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들
수천년 지혜가 만들어낸 한옥의 난방시설
한옥의 살림집 난방은 아궁이에 지핀 불길이 고래(구들장 밑으로 낸 고랑)를 타고 구들장을 데우는 일부터 시작된다. 안방의 경우에는 부뚜막이 있다.
가마솥을 건 부뚜막에는 큼직한 아궁이가 있어서 장작을 듬뿍 집어넣고 불을 때도 좋을 만큼 넉넉하다. 아궁이 바닥은 안쪽으로 약간 경사지게 해서 높이고는 고래가 시작하는 부분에 ‘부넘기’라는 턱을 만들어 준다.
장작에 불이 붙으면 불과 연기가 이 ‘부넘기’로 해서 고개를 바짝 쳐들게 되고, 그래서 깊은 고래 위에 얹은 구들장을 핥으며 지나갈 수 있게 된다.
고래로 그냥 통과하면 방이 데워지지 않고 아까운 열량만 소비할 뿐인 것이다. 고래로 통과하는 불길과 더운 공기가 구들장에 달라붙게 마련하는 일이 한옥 난방시설의 요체이다.
고래는 30 ㎝ 정도의 높이로 골을 이루듯이 만들어진다. 여러 개의 골이 평행하기도 하고, 아궁이로부터 방사선형으로 고래를 켜기도 한다. 켠다는 말은 고래를 같은 간격으로 이랑 이루듯이 만들어낸다는 의미이다.
고래 주변에는 고래보다 더 깊은 개자리(방구들 윗목에 깊이 파놓은 고랑)가 생긴다. 개자리는 50 ㎝ 이상 깊어서 고래보다 바닥이 차다. 불담에 휩싸여 따라들어오던 그을음과 티끌들이 이 개자리에 떨어진다.
개자리에 머물던 더운 기운이 비로소 굴뚝으로 향하게 되는데, 개자리는 아궁이에서 데워진 더운 공기와 불길이 구들에 오래 머물기를 바라며 만든 것이어서 더운 공기가 굴뚝으로 직행하려는 동작을 제어하는 에어커튼의 구실을 한다.
한옥의 구들이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소각로가 된 것은 이 개자리가 있기 때문인데, 이는 수천년 불을 지펴온 사람들의 지혜에서 우러나온 결과이다. 방에 구들을 들인 예가 세계 어느 민족에도 없다는 사실은 신식의 소각로보다 우리 풍부한 경험의 소산인 개자리가 월등한 효능을 지녔음을 말해준다.
개자리에서 머물던 더운 기운은 티끌을 다 떨어버리고 맑은 연기만 배출한다. 땅바닥에 연무로 퍼지는 파아란 연기는 한옥의 한 정취이기도 하고 살충제의 구실도 한다.
사랑방은 굴뚝을 방문 앞 마당에 설치하기도 한다. 키작은 앉은뱅이 굴뚝인데 아주 정감어린 구조물이어서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그 앉은뱅이 굴뚝에서 연기가 나온다.
모깃불을 따로 지피지 않아도 그 연기로 해서 벌써 모기는 저만큼 달아나 버렸다. 그래서 굴뚝 언저리에는 거미줄이 없다. 줄을 치고 벌레를 잡아먹어야 하는데 연기에 쫓겨 벌레들이 다 피해가 버려서 거미로서는 헛수고 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이렇듯 굴뚝의 연기는 자연스레 방충기능을 지니고 있다. 고향 한옥에 사는 이들이 발달된 의료기관이 없던 시절에도 건강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아궁이와 굴뚝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거듭해 살균해 준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소나무를 때면 소나무 그을음이 가마솥이나 아궁이 구들장에 묻는다. 그것을 긁어내면 먹을 만들 수 있는데, 그 먹으로 글씨를 쓴 자리는 잘 썩지 않는다. 먹에 방부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자금성을 돌아보면 굴뚝 보기가 어렵다.
일본의 살림집에는 굴뚝이 아온 없다. 화덕 말고는 불을 때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한옥은 집집마다, 건물마다 굴뚝이 있다. 그런 굴뚝은 굴뚝조형에 특별한 재주를 부려서 경복궁에 보물로 지정된 굴뚝이 있을 정도이다. 전세계에서 굴뚝을 나라의 보배로 지정한 민족은 단지 우리뿐이다.
불이 인류의 문명을 선도하였다는 점에서 우리 구들은 놀라운 구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글 : 신영훈 (해라시아문화연구소장. 전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한옥문화원’을 개원, 한옥을 체계적으로 연구)
사진 : 김대벽 (문화재전문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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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유래한 한자성어 중에 ‘함포고복(含哺鼓腹)’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린다’는 뜻으로, 중국인들은 풍족하고 유쾌한 삶의 조건으로 무엇보다도 배불리 먹는 것을 들었다.
물론 우리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겠지만, 우리 민족은 여기에다 한 가지 조건을 더 추가시켰다. 등까지 따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함포고복이라는 말 대신에 이런 말을 만들어 즐겨 사용해 왔다. ‘등 따습고 배부르면 정승 부러울 게 없다.’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등을 따습게 할 수 있었던가. 여기에 바로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주거 양식, 난방 장치인 구들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한 겨울에 우리 한국인은 불이 잘 든 뜨끈뜨끈한 구들장에 누워야만 비로소 제대로 잠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구들(장)지다’는 ‘잠자다’ 또는 ‘눕다’와 같은 의미로 쓰였고, 이래저래 한국인들은 모두가 ‘구들장 지기’였던 것이다.
언제부터 사용됐나
함경북도 웅기지방의 청동기시대 움집에서 구들의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 보고되어 있지만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다. 문헌 기록으로는 중국의 『구당서(舊唐書)』에 나오는 게 가장 오래다.
이 책 고구려 항에 나오는 “겨울철에는 모두 긴 구덩이를 만들어 밑에서 불을 때어 따뜻하게 한다(冬月皆作長坑下然溫火亂取援)”는 구절로 보아 삼국시대의 고구려에서 사용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어 4-5세기에 활발해진 북방계 민족의 남하운동에 따라 백제나 통일신라 시대에 점차 남쪽 지역에까지 이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 조선 초기에 들어와 북부 및 중부 지방은 물론 남부지방까지 구들을 이용한 가옥들이 지어지기 시작했다는 기록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구들이 우리 민족 고유의 가옥 난방 장치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구조와 모양이 있는가
구들은 ‘방구들’의 줄임말로 ‘온돌’이라고도 한다. 그림에서 보듯 구들은 크게 세 부분, 즉 아궁이·고래(불길)·구들장 그리고 여기에 개자리·연도·굴뚝 등을 추가하여 이루어진다. 구들장 위는 흙을 덮어서 방바닥 또는 마루를 이루게 하는데 따라서 구들은 불지핌에서부터 불의 이동 및 불의 보관까지를 겸한 아주 다양한 용도와 목적의 연소 및 난방 시설이다.
아궁이에서 굴뚝 연도까지 도랑 모양으로 축조하고 그 위에 구들장을 덮어 연기가 흘러나가게 만든 곳을 구들고래 또는 방고래라 하며 구들장을 받치는 것을 두득이라 한다.
굴뚝이 있는 벽과 평행으로 깊게 파낸 고래를 특히 개자리라 하는데 이것은 역풍을 방지하기 위해 판 도랑으로 구들고래가 끝나는 주위의 벽과 고막이 안에 깊게 만든 고래로써 대개 불아궁이의 반대편 벽쪽에 만든다.
이 외에도 불기운이 이곳에 마지막으로 저장됨으로써 보온 기능을 극대화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굴뚝 바로 밑의 개자리로 연기가 넘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고래의 깊이와 너비는 방의 크기와 아궁이와 굴뚝의 거리 또는 구들장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 고래에는 구들장을 놓는 방법에 따라 줄고래(나란히 고래), 부채 고래(선자 고래), 맞선 고래, 허튼 고래, 굽은 고래 등이 있다(그림 참조).
한국인과 함께 존재할 구들
구들을 이용한 난방법은 주로 온도가 높아진 돌이 방출하는 열을 이용하는 것으로 열의 전도와 복사, 대류 등을 모두 이용한 난방법이다.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난방법으로 열 효율이 좋고 연료나 시설이 경제적이며, 반영구적이라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주로 열의 전도에만 의존하는 난방법이기 때문에 아랫목과 윗목의 온도 차가 심하고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방을 밀폐시켜야 하며 연료 조달이나 온도 조절이 어렵다는 것 등 여러 단점으로 인해 요즘 짓는 가옥에서는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방구들에 엉덩이를 붙이고 배 깔고 등을 대야 진정으로 따듯하고 즐겁고 배부를 수 있던 한국인, 추운 겨울 밖에서 돌아와 맨 먼저 한 일이 따스한 아랫목 구들에 손을 넣던 한국인이 사라지지 않는 한 구들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할 것이다.
엉덩이며 손이며 등짝 살갖에 ‘쩍’하고 달라붙던, 화들짝 불에 데인 진한 입맞춤과도 같던 방구들 장판의 그 맛과 멋을 잊을 수 없는 ‘우리’들이 존재하는 한다.
사진 : 김대벽 (문화재전문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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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찬바람이 속살을 파고들 즈음이면 군불로 데워진 뜨끈한 온돌방이 제격이다. 겨울비라도 내려 몸과 마음이 눅눅해지면 온돌의 아랫목은 더 없는 극락이다.
그렇지만 자연을 이해하는 마음이 없으면 이 생활도 쉬운 것은 아니다. 장작불을 때는 부엌은 그을음이 부뚜막으로,벽으로 갈수록 더해간다.게다가 연기란 놈이 집안 구석구석 숨었다 가기 때문에 아무리 옷을 잘 빨아 넣어두어도 갈아입을라치면 언제나 ‘시골냄새’라는 불내(불냄새)가 ‘군군’하게 풍겨나니 말이다.
지금처럼 석유나 가스,페치카의 불도 좋지만,그래도 장작불만은 덜하다. ‘ 구운 돌 위에 사는 즐거움’이란 곧 자연의 정을 체감하는 사람 사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나이든 세대들은 이 온돌방의 추억을 지금도 따습게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민족의 정서가 세계에 유례없는 온돌문화를 만들어 냈다.
●전설의 온돌방
최근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머무른 절로 유명한 경기 양주 회암사지(檜巖寺址,사적 제128호)에서 국내 최대 규모의 온돌시설이 원형에 가깝게 발굴됐다.
공동조사단 장경호 단장은 “온돌시설이 확인된 건물지는 고려말에 목은 이색이 작성한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의 건물배치로 볼 때 ‘서승당(西僧堂)’에 해당한다”고 했다.
이 온돌시설은 중앙통로를 사이에 두고 ㅌ자 형으로 서로 마주보도록 구들이 깔려 있는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고 한다.
회암사지 발굴 현장
서승당지의 'ㅌ'자 구들장. 왕의 행차시 호위했던 무사들의 숙소로 추정된다.
아궁이에서 장작불을 때면 연도(煙道,연기길)를 따라 방의 구들을 덥힌 뒤 일(一)자로 뻗은 중앙 통로 바닥을 거쳐 건물 뒤쪽에 설치된 굴뚝으로 연기를 배출하는 보온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회암사의 온돌은 경남 하동 칠불사의 아자방(亞字房)과 유사한 구조로 확인됐다.아자방의 경우 신라 효공왕 때 담공선사가 세운 것으로 “한번 불지피면 온기가 마흔 아홉 날을 갔다”는 전설의 온돌방이다.그러고 보면 회암사도 실용·효과면에서 칠불사 아자방 못지 않았을 것 같다.
아자방 내부
옛 건물의 구들은 자연의 힘과 불의 힘을 가장 적절하게 활용해 만들어졌다고 여겨진다.완벽하게 방습 처리하고,바람 세기,굴뚝의 위치나 높이,방향 등 지역 조건을 잘 맞추었을 것이다. 그래야 온기가 오래갔을 테니. 결국 구들은 우리 민족이 불을 얼마나 잘 다루었는가를 웅변하는 문화 요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구들의 구조는 간단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과학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구들장은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뜨거운 열기가‘(구들)고래’라 불리는 공간을 지나면서 달구어진다. 식은 연기는 굴뚝을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아궁이와 고래 사이엔 ‘부넘기’가 있다.
불이 넘어가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넘기와 고래, 고래와 굴뚝 사이엔 각각 연기의 역류를 막는 ‘구들개자리’ 와 ‘고래개자리’ 가 있다. 우리의 구들은 허공을 돌로 가두어 열기와 연기가 순환하도록 한, 단순하지만은 않은 문화였다.
‘구들’은 ‘구운 돌’이라는 뜻의 순수 우리말이다. ‘온돌’ 은 한자 표현이다. 구들은 중국 문헌 ‘진서’서이전에 따르면 기원전 300 년 이전에 한반도 북부 압록강· 두만강 유역과 만주지역에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구당서’ 고구려편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긴 겨울을 나기 위해 길다란 갱(坑)을 만들어 따뜻하게 난방한다” 고 기록하고 있는데,이 갱이 바로 구들의 원형으로 보인다.
●부지런한 자가 먼저 온돌에 앉는다.
온돌(구들)문화는 글자 그대로 돌을 달굴 정도로 자연과 붙임이 많아야 살아 갈 수 있는 문화이다. 우리 정서를 이것으로 압축할 수 있다고 하는 것도 우리의 부지런한 생활을 반영하고 있어서다.
구들을 데우려면 땔거리를 준비하는 일도 만만치 않은 데다가, 기실 방 몇 개 데우려면 그야말로 장작패는 일이 쉽지 않다. 가끔 옹이가 있는 솔둥걸이 라도 만나면 기진맥진해서야 끝이 난다.
불 때는 것도 처음에는 밑불로 솔가지와 솔방울 몇 개를 놓고 잔불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처음에는 으레 연기가 구들로 들지 않고 나오기 때문에 곤혹스럽다.
그래서 인생처럼 불도 조심스레 달래는 요령이 필요하다.
여하간 구들은 구들장 베고 누워 여유부리는 게으른 자들에게는 커다란 애물일 수도 있으니, 요사이 난방보일러는 그들에게 구세주일 게다.
지난 주 추위는 강풍을 동반했다. 이곳 서당아이들 가운데 집이 먼 녀석들은 추위를 녹인다며 군불더미에 조약돌을 구워 주머니에 넣고 나섰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하더냐?” 는 물음에 “그냥요” 라고 답하는 아이들을 보니 거북이가 알 깨고 나와 제 어미에게 배우지 않아도 하는 수영처럼, 느낌으로도 조상의 삶을 잘도 꿰차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꽁꽁 얼어붙은 시골저녁, 오늘은 정말 군불 지핀 구운 돌(온돌)위에 등을 붙이고 누우니, 수 천년 이어진 선조 들의 삶이 따끈따끈한 온돌로 다가오는 듯 하다.
글 : 민홍규-우리문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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