고 단지 중원문화의 수혜를 받은 문화열등지역이라고 폄훼했기 때문입니다.”(이형구 선문대 교수)

중국은 예로부터 사방의 오랑캐들을 사이(四夷)라 했는데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 했다. 얼마나 천대하고 괄시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1970년대 말부터 중국학계는 당황하기 시작한다.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 BC 4500~BC 3000년) 유적의 출현 때문이었다. 물론 1930~40년대에도 장성이북과 이남의 문화가 융합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당시 발해유역에서 동북문화 특징인 지(之)자문 빗살무늬 토기(통형관)와 중원 양사오(앙소·仰韶)문화의 특징인 홍도 및 채도가 공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는 우월한 중원의 양사오 문화가 열등한 훙산문화에 영향을 준 결과라고 치부해버렸다.

그러나 그 오랑캐의 소굴인 동북방 뉴허량(우하량·牛河梁)과 둥산쭈이(동산취·東山嘴)에서 제단(壇)과 신전(廟), 그리고 무덤(塚) 등 엄청난 제사유적이 3위 일체로 확인된 것이다. 이뿐인가. 다링허(대릉하·大凌河) 유역인 차하이(사해·査海)에서 중국 용신앙의 기원으로 일컬어지는 용형 돌무더기가, 차하이-싱룽와(흥륭와·興隆窪·BC 6000년)에서 옥기의 원형과 빗살무늬 토기, 덧무늬 토기 등이 쏟아졌다. 중국학계는 기절초풍했다.

#휘황찬란한 량주문화

비단 이것만이 아니었다. 역시 남만(南蠻)의 소굴이었던 장강(양쯔강) 유역에서 탄생한 이른바 량주(양저·良渚)문화도 난공불락의 중화주의에 결정타를 안겨주었다. 훙산문화보다 약간 늦은 량주문화의 찬란한 옥기와, 흙으로 쌓은 엄청난 규모의 고분군, 그리고 궁전터와 제사유적 등.

예컨대 량주문화의 대표격인 량주 유적은 30㎢의 면적에 50곳이 넘는 건축지와 거주지, 고분군을 자랑한다. 특히 판산(반산·反山) 12호는 중심대표인데, 그곳에서 나온 옥월(玉鉞·옥으로 만든 도끼)과 옥종(玉琮·구멍 뚫린 팔각형 모양의 옥그릇) 등 옥문화는 휘황찬란 그 자체다.

“훙산문화의 옥과 비교하면 약간 차이가 있죠. 량주보다는 이른 시기인 훙산옥은 사실적이고 조형적인 반면 량주의 옥문화는 굉장히 추상적이고 정교합니다. 옥에 세밀화를 그린 듯한 1㎜의 세공기술은 지금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하죠.”(이교수)

량주 유적에서 확인된 옥종(예기). 훙산옥이 조형적인 반면 량주 옥문화는 세밀화를 그린듯 정교함을 뽐낸다.
옥월과 옥종은 예기이자 위세품이다. 옥종이 의식에 사용됐다면 옥월을 포함한 각종 부월(도끼)은 군권을 뜻한다. 이 판산 고분의 주인공은 바로 신권과 군권을 한꺼번에 차지했다는 뜻이다.

또한 판산 인근의 모자오산(막각산·莫角山) 유적군은 량주문화 유적군의 중심점이다. 동서 길이 670m, 남북 폭 450m로 전체면적이 30만㎡에 달한다. 높이 10m의 인공토축을 쌓았고, 그 위에 작은 좌대를 3개 조성했다. 유적에는 좌우로 나란히 배열된 직경 50㎝가 넘는 나무기둥들이 있고, 20m가 넘는 초목탄층과 홍토 퇴적층이 보인다. 이것들은 모두 이곳이 궁전터이자 제사를 지낸 곳임을 방증해준다. 야오산(요산·瑤山) 유적에서는 홍색, 회색, 황색 등 3색으로 조성된 대형제단과 묘지가 확인되었다. 량주 유적 조사단은 한마디로 “이곳에는 궁전과 제사기능을 갖춘 대형건축물 혹은 도성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 古國(훙산)과 方國(량주)

문제는 훙산문화와 량주문화의 관계였다.

“량주문화 초기의 옥기를 보면 규범화한 짐승얼굴 도안이 대량 활용되었는데, 이는 훙산문화 옥기 가운데 용형 옥기의 원형을 연상시키거든. 이는 량주문화가 훙산문화의 영향을 또 받았다는 거지.”(이교수)

오랑캐의 본거지에서 잇달아 중원을 능가하는 문화가 터지자 중국학계는 궈다순(郭大順)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의 표현대로 “통고적(痛苦的), 즉 쓰라린 아픔을 겪으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황하 중류(중원)는 중국문명의 중원(中原)이 아니었음을….

중국고고학의 태두 쑤빙치(蘇秉琦)는 “훙산문화와 량주문화는 차례로 중원으로 몰려와 중화대지에서 4000~5000년 문명을 일으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인정했다. 후에 들어서는 중국 최초의 나라인 하나라와 상나라를 형성·발전시키는데 초석을 놓았다고 덧붙였다.

“쑤빙치는 그러면서 중화문명론이라는 것을 개진했지. 즉 3부곡(部曲)이라 해서 고국(古國)-방국(方國)-제국(帝國)의 3단계론을…. 그러면서 훙산문화를 중국 최초의 원시국가단계인 고국, 량주문화를 그 다음 단계, 즉 제후국의 형태인 방국으로 규정한 것이지.”

쑤빙치는 두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최고위층, 즉 왕의 신분임을 입증해주는 유적이 확인된 점에 주목했다.

“취락이 있다해서 다 국가단계가 되는 건 아니지. 일반취락과 중심취락, 그리고 중심취락을 초월하는 최고위층의 공간을 갖춰야 국가단계라고 할 수 있거든.”

이미 살펴봤듯 뉴허량은 단·묘·총 등 3위일체의 조합이 엄격하게 구분된 훙산인들의 성지이며, 특수신분인 제정일치시대의 왕이 하늘과 소통하는 곳이었다. 또한 종교제사 중심인 이곳은 1개 씨족이 아니라 여러 씨족의 문화공동체가 모셨던 곳이었다.

훙산문화(BC 4500~BC 3000년)보다 시기가 다소 늦은 량주문화(BC 3200~BC 2200년)는 훙산문화에 비해 취락분화의 층위가 더욱 뚜렷하다. 모든 유적이 정남북의 정교한 배열을 이루고 있으며, 옥기문화 또한 훨씬 정교했다. 쑤빙치는 이런 량주문화를 ‘방국’의 전형으로 표현했다.

#중원을 향해 달려라

그러면서 ‘량주훙산 축록중원(良渚紅山 逐鹿中原)’이란 말로 정리했다. 사슴을 쫓는다는 뜻의 ‘축록’은 사마천의 사기에 “유방과 항우가 중원을 향해 다투어 진출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사기에서 딴 이 ‘량주훙산 축록중원’이란 말은 량주문화와 훙산문화가 중원으로 중원으로 질주했다는 뜻이다.

그럼 ‘축록’의 증거들을 살펴보자.

중원 양사오 문화의 본거지인 타오쓰 유적에서 확인된 반용문 토기. 용(龍)의 본향인 훙산문화의 영향을 그대로 받았다.
우선 동북의 훙산문화와 중원의 양사오 문화의 접촉. ‘오랑캐의 문화’를 ‘통고’의 과정 끝에 ‘중국문명의 시원’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중국학계가 주목한 곳은 허베이성(河北省) 서북부였다. 1970년대 말, 쌍간허(桑幹河) 유역인 위센(蔚縣) 싼관(三關) 유적에서 훙산문화의 대표적인 문양인 용무늬 채도관과, 양사오 문화의 대표선수인 장미문양의 채도(이른바 묘저구·廟底溝 유형이라 한다)가 나란히 나온 것이다.

최근에는 쌍간허 인근 신석기 유적에서 훙산문화 말기에 해당되는 옥조룡(용 조각 옥기)이 출토되었다. 중원인 진남(晋南) 타오쓰(도사·陶寺)유적에서 출토된 주칠을 한 반용문(아직 승천하지 못한 용) 토기그릇과 외방내원(外方內圓)의 옥벽은 훙산문화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쑤빙치의 결론은 이랬다.

“관중 분지(중원)에서 자생한 장미문양의 채도(양사오 문화)와, 옌산 이북·다링허 유역에서 자란 용인문(龍鱗紋·용과 비늘모양 무늬) 채도 및 빗금토기 옹관(훙산문화)이 북으로, 남으로 향했다. 두 문화는 결국 허베이성 서북부에서 조우했다. 이곳에서 융합된 두 문화는 다시 동북으로 건너가 훙산문화의 꽃인 제단(단)과 신전(묘), 무덤(총)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학계는 이른바 그렇게 창조된 중국문명의 질긴 끈을 베이징 천단(天壇)에서 찾는다. 뉴허량 제단의 앞부분 형태는 천단의 환구이고, 뒷부분은 베이징 천단의 기년전(祈年殿·천자가 하늘에 제사 지낸 곳)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또한 무덤의 구조와 후대 제왕릉의 구조가 흡사하다는 점을 꼽는다.

그런데 훙산문화만이 이렇게 중원으로, 남으로 퍼진 것은 아니다.

훙산보다 늦은 량주문화의 ‘축록중원’을 살펴보자. 요순시대 유적으로 꼽히는 진남(晋南)의 타오쓰 유적에는 량주식 토기와 옥기들이 즐비하게 나온다.

또한 산둥반도 남쪽인 쑤베이(蘇北) 화팅(花廳) 유적은 이른바 다원커우(대문구·大汶口) 문화 유적으로 꼽히는데, 이곳에서도 량주문화의 전형적인 정(鼎·솥)과 호(壺·항아리), 옥(玉) 등이 나왔다. 이는 량주문화가 중원은 물론 산둥반도까지 진출했다는 소리다. 저명한 고고학자인 옌원밍(嚴文明)은 이를 두고 “량주문화가 다원커우 문화를 정복했다”고까지 선언했다.

“중국학계는 수레바퀴통으로 문화의 접변과 교류를 설명했어요. 5000년전 중국문명은 여러 부족들의 문화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아 중원으로 모였다고…. 먼저 북(훙산문화)이 중원(양사오 문화)과 교류를 시작하였고, 이어 동남(량주문화·다원커우 문화)과 중원이 교류하고, 북과 동남이 관계를 맺고…. 뭐 이런 식으로 정리했죠.”

중국학계는 모든 문명은 중원에서 나왔다는 ‘일원일체’의 역사관이 훙산·량주 등 여러 문명이 모여 지금의 중화문명을 이뤘다는 ‘다원일체’의 역사관으로 바꾸었다. 그러면서 고대 전설을 이 고고학적인 성과에 끼워 맞추기 시작한다. 즉 사기 등 역사서에서 전설로 등장하는 황제와 염제, 황제와 치우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아전인수로 끌어들인다. 절로 혀를 내두르게 하는 중국학계의 견강부회를 한번 풀어보자.

〈뉴허량·선양|이기환 선임기자〉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6)중국인의 조상 ‘황제’는 동이족었나
입력: 2008년 01월 18일 17:30:35
 
‘황제(黃帝)집단=훙산(紅山)문화 대표. 옌산(연산·燕山) 남북지구가 주요 활동범위. 어렵이 주요 경제활동.’

‘신농씨(염제) 화족(華族)집단=양사오(앙소·仰韶)문화 대표. 중원 속작(粟作)농업이 주요 활동범위.’

지난해 7월30일, 이른바 랴오허(遼河)문명전이 열리던 랴오닝성 박물관 전시실. ‘훙산문화와 오제전설’이라는 제목의 전시공간은 기자의 눈과 귀를 멎게 했다. 훙산문화 시대를 오제전설과 연결시킨 것까지는 좋았는데, 중국인의 조상이라는 황제를 훙산문화 대표로 ‘등록’한 것이었다.
훙산문화와 오제전설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랴오닝성 박물관 전시공간. 황제와 치우의 전쟁이 벌어진 쌍간허 유역 쭤루의 인근 위센에서 훙산문화와 양사오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이 공반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 중국인의 조상이라던 황제(黃帝)를 동북의 훙산문화 대표로, ‘염제 신농씨’를 중원의 양사오 문화 대표로 둔갑시켜 놓았다. <선양/김문석 기자>

-마오쩌둥도 찾은 황제릉-

참 이상한 일이었다. 황제가 누구인가. 중국인의 조상이 아닌가. 그런 황제가 동이(東夷)의 땅을 대표한다는 것이니…. 그렇다면 치우는? 단군은?

굳이 옛날 기록을 들출 필요도 없다. 1912년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이 된 쑨원(孫文)이 서둘러 한 일은 황제(헌원)에게 제사지내는 것이었다. 훗날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나 공산당의 마오쩌둥(毛澤東)도 1937년 국·공합작 뒤 다투어 찾아간 곳도 바로 황제릉이었다.


“황제께서 천명으로 나라를 세우시고~. 추악한 치우를 주살하시어 화(華)와 이(夷)를 구분지었네.”(국민당의 제문)

“(황제가) 위대한 창업을 이루시니~. 그러나 그 후예들은 황제만큼 용맹스럽지 못해 큰 나라를 망가지게 했네.”(마오쩌둥의 제문)

이렇듯 너나 없이 ‘축록(逐鹿) 황제릉!’을 외치며 다투어 황제릉을 향해 달려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황제가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국통의 상징이자, 민족정체성의 상징”이었으며 “공산당과 국민당도 비록 정치적인 목표가 달랐지만 권력의 정통성 확보라는 측면에서 황제를 끌어들이려 한 것”(김선자의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신화’·책세상)이다. 중국인들은 왜 자존심을 버리고 그들의 조상으로 추앙해온 황제를 오랑캐의 땅으로 폄훼하던 훙산문화를 창조한 주인공으로 바꿔 부르는 것일까. 누누이 강조하듯 1970년대 이후 발해연안에서 무수히 발견된 문명의 흔적 때문이었다.

-황제는 훙산 고국의 초대왕?-

중국의 용 사상이 잉태한 곳이 바로 이곳(차하이·査海·BC 6000년전)이었다. 제단과 신전, 무덤(적석총) 등 3위 일체의 제사유적을 핵심으로 하는 훙산문화가 창조된 곳(뉴허량)도 바로 이곳이다. 즉 제정일치 사회의 왕이 존재한 고국(古國)이 탄생한 곳이다.

그러니 중국인의 입장에서 황제는 ‘훙산 고국’의 초대 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처음엔 크게 당황했던 중국학계는 정신을 차린다. 바로 전설과 고고학 자료들을 교묘하게 끼워 맞춘다. 우선 뉴허량 출토 곰의 뼈를 두고는 “사마천의 사기에 ‘황제는 유웅씨(有熊氏)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면서 곰과 황제를 연결시킨다.

그리고 1970년대 말 허베이성(河北省) 장자커우(張家口) 지구 쌍간허(상건하·桑乾河) 유역인 위센(蔚縣) 싼관(三關) 유적에서 함께 발견된 유물 2점에 주목한다. 동북 훙산문화의 대표 문양인 용무늬 채도관(항아리)과 중원의 양사오 문화를 대표하는 꽃무늬 채도가 한 곳에서 나온 바로 그 곳. 이는 훙산문화와 양사오 문화가 접변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중국학계는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역사기록을 떠올린다.

“이 장자커우 인근에 황제와 염제, 황제와 치우가 싸웠다는 반취안(판천·阪泉)과 줘루(탁록·탁鹿)란 곳이 있어요. 중국학계는 바로 이 인근에서 동북 훙산문화 유형과 중원 양사오 문화가 영향을 주고 받았다고 해석하기에 이르렀지요.”(이형구 선문대 교수)

-“피가 백리나 흘렀다”-

사서에 따르면 훙산문화 시기에 즈음해서 문명의 충돌이 두 번 있었다. ‘염제(신농씨) vs 황제’의 ‘반취안(판천) 전쟁’과 ‘황제 vs 치우’의 ‘줘루(탁록) 전쟁’이었다.

“염제(신농씨)가 제후들을 침범하려 했다. 헌원(황제)은 곰과 범, 살쾡이 같은 사나운 짐승들을 훈련시켜 판천(阪泉)의 들에서 여러 번 싸운 뒤에야 뜻을 이루었다. 치우가 또다시 난을 일으켰다. 헌원은 제후들과 함께 나서 탁록(탁鹿)의 들에서 싸워 결국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천자로 삼았으니 그가 바로 황제다.”(사기 오제본기)

‘장자(莊子)’에는 “들판에 피가 백리나 흘렀다”고 했다. 병장기가 핏물에 둥둥 떠다닐 정도였다. 고대 동양문명의 맹주를 놓고 벌인 ‘1·2차 대전’의 치열함과 처절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중국인들에게 황제(헌원)는 이민족의 도전을 뿌리치고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한, 동양문명의 창시자였다. 그야말로 “황제는 중국인의 자존심이자 정체성 그 자체”(정재서 교수의 ‘동양신화’·황금부엉이)였던 것이다.

-염제 vs 황제의 1차대전-

그러나 훙산문화 발견 이후 중국학계는 황제의 정체성을 완전히 바꿔놓기 시작한다.

쑤빙치는 ‘통고(痛苦)의 연구’ 끝에 황제의 고향을 중국 동북방, 즉 훙산문화의 본거지인 발해연안에서 찾은 것이다. ‘훙산시대=황제시대’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 고고학 성과와 역사서의 오제전설 기록을 토대로 지금부터 5000년 전후의 문화구를 3대 고고문화구로 나누었다.

즉 훙산문화의 동북문화구, 양사오 문화의 중원문화구, 그리고 다원커우(대문구·大汶口) 문화의 동남연해문화구 등이다. 그리고 고대 전설상의 오제시대를 다시 전·후기로 나누었다. BC 3500~BC 3000년전 시기를 전기, BC 3000년전~하나라 건국(BC 2070년) 이전을 후기로 각각 구분했다.

훙산문화는 바로 오제시대 전기, 즉 양사오 문화와 상응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훙산문화는 중국문명 기원 과정에서 한걸음 먼저 나갔으며(先走一步) 양사오 문화와 기북(冀北·허베이성 서북부)에서 만났다는 것이다. 바로 제1차 대전인 ‘황제 vs 염제 전쟁’이며, 시대는 오제시대 전기(BC 3500~BC 3000년)에 일어난 일로 보았다.

즉 훙산문화의 용무늬 토기와 양사오 문화의 꽃무늬 채도가 싼간허 유역 싼관 유적에서 공반되어 나온 것은 바로 이 ‘황제 vs 염제 전쟁’을 의미한다.

이것은 쉬즈펑(徐子峰) 츠펑대교수의 말처럼 “두 문화가 충돌한 동시에 교류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는다. 쑤빙치는 “이렇게 충돌·교류한 문화는 다시 발해연안으로 올라가 그 유명한 훙산문화의 단(제단)·묘(신전)·무덤(총·적석총)으로 발전하여 전성기를 이뤘다”고 결론을 내렸다.

“중국학계는 동북방과 중원문화의 충돌·교류 이후 훙산 고국(古國)이 탄생했다고 보았지. 훙산 고국의 초대 왕은 ‘황제’라는 것이고….”(이형구 교수)

쑤빙치 등은 황제의 고향을 동북방으로 연결했다. 황제가 염제와 싸울 때 함께 전쟁터에 나선 곰과 범, 살쾡이 등은 이런 짐승들을 토템으로 삼은 부족들의 명칭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또한 사기 오제본기는 “황제는 일정한 거처없이 옮겨 다녔다”고 했다. 중국학계는 이를 ‘황제족’의 성향을 일컫는 것으로 동북방 민족과 관련이 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라고 보았다.

-황제 vs 치우의 2차대전-

그렇다면 동이족의 신으로 알려진 치우는 무엇인가. 중국학계는 바로 ‘황제 vs 치우 대전’ 역시 오제전설과 역사서를 고고학 성과와 끼워맞춘다.

즉 ‘황제 vs 치우’전을 오제시대 후기(BC 3000~BC 2070년)에 일어난 ‘사실’로 본 것이다. 훙산문화의 전통을 이은 황제족과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치우족의 문화, 즉 다원커우 문화가 역시 충돌·교류한 증거라는 것이다.

BC 3000년 무렵 다링허(大凌河)와 시랴오허(西遼河)에서는 훙산문화의 전통을 이은 이른바 훙산후(紅山後) 문화라 하는 샤오옌(소하연·小河沿) 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는 다시 조기 청동기-샤자뎬(하가점·夏家店) 하층문화로 성장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누공두(鏤孔豆·구멍뚫은 굽달린 접시)와 주전자(壺), 고족배(高足杯·다리가 높은 그릇) 등 다원커우 문화의 특징을 보이는 유물들이 속출한다. 바로 이것이 동북방(훙산문화 계열)과 동방(산둥반도)의 충돌 및 교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궈다순(郭大順)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은 “사기 오제본기는 황제·염제 싸움을 먼저, 황제·치우 싸움을 나중에 기록했다”면서 “고고학 성과를 검토하면 역사서가 딱 들어맞는다”고 자화자찬한다.

-치우는? 단군은?-

그런데 여기서 의문 하나. 이 해석대로라면 훙산문화의 창조자와 치우와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훙산문화의 주인공은 황제이고, 산둥반도 다원커우 문화의 주인공이 치우라는 이야기이니…. 어찌된 일인가. 그리고 또 하나.

중국학계는 황제를 비롯한 오제전설(황제·전욱·제곡·요·순) 주인공들의 고향을 대체로 동북방으로 본다는 것이다. 훙산문화를 꽃피운 것은 바로 황제라는 것이다. 후계자 전욱(전頊)도 “북방의 대제(大帝)”라는 칭호를 얻는다. 뉴허량 신전에서 끊어진 하늘과 땅의 관계를 혼자 독점하며 제정일치 시대를 이끈 이가 전욱이라는 것이다. 또한 제곡(帝곡·3대왕)은 훗날 상나라의 선조라고 했다.

모골이 송연하다. 이미 ‘하상주 단대(斷代)공정’을 단행, 전설상의 하나라 건국연대를 BC 2070년이라 확정한 중국이다.

그렇게 올려놓은 중국역사가 4000년이다. 그런 중국학계가 이젠 더 나아가 발해문명, 즉 훙산문화를 창조한 이가 바로 황제이며, 그 황제가 중국인의 조상이라 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다시 전설의 1000년 역사가 ‘사실(史實)’로 회복된다. 이른바 중국문명 5000년이 확정되는 것이다. 이것이 ‘중국문명 탐원공정’의 핵심이다.

우리 학계는 중국으로부터 헤어나고 싶은 망령과, ‘실증할 수 없다’는 지나친 결벽증(?) 탓에 제대로 된 연구조차 ‘재야사학’이라며 무시하고 있다. 그런 사이 중국학계는 이미 ‘중국문명 5000년’의 틀을 짜놓고 있는 것이다. 발해연안에서 무수히 발견되는 적석총과 빗살무늬 토기, 그리고 곰 숭배의 원형들…. 중국학계의 견강부회로 그 역사가 황제의 역사라면, 치우와 단군, 그리고 웅녀 등 우리 민족의 흔적은 깡그리 무시되는 셈이다.

전설과 고고학 성과를 완벽하게 끼워 맞추는 중국학계의 움직임과 우리 학계의 무력함에 기자는 가슴이 탁 막혔다.

〈뉴허량·선양|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경향닷컴|이다일 기자 crodail@khan.co.kr〉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7)고조선과 청동기
입력: 2008년 01월 25일 16:56:07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17. 유물·유적 토대로 추정한 청동역사 / 발해문명 흐름도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요령(랴오닝), 러시아의 아무르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문화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 시대로 넘어간다. 이 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기원전 2333년)”(고교 국사교과서)
이형구 선문대교수가 뉴허량의 �싼쯔 금자탑(피라미드) 유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청동기를 제작할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도가니 잔편이 확인되었다. 그 연대는 BC 3000년까지 올라갈 수 있가는 평가다. <뉴허량|김문석기자>

지난해 2월, 교육인적자원부가 2007년판 국사교과서를 공개하자 학계가 한바탕 요동쳤다. 새 교과서가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개막을 기존 교과서 내용(BC 10세기)보다 500~1000년 앞당겼기 때문이었다. 또한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는 애매한 인용문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확정지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뒤늦은 감이 있다”는 환영론이 나왔지만, 학계 일각은 “올려도 너무 올렸다”고 아우성쳤다.

#한반도를 벗어나라

기자는 논쟁의 출발점이 잘못되었다고 본다. 근대 국민국가의 산물이자 발명품이라는 ‘국사’라는 개념과 학문을 없애지(국사 해체론자들의 주장처럼) 않는 한, 우리 역사의 영역을 ‘한반도’에서 ‘발해연안’까지 넓혀봐야 한다는 것이다. 청동기의 기원을 ‘한반도에만 국한시키면’ 논란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이제 ‘눈을 들어’, 그 옛날 이른바 동이족이 다른 족속과 어울려 발해문명을 창조해낸 발해연안을 바라보라. 그러면 논쟁 또한 눈 녹듯 사라질 것이다. 운을 떼면 동북아 청동기 시대의 기원은 발해연안이며, 그 연대는 BC 3000년(훙산문화 시대)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또한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BC 2000~BC 1500년) 시기에는 석성을 쌓고 청동기를 만들었으며, 고대 왕국의 기틀을 쌓은(고조선) 발해연안 사람(동이족)들이 중원으로 내려와 상나라(商·BC 1600~BC 1046년)를 건국했다는 점까지.

#청동꺾창의 비밀


1986년 3월, 랴오닝성 진저우(금주·錦州)에서 의미심장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청동꺾창(銅戈)이었다. 유물이 출토된 곳은 진셴(錦縣) 수이서우잉쯔(수수영자·水手營子) 마을이었다. 발해만에서 북쪽으로 10㎞ 정도 떨어진 곳이며, 고구려를 침략한 당나라 군사들이 죽어갔다는, 유명한 요택(遼澤)을 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청동꺾창은 상나라 초기의 특징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고고학적으로 샤자뎬 하층문화에 속하지만 고조선과 연관성이 매우 깊은 지역이다.

그때까지 발견된 청동꺾창은 대부분 자루(柄)부분이 목재여서 썩어 없어진 상태였다. 그런데 이 꺾창은 몸 전체를 청동으로 주조한 게 특징이었다. 청동꺾창의 무게는 1.105㎏에 달했고, 전체 길이는 80.2㎝였다. 연대는 BC 1500년으로 평가됐다.

이 청동꺾창은 중원의 허난성(河南省) 중부 옌스셴(偃師縣) 얼리터우(이리두·二里頭) 유적에서 확인된 청동꺾창(연대는 BC 1500년 추정)과 매우 흡사한 느낌을 준다. 이것은 둘 다 상나라 초기, 즉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꺾창이라는 뜻이며, 상나라의 전통이 발해연안에서도 숨쉬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이 청동꺾창은 선사시대에서는 농사용, 즉 수확용 돌낫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해요. 그리고 직접적인 단서는 바로 발해연안에서 나왔고….”(이형구 선문대 교수)

이교수가 말하는 유물은 랴오둥(요동·遼東) 반도 남단 양터우와(양두와·羊頭窪)에서 확인된 돌꺾창(石戈)를 가리킨다. 리지(李濟)는 “양터우와 문화의 연대는 하(夏·BC 2070~BC 1600년) 연대와 비슷하다”면서 “이 돌창이 수이서우잉쯔 출토 청동꺾창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고조선 수장의 권장(權杖)

발해만 연안에서 확인된 청동꺽창. 실상용 무기라기보다는 예제용 청동기로 보이며 고조선 시대 수장의 권장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수이서우잉쯔 출토 청동꺾창은 청동기 기원뿐 아니라 고대국가(고조선) 형성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원래 과(戈·꺾창)를 자전에서 찾으면 ‘한두 개의 가지가 있는 창’이라는 풀이와 함께, 두번째 뜻으로 ‘전쟁을 뜻하는 말’이라고도 나온다. 고대사회에서는 과가 오늘날의 총 같은 대표적인 무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수이서우잉쯔에서 나온 청동꺾창을 살펴보라. 비실용적이라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과는 원래 무기다. 때문에 창날(戈) 부분은 무게 있는 청동으로 만들어 날을 세우고, 자루부분은 가벼운 나무를 사용한다. 그래야 적을 제압할 수 있다. 하지만 수이서우잉쯔 청동꺾창은 창날과 자루를 모두 미끈한 청동으로 만들었다. 가벼워야 할 자루(柄)는 무겁고 두껍다. 반면 과는 얇고 가볍다. 또한 자루 양면은 정교한 문양을 주조했고, 녹송석(綠松石)으로 요철식 상감을 해놓았다. 이래가지고서야 무기라 할 수 없다.

“그러니 살상무기가 아니라 의례(儀禮)용 병기로 볼 수밖에. 이른바 권장(權杖), 즉 권력를 상징하는 지팡이의 기능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 또 하나. 청동꺾창이 나온 수이서우잉쯔는 랴오둥 반도와 인접한 곳에 있어요.”(이교수)

여기서 기자는 이교수의 강조점을 듣고 깊은 상념에 빠졌다. 수이서우잉쯔. 이곳이 바로 우리 역사의 출발점, 즉 고조선의 터전이고, 청동꺾창은 바로 고조선의 수장(왕)이 지녔던 권장이 아닌가. 기자는 “기자(箕子·상이 망한 뒤 기자조선을 건국했다는 상나라 귀족)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상서(尙書)의 기록을 떠올렸다. “기자(箕子)가 조선을 건국했다”가 아니라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뜻이니, 기록상으로도 이미 발해연안에 조선이 존재했다는 의미 아닌가. 또 하나, 경향신문 탐사단이 처음 공개했던 싼줘뎬(삼좌점·三座店)·청쯔산(성자산·城子山)의 거대한 석성 역시 고조선의 유적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경향신문 2007년 10월13일 ‘고조선 추정 싼줘뎬·청쯔산 유적’ 참조)

#청동기 시대의 개막은 BC 3000년

�싼쯔에서 확인된 도가니편들. 동북아 청동기 문화의 기원논쟁에 핵심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수이서우잉쯔 출토 청동꺾창은 병기의 예제화(禮制化)를 뜻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인 셈이다. 벌써 BC 1500년 무렵에 이토록 예제의 완벽한 모습까지 갖춘 청동기를 창조한 것이다. 그러면 과연 청동기의 기원은 언제란 말인가. 기자는 다시 뉴허량(牛河梁) 13지점에서 보았던 이른바 �산쯔(전산자·轉山子) 유적의 진쯔타(금자탑·金字塔·피라미드)를 주목했다.(경향신문 12월1일자 ’뉴허량의 적석총들’ 참조)

“BC 3500~BC 3000년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이 피라미드 정상부에서 야동감과(冶銅감鍋), 즉 청동기를 주물한 흔적으로 보이는 토제 도가니의 잔편이 있는 층위를 발견했거든. 청동주물을 떠서 옮기는 그릇과 함께….”(이교수)

이는 매우 중대한 뜻을 담고 있다. 맞다면 기존 중국 청동기 시대의 개막연대(BC 2000년)보다 1000년을 앞당긴 중국고고학사의 쾌거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이징 과기대 야금연구실 한루빈(韓汝) 교수는 1993년 베이징대 국제학술대회에서 이 같은 성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지층이 교란되었다는 점이 제기되어 여전히 세계학계의 공인을 받지 못했다. 한낱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중국학계는 실마리를 놓치 않았다.

“피라미드 도가니 지층에서 확인된 고풍관(鼓風管·높은 열을 내려고 바람을 불어 넣는 관)의 구멍을 보라. 그것은 마치 고대 이집트인들의 벽화에 표현된 청동기 제작 과정과 완전히 똑같다.”(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

이뿐이라면 또 “‘초’를 치는군”하면서 중국인 특유의 ‘허풍’으로 폄훼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제단·신전·적석총이 확인된 뉴허량 제2지점 4호 적석총 내부에서 나온 청동제 환식(環飾·고리 장식)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조사단이 분석해보니 홍동질(紅銅質), 즉 원시청동인 순동이었다.

증좌가 또 있다. 1987년 우한치(敖漢旗) 시타이쯔(西台子) 유적, 즉 훙산문화(홍산문화·BC 4500~BC 3000년) 문화층에서 출토된 다량의 도범(거푸집)이다. 도범의 속에는 낚시바늘 형태의 틈새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것은 청동낚시바늘을 만들기 위한 주형(鑄型)이 분명했다. 결국 이 모든 발굴 성과를 토대로 추측하면 중국의 청동기 시대, 아니 동북아 청동기 시대의 시작은 BC 3000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얘기다. 적어도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연구해야 할 때란 얘기다. 그런데 이런 훙산문화의 전통은 이른바 샤자뎬(하가점) 하층문화를 거쳐 상나라로 그대로 넘어온다.

#훙산문화→고조선→상나라

“수이서우잉쯔에서 나온 청동꺾창(BC 1500년)도 중요하지만, BC 1600년 유적으로 평가되는 다뎬쯔(大甸子) 유적도 훙산문화-샤자뎬 하층문화-상나라 문화를 연결해주는 상징적인 유적이죠.”(이교수)

1973년 다링허(大凌河) 유역 우한치 다뎬쯔에서는 모두 1683건의 도기(陶器)가 확인됐다. 도기 가운데는 400점에 달하는 완전한 채회도기들이 쏟아졌다. 그런데 도기의 모양이라든가, 문양의 모티브가 훗날 상나라의 그것과 완전히 같았다.

특히 솥과 잔, 사발, 시루, 단지에 나타난 도철(괴수의 얼굴)·운뇌문(雲雷·구름과 번개)·목뇌(目雷·눈과 번개)·기룡(夔龍·추상화한 용) 문양 등은 상나라의 청동기 문양과 똑같다. 그리고 싼줘뎬·청쯔산의 거대한 석성 역시….

결국 이 모든 것을 정리해보자.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인 훙산문화 시기에 청동기 문화의 맹아가 텄다. 그리고 훙산문화부터 시작된 등급사회와 예제가 갈수록 발전했고, 청동기와 석성, 적석총의 전통이 샤자뎬 하층문화 시기에 꽃을 피웠다. 쑤빙치(蘇秉琦)의 말처럼 발해연안에는 중원의 하나라(BC 2070~BC 1600년)와 같은 반열의 강력한 방국(方國·왕국의 의미)이 존재했다. 쑤빙치는 그 방국이 어디인지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방국은 고조선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발해문명 창조자 가운데 일부 지파가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중원으로 내려와 상나라(BC 1600~BC 1046년)를 건국한다.

이 모든 해석은 중국학계가 인정하는 것이다. ‘고조선 부분’만 빼고…. 쑤빙치를 비롯한 중국 고고학자들이 (훗날 중원을 제패한) 상나라 문화의 기원은 발해만에 있었다(先商文化在渤海灣)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8)천하를 제패한 동이족
입력: 2008년 02월 01일 17:14:53
 
ㆍ중원통일 상나라는 발해문명의 후예

“은나라 시조 설(契)의 어머니는 간적(簡狄)이다. 그녀는 제곡(帝곡·황제의 증손자라 함)의 둘째부인이다. 간적 자매가 목욕을 하러 가는데 제비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간적이 이를 받아 삼켜 잉태했다. 그가 설이다.”(사기 은본기)
안양 인쉬(殷墟)에서 확인된 상나라 말기의 건축유적. 주 무왕에 의해 패배하여 분신자살한 주왕의 궁전이었을 것이다. l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관 제공

사기에 나오는 은(殷)은 본래 상(商)나라이다. 최근 중국학계와 정부는 ‘하상주 단대(斷代) 공정’에 따라 상나라의 연대를 확정했다. 즉 BC 1600년에 성탕(成湯)이라는 영웅이 하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했으며, BC 1300년에 은으로 천도한 뒤 BC 1046년 주(紂)임금 때 주(周) 무왕에 의해 멸망했다. 은이라는 나라 명은 상왕조의 마지막 도읍 명칭인데, 주나라 사람들이 은으로 낮춰 부른데서 유래되었다.

상나라는 폭군의 나라?

상(은)나라는 왠지 ‘폭군의 나라’ 혹은 ‘망국의 한(恨)’을 연상시키기 십상이다.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의 난행이 너무도 생생한 필치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桀)과 함께 ‘걸주’라는 이름으로 폭군의 상징이 됐다.

‘요망한’ 애첩 달기(己)의 비위를 맞추려 술로 연못을 만들고, 숲에 고기를 달아놓고는 벌거벗은 남녀를 뛰어놀게 한 이른바 ‘주지육림(酒池肉林)’. 기름을 바른 구리기둥을 숯불 위에 걸어놓고 죄인을 걷게 하고는 떨어져 불에 타는 모습을 보고 깔깔댔다는 ‘포락지형(포烙之刑). 신하이자 서형(庶兄)인 비간(比干)이 목숨을 걸고 간언하자 “성인의 심장엔 구멍이 일곱개가 뚫렸다는데 한번 보자”면서 심장을 해부한 만행의 줄거리는 지금도 뭇사람들을 진저리치게 한다. 제후들을 죽여 포(脯)를 떠서 소금에 절인 뒤 다른 제후에게 보내 맛을 보라고 강권하기도 했다. 그것으로 충성도를 시험했다니…. 충신인 기자(箕子)가 망국 후에 황폐해진 도읍지(인쉬·殷墟)를 지나다가 지었다는 ‘맥수지가(麥秀之歌)’는 지금도 망국의 슬픔을 상징한다.

“(파괴된 궁실 자리에 곡식 자란 모습을 보며) 보리는 잘 자랐고, 벼와 기장은 싹이 올라 파릇하구나. 개구쟁이 어린애(주왕)야! 나하고는 사이좋게 지냈더라면….” 맥수지가는 여전히 유학계나 한문학계에서 최고의 산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천하 쟁탈전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 왕조교체 후 전대의 마지막 왕을 망나니로 만들어 버리는 예는 하나라 걸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만 상나라의 폄훼는 더 심한 편이다. 주나라의 계승자임을 자처한 후대의 사가들이 지어낸 과장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정저우 상성에서 확인된 청동 술잔.
상나라의 실체를 알면 더욱 확실해진다. 하·상·주의 왕조교체는 단순한 왕조의 교체가 아니다. 지금의 개념대로라면 동이족이 한족(漢族)과 처절한 중원쟁탈전을 벌인 끝에 하나라를 무찌르고 550년 가까이 천하를 통일했다. 그것이 바로 상나라이다. 그런 상나라를 다시 중원의 종족(한족·漢族)이 몰아내고 주나라를 세운 것이다. 이후 중국의 역사는 줄곧 한족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상나라는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어요. 갑골문자를 발명했을 뿐 아니라 청동기 문명을 꽃피웠으며, 동양의 예제를 확립했잖아요.(이형구 선문대 교수)”

우리는 한때 천하를 풍미했고, 드라마틱한 역사를 남겼지만, 망국의 한을 품으며 홀연히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린 이 상나라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역사를 쏙 빼닮은…. 우선 중국 역사서에 나타난 대로 상나라의 역사를 일별해보자.

천하를 통일한 동이

상나라 시조인 설(契)은 요순 시절에 우(禹)의 치수를 도운 덕에 상(商)이라는 곳에 봉지를 받았다. 그래서 상이라는 나라 이름이 생겼다. 상토(相土·설로부터 3대)는 마차를 발명했으며, 그 세력을 ‘해외’에까지 넓혔다. 그리고 왕해(王亥·7대)는 비단과 소를 화폐로 삼아 부락들을 상대로 장사를 벌였다. 훗날 왕해는 유역(有易)이라는 마을에서 엄청난 환대를 받는다. 왕해의 아우 왕항(王恒)은 유역족을 대패시키고 그 족속의 재물을 빼앗았다. 세력을 넓혀간 상은 훗날 성탕이라는 영웅을 만난다. 탕은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요리사 출신인 이윤(伊尹)을 재상으로 등용, 국세를 떨친다. 이 무렵 하왕조는 걸 임금의 학정 때문에 멸망기에 접어든다. 천하의 인심을 얻은 성탕은 도읍을 ‘박(毫)’으로 옮긴 뒤 드디어 11차례의 접전 끝에 하왕조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통일한다. 이때가 BC 1600년이다.

그 뒤에도 역마살이 끼였는지 하왕조 멸망 뒤에도 다섯차례나 도읍을 옮겼는데, 반경(盤庚)이 BC 1300년 은으로 천도한 뒤에야 완전히 정착했다.(웨난의 ‘하상주 단대공정’(일빛) 참조) 상은 은 천도 이후에도 12명의 왕이 254년 동안 화려한 문명의 꽃을 피우다가 멸망한다. 마지막 왕인 주왕은 나중엔 폭군이 되고 여성의 치맛폭에 싸여 천하를 그르쳤지만 “처음엔 총명하고 말재주가 뛰어났으며 그의 지혜는 신하의 간언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사기 은본기)”였다.

이 대목에서 기자는 자꾸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기록(삼국사기 백제본기)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양념으로 인용해보자.

“665년, (의자)왕은 궁녀와 함께 주색에 빠지고 즐기기만 했다. 좌평 성충(成忠)이 극력 간언하자 화가 난 왕은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후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성충이 옥중에서 굶어 죽었는데….”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인지, 아니면 ‘승자의 전리품’이라는 역사의 기록이 되풀이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대목이다.

발해문명의 후계자

BC 6000년부터 잉태한 발해문명의 후계자였던 상나라의 문명은 대단했다. 중국학계는 상나라가 중원 하나라(BC 2070~BC 1600년)의 일개 소국이었고, 차츰 세력을 넓힌 뒤 성탕 때(BC 1600년)에 하나라를 멸망시켰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랬을까.

인쉬에서 발굴된 갑골. 갑골에 새겨진 문자(갑골문자)는 상나라의 위대한 발명품이다.
우선 도성의 규모를 보자. 도성은 국가의 중심이자 왕조의 위세를 나타내주는 상징이다. 그런데 상나라는 멸망 때까지 10차례가 넘는 천도가 있었으나, 흩어져 있는 도성의 규모는 만만치 않았다. 모든 상나라 도성이 판축기법으로 쌓은 점은 특기할 만하다.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관은 “자연적인 방어시설인 강변에 쌓은 점이라든지, 흙을 켜켜이 쌓아 조성한 이른바 판축기법으로 보면 기원 후 1세기 때부터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백제 풍납토성과 매우 비슷하다”고 말했다.

먼저 성탕이 세운 것으로 여겨진 허난성(河南省) 옌스(언사·偃師)상성의 궁전터는 그 규모가 19㎢에 달했다. 성탕은 하를 멸한 뒤 다시 허난성 정저우(정주·鄭州)에 도읍했는데(중정·仲丁 시기에 건립됐다는 설도 있다) 규모가 25㎢였다.

정저우 상성의 경우 궁전 내부에서는 100기 정도의 인골이 묻힌 구덩이가 확인되었는데, 이는 순장제도 혹은 사람을 제사에 바친 증거로 보인다. 외성에서는 중·소형 무덤이 100여기 확인됐다. 이 무덤에서는 력(격·솥의 일종), 작(爵·술잔), 분(盆·물과 술 담는 동이), 규( ·제사에 쓰이는 세발달린 가마솥), 언( ·시루), 존(尊·술그릇) 등이 대거 발굴되었다. 이곳에서는 노예들이 거주하면서 수공업을 담당한 것으로 보이는 작업장이 확인되었다. 이는 상나라 시기에 노예제가 확립되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또한 인쉬(은허·殷墟)유적의 발견은 뭇사람들의 시상을 자극할만한 한편의 대서사시 같다. 1899년 가을. 심한 학질에 걸린 왕이룽(왕의영·王毅榮·국자감 좨주)은 의사에 처방에 따라 ‘용골(龍骨)’이란 약재를 구입했다. 그런데 그는 약재에 뭔가 전서(箋書)와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금석학자인 그는 야릇한 흥분에 휩싸였다.

이것은 훗날 갑골문으로 확인되었다. 후술하겠지만 이 갑골이 허난성 안양센(安陽縣)의 샤오둔춘(小屯村)에서 집중 출토된 것을 파악한 중국학계는 1928년부터 본격 발굴에 들어갔다. 15차례에 걸친 발굴 끝에 2만4794점의 갑골이 발굴되었다. 상나라의 위대한 발명품인 한자의 원형, 즉 갑골문자를 발견한 것이다.

인쉬는 BC 1300년부터 BC 1046년 주왕이 분신자살할 때까지 상나라의 도읍지였으며, 254년간 이른바 은나라 시대를 이끈 곳이다. 망국의 한이 풀 한포기, 돌멩이 하나에도 녹아있는 바로 그 인쉬…. 이곳에서는 갑골문자뿐 아니라 궁전터와 종묘유적, 그리고 왕과 귀족의 무덤떼가 고스란히 확인되었다. 이른바 인쉬에서는 100㎏이 넘는 청동기를 주조하던 주형(鑄型)이 확인되는 등 크고 정교한 청동기와 옥기가 대량으로 쏟아졌다. 발굴성과가 중국역사에 준 충격은 엄청났다. 전설상의 나라로 여겨진 상나라의 실체가 완벽하게 드러난 것이었다. 무엇보다 갑골문이 해독되면서 상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마천의 사기가 ‘소설’이 아니라 사실(史實)이라는 것을 확인시켰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수수께끼의 열쇠

“이로써 상나라의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했지. 상나라 사람들이 전쟁에 나서거나 큰 일을 치를 때는 그 길흉을 점쳤다는 것과, 신과 인간을 소통시키는 신권과 왕권의 복합왕국이었다는 것까지….”(이형구 교수)

특히 ‘발해산’ 청동기로 무장한 상왕조는 청동기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하나라를 압도했다. 짐승문양, 도철(괴수)문양 등 왕권과 신권을 상징하는 다양한 청동예기는 물론, 다양한 형태와 쓰임새가 자랑인 다양한 생활용기도 상왕조의 문화를 살찌웠다.

그렇다면 상나라 문화와 동이족과는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리는 이미 상나라가 차하이·싱룽와 문화(BC 6000~BC 5000년)-훙산문화(BC 4500~BC 3000년)-샤자뎬 하층문화(BC 2000~BC 1500년·고조선의 문화로 여겨짐)의 찬란한 발해문명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보았다. BC 1600년 무렵 발해문명의 일파가 남하하여 중원 하나라를 쓸어버린 뒤 천하를 통일한 나라가 상나라라고….

그러면 중국학계는 이 상나라와 상나라 문화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발해문명의 일파가 남하, 상(商)을 건국했다면 발해연안엔 어떤 나라가 존재했을까. 그리고 상나라가 망한 뒤 발해연안에 건국되었다는 기자조선의 실체는 무엇일까. 또한 상나라 문화를 쏙 빼닮은 부여국의 존재는 무엇이며, 중국인들은 동이의 역사 가운데 왜 유독 부여에 대해서는 호의적으로 서술할까. 이것이 앞으로 풀어야 할 수수께끼 보따리다.

〈 선양·뉴허량 |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9)상나라와 한민족(上)
입력: 2008년 02월 15일 17:15:16
 
ㆍ상나라 귀족묘 출토 인골…한족 아닌 백의민족 모습

“(시조인) 설 현왕이 아들 소명(설로부터 2대)을 낳고 지석(砥石)에 거주했다.”(순자·성상편)

중국 문헌은 동이족인 상족(商族)이 중원으로 내려와 하나라를 멸할 때까지의 역사와 활동무대, 즉 시조 설부터 성탕의 상나라 건국(BC1600년)까지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던져놓았다. 중국 학계는 이 문헌기록을 토대로 다각적인 분석에 들어간다.

안양 인쉬에서 발굴한 상(은)나라 무덤. 노예로 추정되는 대량의 인골이 나란히 묻혀 있다. 순장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부여의 습속과 같다.
옌산에서 백두산·헤이룽강까지

처음에 인용한 ‘순자 성상(荀子 成相)’편의 기록을 검토해보자.

“요(遼·랴오허를 뜻함)는 지석에서 나온다”는 내용이 ‘회남자(淮南子) 추형훈(墜形訓)’편에 나온다. 이 내용을 주석한 가오유(高誘)는 “지석은 산의 이름이며 변방의 바깥에 있고, 요수(遼水·랴오허)가 그곳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른다”고 했다.

즉 시조 설은 랴오허의 발원지인 지석에 살았으며, 지금의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츠펑(赤峰)시 커스커텅치(克什克藤旗) 부근이라는 것이다. 물론 ‘남쪽바다’는 발해이다.

또한 ‘여씨춘추 유시(有始)’편에는 “하늘에는 9개의 들이 있는데, 북방을 일컬어 현천(玄天)이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진징팡(김경방·金景芳)은 이 모든 문헌을 근거로 “설, 즉 현왕은 북방의 왕”이라 단정했다.

“상토(설로부터 3대)가 맹렬하게 퍼져, 해외에서 끊어졌다(相土烈烈 海外有截)”(시경·상송)는 내용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상토는 시조 설의 손자. 중국 학계는 이 기록을 토대로 상토 때 상족의 활동무대를 발해 연안으로 보고 있다. 상토는 무공이 매우 뛰어났으며, 마차를 발명하여 세력을 떨친 이다. 시조 설로부터 7~8대인 왕해(王亥)와 상갑미(上甲微) 때는 “하백(河伯)의 군사를 빌려 유역족(有易族)을 쳐 멸망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유역족은 이수이(역수·易水)에서 그 이름을 빌려왔으며, 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 이셴(역현·易縣) 일대이다. 상족이 초기에 이미 허베이성 이셴까지 세력을 떨쳤다는 것이다.

고고학자 쑤빙치(소병기·蘇秉琦)는 “은(상)의 조상은 남으로는 옌산(연산·燕山)에서 북으로는 백산흑수(백두산과 헤이룽강)까지 이른다”고 단언했다.

또한 그 유명한 안양 인쉬(殷墟) 유적 발굴을 총지휘했던 푸쓰녠(부사년·傅斯年)은 일찍이 “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했으며, 상이 망하자 동북으로 갔다”고 단정했다. 중국 학계도 이런 쑤빙치와 푸쓰녠의 관점이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1970년대 이후 발해 연안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발굴 성과가 이 같은 학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인쉬(은허) 인골의 비밀

상나라 사람들과 발해 연안의 친연관계는 인종학의 지지까지 받고 있다. 인골전문가인 판지펑(반기풍·潘其風)은 인쉬(은허) 유적에서 출토된 인골들을 분석했는데 아주 의미심장한 결과를 얻어냈다.

“인쉬 유적에서는 상나라 귀족들의 묘가 발견되었는데, 발굴된 대다수의 시신들이 동북방 인종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어요. 인골들의 정수리를 검토해보니 북아시아와 동아시아인이 서로 혼합된 형태가 나타난 거지. 이것은 황허 중하류의 토착세력, 즉 한족(漢族)의 특징과는 판이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어요.”

또하나, 인쉬(은허) 발굴자들이 인정했듯 상나라 사람들이 동북방의 신앙을 존숭했다는 것이다. 즉 상나라 왕실에서 고위층 귀족들에 이르기까지 동북방향을 받들었는데, 이는 고향에 대한 짙은 향수와 숭배를 나타난 것이라는 해석이다.

결국 이 모든 중국 문헌과 고고학적인 발굴 성과로 미루어 보면 BC 6000년(차하이·싱룽와 문화)부터 시작된 발해문명의 창조자들이 그 유명한 훙산문화(BC 4500~BC 3000년)를 거쳐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BC 2000년 무렵~BC 1500년·즉 고조선 시기)를 이뤘다.

그리고 상나라의 시조 설은 차하이·싱룽와 문화-훙산문화의 맥을 이은 발해문명의 계승자로서, 샤자뎬 하층문화의 주인공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설과 그의 손자 상토, 그리고 7~8대인 왕해와 상갑미 대를 거치면서 발해문명의 계승자들은 남으로 뻗어갔으며, 급기야 BC 1600년 무렵 중원의 하나라를 대파하고 천하를 통일했다.

쑤빙치가 “하나라 시대에 이미 중국 동북방 발해 연안에는 하나라를 방불케 하는 강력한 방국(方國), 즉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단언한 이유다. 물론 중국 문헌에는 다링허·랴오허 유역, 즉 발해 연안을 풍미한 발해문명의 주인공들이 과연 누구인지 적혀있지 않다.

그런 이유로 중국 학계는 단순히 상나라의 선조가 동북민족과 관련이 깊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냥 ‘연나라의 옛 땅’이라는 군색한 표현으로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누누이 강조했듯 상나라를 이룬 동이족, 그 가운데서도 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 등 우리의 역사를 이룬 우리 민족과는 강한 친연성을 갖고 있다.



의미심장한 부여

이제부터는 상나라와 동이, 그 가운데서도 우리 민족과의 친연성을 차근차근 다져보자. 먼저 시조설화.

“(목욕을 갔던) 간적이 제비알을 삼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설(契·상나라의 시조)이다.”(사기 은본기)

“북이(北夷)의 탁리국(탁리國) 왕이 출행했는데, 왕의 시녀가 후에 임신했다. 왕이 시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는 ‘전에 하늘 위에 기를 보았는데, 큰 계란 같았다.’(혹은 닭처럼 생긴 것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시켰다) 이 왕이 시녀를 가두었는데, 뒤에 남자아이를 낳았다.~ 그 이름을 ‘동명’이라 했다. ~동명은 ‘부여’에 이르러 왕노릇을 했다. 곧 부여의 시조이다.”(후한서 동이전 부여조·논형 길험편 등)

“옛날 시조 추모왕이 창업의 기초를 열었다. 추모왕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었다. 알에서 태어나 세상에 나오니 성덕이 깊었다. 이는 곧 고구려의 시조이다.”(광개토대왕릉비)

재미있는 신화의 공통점이다. 상(은)나라의 시조신화와 부여·고구려 등 동이족의 신화가 어쩌면 이렇게 비슷한지 모르겠다. 중국학계도 “새알을 삼켜 탄생하는 이른바 난생신화는 (중원이 아니라) 동북아 민족의 공통분모”(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라고 인정한다.

“하늘이 현조(玄鳥·제비)에 명령해 상나라 조상을 낳아 넓디넓은 은땅에 살게 했다”(시경 상송 현조·詩經 商頌 玄鳥)는 기록은 상나라와 새의 깊은 관계를 웅변해준다.

고조선과 발해문명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이미 밝힌 바 있으므로(경향신문 1월26일자 ‘고조선과 청동기’ 참조) 생략한다.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고구려와 백제의 ‘조상’인 부여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고 있다. 고조선과 달리 중국측 문헌자료도 풍부하기에 논란의 여지는 적어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부여에 관한 중국사서와 우리측 문헌인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보면 아주 재미있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우선 중국 위·촉·오 등 삼국시대의 정사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와 중국 후한의 정사를 기록한 후한서 동이전 부여조(유송의 범엽이 5세기 무렵 저술), 그리고 당태종의 지시로 편찬된 진서(晋書) 동이전 등 중국측 사료를 종합해보자.

“(부여의 땅은) 동이의 땅 가운데 가장 좋은 곳이다.~사람들은 거칠고, 씩씩하고 용맹스러우며 근실하고 인후해서 도둑질이나 노략질을 하지 않는다. 활과 화살, 창, 칼로 무기를 삼으며~음식을 먹는 데 조두(俎豆·제기)를 썼고, 모일 때에는 벼슬이 높은 이에게 절하고 잔을 씻어 술을 권했다. 또한 읍을 하고 사양하면서 오르내린다. 은(상)나라의 정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以殷正月祭天) 나라의 큰 모임이다. 연일 음식과 가무를 하는데(連日飮食歌舞), 이를 영고(迎鼓)라 한다. 흰색을 숭상하고 해외에 나갈 때는 비단옷 입기를 숭상한다. 밤낮 길을 가며 노인과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를 부르니 종일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군사를 일으킬 때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소를 잡아 그 굽을 보아 길흉을 점쳤다.(소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모이면 길하다)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는데 숫자가 많을 때는 100명이 되었다. 남녀 모두 하얀 옷을 입고 부인은 베옷을 입고 목걸이와 패물을 떼어놓으니 이는 대체적으로 중국과 비슷한 면이 있다.(大體與中國相彷彿也)”

글귀마다 숨어있는 뜻이 굉장히 의미심장하므로 다소 장황하게 인용했다. 상나라의 그것과 너무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은나라 역법을 쓴 이유는

“부여가 은(상)나라 달력을 써서 은의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은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대목이지. 역법(曆法)이라는 것은 왕권국가의 상징이에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 어김없이 역법을 바꾸어 새 왕조가 천운에 따랐음을 나타냈어요.”(이형구 교수)

역법이 왕권과 국가의 상징일진대 부여가 하·주·진의 역법이 아니라 상나라의 역법을 썼다는 것은 범상치 않은 일이다.(이형구의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고대문화의 비밀’ 김영사 참조)

하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한(BC 1600년) 상나라 성탕은 바로 상나라의 역법을 새로 만든 것 외에도 옷색깔(복색)을 바꿔 흰색을 숭상했다.

“하나라는 흑색을 숭상하여 군사행동 때는 흑마를 탔고, 제사 때는 흑생 희생물을 바친다. 은나라는 백색을 숭상하여 군사행동 때는 백마를, 제사 때는 흰색을 바친다. 주나라는 적색을 숭상했는데~.”(예기 단궁상·禮記 檀弓上)

이것은 앞서 언급한 부여의 습속, 즉 “부여가 ‘흰색’을 숭상했다”는 사료와 일치한다. 이뿐이 아니다.

상나라 마지막 왕 주(紂)왕은 온갖 악행으로 폭군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랬다면 물론 나쁜 짓이지만, 한번쯤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 있다. “주왕은 수많은 악공들과 광대들을 불러놓고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숲처럼 매달아놓고는 벌거벗은 남녀들이 그 안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놀았다.”(사기 은본기)

이 대목에서 “(부여에서는) 음식과 가무를 즐기고, 노인과 아이 할 것 없이 하루종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사료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선양/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0)상나라와 한민족 中
입력: 2008년 02월 22일 17:05:22
 
ㆍ은·부여는 ‘君子의 후예’ 풍류 즐기고 禮 중시
ㆍ     

은(상) 마지막 왕 주(紂)의 악행에 대해 변명할 필요는 없다.

충신의 심장을 갈랐고, 육포를 뜨고 젓을 담가 맛보게 했으며, 녹대(鹿台)를 만들어 세금으로 거둔 돈을 가득 채웠으니까. 폭군은 더 나아가 수많은 악공과 광대들을 불러놓고 주지육림의 난행을 펼쳤다. 벌거벗은 남녀들이 그 안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새도록 술판을 벌인 것으로도 악명을 떨쳤다.(사기 ‘은본기’)
안양 인쉬 거마갱(車馬坑)에서 발굴된 마차유적. 은(상)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다.

-주(紂)왕을 위한 변명-

주왕의 악행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지만 “악공과 광대를 불러놓고 밤새도록 술판을 벌인 일”에 대해서는 다소간 할 말이 있다. 바로 음주가무야말로 상나라 풍습의 영향을 받은 우리 민족의 ‘전매특허’가 아닌가.

“(은나라 정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고 음식과 가무를 즐겼다(連日飮食歌舞). 밤낮으로 길을 가다가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하루종일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는다”(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는 부여 풍습이 대표적이다. 마한도 그랬다.

“(5월이면) 파종을 마치고 신령께 굿을 올린 뒤 무리가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시는데 밤낮으로 쉼이 없다.(群醉歌舞飮酒 晝夜無休).”(삼국지 위지 동이전 마한조)

이는 왜 현재 우리나라 전국에 4만여곳의 노래방이 성업 중인지를 설명해주는 근거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 민족이 아무런 생각 없이 음주가무를 즐겼던 것일까.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보듯 우리 민족은 무절제한 음주가무가 아니라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며칠씩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놀았다.

그것은 천·지·인이 만나 한바탕 신명을 떨친 축제였다. 천지신명과 조상에게 만물의 소생을 기원하고 추수감사를 드리는 전통축제였던 셈이다. 조흥윤 한양대 교수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축제를 벌인 것이 바로 굿이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고조선 시기 순장무덤인 랴오둥반도 강상무덤.
“삼국시대 화랑도·풍류도와 고려시대 연등회·팔관회 등은 종교행사 형식이었지만, 내용면에서는 음주가무를 포함한 옛 제천의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무(巫)와 불교를 억압한 조선 때 크게 위축되었지만 신명과 음주가무라는 한국인의 민중문화는 면면히 이어졌다.”(조흥윤의 ‘한국문화론’ 동문선)

그렇다면 주왕의 난행은 어찌된 것인가. 동이족의 나라 은(상)을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운 한족은 의도적으로 은나라와 주왕을 무도한 나라, 그리고 천하를 난도질한 망나니로 폄훼했다. 사마천의 사기는 한족이 기록한 ‘승자의 역사’인 셈이다.

일례로 축제 때 젊은 남녀들을 ‘풀어놓아’ 짝을 짓게 만드는 풍습은 지금도 동남아와 아프리카 등을 조사한 민족지 연구에서 심심치 않게 보이는 자료이다. 고대사회에서 이런 정도의 축제는 흉볼 ‘깜’도 안되는 자연스러운 풍습이다.

-동이는 군자의 나라, 불사의 나라-

그리고 은(상)나라가 무도하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탐사단이 추적해왔듯 이른바 동이족의 본향인 발해연안은 BC 6000년 전부터 문명의 씨앗이 뿌려진 곳이다. 발해문명의 창조자들은 이미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BC 4500~ 3000년) 때 하늘신과 조상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지난해 7월 말 뉴허량 유적에 선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이미 이곳 둥산쭈이(동산취·東山嘴)의 제사유적과 뉴허량(우하량·牛河梁)의 여신묘와 적석총에서 봤잖아요. 하늘신, 지모신에게 제사지내고, 그리고 적석총에 마련된 제단에서 조상을 기린 그런 모습들을 그릴 수 있잖아요. 웅녀의 원형이 뉴허량 여신묘에 그대로 나타나잖아요. 그리고 적석총 제단은 지금으로 따지면 조상에 대한 시제를 올리는 성스러운 장소라고 봐야 합니다.”

이교수는 “발해문명 창조자의 일파가 서쪽으로 남하해서 건국한 상나라에서는 제천(祭天), 즉 하늘에 대한 제사와 조상에 대한 제사(祭祖)가 확립된 시기였다”고 말한다. 중국학자들도 훙산문화 시기에 벌써 신권과 왕권이 합쳐진 제정일치 시대가 개막되었다고 본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부여인의 얼굴.
그런 점에서 동이족의 나라 은(상)을 극악무도한 나라로 폄훼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후한서’ 동이열전(5세기 유송의 범엽이 저술)과 ‘설문해자’(說文解字·후한 때 허신·許愼이 펴낸 최고의 자전)를 종합해 보자.

“동방은 이(夷)이며, 이는 근본이다. 만물이 땅에서 나오는 근본이다. 동이의 풍속은 어질다. 천성이 유순하다. 군자의 나라요, 불사의 나라이다. (天性柔順 易以道御 至有君子 不死之國焉) 때문에 공자는 ‘중국에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나는 군자불사의 나라인 구이(九夷)에 거하고 싶다’(故孔子欲居九夷)고 말했다.”

‘후한서’ 동 이전과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동이의 역사를 나열하기 전 ‘서론’ 형식으로 쓴 전언(前言)에서 이렇게 칭찬하고 있다.

“동이는 모든 토착민을 인솔하여 즐겁게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그릇은 조두(俎豆·제기)를 쓴다. 중국에서 예를 잃어버리면 사이(四夷)에서 구한다는 것은 믿을 만 한 일이다. (중국) 천자가 본보기를 잃으니 이것을 사이에서 구했다.”



“난 은나라 사람이다.”(공자의 고백)

동이가 예(禮)의 민족임을 중국사료도 인정한 것이다. 그뿐이랴. 만고의 성인인 공자도 동이족의 후예였음을 고백했다.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다. ~장사를 치를 때 하나라 사람들은 동쪽 계단에,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 모셨지만 은(상)나라 사람들은 두 기둥 사이에 모셨다. 어젯밤 나는 두 기둥 사이에 놓여져 사람들의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나는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다.(予始殷人也)”(사기 공자세가)

죽음을 앞둔 공자의 생생한 육성유언이었다. “주나라가 하나라와 은나라의 제도를 귀감으로 삼았기에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고 선언했던 공자. 하지만 그런 공자도 군자의 나라이자 불사의 나라인 동이로 가고 싶다고 했다. 결국 죽음에 이르러 “나는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음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은나라 주왕 때 세 명의 성인이 있었다.

바로 훗날 기자조선을 세운 기자(箕子)와 송나라를 세운 미자(微子), 그리고 주왕에게 심장을 도륙당한 비간(比干) 등이다. 미자는 주왕의 서형(庶兄)이었다.

은을 멸한 주나라는 미자에게 은(상)의 제사를 모시게 했다. 미자는 ‘미자지명(微子之命)’을 지어 뜻을 알리고는 송나라를 건국했다. 그런데 공자는 바로 그 송나라 귀족의 후손이었다. 공자는 동이족의 후예답게 어릴 때부터 타고난 듯 예법을 따랐다.

“소꿉장난을 할 때 늘 제기(祭器)인 조두(俎豆)를 펼쳐놓고 예를 올렸다.”(사기 공자세가)

‘조두’에서 조(俎)는 제사지낼 때 편육을 진설하는 도마처럼 생긴 제기이고, 두(豆)는 대나무·청동·도자기 등으로 만든 제사지낼 때 음식을 담는 그릇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조두라 하면 제기를 뜻한다. 공자는 만능 뮤지션이었다. 동이의 후예다웠다.

때는 바야흐로 춘추시대 말기. 세상이 어지러워져 자신의 숭고한 뜻을 알아주지 않자 거문고를 뜯고, 경(磬·돌 혹은 옥으로 만든 타악기)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안타까워했다. 음악에 대한 공자의 철학은 심오했다.

“감정이 소리에 나타나 그 소리가 율려(律呂)를 이루면 그것을 가락이라 한다. 세상의 가락이 편안하고 즐거우면 화평하지만 어지러운 세상의 가락은 슬프고 그 백성은 고달프다.”

우리 민족의 무용·문학·음악 등 예술의 바탕에 공자의 음악철학이 깔려있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순장제도의 실상-

목 없는 순장자들의 유골.
중국학계는 또한 은나라의 습속인 순장(殉葬)제도를 야만성과 연결짓기도 한다. 은(상)의 말기 도읍지인 안양(安陽) 인쉬(은허·殷墟)의 제1001호 대묘에서 확인된 360명의 순인(殉人)의 예를 들면서….

중국의 황잔웨(황전악·黃展岳)는 “순장과 같은 야만적인 습속은 은나라 통치세력권에서 성행한 것으로 은의 동방 회이와 동이 지역에서 널리 유행했다”고 비난했다.

그도 그럴 것이 1963~65년 랴오둥 반도 강상(崗上)·러우상(樓上)유적에서는 100여명, 수십명을 순장한 고조선시기의 순장무덤이 발굴된 바 있다. 그리고 “부여에서는 사람을 죽여 순장했는데 많을 때는 100여명이 된다”(삼국지 위지 동이전)고 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조를 보면 “248년 왕이 죽자 순사하는 자가 많아 이를 금지하도록 했지만, 그래도 속출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 신라는 지증왕 3년, 즉 502년에 비로소 순장제도를 금지했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춘추전국시대 진(秦)나라 목공이 죽었을 때 무려 177명을 순장시킨 기록도 있다. 순장은 고대사회에서 유행한 장례풍습이었다. 진시황이 죽었을 때는 1만여명을 생매장했으며, 명나라 성조가 죽자 무려 3000여명의 비빈이 순장됐다.

이형구 교수는 “순장제도는 전제적인 지위와 통치권을 갖춘 통치자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라면서 “동이의 습속이 야만적이냐 아니냐는 단순논리로 순장제도를 해석하면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여와 은(상)의 끈질긴 인연-

중국사서를 들춰보면 눈에 띄는 점이 나오는데, 그것은 ‘부여’를 늘 맨처음에 올려놓고는 돋보이게 기술한다는 점이다.

진서(晋書·당태종 때 지은 진왕조의 정사)를 보면 “부여 사람들은 강하고 용감하며 모임에서 서로 절하고 사양의 예로 대하는데 중국과 같은 것이 있다(會同揖讓有似中國)”면서 중국과의 친연성을 강조한다.

“오랑캐의 나라지만 조두(俎豆)를 사용하여 음식을 먹고~, 풍습이 대체로 중국과 비슷하다(大體中國如相彿也)”(삼국지 위지 동이전)는 기록도 무시할 수 없다. 조두는 바로 공자가 어릴 때 소꿉장난을 했던 제기가 아닌가.

물론 중국측 기록으로 따져봐도 부여가 BC 3세기쯤부터 494년 고구려에 병합될 때까지 700년이나 이어진 강력한 왕국이었기에 비중있게 다뤘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과의 친연성을 유난히 강조하는 것을 보면 은(상)으로부터 이어진 끈질긴 인연의 끈이 작용한 게 아닐까. 부여, 즉 우리 민족과 은(상)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단서가 또 있으니 바로 점복신앙, 즉 갑골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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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루트를 찾아서](21)상나라와 한민족 下
입력: 2008년 03월 07일 17:46:40
 
ㆍ‘갑골문화’ 동이족이 창조 한자는 발해 문자 였을까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빛바랜 논문 한 편을 꺼냈다. 1981년 국립 대만대 유학 시절 작성한 중국어 논문(‘渤海沿岸 早期無字卜骨之硏究’)이었다. 그는 논문 뒤편에 쓴 후기(後記)를 보여주며 추억에 잠겼다.

“여기 후기에 ‘내가 병중에 초고를 완성했다(病中完成草稿)’고 했어요. 이 논문을 쓰기 시작할 무렵 대장암 진단을 받았거든. 의사가 수술을 빨리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죽기 전에 이 논문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그래 수술 날짜도 받지 않고 한 달 동안 밤을 새워가며 신들린 듯 논문을 완성했지. 그리곤 곧바로 다른 병원으로 달려가 재진찰을 받았는데, 아 글쎄 오진이라잖아요.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갑골문화는 동이의 지표

안양 샤오툰춘에서 나온 갑골과 갑골문자. 갑골문화는 발해문명권의 독특한 문화였다.
27년 전에 쓴 사연 많은 논문은 갑골문화와 우리나라 갑골문화의 관계를 처음으로 다룬 것이다. 논문은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이 발행하는 ‘고궁계간’(81~82년)에 3회 연재되었다. 우리의 국사편찬위원회격인 대만 국립편역관이 펴낸 갑골학의 교과서인 ‘갑골문과 갑골학’(張秉權·장빙취엔)도 이 교수의 논문을 갑골의 기원을 가장 잘 논증한 논문으로 평가했다.

“그때까지 갑골문화라 함은 은(상)나라만의 독특한 문화로만 여겼거든. 내 은사이자 안양 인쉬(은허·殷墟) 유적을 발굴한 스장루(石璋如)·리지(李濟) 선생은 물론, 대륙의 후허우쉬안(胡厚宣) 선생 등도 모두 갑골문화의 원형을 황화 중류와 산둥반도에서 찾았어요.”

하지만 이형구 교수는 달랐다. 유학 초기부터 발해문명에 깊이 연구해왔던 이 교수가 아니던가.

“갑골문화의 분포지를 유심히 살피니 발해연안, 즉 동이족의 영역에 집중되고 있더군요.”

이 교수의 말마따나 “갑골문화는 동이족의 문화를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갑골(甲骨)은 복골(卜骨)이라고도 하는데 귀갑(龜甲·거북의 배 부분)이나 동물의 견갑골(어깨뼈)로 점을 치는 행위(占卜)를 말한다. 즉 거북이나 짐승뼈를 불로 지지면 뒷면이 열에 못이겨 좌우로 터지는데, 그 터지는 문양(兆紋)을 보고 길흉을 판단한다. 한자의 ‘卜’은 갈라지는 모양을 표현한 상형문자이다. 또한 발음이 ‘복’(한국발음), 혹은 ‘부(중국 발음)’인 것도 터질 때 나는 소리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점복은 왕이 주관했으며 길흉을 점친 것을 판정하는 사람을 정인(貞人)이라 했다. 은말(제을~주왕·BC 1101~BC 1046년)에는 왕이 직접 정인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貞자를 잘 뜯어봐요. 맨 위에 卜자가 있고 그 밑에 눈 目자, 맨 밑에 사람 人 등 세 부분으로 되어 있잖아요. 이것은 점(卜)을 보는(目) 사람(人)이라는 뜻입니다.”

점을 친 뒤에는 질문 내용과 점괘, 그리고 실제 상황과 맞아 떨어졌는지를 기록한다. 가장 오래된 월식사실을 기록한 은(상)의 무정(武丁·BC 1250~BC 1192년) 때의 갑골을 보자.

“癸未卜爭貞 旬無禍 三日乙酉夕 月有食 聞 八月(계미일에 정인 쟁이 묻습니다. (왕실에) 열흘간 화가 없겠습니까? 3일 뒤인 을유년 저녁에 달이 먹히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여덟번째 달에).”(김경일 교수의 ‘갑골문 이야기’, 바다출판사)

이렇게 점을 친 뒤 갑골판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꿰어놓는데, 이것이 바로 최초의 책(冊)이 아닌가. “오로지 은(殷)의 선인들만 전(典)과 책(冊)이 있다”는 “상서(尙書) 다사(多士)”편은 옳은 기록이다.

점복의 나라, 예법·효의 나라

이렇게 은(상) 사람들은 하늘신과 조상신, 산천·일월·성신 등 자연신을 대상으로 점을 쳤다. 국가대사에서 통치자의 일상 사생활까지, 예컨대 제사·정벌·천기·화복·전렵(田獵)·질병·생육까지….

“점복 활동과 관계된 기록을 복사(卜辭) 또는 갑골문이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 갑골문화야말로 발해문명, 즉 동이족이 창조한 문명의 상징이지. 갑골문을 보면 ‘선왕선고(先王先考)’, 즉 조상에게 제사 지냈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결국 동방의 예법과 효 사상은 발해문명 창조자인 동이가 세운 전통이라 보면 됩니다.”(이형구 교수)

사실 하늘신과 조상신에 대한 끔찍한 사랑은 동이족만의 특징이었다.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에서 보이는 신전과 적석총, 제단 등 3위 일체 유적은 바로 하늘신·지모신·조상신에 대한 사랑을 표시한 예법의 탄생이자, 제정일치 사회의 개막을 상징한다.

그리고 점복신앙과 갑골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형구 교수가 갑골문화의 기원을 발해연안에서 찾은 이유다.

“군사를 일으킬 때 소를 잡아 제사 지내고, 소의 굽으로 출진 여부를 결정했다. 그 굽이 벌어져 있으면 흉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

부여·고구려의 점복기사는 삼국지 위지뿐 아니라 후한서와 진서(晋書) 등 중국사서에 차고 넘친다. 신라의 경우엔 아예 왕과 무(巫)가 동일시되기도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조 기록을 보자.

“(2대) 남해 차차웅(次次雄)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하는데, (김대문이 말하길) 방언에 이르길 무(巫)라 일컬었다. 세인들이 귀신(조상을 뜻함)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므로 이를 두터이 공경하고, 존장자를 칭하여 자충(慈充)이라 했다.”

그런데 ‘차차웅’ 혹은 ‘자충’을 방언으로 ‘무(巫)’라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월식사실이 기록된 은(상) 무정(BC 1250~BC 1192년)시기의 갑골내용. 점을 친 정인의 이름과 점복내용, 실제 일어난 일 들이 기록됐다. | 김경일 교수의 ‘갑골문 이야기’에서
“한자음으로는 차차웅(츠츠슝)이나 자충(츠충)이 매우 비슷하다. 또 점복의 목적과 결과를 말하는 ‘길흉(吉凶·지슝)’과도 유사하다. 길흉의 한자음을 표음해서 차차웅 또는 자충이라 하지 않았을까.”(이형구 교수 ‘문헌자료상으로 본 우리나라 갑골문화’ 논문 중에서)

그럴듯한 해석이다. 점복신앙의 단서는 삼국유사 가락국기 시조설화에서도 엿보인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겠다.(龜何 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유명한 내용인데, 이 교수는 “끽(喫)자는 구워먹겠다는 뜻이 아니라 점복에서 불로 지지는 행위를 뜻하는 계(契)자가 와전됐거나 가차(假借)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불변을 뜻하는 계(契)자는 갑골에 새긴 문자 혹은 불로 지져 터진 곳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헌만 있고, 증거가 없으면 모든 소용인가. 고고학 자료를 보자.

갑골의 원류는 발해

우선 발해 연안. 1962년 시라무룬(西拉木倫) 강 유역인 네이멍구 자치구 바린쭤치(巴林左旗) 푸허거우먼(富河溝門) 유적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갑골이 나왔다. 그런데 이 유적에서는 갑골 외에도 동이족의 대표 유물인 지(之)자형 빗살무늬 토기가 공반되었다. 연대는 BC 3500~BC 3000년이었다. 이 연대는 중국·대만학계가 갑골문화의 원조로 보고 있던 허베이(河北)·허난(河南)·산둥(山東)반도의 룽산문화(龍山文化·BC 2500~BC 2000년)보다 1000년 이르다. 또한 고조선 문화에 해당하는 발해연안의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 유적에서도 갑골이 흔히 발견된다. 츠펑 즈주산(蜘蛛山)·야오왕먀오(藥王廟) 유적, 닝청(寧城) 난산건(南山根) 유적, 베이뱌오펑샤(北票豊下) 유적 등에서도 다량의 갑골이 나왔다. 물론 이 유적들의 연대는 상나라 초기 갑골이 출토된 유적보다 이르다. 갑골의 재료도 거북이가 아니라 사슴과 돼지 같은 짐승뼈를 사용했다.

갑골문화는 은(상)의 중기~말기, 즉 무정왕~주왕(BC 1250~BC 1046년) 사이에 극성했다. 글자가 있는 갑골, 즉 유자갑골(有字甲骨)도 이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모두 글자 없는 갑골, 즉 무자갑골(無字甲骨)이었다. 대부분 발해 연안에서 나타난다.

“또 하나 갑골의 분포도를 보면 재미있어요. 발해 연안에서 갑골 재료로 주로 쓴 것은 사슴과 양이었는데, 시대가 흐르고, 또한 남으로 내려오면서 소가 많아지거든. 이것은 시대와 사회가 농경사회로 급속하게 변했음을 알려주는 거지. 또 하나 발해문명 사람들이 기후가 온화한 중원으로 갑골문화를 대동하고 남천(南遷)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고….”

그런데 발해 연안에서 태동한 갑골문화가 중원으로만 확산된 게 아니었다. 1959년 두만강 유역 함북 무산 호곡동에서도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형구 교수가 81년 처음 논문을 쓸 때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있었다.

갑골문화와 한반도

“왜 한반도에는 갑골이 보이지 않는지 정말 궁금했어요. 갑골문화는 일본 야오이(彌生)시대와 고훈(古墳)시대에도 보이는 현상인데 왜 한반도에는 없을까. 같은 동이족의 발해문명문화권인데….”

그런데 ‘병중 논문’의 초고를 완성, ‘고궁계간’에 송고한 뒤, 81년 가을 귀국하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재직 중이던 이 교수에게 한 편의 보고서가 전달됐다.

“이 교수가 좋아할 대목이 이 보고서에 있어요.”

당시 동아대 정중환 교수가 건넨 것은 ‘김해 부원동 유적’ 보고서였다. 이교수는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라했다.

“아! 학문을 한다는 게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지 실감한 순간이었지. 그 보고서에 바로 내가 그토록 찾던 복골의 존재가 있었거든. AD 1~3세기에 한반도에서도 갑골문화가 있었던 것을 확인했으니….”


이후 봇물이 터졌다. 김해 봉황동 유적과 사천 늑도, 전남 해남 군곡리 패총, 경북 경산 임당 저습지와 전북 군산 여방동 남전패총 등에서 갑골이 속출했다. 수 천 년 전부터 점복과 굿을 좋아했던 사람들. 지금도 20만명에 이르는 무당과, 30만명에 달하는 역술인들이 성업 중인 ‘별난’ 나라, ‘별난’ 민족의 전통은 이토록 뿌리깊은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 그렇다면 동이족이 한자를 창조했다는 말인가.

“발해문명 창조자인 은(상) 시대에 갑골문자가 창조되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하지. 하지만 아직 연산산맥 동쪽이나 한반도에서는 문자가 있는 갑골이 나오지 않았으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죠. 발해문명 창조자들인 동이족이 남으로 내려가 중원문화와 어울려 함께 한자를 창조했다고 정리하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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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Damduck Story -재미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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