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는 현재 5개의 궁궐이 남아 있다. 현존하는 궁궐은 경복궁(景福宮, 사적121호)과 창덕궁(昌德宮), 창경궁(昌慶宮), 덕수궁(德壽宮), 경희궁(慶凞宮)이다. 경복궁은 궁궐 조성의 형식에 맞춰 건설된 조선시대의 정궁으로서 여타의 궁궐건축의 규범이 된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것을 흥선대원군의 집권기에 재건(1865~ 1873)한 것이다.
백악산 남쪽의 평평한 대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태조 3년에 창건하였다. 왕자의 난에 이어 개성으로의 환도와 태종의 재천도(1406) 후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세종대에 이르러서야 궁으로서 완전한 격식을 갖추었다.
조선왕조의 궁궐 건축 중 가장 큰 규모로써 광대한 실내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으로서 왕이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거나 또는 국왕의 즉위식, 외국 사신의 접견 등 공식적인 행사가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궁궐을 상징하는 건물이며, 궁궐 건축 중 가장 위계가 높은 건물이다. 태조 4년에 처음 지어졌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고종이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근정전’이라는 명칭은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것으로 ‘부지런한 가운데 맑은 정치를 하라’는 뜻이다. 뒤로는 백악에 기대어 남향하고 있으며, 주위에는 행각을 둘러 넓은 뜰(조정)을 형성하였다. 조정에는 품계석이 양 옆으로 12개씩 세워져 있어서 문관과 무관이 행사시 자신의 품계에 맞춰 배열토록 하였다.
근정문은 정전인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정문이다. 조선시대 정전의 정문중 유일하게 중층으로 남아있으며, 근정전의 남쪽 정면에 행각에 이어져 위치한다. 근정문의 동·서 양쪽으로는 일화문과 월화문의 협문을 두어 신분에 따라 그 출입을 달리 하였다. 그 남쪽에는 영제교와 흥례문이 있어서 광화문에서부터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근정문도 근정전과 함께 고종 4년(1867)에 중건되었다. 흥례문은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건물이 들어서면서 헐려져 나갔다가 얼마전에 복원되었다.
근정전은 2중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5칸의 다포식 팔작지붕건물의 중층건물이다. 2중 기단은 월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변에 장대석을 두르고 하엽동자석(荷葉童子石)과 팔각의 회난석(廻欄石)을 두어 난간을 만들었다. 각 난간의 엄지기둥에는 방향에 따라 12지상의 일부와 사신상(四神像) 또는 서수(瑞獸)들을 조각하였다. 월대에 설치된 중앙 계단에는 상·하 월대 모두 봉황 두 마리를 돋을 새김한 답도를 꾸몄고, 주변은 당초문을 새겼다.
전의 평면은 바깥쪽에 외진주를 설치하고 그 안에 내진주를 세웠다. 바닥면에는 전돌을 깔았으며 뒤쪽 중앙에 어좌를 두고 그 뒤에 일월오악도가 그려진 병풍을 설치하였다. 천장에는 보개를 만들어 천정 안으로 넣었으며 속에는 운문 사이에 쌍룡과 여의주를 장식하였다. 내진주는 독립된 고주로서, 퇴량으로 외진주와 연결되었고 퇴량과 뜬 창방 사이의 상부 둘레에는 당초문을 조각한 낙양각(落陽閣)이 돌려져 있다. 외진주는 귀솟음과 안쏠림 기법이 보이며 기둥사이에는 솟을 빗살문의 분합문과 교창 등으로 외부와 차단하였다.
근정문은 정면 3칸, 2칸의 다포계 우진각 지붕의 중층 누문으로 기단은 전면을 장대석으로 축단하고 삼간(三間)에 걸쳐 계단을 마련하였다. 답도 좌우 계단은 장대석으로 축단하였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경복궁의 정전으로서 당시 건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내부 천정보개의 용]
정면도
종단면도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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